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병기
초등학교 5학년생 아이들 넷을 향해 말했다.
"父母有疾(부모유질)이어든 憂而謨趨(우이모추)하라, 이 말은 부모가 편찮으시면 걱정하면서 빨리 낫도록 도와드려야 한다는 뜻이야. 자 어떻게 도와드릴 수 있을까?"
한 녀석이 턱주가리를 치켜 올리면서 되물었다.
"왜 걱정을 해야 돼요?"
다른 녀석들도 금세 고개를 주억거린다. 웃고 까불고 장난치고 바람개비처럼 팔랑거리는 녀석들답다. 이 녀석들은 당최 심각해지질 않는다.
"아니, 부모가 아픈 데 걱정이 안 돼?"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서로 쳐다보다 내 얼굴을 바라보다 하며 어리둥절해 한다. 나는 일말의 기대를 걸고 다시 묻는다.
"그거 걱정할 문제 아닌가?"
아이들은 표정도 없고 말도 없다. 잠시 후 한 녀석이 이제 질문의 요지를 알겠다는 듯 시원스레 쏟아낸다.
"병원에 가면 되잖아요!"
"맞아요, 맞아요. 병원에 가면 돼요."
아하! 왜 진작 그 생각을 못했지? 하는 표정으로 이젠 이구동성으로 합창이다.
"야, 인석들아. 병원에 가는 것은 가는 것이고, 가족이 아프면 걱정이 안 되느냐고?"
아이들은 다시 난감한 듯 대답이 없는데, 한 녀석이 돌연 뾰루통해져서 사뭇 도전적 어조로 외친다.
"엄마는 걱정 안 해요. 혼만 내요."
"맞아요, 맞아요. 아무리 아파도 과외는 가야 해요."
"맞아요, 맞아요. 정말 나빠요."
녀석들은 마치 규탄대회라도 열 듯한 기세다.
맥이 탁 빠진다. 이 녀석들에게 내가 뭘 가르치려고 했던 거지? 내가 한자 몇 자 익혔다고 폼잡고 싶었나. 컵에 물을 천천히 가득 따라 아주 꼭꼭 씹어서 마신다. 다 마실 때까지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는다.
먹을 게 턱없이 부족했던 내 어린 시절, 과외는 사치였다. 그저 아프지 않고 맘껏 뛰어 놀고 먹을 것 있을 때 배터지게 먹으면 그만이었다. 우리 부모들의 최대의 희망사항은 아프지 않고 튼튼하게 커줬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공부까지 잘 하면야 더할 나위 없지만.
내 열두 살은 그렇게 갔고 나는 아직도 '열두 살의 아이'란 당연히 그럴 거라 짐작만 하고 있었다. 그때의 나와 같은 생각과 욕망과 놀이 속에 존재하는 아이들로만 이 아이들을 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아이들의 열두 살은 다르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아픈 것도 먹는 것도 공부에 지장이 없어야 하는 거다. 벌써 이들을 만난 지 반년인데 나는 이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의 이 아이들을, 만나지 못했던 거다. 저 팔랑개비 같은 녀석들을 옥죄는 것은 그 넘의 공부, 공부다.
내가 가르치려 했던 것 또한 저들에겐 또 하나의 구속이었겠다. 감옥이고 형벌이었겠다.
공짜로 한자 교실을 열면서 나는 제법 자유인 흉내를 냈다.
"오고 싶으면 오고, 오기 싫으면 오지 않아도 돼."
선심을 있는 대로 베풀었지, 내 멋에 겨워서.
사실 아이들은 부모에 의해 끌려왔고 거부할 수 없었을 뿐인데.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수업을 접고 말았다. 진심으로 그들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속으로만 간절히 부탁했다.
"얘들아! 부디 건강하게 자라다오."
*수필가 강병기(공도한의원 원장)씨는 '에세이스트'로 수필(2007)·평론(2009)부문에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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