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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뚜기와 송사리

송종숙

저물녘에야 건넛마을 큰댁을 다녀온다. 김장김치 몇 포기를 갖다드리고 오는 길이다. 거뭇하게 산 그림자가 내리고 있는 들녘에 거의 식어버린 듯한 겨울 해가 넘어가고 있다. 떠오를 때는 어지간히 천천히 올라오던 해도 넘어갈 때는 왜 그리 바삐 서둘러 가는지 모른다. 황혼녘 인생 같다. 마을 앞엔 수확이 끝난 빈 논바닥만 썰렁하게 누어있다. 김장 채소마저 다 뽑아가고 아무 것도 없이 텅 빈 들이 적막하다. 저녁참이라 동네 길에는 아무도 없다. 으쓱한 냉기가 들어 두 팔을 겨드랑에 끼고 걷는다. 김치 짐을 부려버리고 맨손으로 들길을 종종거리며 걷는 맛이 호젓해서 좋다. 둔덕 위에는 선들 바람에 마른 억새풀이 흔들리고 있다. 어둑한 들녘을 배경으로 희부옇게 서있는 모양이 휘진 노인네가 허청거리는 모습 같다. 홀연, 빈 들녘 어디선가 울리는 목소리가 있는 듯하여 돌아본다. 아무도 없다.

 

강릉 시동생이 떠오른다. 어디선가 들리는 그 환청은 이따금 탄식하던 그 소리였나?

 

"형수님 거긴 메뚜기도 있고 송사리도 있어요? 여긴 그런 걸 볼 수가 없네요. 초충도를 병풍수로 놓으셨던 사임당의 고향에 메뚜기도 없고 송사리도 볼 수 없다니까요. 그래서 되겠어요? 이게 무슨 현실이지요?"

 

장익순 선생, 박경리 소설가와의 교분에서 생명사상을 영향 받은 것인지 시동생은 기회만 있으면 울컥, 농촌의 황폐화를 한탄하였다. 생명체가 모두 사라진 듯, 고요한 빈 들녘을 보니 갑자기 시동생 생각이 떠올랐나 보다. 사실 이곳 시골도 언제부턴가 송사리 메뚜기 구경을 할 수가 없다. 가을철이면 메뚜기를 잡아 풀줄기에 기다랗게 꿰어서 빙빙 내두르며 논둑을 호기 좋게 내달리던 아이들 모습도 구경할 수 없다. 논둑 옆 봇도랑 밑바닥에 크고 작은 바윗돌들이 박혀있어야 고기들이 숨어들고 새끼도 낳겠건만 마을마다 개울바닥을 통째로 말끔한 시멘트로 깔아놓았다. 흘러오는 물줄기도 머물지 못하고 내려 온대로 그냥 조르르 흘러가버린다. 송사리커녕 개구리도 가제도 살 곳이 없는 것이다. 풀언덕마다 농약을 뿌려대니 메뚜기도 방아깨비도 여치도 먹고 살 풀숲이 없다. 곤충들조차 차츰 멸종되어 가는가 보다. 장지문에 햇살 퍼지는 아침녘, 마당에서 재잘대던 텃새들 소리에 잠깨던 기억, 계절 따라 서식지를 찾아오던 철새들이 겨울 바다, 찬 하늘에서 군무를 추던 그 장관도 잃어버린 꿈이 되려는가 보다. 산짐승들도 해마다 그 수가 줄어간다.

 

농촌이 비어간다. 젊은이들도 이미 떠났지만 자연도 그 곳을 지킬 수가 없다. 마을길, 농로마저 말쑥하게 시멘트, 아스팔트 포장해서 자동차 소음에 민감한 새들을 쫓아버렸다. 사료용으로 볏짚을 둥글게 비닐 포장해 추수 직후 곧바로 수거해가니까 논에도 새들 먹이인 낙곡이 없다. 새만금같이 대규모 방조제가 생긴 바닷가에는 바닷물 수질 악화로 수초도 자라지 않고 조개랑 수많은 생명체를 품어 키우던 갯벌도 많이 사라져버렸다.

 

머지않아 이 강산, 이 좋은 농토들이 황폐한 황무지가 되어 버린다면 어쩌나? 메뚜기와 송사리도 이러다 완전히 사라지고 마는 것이라면? 문뜩, 모래시계가 생각난다. 우리의 시간이 혹시, 모래시계의 남은 모래알처럼 차츰 줄어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진다. 순간의 편리만 쫓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은 어디까지 달려갈지 모른다. 문명의 종착역은 무지개 같은 행복의 별천지가 될 것인지, 멸망의 낭떠러지로 내달리는 어리석은 괴물열차가 될 것인지, 아무튼 모를 일이다. 빈 들녘에 모래시계의 환영이 보이는 것 같다. 남은 모래가 얼마나 될까?

 

* 수필가 송종숙씨는 2010년'한국수필'로 등단. 수필집'안아당의 오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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