박귀덕
엊그제만 해도 아파트 양지바른 곳의 청매靑梅가 꽃을 활짝 피우더니, 오늘 아침은 찬 기운이 품안으로 파고드는 영하의 날씨다. 여느 때와 같이 큰딸 집에 들어서니 내일은 더 빨리 와 달라고 부탁을 한다. 사위는 무주로 출근하면 금요일에나 돌아온다. 딸은 주말 부부로 산 지 몇 년째다. 딸이 내일 새벽에 보육원어린이들을 인솔하고 '키자니아체험' 출장을 가야 하니, 아이들만 집에 두고 가지 않도록 출장 가기 전에 와 달라는 것이다.
'키자니아체험'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어린이 직업체험이라고 한다. 90여 가지의 직업 중에서 호기심 있는 업종을 선택하여 직접체험을 하게 해줌으로써 노동과 돈의 가치를 배우게 하고, 다른 어린이들과 어울려 살아가도록 사회성을 길러 주고, 리더십과 창의성을 기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전북체신청이 보육원어린이들을 서울 송파구 잠실 3동 '키자니아'에 보내 현장체험을 시키는 일이라고 한다. 내 머릿속에 번개처럼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그렇게 좋은 현장체험이라면 우리 손자들도 데리고 가라고 했다.
마침 그날은 나도 바쁜 날이었다. 전북도립국악원에서 1년 공부한 결과를 발표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나는 민요와 한국무용 두 가지 프로그램에 출연해야 한다. 아침에 일찍 화장을 마치고 9시에 민요 리허설을 가야 했다. 또 무대화장과 쪽머리를 해야 하고, 머리에 쪽을 지어 달라는 몇 분 어르신들의 부탁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손자들을 딸애가 맡아주면 나는 홀가분히 준비를 할 수 있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나도 젊었을 때 직장생활을 하면서 아이들을 맡길 곳이 없어 일터까지 데려가서 같이 놀며 근무할 때, 아이들이 엄마의 일하는 모습을 보고 자랑스러워했던 기억도 되살아났다. 또 직장에 다닌다고 늘 아이들과 떨어져 지냈으니 다른 어린이들을 인솔하여 견학시킬 때 자연스럽게 아이들과 같이 지낼 수 있는 엄마의 정을 보이라고 권했다. 손자들은 엄마를 따라 갈 수 있다고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기필코 엄마를 따라 가겠다고 별렀다.
그 들뜬 기분은 딸아이의 가라앉은 목소리와 함께 물거품이 되었다. 나와 아이들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고 알겠는데 도저히 그럴 수는 없다며, 이해를 구하였다. 그 모습이 너무나 진지해서 머리가 숙여졌다. 이유를 들어 보니 내일 출장이 놀러가는 게 아니라 공무집행이니 그들 틈에 손자들을 끼워넣을 수 없다고 했다. 내일 같이 가는 어린이들이 부모가 없어 보육원에 맡겨진 아이들인데, 그 아이들에게 엄마와 아이들이 같이 가는 모습을 보여주면 마음에 상처를 입을 텐데 그런 어린이가
단 한 명이라도 있어서는 안 된다며 잘라 말했다. 겨울방학 때 '키자니아체험장'에 데리고 가겠다며 손자들을 달래고 출근하는 딸의 뒷모습을 바라보노라니 괜히 머쓱해졌다.
내일 아침은 남편이 애들을 돌보기로 정했지만 마음엔 찬바람이 분다. 욕심에 마음을 팔아 버린 건 아닐까? 나만을 생각하며 사는 삶에 익숙해지지는 않았을까? 왜 내 생각 속에는 보육원어린이들의 마음에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없었을까?
추운 날씨에 배려해야 할 이웃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는 마음이 들어 올 수 있도록 내 마음 한 구석을 비워 두어야할 것 같다.
*수필가 박귀덕씨는 2004년 <수필과 비평> 으로 등단했다. 수필집 「삶의 빛 사랑의 숨결」이 있다. 수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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