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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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 전깃불이 들어오기 전까지 우리 집은 등잔불을 밝히고 살았다. 안방과 부뚜막 조왕, 그리고 마루기둥에 등잔대를 만들어 성냥과 나란히 놓았었다. 대두병에는 물같이 맑은 기름이 항상 절반 이상 담겨 있었으며 기름이 달아난다고 마개를 야무지게 틀어막아 그늘진 곳에 걸어 두었었다. 행여 대두병에 성냥을 그어대면 불이 난다며 어찌나 단속을 했던지 동생과 나는 아예 그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 기름이 바로 휘발성이 강한 석유였다.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어느 날 오후, 마른장마 끝에 애타게 기다렸던 비라서 아버지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빠른 손놀림으로 집안일을 대충 마치고 삽을 들고 논으로 가셨다.
초가지붕의 호박넝쿨을 타고 쏟아지는 집시랑 물이 금세 빈 항아리에 가득 차올랐다. 낙숫물의 색깔이 간장 같았다. 강아지와 닭들이 덩달아 갈팡질팡 하였다. 나는 저녁밥을 지으려고 아궁이에 짚불을 지폈고 강아지는 아궁이 옆에 젖은 몸으로 다리를 접고 앉았다. 처마 밑에서 함초롬히 비를 맞은 닭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장태에 들어가 홰를 쳤다.
방천 둑에 매어 놓았던 송아지랑 염소는 진즉 집으로 끌고 왔건만, 논 물꼬를 보러 가신 아버지는 땅거미가 내리도록 돌아오시지 않았다. 이 무렵 병으로 고생하시는 아버지를, 어린 동생과 나는 걱정이 되어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생각다 못해 호롱 심지를 돋우고 불을 밝혀 논으로 갈 채비를 하였다.
나는 어른들의 등잔 다루는 법을 평소 지켜본 터였다. 마당에서 늦게까지 일을 하실 때는 호롱 심지를 크게 올렸다. 그러면 끄름은 생길망정 불꽃이 커져 사방을 밝게 비췄다. 방에서는 다시 심지를 평상으로 줄이면 끄름도 나지 않고 적당히 밝아져서 공부하기에 좋았다. 기름이 떨어질 때쯤이면 심지가 타들어가 금방이라도 불이 꺼질 것 같다가도 호롱에 석유를 넣으면 거짓말같이 불이 밝아졌다.
내리던 비는 멎었다. 서쪽하늘에 금방 떠있던 초승달은 벌써 지고 없었다. 아마 칠월 초사나흘쯤이었나 싶다. 등불을 켜들고 동생과 나, 강아지까지 셋이서 강둑을 걷기 시작했다. 낮에는 강아지풀을 꺾어 코에 붙여 콧수염을 달기도 하고 클로버 꽃을 엮어 손목시계와 반지를 만들어 차기도 하며 뛰놀던 방천길, 눈을 감고도 달릴 수 있는 길이건만 그날 밤의 그 길은 왜 그리도 터덕거리고 무서웠던지.
한바탕 내린 비로 하늘은 처량하리만치 맑아 초롱초롱한 별과 은하수가 작은 냇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가끔 멀리서 들리는 천둥소리와 함께 번쩍번쩍 번개가 칠 때면 둑길에 서있는 전봇대가 마치 커다란 뼈다귀처럼 휙 다가왔다. 깡충거리던 강아지도 놀랐던지 낑낑댔다. 그래도 동생과 나는 조금만 참으면 아버지를 만난다는 기대로 무서움을 삼키며 더듬더듬 걷고 있었다.
논이 가까워질수록 만약에 아버지가 그곳에 계시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엉뚱한 생각으로 가슴은 두방망이질을 쳤다. 들고 있던 등불마저 휘청거렸다. 울음 섞인 목소리로 아버지를 불렀다. 그러나 아버지는 대답이 없었다. 무서움과 두려움이 뒤범벅되어 동생과 나는 맹꽁이와 함께 3중창으로 울고 있었다.
그때였다. 논배미 물꼬 쪽에서 아버지의 기척이 들려왔다. 반가움과 서러움이 복받쳐 더 큰 소리로 울었다. 적막한 밤공기는 성능 좋은 마이크가 되어 허허벌판을 울음소리로 메우고 있었다. 아버지는 하던 일을 멈추고 우리 쪽으로 오셨다. 내 일생에 그때처럼 아버지가 반갑고 고마웠으며 커보였을까. 어린 마음에 최고로 여기던 신부님보다도 우리 아버지가 더 높아 보인 순간이었다. 가톨릭신자였던 아버지는 기도를 하시면서 어제 비료를 뿌렸기에 논물이 넘치지 않도록 물꼬를 조절하고 계셨던 것이다.
돌아오는 길 아버지는 동생을 지게에 태우고 나는 아버지의 삼베바지를 움켜쥔 채 강아지랑 졸랑졸랑 재잘거리며 집으로 돌아 왔다.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내 작은 손으로 아버지의 삼베바지를 움켜쥐었던 그 촉감! 땀과 빗물과 논물로 얼룩진 아버지! 아버지는 방을 밝히고 마당을 밝히고 나를 밝혀주는 등잔불이었다.
※ 수필가 최정순씨는 2007년 대한문학으로 등단. 행촌수필문학·영호남수필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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