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5-11-06 21:30 (Thu)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오피니언 chevron_right 문화마주보기

코로나19의 재유행 그리고 예술인 지원

김문성 국악평론가 긴 장마가 물러갔다. 소멸된 듯 부활하더니 전대미문의 물난리를 가져왔고, 도내 곳곳에 커다란 생채기를 내었다. 장마를 따라하듯 수도권 교회발 코로나19가 맹렬한 기세로 재확산 중이다. 우리 도의 방역에도 비상이 걸렸다. 코로나19의 재확산은 특히 예술인들에게 큰 고통을 주고 있다. 현장에서 만난 예술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코로나19로 아파 죽는 게 아니라, 배고파 죽을 것 같다며 현 상황을 우려했다. 모처럼 공연계가 숨통이 트이나 싶었지만, 코로나19 재유행으로 블랙아웃이 장기화할 거라는 공포감에 예술인들이 동요하고 있다. 한 젊은 북잽이는 북채를 던지고, 구직 시장으로 뛰어들었다. 코로나19는 예술인들에게 뉴노멀 시대에 적응하라는 무거운 과제를 던져줬다. 비대면 온라인 스트리밍을 통한 공연이 단적인 예다. 더하여 공연마인드와 멘탈도 변화할 필요가 있다. 집단성이 중시되는 공연 대신 독주 혹은 소수 멤버 중심의 공연으로 대체하고, 관객 소통형 공연은 자제할 필요가 있다. 올드노멀 시대에는 일청중, 이고수, 삼명창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듯 관객과의 소통을 화룡점정같은 가치로 여겨졌으나 지금은 무대 완성도에 집중하는 공연이 가치를 발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예술인들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야 한다. 코로나 블루는 예술인들을 표적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연 부재 혹은 관객 대신 공연장을 메운 카메라에서 오는 우울함이 상당한데, 이를 극복해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주도하겠다는 긍정적인 멘탈이 그 어느때 보다 절실히 요구된다. 하지만 생계곤란을 겪는 예술인들의 경우 멘탈 훈련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다양한 구제책이 나오고는 있지만, 예술인이 처한 현실과는 괴리가 있다. 공연 지원외에 별도의 생계 지원이 필요함에도 공연 지원 위주여서, 좀처럼 어려운 현실이 나아지지 않는 것이다. 공연 지원의 경우 대부분이 대관료, 음향조명 임차비, 홍보물제작비 등 제작 실비로 소진되며, 정작 예술인들에게 쥐어지는 돈은 몇 푼 되지 않는다. 공연 지원이 생계지원 효과를 함께 내려면 제작 실비 중 예술인 창작 사례비를 최대한 확보해주는 방식이 필요하다. 우선 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장 대관료 면제 사업을 한시적으로 성격을 변화하여 위원회가 주요 공연장을 장기 대관하고, 해당 공연장을 예술인과 단체가 무료로 사용하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또한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가 비대면 우수공연에 한해 영상제작비를 무료 지원하는 것처럼, 비대면으로 전환하는 공연에 대한 영상제작비와 스티리밍 공간 확보를 지자체나 국가가 지원해주는 방식도 있다.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의 예술인 창작지원금사업 수혜대상자 기준과 대상자를 일시적으로 넓히는 것도 방법이다. 현재는 예술인 가구원의 소득인정액이 기준 중위소득 120% 미만이어야 하는데, 한시적으로 이 기준을 완화할 필요가 있다. 또한 지원사업 중 자부담 의무가 전제된 사업은 이를 면제해주며, 서울문화재단처럼 단체 대표나 예술인의 직접 사례비 지급이 가능도록 허용하여야 한다. 이러한 정책에 더하여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도민들의 예술인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격려다. 코로나19에 긴 장마에 당장 배추값 인상을 걱정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국민과 국가가 예술을 통해서 위기를 극복하고 상처를 치유받던 경험들을 상기시킨다면 이들 예술인에 대한 관심이 곧 코로나19를 극복하는 백신이고, 치료제로서 기능할 것이라는 확신은 지나친 허언일까? /김문성 국악평론가

