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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 한 살 <창작극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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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정윤성

전주의 한옥마을 주변인 경원동 동문거리는 한 시절, 시민들의 발길로 풍요로웠다. 헌책방과 작은 인쇄소들이 즐비했던 거리, 그래서 동문거리는 헌책방 거리나 인쇄소 골목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그 활기에 힘입어 이름난 음악감상실이나 다방도 이 거리에서 빛을 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동문거리는 성곽도시인 전주의 도심과 동문을 연결하는 중요한 공간, 조선 시대와 일본 강점기를 거쳐 70년대와 80년대까지만 해도 전주를 대표하는 문화의 거리로 위상을 지켰다. 그러나 신도시 건설로 공간의 기능이 분산되고 옮겨지면서 동문거리는 급격히 침체되기 시작했다.

빈 점포가 늘어나면서 거리의 정체성이 사라지고 있던 시절, 그 한편 낡은 건물 지하에 들어선 소극장이 있다. 오늘까지 건재한 <창작소극장>이다.

80년대, 소극장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전북지역 극단들도 작은 공간을 찾아 소극장을 열었다. 그러나 임대료와 극단 운영의 경제적 부담으로 문을 닫아야 하는 환경은 나아지지 않았다. 동문거리에 다시 문을 연 창작소극장이 연극인들 뿐 아니라 지역 예술인들의 특별한 관심과 기대를 모았던 이유다.

창작소극장은 사실 전북연극의 역사인 <창작극회>의 단원들이 십시일반 자금을 모아 마련한 공간이었다. 이쯤 되면 가난한(?) 연극인들이 열악한 환경을 딛고 스스로 나선 이유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는데 들여다보면 그 이유가 특별하다.

창작극회는 1961년 고 박동화 선생이 창단한 우리 지역의 가장 오래된 극단이다. 이후 어려운 여건에서도 꾸준히 무대를 올리며 연극의 저변을 확장해온 창작극회는 줄곧 전북연극의 성장을 이끌었다. 그러나 위기가 찾아왔다. 1986년 전주시가 극단을 창단하면서 단원들이 대거 관립극단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존립이 위태로워진 창작극회는 한동안 활동을 멈춰야 했다. 극단의 명맥을 이어야 한다는 책임감과 자성으로 고민하던 단원들은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 결실이 창작소극장 개관이었다.

소극장 문을 연 지 30여 년, 창작극회가 세상에 나온 지 61. 코로나의 위기 속에서 지난해 60주년을 맞은 창작극회가 올해 그 의미를 담은 무대로 관객들을 맞았다. 지난주 한국소리문화의전당에서 올린 연극 꿈속에서 꿈을 꾸다가 그 무대다. 80년대부터 창작극회를 지켜왔던 곽병창이 극본을 쓰고 류경호가 연출한 이 작품은 그동안 창작극회가 올렸던 현대사 작품들을 다시 엮은 서사다. 곽병창은 작품 앞에 "끝나지 않을 꿈꾸기의 한 매듭이자 이 자리를 지켜온 선배와 동지들에 대한 오마쥬"라 붙였다.

돌아보니 한 길에서 61, 온전히 역사가 된 극단의 궤적이 경이롭다. 그리고 자랑스럽다./김은정 선임기자

 

 

김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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