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가득한 장독대를 마련했으니, 올해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손으로 장을 담기로 했다. 결혼한 지 서른 두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간장을 담가본 적이 없었다. 그동안 장 담그기를 미뤘던 것은 일조시간이 짧은 아파트 탓도 있지만, 장 담그는 법을 알지 못했다. 이젠 아파트 핑계도 댈 수 없고, 거동이 불편한 어머님을 모시고 있으니, 변명의 여지없이 장을 담글 수밖에 없다. 다행히 우리 집은 동남향이어서 종일 토실토실한 햇살이 강아지처럼 뒹굴고 있다.
간장은 여인의 정성과 물과 바람과 햇살이 빗어내는 자연의 선물이다. 그래서 옛 여인들은 장 담그기 전 날 목욕을 하고, 장 담그는 날은 시루떡에 초를 밝혀 깊은 장맛을 기원했단다. 부정을 타지 않도록 심지어 장독대 주변에 금줄까지 쳤다고 한다. 바람과 볕이 가장 잘 드는 곳에 장독대를 마련하고, 비오는 날은 빗물이 들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한다. 외출을 할 때에도 내심 장독대 걱정을 했다. 정성을 다해 장을 삭히고 장맛을 지키던 지극함이 있었으니 '장맛을 보면 그 집안을 알 수 있다'는 말은 깊이 새겨 둘 얘기다.
간장을 담기 전 귀담아 들었던 어른들의 이야기는 하나같이 손 없는 날 담가야 장맛이 깊다고 했다. 2월 15일이 바로 손 없는 날이었다. 하루 전 손질해둔 항아리에 소금물을 채우고, 햇볕에 말린 메주를 넣고 숯과 고추를 띄웠다. 요즘은 염도계를 이용하는 사람도 있지만, 굳이 염도계를 사용하지 않아도 물위로 500원짜리 동전 크기만큼 계란이 뜨면 소금물의 농도가 알맞다고 했다. 밤사이 장독대가 내란을 일으킬 일도 없는데 눈만 뜨면 장항아리를 들여다보았다.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에 혹 항아리에 금이 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햇볕에 몸을 태워 변해가는 간장빛깔을 지켜보는 일도 소소한 즐거움이다. 간장항아리는 소금물에 몸을 불려가며 다갈색 수묵화를 그렸다. 날씨가 흐린 날은 구름도 항아리 속을 들여다보고, 바람 부는 날에는 빨랫줄의 빨래도 고개를 기웃거렸다. 햇살이 꼬리를 내리면, 항아리도 달빛에 몸을 풀었다. 장독대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햇빛이 들고 맑은 바람이 머물다 갔다. 간장은 깨끗한 환경에서 오래 익어야 깊고 은근한 맛이 깃든다고 한다.
얼마나 지났을까? 뒤뜰 매화가 입술을 벌리기도 전 간장 항아리에 하얀 장꽃이 피었다. 하얀 곰팡이가 매화처럼 벌어지고 있었다. 깜짝 놀라 장맛을 잘 아는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혹 염도 때문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밤새 걱정을 했는데, 간장에 꽃이 피면 오히려 장맛이 좋다며, 하얀 곰팡이가 바로 장꽃이라 했다. 하얀 곰팡이는 미생물이 활동할 때 나타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며, 불안한 마음을 편하게 해줬지만, 기도하는 마음으로 간장의 만개를 기다리리라.
지난 여름 정읍은 삽시간에 전국 최대의 강우량을 기록하지 않았던가? 폭우의 피해로 저지대 주민들은 막대한 재산 손실을 입었고, 둑이 무너져 하루아침에 땅의 운명이 바뀌었다. 요사이 우리 지역은 절개지에서 밀려온 토사를 치우고, 유실된 농토를 원상복구 하느라 한창 바쁘다. 여름 날씨처럼 언제 어디서 비운의 화살이 날아올지 모르는 게 농촌의 현실이다. 그러기에 화살을 제거하려면 상호 협동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다. 하나의 공동체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이웃을 잘 만나야 한다고 했다.
여전히 높은 철탑을 쌓고, 맹견을 내세워 소통을 단절하고 사는 이웃도 있지만, "땅은 백 냥을 주고 사지만 이웃은 천 냥을 주고 산다."는 말이나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우리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걸 보면, 얼마나 이웃이 소중한가를 알 수 있다. 시골의 울타리는 서로의 경계를 드러내지만, 언제라도 필요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열린 통로다. 장맛을 내는 일도 중요하지만, 가까운 주변에 천 냥을 주지 않고도 아침 인사를 건넬 수 있는 이웃들을 만났으니 로또에 당첨된 기분이다. 마을을 나눌 수 있는 따뜻한 이웃이 있어 감사하다.
이제 숲은 묵은 계절을 털어내고 바람에 목 축여 새 옷을 입었다. 새들도 부드러운 속살 드러내며 비상을 꿈꾼다. 겨우내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는데, 혹한 설움 견디어 온 매화도 꽃망울을 터뜨릴 기세다. 문 닫은 학교에서 새로운 삶을 조각하는 일 녹록치 않지만, 또 하나의 열림을 위해 두 팔 벌리면 잠들어 누운 땅한 구석쯤 밝아지는 날 있으리라. 조용한 산골 아담한 집 아니어도, 자연을 벗 삼아 노동의 신성함과 장맛의 하모니를 이루며 살고 싶다.
*수필가 이명화씨는 광주에서 태어나 2003년 <문예연구> 로 등단했고, 수필집 「사랑에도 항체가 있다」 를 펴냈다. 문예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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