  • 오피니언
  • 기고
  • 2020.08.24 17:07

비대면 시대, 대면예술의 운명

곽병창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연극은 대면예술이다. 좀 더 넓히면 모든 공연예술은 대면예술이다. 대면예술의 분질은 얼굴을 바라보며 의사소통하는 데에 있다. 이 의사소통은 공연자와 관중 사이만이 아니라 공연자와 공연자, 관중과 관중 사이에서도 일어난다. 그러니 대면을 자꾸 말리는 세상에서 대면예술은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 이런 기이한 세상을 예상이라도 한 듯이 몇 해 전부터 영국의 국립극장(NT)은 연극을 전 세계에 영상으로 생중계하는 기획을 선보여 왔다. 궁여지책이던 랜선 공연이 이제 주류가 되려 한다. 연극도, 공연예술도 비대면 예술의 시대로 진입해가는 것일까? 그래도 되는 것일까? 코로나 이전에도 이미 기술의 진보는 예술의 존재와 소통방식에 대한 새로운 숙제를 던져주고 있었다. 이른바 DNA(Data, Network, AI) 생태계의 도래에 맞게 예술분야에서도 이를 수용해야 한다고 등을 떠밀고 있다. 세계적인 공공극단인 RSC(Royal Shakespeare Company)가 디지컬 플랫폼에서의 몰입형 실황공연을 선보이고, 유명한 래퍼가 자신의 아바타를 내세운 콘서트를 성공적으로 치러내는 게 이제 그다지 놀라운 소식이 아니다. 기술의 힘을 맹신하는 이들은 그리스 연극에서의 makina (신들의 하강을 돕던 기계장치, 영어 machine의 어원), 원근법을 무대 위에 실현하던 중세의 극장, 리프트와 조명장치 등을 예로 들면서 역사적으로 연극이야말로 새로운 기술의 실험장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의 연출가, 감독들이 마땅히 새로운 기술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무대어법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박할 수도 그럴 필요도 없는 주장이다. 하지만 마키나도, 사실주의극장이나 리프트 무대도 모두 무대와 객석의 대면을 강화하는 장치였다. 지금 우리는, 기술이 무대로부터 관객을 떠나보내는 사상 초유의 상황을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관객이 그 동안 볼 수 없었던 배우의 뒷모습과 숨구멍을 수십 대의 카메라로 속속들이 살피고 무대 바닥과 천정의 기계장치까지 들여다볼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현장 대면예술의 가치를 대신할 수 있을까? 공연마다 달라지는 관객의 반응, 상대 배역의 컨디션에 따라 미세하게 달라지는 배우의 숨결을 기계가 다 담아내서 전달할 수 있을까? 옆자리에 누가 앉아있는지에 따라 가라앉기도 들뜨기도 하는 객석의 오래된 생명력을 가상현실 헤드셋이 채워줄 수 있을까? 어쩌면 이런 물음에 대한 답도 기술은 금방 찾아낼지 모른다. 하지만 기술의 진보가 아무리 빨라져도 인간이 인간과 함께 교감하고 소통하면서 새로운 각성을 얻고 활력을 얻던 대면 예술의 소중함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제 세계는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그리고 그 격변의 복판에 인류의 가장 오래 된 소통수단이었던 대면예술의 운명이 던져져 있다. 그런 점에서 대면예술의 담당자들이 다시금 되새겨야 할 덕목은 단순하고 자명하다. 본질을 잊지 않는 것, 인간이 또 다른 존재와 소통하고 공존하는 가장 원초적인 수단, 그리고 최후의 수단이 곧 대면예술임을 되새기는 일이다. 그리고, 예술가로서의 상상력과 첨단 기술을 잘 버무려서 더 나은 인간의 공동체를 만들어낼 대면예술의 미래를 궁리해야 한다. 콩기름 냄새와 배우의 땀 냄새가 뒤섞여 풍겨오던 오래된 소극장의 퀴퀴한 향기는 잊을 수 있다. 그럴지라도, 한 공간에서 함께 웃고 울며 궁극의 교감을 나누던, 그 찬란한 순간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곽병창 우석대 교수

