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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맨발에게 말을 걸다

문경근
문경근

산책로 초입에 들어서니 맨발의 청춘들이 눈에 띈다. 나이 든 이들도 질세라 맨발이다. 늘그막이라고 점잔을 빼느라 신발을 벗을까 말까 뭉그적거리고 있는데, ‘맨발로 걸으면 성인은 아랫배가 빠지고, 고혈압인 사람은 혈압이 조정되며’ 라는 안내판의 글 몇 줄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 바로 이거다. 맨발 걷기가 이렇게 좋은 건데, 이를 무시하면 어리석기 아니면 발바닥 환자가 아닌가. 밑져야 본전이고 운 좋으면 남는 장사일 것이다.

양말을 돌돌 말아 운동화 속으로 깊이 밀어 넣은 뒤, 양팔의 균형 맞추듯 두 손에 나누어 들었다. 지금부터는 오직 건강을 위한 걸음이 있을 뿐이다. 그러고 보니 내 발은 참으로 오랜만에 길에서 민낯을 드러낸 셈이다. 맨발과 흙길의 만남, 자연과 뜻이 잘 맞아 편안한 조합이지 싶다.

조금은 설레는 기분으로 첫발을 내딛는다. 오랜만에 흙길과 발바닥을 대면 헤어진 남녀가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듯 조심스럽다, 처음에는 발바닥이 선득선득 간질간질하여 실실 웃음이 나온다. 반갑기는 한데 할 말이 마땅치 않으면 그저 웃고 마는 상황이 이런 건가. 발바닥에 일부러 힘을 주기도 하고 종종걸음도 쳐보기도 한다. 흙길 외출에 나선 발바닥도 덩달아 신바람이 나는지 들뜬 탄력이 감지된다. 한결 가벼워진 발은 호사를 누리며 주인에게 홀가분함이 무엇인지를 깨우쳐 준다.

잠시 바위에 걸터앉아 숨을 돌리며 발바닥에 바람을 쐰다. 매일 어린이집에서 지내다가 오랜만에 나들이 나선 손주의 얼굴에 화색이 돌듯, 발그레한 발바닥에 생기가 돈다. 그동안 단 한 번이라도 진심으로 쓰다듬어준 일이 있었던가. 무심한 주인을 만나 칭찬 한 번 못 해준 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발의 외모는 물론 그 안에 숨겨져 있는 이력까지도 진지하게 생각하며 오늘따라 둥둥 떠받들고 싶어진다. 맨발이라야 겨우 집안에서 방바닥을 디뎌보거나 어쩌다 물가에 나갔을 때 모래밭을 밟아본 것이 고작이었다. 그것도 긴 시간에 아니었으니, 흙 맛을 보고 싶은 발바닥으로서는 답답하고 감질이 났을 것이다. 맨발에게 말을 건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내 몸을 지탱해주며 때로는 마음의 무게까지 감당해주었지. 그동안 수고 많았다.’

굴곡진 발바닥을 어루만지며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삶을 떠올려본다. 70년 넘는 세월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굳은살로 누적된 채 손길을 받아주고 있다. 딱딱하고 무덤덤해 보이지만 그 안에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으리라는 생각에 숙연해진다. 불현듯 유년 시절 맨발의 기억이 한 자락 깨어난다. 그 시절 학교에서는 남의 신발을 훔쳐 가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 찢어진 신발이나 심지어 맨발로 등교하는 친구들도 적지 않았던 때다. 그러던 어느 날, 명절에 맞춰 아버지가 새로 사주신 내 고무신이 감쪽같이 없어졌다.

울고불고했지만 맨발로 교문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한 시간 남짓 걸리는 귀갓길은 고통과 눈물로 범벅되었다. 발바닥은 쓰라리고 잃어버린 신발 걱정에 눈앞이 캄캄했다. 풀이 죽어 들어오는 나를 본 어머니는 혀만 끌끌 찰 뿐 꾸지람을 하지는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신작로 자갈길을 맨발로 걸어온 아들의 상심을 헤아리고 있었지 싶다.

흙길과 설렌 만남을 끝내고 다시 험한 세상과 맞서는 무장을 해야 한다. 시원한 물로 깨끗이 씻은 발에 다시 양말과 운동화를 신긴다. 냉엄한 세상 속에서 맨발은 안 될 테니까.

 

* 문경근 수필가는 <대한문학> 으로 등단했으며, 전북문인협회, 정읍수필문학회, 행촌수필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수필집 <학교 잘 다녀왔습니다> 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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