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두환
나는 가을이 되면 단풍나무 숲길을 따라 걷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추석 이튿날 아내와 딸과 사위, 외손녀와 함께 가까운 강천산을 찾았다. 순창군 팔덕면 백암마을 장인장모 묘소를 찾아 성묘 를 하고 손녀들에게는 추억거리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강천사 매표소에 다다르니 '명절연휴에는 입장료 무료'라며 친절하게 안내까지 해주었다.
강천산은 예로부터 옥천골이라 불릴 만큼 깊은 계곡과 맑은 물,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곳이다. 높이 583.7m의 강천산은 생김새가 용이 꼬리를 치며 승천하는 모습과 닮았다고 하여 용천산(龍天山)이라고도 한다. 늦가을이면 만산홍엽이 절경이다. 순창 강천산군립공원은 사방이 울긋불긋하여 가을정취와 낭만을 느끼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봄여름가을겨울, 사시사철 풍경이 아름답다.
내가 단풍 숲을 걷고 싶어 하는 이유는 값싼 감상주의나 분위기에 빠지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색에 잠기고 싶기 때문이다. 단풍 숲은 꽃처럼 향기를 발산하지 않지만 자세히 보면 사색의 향기가 흐른다. 그래서 나는 사색의 향기에 묻혀 조용히 내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갖는다.
강천산 산책길을 유유자적 걷노라니, 중국 산문의 대가이며 탁월한 시인, 한유의 '불평즉명(不平則鳴)'이 생각난다. 한유는 '소리 없는 풀과 나무도 바람이 흔들면 울게 되고, 소리 없는 물도 바람이 움직이면 운다.'라고 했다. 봄은 새가 울고, 여름은 우레가 울며, 가을은 벌레가 울고, 겨울에는 바람이 운다. 가을날 풀벌레가 짝을 찾아 사랑의 세레나데를 읊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푸석해진 풀잎이 이제 막 눕기 시작하는 밭 언덕배기에는 늙은 호박들이 잠시 낮잠을 즐기고, 시원스럽게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총총히 어우러진 도린결 억새들도 춤을 추는 듯하다. 하얗게 피어오른 억새꽃을 보니, 백발이 되신 어머님 모습이 떠오른다. 이렇게 가을이 깊어지면 농촌에서는 발바닥이 닳도록 논밭을 오가야 한다. 어머님은 새벽부터 밤중까지 텃밭에서부터 이 밭 저 밭 온 밭을 더듬고, 아버님은 마을 끝머리에서부터 집안 마당까지 볏짐을 나르느라 앉아서 담배피울 시간도 아까웠다.
하루해는 너무도 짧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을 어른들은 틈만 나면 지게막대기로 장단을 맞추며 육자배기에 흥타령을 주고받았고, 흥이 오르면 수제비· 두부김치를 나눠먹으며 밤새도록 풍물을 즐겼다. 내 고장 진안 사옥마을에서는 가을걷이가 끝나면 젊은이들은 개울을 막고 물고기를 잡아, 얼큰한 매운탕과 어죽을 끓여먹기도 했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이런 풍경들이 내마음속에는 오롯이 남아있다.
오늘의 고통은 내일의 힘이 된다. 밤이 오면 아침이 찾아오듯이, 가을과 겨울이 지나면 또다시 봄은 찾아오리라. 먼 훗날 다가 올 내 인생의 가을은 어떤 모습일까. 얼마나 아름다운 빛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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