  • 오피니언
  • 기고
  • 2020.08.17 16:20

초현실적 예술 공간, 전주시립미술관

김선태 한국전통문화전당 원장 요즘 트렌드로 도시재생 같은 리노베이션, 리모델링 같은 단어가 익숙하고 다양한 공간 재활용의 사례들을 무수히 많이 볼 수 있다. 세계적인 공간재생으로 성공한 프랑스 파리 오클레앙 철도의 종착역을 미술관으로 개조한 인상파 거장들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오르세 미술관과 요새와 왕궁을 거쳐 미술관으로 재탄생한 루브르는 전 세계 관광 필수 코스이다. 2000년대에는 영국 북부도시인 게이츠 헤드 도시 재생 프로그램 일환으로 제분소를 개조하여 만든 발틱 현대 미술관이 재생 미술관의 바이블처럼 추앙받고 있다. 중국 북경 798은 본래 경공업 단지로 점차 폐업하면서 수많은 화랑과 작업실이 밀집되어 중국 현대 미술의 아이콘이자 예술 단지가 되었다. 중국 상해의 모간산루 역시 방직공장이 쇠퇴하면서 순수 예술과 사진, 디자인,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장르까지 예술 중심지라는 명성을 유지하고 블루칩 작가들의 성지가 되었다. 국내에도 폐교, 양곡창고, 찜질방, 공장, 국가시설 등 다양한 장소가 리모델링되어 시민들을 위한 문화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는 사례는 무수히 많다. 청주시 옛 담배공장인 연초제조창을 2년간 재건축한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은 복합 문화공간으로 작품 수장고와 보존과학실을 일반인에게 개방하는 것이 특징이다. 버려진 찜질방을 미술관으로 개조한 화성에 있는 소다미술관은 옛 찜질방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독특한 외관과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충남 당진의 아미미술관은 폐교를 멋지게 활용하여 관광객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서울 마포에는 국가시설인 석유비축기지 5개의 유류보관 탱크를 리모델링하여 공연장, 강의실, 문화비축기지 관련 전시관으로 개조하고 기존 탱크들에서 나온 자재를 재활용해 커뮤니티 센터로 사용하고 있다. 전북의 경우, 임실 오궁리 미술촌은 1995년 전북지역에서 활동하는 중견작가들이 폐교된 오궁초등학교를 교육청으로부터 임대 받아 전국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은 미술촌으로 꾸민 곳이다. 전주 팔복동 공업단지에 팔복예술공장은 1979년에 카세트테이프를 제작해 해외까지 수출하였던 쏘렉스 공장이 25년 동안 방치되어 있었던 곳을 리모델링하여 미술관과 작가 레지던스 공간, 야호 예술놀이터로 변신하여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전북 순창의 옥천골미술관은 양곡창고를 미술관으로 리모델링하여 기획전시와 어린이 미술교실, 청소년 미술아카데미, 미술전문가 초청 특강이 수시로 이뤄져 군민들의 미술문화 갈증을 해소해주는 단비와 같은 역할을 한다. 전북완주의 삼례문화예술촌은 일제가 수탈한 쌀을 보관했던 양곡창고로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었으나 지금은 그 상처를 치유하듯이 예술복합공간으로 리모델링되어 전국에서 관광객들이 끊임없이 방문하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완주군 소양면 송광사 가는 길에 위치한 산속 등대는 본래 제지공장이 문 닫고 방치돼 있었던 곳을 민간주도하에 예술공간으로 재생시킨 성공적인 사례이다. 앞으로 3년 후에 개관을 목표로, 현재 전주종합경기장 안에 있는 야구장을 리노베이션 하여 미술관으로 재탄생시키는 사업 용역발주와 포럼이 한창 진행 중이다. 야구장과 미술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대상으로 초현실주의 작가 달리의 작품 기법인 데페이즈망(전치, 치환)을 연상케 한다. 과연 그 두 개의 조합이 어떻게 미술관으로 재탄생 될지 많은 상상력과 호기심을 유발한다. 오래 된 거울을 닦고 문질러서 묵은 때를 걷어 내 환하게 비치게 하는 일처럼 도시재생은 낡고 쓸모없는 공간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보듬는 것이다. 이처럼 시공을 초월한 초현실적인 아우라가 물씬 풍기는 전주시립미술관을 기대해본다. /김선태 한국전통문화전당 원장

