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 모악산 밑에 위치한 구이면사무소 앞에는 아주 대조적인 비석 2기가 서 있다. 지난 6월 송이목 전 구이면장과 이의성 주민자치위원장 등 지역 주민들이 뜻을 모아 면소재지 인근에 방치됐던 비석 2기를 이곳으로 옮기고 그 의미를 기록해 두었다.
비석 중 하나는 전주판관 박제근의 애민선정비(愛民善政碑)이고 다른 하나는 균전사 김창석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다. 사실 애민선정비나 영세불망비 모두 송덕비(頌德碑)의 일종이다. 송덕비는 선정을 베푼 관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후임자나 백성들의 추천을 통해 엄격한 심사를 거쳐 임금의 허락을 받아 세웠다. 그러나 일부 관리들은 재임 중에 백성을 부추겨 억지로 자신의 공적비를 세우게 하거나 자비를 들여 송덕비를 세우는 사례도 많았다.
아마도 판관 박제근의 선정비는 전자의 경우이고 균전사 김창석의 불망비는 후자에 해당하는 것 같다. 전주판관 박제근(1819∼1885)은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재령·김천군수를 거쳐 4년 가까이 전주판관으로 재임했고 무주부사 상주목사 이조참판을 역임했다. 시문집으로는 敬菴遺稿(경암유고)를 남겼다. 그는 인품이 근엄하고 공사가 분명하며 전주판관 재임 시 선정을 베풀어 칭송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반면 균전사 김창석(1846∼?)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라도지역 세금을 거두는 관리로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던 인물이다. 없는 토지나 농사를 못 짓는 땅에 세금을 매기거나 농지 면적을 부풀려서 세금을 부과하는 등 악명을 떨쳤다. 고부군수 조병갑과 세곡(稅穀) 운반책임을 맡은 조필영 등과 함께 대표적 탐관오리로 지목돼 충청도 홍주목으로 귀양을 가기도 했다. 전주에 살던 김창석은 균전사로 있으면서 막대한 치부를 했고 후일 평사낙안형 명당인 정읍 산외면 진계리에 아흔아홉칸 대저택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 그의 저택은 6.25 전란 중에 소실된 것으로 알려졌다.
송이목 전 면장의 전언에 따르면 균전사 김창석의 영세불망비 비문은 다른 비문들보다 더 깊고 굵게 새겨졌다고 한다. 아마도 석공이 김창석의 악행을 후세들이 영구히 잊지 말라는 의미에서 힘주어 새겼던 것 같다. 김창석의 영세불망비는 구이면뿐만 아니라 완주 소양면 황운리와 정읍 산외면 야정마을에도 서 있다. 강압으로 백성들이 세웠든, 아니면 자비로 세웠든 김창석의 불망비는 오늘날 징계비(懲戒碑)의 상징이 됐다. 완주 구이면민들이 한 곳에 세워 놓은 애민선정비와 영세불망비가 모든 공직자의 반면교사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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