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신군부에 저항하는 광주시민들의 민주화운동은 과거 전북일보의 보도를 통해서 전북도민들에게 전달됐다. 하지만 당시 보도는 신군부의 언론통제로 축소‧왜곡 된 표현으로 가득했다.
전북일보 1980년 5월 21일자 1면에는 ‘전남대생 데모가 발단, 유언비어로 시민가세’란 제목으로 광주 민주화 운동이 도민들에게 전해졌다.
‘계엄사령부는 지난 18일부터 광주 일원에서 발생한 소요사태가 아직 수습되지 않고 있다고 밝히고 조속한 시일 내에 평온을 회복하도록 모든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발표했다. 계엄사령부에 따르면 이번 소요사태는 맨 처음 전남대생 600여명이 거리에 나와 ’비상계엄해제‘ 등을 요구하며 시위에 들어갔지만 20일에는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터무니없는 각종 유언비어가 유포, 이에 격분한 시민들이 시위대열에 가세함으로써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이날 계엄사령부가 발표한 유언비어는 △경상도군이 전라도에 와서 남녀를 불문하고 닥치는대로 밟아 죽이고 있기 때문에 사상자가 많이 났다 △18일에는 40명이 죽었고 (광주) 금남로는 피바다가 되었는데 군인들이 여학생들의 속옷까지 찢어버린다 △공수부대들이 대검으로 아들딸을 찔렀다 △공수부대가 몽둥이로 무차별 난타, 눈알이 빠지고 머리가 깨졌다 △한신대학생 하나가 그날 다쳐서 죽었다 △학생들 50여명이 맞아서 피를 흘리며 끌려다니고 있다 △계엄군이 출동해 APC(장갑차)로 사람을 깔아죽였다 △계엄군이 달아나는 시민들에게 대검을 던져 복부에 박혀 중상을 입었다 등이었다.
하지만 훗날 계엄사령부가 유언비어라고 발표한 계엄군의 만행은 여러 증언을 통해 사실로 드러났다.
계엄군의 작전명 ‘화려한 휴가’ 개시 10일 뒤인 5월 27일. ‘오늘 새벽 3시 30분 군병력 진입, 치안유지될 때까지 출입제한’이란 제목으로 계엄군의 광주진입 소식도 실리게 된다. 당시 보도를 통해 ‘폭도 2명이 사망하고 200여명을 체포했다. 시민의 인명피해는 없었다’고 신군부는 발표했다. 다음날인 28일 보도에는 ‘계엄군은 총기로 저항하는 무장폭도 17명이 사망했고 295명을 생포했다. (사망한 이들은) 총기를 버리지 않고 대항한 자들로 전남도청 12명, 전일빌딩 3명 등이다’고 했다. 수많은 희생자가 나왔던 광주민주화운동을 계엄군은 언론통제를 통해 명백하게 축소‧왜곡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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