  • 오피니언
  • 기고
  • 2020.08.10 16:33

국민 여론의 통합은 교집합의 확대로부터

소재호 한국예총 전북연합회장 회화 작품을 평하면서 대칭과 조화라든지, 변화와 조화라든지 하는 언설을 가끔 들었다. 대립과 대조와 대칭은 한 개념의 상관속으로 묶이는 어휘들이지만 큰 카타고리 안에서 전체 속 N분의 일로 유기적 기능을 하는 바, 조화에 응분한다는 이론이다. 그 각각의 소재들(질료들)은 상호간 철저히 조화하여 한타랑의 큰 그림으로 정채精 彩를 빚어서 아름다움의 궁극에 이른다고 말한다. 미술에서 보색 관계는 이를 극명하게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는 현상이다. 한편 완벽한 대칭보다 아주 미소한 비대칭이 미적 형상화에 더욱 접근한다고도 말해진다. 일컬어 황금비율이라는 화두가 이에 준하는 논거이다. 대칭이 조화로 연계해 나감에 있어서 변증법적 이론이나 양자 절충론으로 상황 진행을 꾀한다면 진정한 조화에 해당한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양자를 넘나드는 통섭統攝,通涉의 상황이 차라리 바람직한 진화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몇몇 지인들끼리 모여 대화하는 중에 정치 이야기를 화제로 올릴 경우,당신은 무슨 신문을 구독하느냐 고 예비 질문을 먼저 던진다. 가령 J신문을 구독한다거나, H신문을 구독한다하고 하며 성향이 나뉘면 바로 이는 야당 지지자냐 여당 지지자냐로 대번에 정치 성향이 구분 되고 만다. 그때에 양자들은 정치 이야기는 바로 건너 뛰고 다른 공동 화제를 찾아 소위 교집합의 상호 교감의 단계로 넘어간다. 종교 이야기도 이렇듯이 성향 간파 후에 다른 대화 단계로 접속한다. 이러저러한 경우들을 목도하며 우리 국민들의 슬기로움과 문화적 성숙도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수많은 종류의 종교들이 한반도에 범람하였어도 종교간 대립이나 분쟁이 없는 바, 우리 민족의 수월성이 경이롭기까지 한다 . 이러한 화법에 입각하여 서로 공감 공명하는 담론만을 골라 이를 중심에 두고 상호 정리를 도탑게 쌓아가는 우리 자신들을 대견스럽게 생각해도 좋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교집합이란 상호간 공통의 성질, 동질의 속성 등이 함꼐 맞물리는 분량의 집합을 일컫는다. 한편 한쪽의 이질성의 사물로 다른쪽 이질성에 등식을 지울 때, 이에 교차 칭하면 이를 상징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어떤 사람을 일컬어 짐승이라 칭했다면 짐승은 그 사람에 대한 상징어이다. 상징성은 진화한다. 그러니까 교집합의 차츰 확대를 의미한다. 세상의 모든 일들은, 아니 자연의 현상들은 상호 물들거나 상호 번짐으로 중화에 나아간다. 이는 융합이라거나 교화라고 이를 수 있을 것이다. 푸른 색과 노란 색이 융합하면 초록이 생겨난다. 초록은 생명의 빛깔이다. 두 색은 서로 물들거나 번졌을 것이다. 조화하면 상생한다. 또는 높은 가치로 승화한다. 우리 민족에게 가장 큰 대립적 상황은 남북 대치이다. 그런데 개성공단 마련은 두 이질적 집단의 맞물리는 지점, 곧 공동 이익 창출의 교집합인 셈이다. 멀리 평양과 서울의 간격이 넓다하여도 한 수돗물을 마시던 개성은 민족 공동체를 찾아나서는 교집합이며 이 확대로 결굴 붉은 색과 푸른 색이 만나 예쁜 보라색을 만들고야 마는 것이 아니겠는가. 멀리 신라시대 최치원 선생은 유뷸선을 통합하자고 주장을 편 시절이 있었다. 조선조에 서산대사도 유.불.선의 삼교 통합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멀고 먼 종교도 그와같이 통합의 기운을 솟게 한 선각자가 있었던 바, 현대의 이념 따위가 엉뚱하게도 민족 통합을 막는단 말인가. 개성공단을 열이고 백이고 늘려가면 언어가 먼저,다음 사상이 뒤쫒아 서로를 교화할 것이다. 불근 색으로만 고집하고 집착하는 무리가 있다면 그들은 영원히 보색을 찾지 못할 것이다. 홀로 독존하기란 우주적 이법이 아니다. 서로 번지며 서로 물들자.그리하여 신성하고 신비한 생명의 빛을 창조하자. /소재호 한국예총 전북연합회장

