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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방울

▲ 김형진
무녀가 모둠 뜀질을 하면 꽃처럼 장식한 신대 상단의 방울들이 짤랑짤랑 맑은 소리를 낸다. 한바탕 뜀질로 신명을 다한 무당은 제 자리에서 맴돌기도 하고 원을 그리기도 하며 장단에 맞추어 신대를 흔든다. 방울소리가 굿판에 흐른다. 무녀는 쉼 없이 주문을 주워섬긴다. 그녀의 얼굴엔 신을 맞은 듯 화색이 돌고 주위엔 신기가 감돈다.

 

신맞이를 위한 무녀의 뜀질이나 맴돎에는 별로 눈이 가질 않는다. 눈길은 방울에, 귀는 방울소리에 머문다. 대개는 노랑 방울을 쓰는데 오늘은 하얀 방울이다. 백통인지 스텐레이스인지 은인지 구별도 할 겨를도 없이 하얀 방울이 짤랑짤랑 울리면 가슴 안에서 긴 반향이 읾을 느낀다. 가슴 안에 눅눅한 바람이 스민다.

 

어릴 적 어머니께서 가끔 말씀하셨다.

 

“너는 방울이어야. 그것도 보얀 은방울이어야.”

 

옆 동네에서 일을 보고 점등을 넘어오는 참이었다 한다. 점등은 동네 동남쪽에 있는 상당히 가파른 고개였다. 길 왼쪽 낮은 둑은 평평한 밭으로 이어지고, 오른쪽나지막한 언덕 위로는 비탈 벋어 오른 밭, 꼭대기는 노송이 우거진 야산이었다. 가을걷이가 끝난 밭은 고구마 심은 황토 이랑이 허적했다. 노송 윗가지가 보이기 시작할 지점에서였다.

 

오른쪽 언덕 중동에 언턱이 져 있고 그 위에 밀가루 같이 몽근 모래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모래를 헤쳐 보았다. 까만 소반이 나오고 그 소반 위에 은방울 한 쌍이 놓여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집어 들었다. 집어 들다가 꿈에서 깨고 말았다.

 

그 은방울이 내 태몽이라 했다.

 

“은방울, 생김새는요?”

 

“색깔 보얗고 귀엽게 생겼재, 시방도 눈에 선히야.”

 

“흔들어 봤어요?”

 

“소리는 못 들었어야.”

 

태몽 이야길 들을 때마다 궁금한 것은 소리였다. 은방울의 진가는 생김새보다도 짤랑짤랑 맑은 소리일 테니. 그러나 어머니는 소리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다.

 

바로 위가 다섯 살 터울의 누님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취학 전에는 누님의 반짇고리에서 울긋불긋한 비단 헝겊을 꺼내 벌여놓고 구경하는 게 재미있었다. 학교에 들어가서는 뜀박질, 공차기, 자치기보다 공기놀이, 오자미놀이, 팔방에 더 빠져 지냈다. 때로는 풀각시를 만드는 데 재미를 붙이기도 했다. 보는 사람이 없을 때는 제법 신명나게 춤을 추다가 인기척만 나면 숨어버리는 일도 있었다. 가까운 사람하고가 아니면 아예 입을 봉하기 일쑤였다.

 

소년 시절,

 

“구멍 속 배암이 한 자가 되는지, 열 자가 되는지 어찌케 알것냐?”

 

어머니의 걱정을 귓바퀴에 매달고 자랐다. 그때부터 나는 구멍 속에 든 뱀이었다. 바위 사이에 또아리를 뜬 까치살모사도, 열사熱沙의 구릉 밑에서 꼬리를 흔드는 방울뱀도 아닌 그저 논두렁 구멍 속에 숨어 혀만 날름거리는 물뱀이었다.

 

어릴 적엔 날씨가 잔뜩 흐린 날이면 동네 옆 고래실에서 ‘우웅, 우웅’ 으스스한 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어른들은 구멍 속에서 우는 구렁이 소리라 했다. 한물이 질 징후라 하기도 했다. 구렁에서 울려오는 그 소리는 은근히 사람의 심장을 옥죄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구렁도 아닌 물뱀이었다.

 

해를 마시는 꿈을 꾸고 낳았다는 홍길동이나, 용이 오르는 꿈을 꾸고 낳았다는 이몽룡의 태몽은 언감생심이지만, 적어도 사내의 태몽이라면 호랑이가 포효한다든가 황소가 달려드는 꿈쯤은 되어야 제격이 아닌가. 그런데 작은 소반 위에 놓인 은방울이라니. 그나마 소리 한 번 내보지 못한 방울이라니. 무당의 방울이 흔들어도, 흔들어도 소리를 내지 않는다면 어떻게 신을 맞아들일 수 있겠는가.

 

흔들어도, 흔들어도 짤랑 소리 한 번 내보지 못한 은방울은 이제 꺼멓게 녹이 슬어버렸다.

 

△수필가 김형진씨는 1997년 계간 〈수필〉로 등단. 수필집 〈종달새〉, 수필평론집 〈이어받음과 열어나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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