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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동에 핀 동백꽃 - 정곤

눈 오는 날은 하늘로 날아가고 싶다. 바람 부는 날에는 춤을 추고 싶고, 현수막 속에 박혀 있는 글자가 되어 허공에 펄럭이고 싶다. 해묵은 마음 자락을 씻어내 볕 좋은 곳 산기슭 나뭇가지에 말리고 싶다. 세파에 얼룩지고 흠뻑 땀 배인 내 생각을 세탁기 속에 넣고 수백 번 돌려 맑은 정신이 들 때까지 탈수하고 싶어진다.

 

엄동에 동백꽃을 본다. 그 꽃 속으로 눈이 내린다. 바짝 쪼그리고 앉아 본다. 눈이 내려 쌓여도 꼼짝을 하지 않는다. 귀찮은 내색도 전혀 하지 않는다. 고개를 흔들며 싫다고 거부하지도 않고 자연의 이치에 순응한다. 바람이 와서 가지를 흔들면 겨울 꽃이 되어 반쯤 웃는다. 그래서 겨울에 피는 동백꽃을 우리는 그렇듯 좋아 하는가 보다. 눈 오는 날 대학가 앞을 지날 때면 예쁜 목도리를 두른 학생들이 동백꽃처럼 환하게 웃는 것 같다. 그들도 동백꽃과 같이 자연의 삶과 굳은 절개와 매서운 세상을 배우리라.

 

동백꽃을 보고 있으면 고려의 대문호 이규보의 시 '동백화(冬栢花)'가 생각난다. "복사꽃과 오얏은 화려하지만 봄에 잠깐 피었다가 시들기에 절조가 없고, 소나무와 측백나무는 추위를 이기는 굳은 마음은 있으나 고운 안색이 없으니 동백이야말로 예쁜 꽃이면서 절개가 있다"라고 예찬했던.

 

낮에는 홀로 비어 있던 아파트에 저녁이 되면 뿔뿔이 헤어졌던 식구들이 돌아온다. 그 시각 전주 삼익수영장 부근에는 저녁시장이 열린다. 그곳에서는 봄이면 쑥과 냉이를 손수 뜯어다가 팔고, 여름이면 복숭아 수박을 팔며, 가을에는 배추와 과일을 판다. 겨울에는 대파와 당근 그리고 미나리 등을 팔고 있다. 오늘도 그 여인은 어김없이 미나리 몇 단과 푸성귀를 시장 귀퉁이에서 좌판도 없이 앉아 물건을 팔 것이다. 내가 그를 알게 된 것은 주말농장에서였다. 그 여인은 그 곳에서 생산되는 물건을 시장에 내다 파는 것이었다. 장뼘 만 한 밭에서 나오는 상추 등을 모아 팔았다. 그녀의 삶은 순탄하지 않아 보였다. 항상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어느 때는 시장 시멘트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있으면서도 정영 삶을 두려워하거나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그 여인이 시장 사람들과 맞대어 살 수 있는 것은 마음속에 아름다운 정과 삶에 대한 집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길을 걷다 그 여인이 파는 물건을 보면 나도 몰래 그 좌판 앞으로 성큼 다가가 사주고 싶어진다. 그가 파는 좌판에는 온 식구가 매달려 있는 것만 같다. 사람들이 지나간 자리에 햇살이 지나고, 식구들의 삶의 무게만큼이나 잔뜩 무거워진 어깨를 가지고 혼자서 버티며 살아가고 있다. 그녀의 어깨에는 딸의 운동복, 어머니의 헐렁한 바지, 아들의 점퍼, 병든 남편의 양말이 힘없이 걸려 있다. 온몸 가득한 인내와 힘겨운 삶이 곧 인간의 참 모습 같이 배어 있다. 지난 세월 질퍽거리는 시장에서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고 해내며 살아왔다는 그녀다. 그렇다고 남을 속이거나 많은 이윤을 붙이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더러는 가족들 생일마저도 깜박 잊어버리고 산다는 그 여인이다.

 

나는 시장을 가끔 간다. 그곳에 가면 치열한 삶과 생동감 넘치는 그들이 있기에 시장으로 발길이 돌려진다. 시장에 가면 그녀의 인내와 동백꽃 닮은 그의 진정한 삶이 피어나고 있는 것 같다. 비록 얼굴에는 주름 깊다 하나 그 속에는 순박한 서민들의 삶에 지문이 내재해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시장사람들의 모습에서는 싱싱한 활력이 느껴진다. 겨울동백처럼.

 

 

* 수필가 정곤씨는 2012년 '수필가 비평'으로 등단했다. '덕진문학''모악에세이'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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