  • 오피니언
  • 기고
  • 2020.08.03 16:03

전북 판소리, 더 높은 비상을 꿈꾸려면

김문성 국악평론가 부산의 한 방송사 간부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판소리 명창 이화중선(李花中仙. 1898~1944)에 대해 인터뷰하고 싶다고 했다. 이화중선 특집 방송을 준비중이라고 했다. 인터뷰 내내 의문이 들었다. 왜 부산에서? 그것도 춤이 아니라 판소리를? 자신을 이화중선 매니아로 소개한 간부는 전북이 부럽다고 했다. 전북을 한 번 씩 다녀갈 때면 판소리 싹을 틔우는 지난한 작업에 좋은 기를 얻어가는 기분이라고 했다. 전북하면 판소리를 으레 연상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전북은 타지역과 달리 민관 모두 판소리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유별나다. 그래서인지 특정 유파가 득세를 보이는 서울이나 광주, 전남, 영남 지역과 달리 전북에서는 정정열제, 만정제, 동초제에 보성소리와 동편소리까지 다양한 판소리가 공존하며 성장하고 있다. 판소리 지방문화재 보유자 수도 타지역을 압도한다. 하지만 내실면에서 빛좋은 개살구라는 비아냥성 평가가 의외로 많았다. 적어도 올해 초까지는 말이다. 그 근거로 몇몇 전문가들은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보유자 즉 인간문화재 숫자를 들었다. 초대 인간문화재 김소희, 김여란 명창 이후 강도근, 오정숙 명창을 제외하면 전남, 광주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특히 근 십 여 년 동안 전북 출신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안숙선 명창조차도 판소리가 아닌 가야금병창 인간문화재로 되어 있으니, 그러한 비아냥에 이렇다 할 반론을 내기가 어려웠다. 다행스럽게도 최근 문화재청이 남원 출신 이난초 명창과 전주에서 뿌리내린 김영자 명창을 각각 흥보가와 심청가 인간문화재로 인정하면서 이러한 비판은 수그러들게 되었다. 순차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수궁가, 적벽가에서 추가 보유자가 나올 것이라는 희망도 갖게 된다. 물론 판소리를 단순히 인간문화재 숫자의 많고 적음으로 평가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하다. 소리꾼이 맘 편하게 소리할 수 있는 환경의 조성, 판소리 향유 층의 존재, 이것이 판소리를 평가하고 이해하는 바로미터여야 한다. 또한 최근 미스트롯 출신 송가인을 통해 증명되었듯, 스타성을 가진 인재의 배출이 중요하다. 더하여 판소리 역사를 제대로 알리는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관리도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타지역을 압도하는 공연 인프라, 공연장을 꽉꽉 메우며 추임새를 맞추는 열성적인 팬들 그리고 관의 지속적인 후원은 전북 지역이 왜 판소리에서 강세를 보이는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척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실력있는 인재 배출을 위한 환경은 매우 우려스러운 수준이다. 한때 세 개의 국악과를 보유하였던 전북지역 대학 중 현재는 전북대만이 국악과를 운영하고 있다. 예고 출신 우수한 국악 인재들이 타지역으로 유출되고 있는 것이다. 판소리 역사를 알리는 일은 어떠한가? 이화중선은 미안한 말이지만 송가인과는 급이 다른 대스타였다. 그래서 전설이라는 평가가 붙는다. 이화중선이 있었기에 김소희-안숙선으로 이어지는 전북 판소리의 중흥이 가능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화중선의 삶에는 가정법과 추측이 난무하다. 이화중선이 살다간 오수 구시장 내에는 그 흔한 표지석 하나 없다. 전북이 명실상부한 판소리 성지가 되기 위해서는, 제2, 제3의 이화중선, 이난초, 김영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다시 신발끈을 동여맨다는 심정으로 배출부터 관리까지 시스템 전반을 재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김문성 평론가는 이북5도 문화재위원, 충남도 문화재전문위원, 예경 평가위원 등을 지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20.07.27 16:24

