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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멋져, 최고야!

신상채

▲ ※ 수필가 신상채씨는 2003년도 '문예사조'로 등단했따. 경찰문인협회 회장.

동생이 생긴 뒤로 네 살짜리 큰손주의 일상이 자꾸 엇나가고 있다. 밥도 제대로 안먹고 잠자는 시간도 제멋대로다. 지난밤에도 새벽 3시가 넘도록 잠을 안자고 애니메이션 프로만 보려 했다. 텔레비전에 한 번 빠져들면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보려고 한다. 시청 시간도 너무 길고 또 비스듬히 누워서 보는 시청자세도 문제다. 이러다 시력장애라도 올까 염려스럽다. 자꾸 말려보지만 그때마다 울며 떼를 쓰는 바람에 제대로 제지하지도 못한다. 아이가 하자는 대로 너무 방임한 탓이겠기에 크게 후회도 해본다. 흔히 조부모 손에서 크는 아이들이 버릇없다고들 하는데, 우리 손자들은 그런 소리를 들어서는 안되겠다.

 

텔레비젼을 끄고 억지로 재우려는 할미와 실랑이를 벌이다 이제껏 잘 참아오던 할미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할미의 큰소리에 아이는 더 큰 소리로 울어대니 급한대로 할아비가 대타로 나설 수밖에. 보챌 때마다 할미의 최후의 무기는 업어서 재우는 것이다. 할미의 등에는 무슨 수면제라도 묻었는지 업으면 채 5분도 안돼 잠이 들곤 했다. 그런데 이번엔 그마저 여의치 않다. 유난히 더위를 많이 타는 할미는 더워서 아이를 업어줄 수 없다고 한다. 내친 김에 할미는 그동안 쌓인 아이의 부모에 대한 불만까지 쏟아 놓는다. 할아비가 업어주며 달래자 못이기는 척 울음을 그친다. 겨우 잠을 재우고 나니 4시도 훌쩍 넘어 이번엔 내 잠이 달아나 버렸다. 온갖 잡념이 꼬리를 물어 잠을 놓친채 날이 밝았다. 아이의 부모들은 이런 소동도 모르고 깊은 잠에 빠졌겠구나!

 

아침이 되자 할미는 아이에게 다짐을 한다.

 

"오늘 밤부터는 네 엄마한테 가서 자거라."

 

"싫어, 안 가."

 

마치 그런 말이 나올 줄 알고 기다렸다는 듯이 아이의 대답이 어찌나 신속하고 단호한지 놀랍다. 이유야 물어보나마나다. 엄마가 동생을 안고 자는 그 옆에 같이 있기가 싫은 것이다. 감성이 예민한 아이들의 전형적인 행동양상이 아니겠는가?

 

오늘도 10시가 넘도록 늦잠을 잤으니 유치원 버스는 당연히 놓치고 말았다. 아이의 감기 기운이 아직 남아 있어 병원에 들렀다.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아이의 성장 상태가 궁금해졌다. 키 93센티미터와 몸무게 13킬로그램이다. 기준표를 보니 발육상태는 거의 정상 수준이다. 아주 더디지만 그래도 크긴 크는가 보다.

 

이제는 손톱 발톱을 깎아줘도 울지 않고 가만히 있고, 화장실 갈 줄도 안다. '가위 바위 보'도 잘하고 귀찮을 정도로 술래잡기를 하자고 조르기도 한다. 아이는 지금 신체적 성장 못지않게 정서적으로도 큰 변환기를 치르고 있는 것 같다. 지금 이렇게 많이 자랐지만 그때는 모르던 걱정꺼리도 덩달아 생긴 것 같다.

 

할미는 요즈음 들어 부쩍 아들을 분가시켜야겠다는 말을 자주 들먹인다. 여름만 되면 더위 때문에 고생하는데다 당뇨까지 점점 심해지는지 늘 피곤해 한다. 노년에 손자들까지 돌보느라 시집살이한다고 푸념이 늘어간다. 나이 들고 결혼해서도 부모 품을 떠나려하지 않는 소위 '캥거루족'이 늘어나는 추세라는데 바로 우리집을 두고 하는 말이지 뭔가? 아들 내외는 분가 이야기만 나오면 아예 입을 봉해 버리고 대꾸가 없다. 그들이 믿는 구석은 손자를 끔찍이 아끼는 부모들이 차마 손자들을 내쫓지는 못하리라는 계산인 듯하다.

 

이런저런 걱정으로 우울한 하루를 보내는데 시계를 보니 어느덧 큰아이가 유치원에서 돌아올 시간이네! 얼른 마당으로 나가 기다리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버스는 안 나타나고, 뜻밖에도 바람결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의심하였다.

 

"할머니 멋져, 최고야!"

 

눈치 빠른 아이의 넉살이다. 할머니와 손주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연신 깔깔대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다. 지난 밤 잠도 못자고 시달려 잔뜩 화났던 할미가 어느새 아이가 걱정됐는지 직접 유치원에 가서 아이를 데리고 오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그렇지! 아들이나 며느리는 못마땅해도 손자한테는 한없이 약한 할머니의 깊숙이 숨겨둔 마음을 그만 들키고 말았다. 필시 오늘 밤에도 아이는 안방에서 잠꼬대를 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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