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지역에서 수십 년째 회사를 운영해 온 건설기술업체 대표를 만났다. 그는 요즘 회사 경영이 너무 버겁다면서 자신을 짐을 잔뜩 싣고 언덕길을 오르는 짐자전거와 같다고 전했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페달을 밟고 있지만 돌부리 같은 장애물이 많아 더는 오르기가 힘들다고 하소연했다.
지난달 초 감사원은 전국 자치단체 23곳에서 시행하고 있는 건설기술용역의 지역업체 공동도급 의무화는 불공정 행위에 해당된다는 감사결과를 발표했다. 지방계약법과 건설기술진흥법 등 관계 법률상 근거가 없는 부당한 요구라는 이유에서다. 전라북도에선 전주와 남원 김제 완주 무주 진안 장수 순창 고창 부안 등 10곳이 적발됐다. 감사원은 지역업체 공동도급 의무화는 건설공사 계약에만 적용되는 규정일 뿐 건설기술용역 계약까지 확대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적시했다. 이어 자치단체들이 입찰참가 자격을 제한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위법한 지방조례와 공고는 모두 개정하라고 주문했다.
사실 지역업체 공동도급 의무화 조례는 전라북도가 궁여지책으로 제정했다. 갈수록 피폐해지는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해 지역건설산업 활성화 촉진조례를 만들었고 10개 시·군은 이를 근거로 지역에서 발주하는 건설기술용역사업에 40~49%씩 공동도급 의무화를 적용해왔다. 이 같은 조치 덕분에 중앙의 메이저 업체가 독식해 온 설계 감리 등 건설용역시장에서 도내 업체들이 그나마 버텨 올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정은 외면한 채 오로지 법 규정만을 내세워 지역업체의 공공 건설공사 참여에 제동을 건 감사원의 조치는 존폐 위기에 처한 업계의 현실을 간과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공동도급 의무화가 지역경제 활성화 및 중앙과 지방업체의 상생 취지에 맞는다면 되레 적극 권장해야 할 사항이다.
10년 전 대형마트가 전주시내에 우후죽순처럼 진출하면서 골목상권이 붕괴위기에 직면했다. 이에 시민사회단체와 전주시가 대형마트 의무 휴업제를 도입했지만 업체 측에선 강력히 반발하며 법적 대응에 나섰다. 결국 정부가 나서서 대규모 점포의 영업시간을 제한하는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을 만들기에 이르렀고 소상공인과 지역 상권을 보호하는 제도로 자리 잡았다.
현행 국가계약법 시행령에는 지역에서 발주하는 건설공사에 대해선 지역업체에 40% 이상 배정하도록 지역의무 공동도급을 규정해놓고 있다. 그렇지만 건설공사와 함께 진행되는 기술용역사업만 지역의무 공동도급을 못 하도록 막는다면 형평의 원칙에도 어긋난다.
우리나라 건설기술용역시장 역시 양극화가 심각하다. 수도권의 대형업체와 지방의 중소업체간 수주 격차가 갈수록 벌어지면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지난 2018년 매출 실적을 보면 10억 미만 소기업은 전년대비 3.1% 감소한 반면 100억 이상 중·대기업은 두 자릿수 증가율을 보였다. 특히 전체 업체의 5%에 불과한 300억 이상 대기업이 국내 수주실적의 51.1%를 차지했다.
결국 지역업체 공동도급 의무화를 없애면 수도권 10여개 메이저 업체의 배만 불려주는 꼴이 된다. 나머지 3000여 개에 달하는 지역업체는 설 땅을 잃게 되고 10만여 명에 달하는 종사자들은 벼랑 끝에 내몰릴 수밖에 없다.
공정한 룰은 이러한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필요하다. 이미 수도권 대형업체와 지역의 중소업체는 출발점부터 공정하지 못한 상황이다. 따라서 지역업체 공동도급 의무화가 법률상 근거가 없다는 점을 들출 것이 아니라 대형마트 의무 휴업 도입처럼 관련 법안을 개정하면 된다. 그리고 지역경제 활성화 차원에서 제정한 공동도급 의무화 조례안도 지방자치제 시행 취지를 살리고 자치단체의 행정재량권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존치시켜야 마땅하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소유하고도 남은 한 마리 양마저 빼앗으려 한다면 지나친 탐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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