침묵의 무게

곽병창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모름지기 역사를 움직여온 존재들은 침묵하는 다수였다. 혁명가도 정치가도 그들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기댈 곳은 침묵하는 이들의 선택이었다. 그들은 한때 백성이었고 또 어느 때는 민중(people)이었으며, 언제부터인가는 대중(mass)이란 이름으로 불린다. 이들은 이른바 정치가, 혁명가들이 아무리 부르짖어도 쉽게 응답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어느 순간이 오면 오랜 침묵을 깨고 저자에 나서서 세상을 뒤엎는다.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들은 대체로 선거를 통해서 세상을 응징하거나 보상한다. 하지만 이들의 선택은 종종 기대와 예상을 비껴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침묵하는 다수는 무섭다. 미디어가 우리 모두의 일상을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다. 이제는 예전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온갖 수단들을 동원해서 중구난방 외치고 주장한다. 그렇다. 이제 저 많은 입들을 누구도 막을 길이 없다. 그리고 그게 민주주의의 위대한 열매이기도 하다. 누구나 말할 권리가 있고 누구나 주장할 수 있는 세상은 참으로 위대하다. 이 얼마나 오랜 고통의 열매인가? 그래서 사람들은 이제 침묵하는 다수들의 존재를 종종 잊는다. 하지만 조금만 더 찬찬히 들여다보면 여전히 이 세상엔 침묵하는 이들이 훨씬 많다. 친일파도 독립군도 아니었던 이들, 좌도 우도 아니었던 이들, 한 번도 친*이 되어본 적이 없는 이들, 이들이 특징은 기다림에 익숙하다는 것이다. 자의든 타의든 이들은 순간순간의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식민지와 전쟁, 독재정권의 칼날을 피하는 길이 그것뿐이라 생각해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이들의 침묵을 본능적 보신에만 급급한 비겁한 선택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적어도 이들은 나라를 팔아먹고도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리는 친일파는 척결되어야 하고 나라를 위해 희생한 독립운동가는 예우 받아야 하며, 어떤 명분으로도 전쟁을 일으키고 양민을 학살하는 자들은 나쁜 놈들이라고 생각한다. 지위나 권세를 이용하여 약자를 괴롭히는 일에는 함께 분노하고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그 돈의 논리로 희생되는 무수한 사람들을 연민하고 함께 아파할 줄 아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쉽게 외치지 않는다. 쉽게 판단하지 않고 섣불리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의 침묵이 세상을 외면하거나 방기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숱하게 목도해왔다. 거의 우리 땅에서만 가능했던 여러 차례의 무혈 혁명, 때로 거리를 메우며 흘러넘치던 거대한 환희, 애도, 분노의 순간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선거를 통해 조용히 그러나 묵직하게 드러낸 저들의 외침을 기억한다. 침묵하는 다수의 힘은 그런 것이다. 어떤 정치가의 허망한 자살을 두고 칼날 같은 말들이 쏟아진다. 하지만 세상엔 여전히 침묵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침묵이 방조이거나 무관심으로 보이는가? 그의 삶에 경의를 보내면서도 공공의 장례에는 반대한 이들, 잘못 된 문화, 약자를 보호하지 못 하는 구조를 혁신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정치적 언사로 본질이 왜곡되는 것을 우려하는 이들도 많다. 이들의 침묵까지를 싸잡아서 또 다른 가해라며 몰아붙이는 이의 표정에서 깊은 절망을 느낀다. 진영을 넘나들며 세상 모든 사안의 판관을 자처하는 철지난 논객은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설익은 생각, 절제되지 않는 논리로 세상을 현혹할 수 있다고 여기지 말라. 그대들 말의 날(刃)이 점점 날카로워질수록 세상의 침묵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 그리고 침묵은 그리 만만한 게 아니다. △곽병창 교수는 극단 창작극회창작소극장 대표, 전북도립국악원 공연기획실장, 전주전통문화센터 관장, 전주세계소리축제 총감독을 지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20.07.20 16:39

