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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밤에

▲ 박경숙
언덕길에 차를 세우고 바라보는 달이 유난히 밝다. 자정을 갓 넘긴 포근한 밤이다. 늦여름의 잔영이 남아 있던 얼마 전만 해도 달빛에 몸을 적시면 서늘해지곤 했었다. 그러나 오늘 밤 달은 불에 달군 듯 붉은 기운을 품고 있다. 달은 가끔 지나는 구름에 몸을 숨겼다 나와 나를 지긋이 바라본다. 한가롭게 달과 눈이 마주치자 생각 주머니가 열린다. 달을 바라보며 기억의 소실점에 이르자 그곳에는 어린 시절의 내가 서 있다.

 

고운 달빛을 맞으며 언덕길을 걸어가는 소녀가 보인다. 머리는 양 갈래로 따고 군데군데 때가 낀 원피스를 입은 여자아이다. 한 손에는 동냥 통을, 나머지 손은 보따리를 들고 언덕을 절뚝거리며 걸어간다. 소녀 뒤로 고만고만한 또래의 아이들 대여섯이 따른다. 이윽고 냇가에 이르자 소녀는 동냥 통을 내려놓는다. 달빛이 투영되어 반짝거리는 냇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숙여 물을 마신다. 뒤따르던 아이들이 까치발을 하고 살금살금 다가가 소녀를 밀어 냇가에 빠뜨린다. 물에 빠진 소녀가 허우적거리며 발버둥을 치자 아이들이 깔깔대며 웃는다. 겁먹은 소녀는 급히 물가로 나가 울음을 터트린다.

 

절름발이 소녀가 있었다. 나이는 몇 살 위였지만 몸이 부실하여 넘어지면 자주 울었다. 소녀는 마을 외딴곳의 허름한 토담집에 동생과 함께 살았다. 소녀의 어머니는 그녀가 세 살 때 도시로 돈 벌러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이 돌았다. 소녀는 마을로 매일 동냥하러 다녔다. 친구들과 나는 그녀를 자주 놀렸다. 전주로 이사를 나오고 몇 년 뒤 가보니 소녀가 보이지 않았다. 친구들은 그녀가 섬유공장에 취직했다느니,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한다느니 하는 근거 없는 소문만 전했다. 몇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녀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가끔 귀몽歸夢을 꾸다 깨어나면 그 끝자락엔 그녀가 울면서 서 있었다.

 

달빛에 젖은 대나무를 바람이 훑고 지나간다. 널찍한 이파리 매단 칡덩굴이 여린 대무나의 몸을 감고 있다. 어둠 속에선 대나무와 칡넝쿨은 한 몸처럼 보였다. 소녀는 대나무처럼 여렸고 코흘리개 우리는 칡덩굴처럼 그녀를 감고 오르며 괴롭혔다. 엉엉 소리 내어 울던 소녀의 얼굴이 가슴에 와 박힌다. 그 아이도 지금은 지천명을 훌쩍 넘겨 눈매가 부드러워졌겠지.

 

달은 커다란 벽시계의 오후 시침처럼 서편으로 기운다. 내 삶의 시침도 저 정도쯤 지나고 있을까? 돌아보면 언제부터였는지 딱 꼬집을 순 없지만 사람관계가 뻑뻑해진 느낌이 들곤 한다. 세월 따라 걷다 보니 세상엔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사람들은 소크라테스나 공자가 아니어도 머리에 서리가 내리고 입가에 팔자 주름이 깊게 팰 때쯤이면 나름 철학자나 사상가가 되나보다. '사람만이 희망이다.' 라는 말에는 공감하면서도 때로는 사람에게 등 돌려 멀어지는 나를 합리화하곤 한다. 이제 자화상을 그릴 만큼의 겹겹 나이테가 쌓여 삶의 기둥이 굵어졌는데도 삶의 깊이와 넓이는 자꾸만 작아져 가는 것 같다.

 

가끔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리움을 잊어버렸다는 말을 듣는다. 거창한 것은 아니지만, 한때 가슴 깊이 간직했던 아름다운 추억들이 희미해지긴 마찬가지이다. 육체가 쇠해지면 정신도 기력을 잃어간다. 그동안 가속이 붙은 삶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관성에 의해 흘러가곤 했다.

 

매일 최고치를 경신하던 더위도 스러지고 어느덧 풀숲에선 귀뚜라미가 울고 있다. 이제 곧 들녘의 사과색이 붉어지고 고추잠자리가 하늘을 덮으면, 우리 앞에는 또 다른 계절이 서 있을 것이다.

 

 

※ 수필가 박경숙씨는 2010년 '대한문학'으로 등단했다. 순수필 동인으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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