아르누보 가치 실현, 전주공예품전시관

김선태 한국전통문화전당 원장 서양미술사에서 19세기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프랑스에서 출발하여 전 유럽과 미국까지 영향을 끼친 아르누보(Art nouveau)양식이 적용된 공예 운동을 빼놓을 수가 없다. 아르누보는 1900년에 열린 만국박람회를 통해 시대를 대표하는 공예와 디자인 양식으로 회화 영역에까지 광범위하다. 아르누보 운동은 자유롭고 아름다운 표현으로 수공예의 가치를 내세워 순수미술과 더불어 서양인들의 생활양식에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접목한 디자인을 유행시켰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이치가 그렇듯이 아르누보 공예운동도 공과 실 두 가지 양면성을 노출하며 아르데코인 모더니즘 양식으로 넘어간다. 산업혁명의 대량생산에 밀려 장인의 솜씨에 기초한 전통적 가내공업 수준의 생산 방식보다는 복제품을 대량으로 생산하여 싸구려 공예품이 판을 쳤다. 이는 자본의 시대에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가성비를 최고로 여겼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르누보 운동의 가치인 장인의 혼이 담긴 공예품과 대량생산을 통한 이윤, 미적 가치와 실용성을 접목한 공통분모를 찾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지만, 그 실천과 해답을 전주공예품전시관에서 찾고자 한다. 전주공예품전시관은 전통공예 장인의 숨결이 녹아있는 솜씨와 현대적 디자인이 잘 접목된 오늘날의 라이프스타일 가치를 담아내어 한국공예 산업의 기반 구축을 목표로 하는 곳이다. 전주시가 수공예 거점도시답게 지역 공예인들의 처우개선에 주력하고 있는 모습을 다양하게 찾아볼 수 있다. 먼저 현장의 목소리를 공예정책에 반영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간담회를 통해 공예인들과 소통하고 단체장인 시장이 직접 나서 공예인들을 챙기는 행보를 보여주어 전주공예인들의 자긍심과 공예산업 선순환구조를 구축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 또한, 전주공예품전시관의 판매수익 배분율을 보면 타지역의 경우 60%인데 반해 전주 기반 공예품에는 77%로 책정돼 타지역 공예인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판매실적 역시 전주 공예품이 상위에 랭크되어 수공예 중심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가고 있다. 다만 관주도의 정책이 물꼬를 트고 있는 가운데 전주 공예인들의 적극적인 상품 개발이 더해진다면, 그야말로 전주는 수공예 거점 도시로서 입지를 확고히 할 것이다. 이미 전주 수공예 상품이 세계적인 장인의 도시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그 가치와 우수성을 뽐내며 해외 수출의 가능성을 열어가고 있으며, 일본 수공예 도시인 가나자와와 더불어 세계적인 수공예 도시로 정평이 나있다. 올해 말까지 전주 공예인들에 대한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우수한 전주 공예인들을 발굴하고 육성하기 위한 전수조사를 진행하여 상품디자인, 경영개선 ,마케팅 등 맞춤형 서비스를 지원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아르누보 공예운동은 전통적 공예에서 현대적 산업디자인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현상이었는지도 모른다. 전주공예품전시관은 아르누보 운동에서 중요시했던 전통공예 장인의 손의 회복과 쓰임새의 미학을 준수하면서 실용과 순수, 전통과 현대, 소량과 대량생산을 동시에 아우르는 한국공예의 산실이 되고자 한다. 그야말로 전주공예품전시관이 밀알이 되어 전주 공예인들의 공예품이 수공예 거점도시의 주역이 될 수 있도록 그 어느 때보다도 역할이 기대된다. △김선태 원장은 홍익대 대학원에서 미술사학을 전공했으며 전북관광문화재단 자문위원, 전북문화재 전문위원, 예원예술대 미술학부 교수 등을 지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20.07.13 16:55

명사십리, 그 모래밭을 걷자

소재호 한국예총 전북연합회장 명사십리란 곱고 부드러운 모래가 밟을 때마다 사각사각 우는 소리를 내는 모래톱이 십리에 뻗쳐 있음을 이르는 말이다. 명사는 이미 그 스스로가 청정지역임을 전제한다. 맑고 깨끗한 것끼리 서로 부대껴 아름다운 소리가 유로(由路)됨을 이르는 어휘이다. 모래란 단결과 응집의 반대편 개념을 형상화하는 단어이다. 개별적, 독단적, 단일적, 단절적 개체개체가 불화의 이미지로, 뭍과 물의 경계지점에 모래톱으로 엎드린다. 작은 하나들이 모여 여럿이 함께 있다. 어느 민족이나 사회 단체의 단합되지 못하는 형국을 모래같다고 일러 왔다. 그런데 필자는 그 모래에 대한 역설을 쫒고자 한다. 정갈하고 깨끗하고 햇볕에 눈부시게 빛난 연후에라야만, 가만가만 걷는 연인끼리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만 사각거리는 소리가 난다. 그러니까 모래가 우는 것이다. 그 소리가 음침한가? 그 소리가 불쾌한 탁음인가? 아니다. 수평선으로 달려나가는 파도 소리와 연인끼리 동반하여 걷는 소리가 함께 조화롭고 아름답다. 코로나19의 음험한 시대가 역설적으로 우리 문명한 인류를 원시의 모래밭으로 퇴화(?)시키고 있다는 묘한 아이러니를 느낀다. 폐칩과 폐쇠와 단절과 분산과 분쇄와 이룩된 것들의 와해를 코로나19는 획책한다. 일찌기 있었던 것, 거대하고 웅장했던 것, 본질이 존재에 선행하여 효용성의 부가가치를 최고로 누렸던 것, 이런 모든 것을 뒤로 돌린다. 모래란 애초에 거대한 바위산이 낱낱의 작은 알갱이로 쪼개져서 계곡물에 휩쓸려 나와 모래밭에 누운 게 아닌가? 모래는 존재에서 비존재로 나아가는 중간 매체의 잠시 존재의 형상이 아닌가? 코로나가, 모래를 할퀴던 저 풍상우로처럼, 시대의 모든 상황을 바꾸는 강력한 변인으로 등장하였으니 어찌할꼬? 지금껏 있어 왔던 인류 문명을 지난 적 원시로 회귀시키는 이 엄중한 명령(?)을 이찌할꼬?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우리의 신념대로, 우리의 의도대로 지켜나가고 새로운 모랄을 세울 때까지 개별자끼리 연대해야 한다. 신성하고 생동하는 생명끼리 연대해야 한다. 모래는 적당한 시기 연후에 모래성을 이룬다. 수십층의 고층 빌딩으로 선다. 그래서 우리는 명사의 모래 위로 우리의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칙칙하던 모래톱을 새로운 물결로 휘쓴 뒤 명사를 펼쳐야 한다. 전화(轉化)로 위복(爲福)을 삼아야 한다. 인습이니 관습이니 다 바꾸자. 제도는 민중의 것으로 채우자. 낡은 문명은 다 뜯어 다르게 고치자. 단체, 사회의 개념을 개인주의 총화로 대체시키자. 질서도 윤리 도덕도 생태학적 생명공학적 양태로 환귀시키자. 모든 가치관도 공리주의도 변모시키자. 인간 위에 군림하며 존재하는 모든 위력 말하자면 권력이나 무형의 힘도 분쇄시키자. 코로나가 지금 하고 있는 방식처럼. 모래는 모래끼리 연대하고 연쇄해야만 모래 울음을 낸다. 십리가 명사가 되는 것이다. 사각거리며 생명하는 소리를 연출하자. 원융하는 것이다. 돌고 돌아 융생하는 것이다. 곤충 한 마리와 풀 한 포기와 인간 한 마리가 똑같이 등가적으로 생명의 가치가 셈이 되어야 한다. 제5빙하기가 오기 전에 새로운 생명운동을 일으키자. 과학은 천천히 다음으로 뒤따르라 하자. 이러저러한 화두가 코로나19의 웅변이자 궤변이 아닌가? 인류여! 가만히 먼동이 트는 아침에 명사십리를 걸어라. △소재호 회장은 전주 완산고 교장,전북문협회장,석정문학관장, 표현문학회장을 역임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20.07.06 16:12

이름을 짓고, 다시 고친다는 것

신정일 문화사학자문화재청 문화재 위원 강원도 철원에서 군 생활을 하던 때의 일이다. 우리 분대에 분대장으로 일반하사가 전입을 왔다. 그날 점호 시간에 포대장이 순시를 하다가 물었다. 이름이 뭐야? 예 하사 노재산입니다. 재산이 노라고? 포대장의 이 말에 사람들은 다 웃었고 그 하사는 군대 생활 내내 재산이 노라고 불렸다. 성과 이름이 연결되어 일어난 현상인데, 그만큼 이름이 삶에서 중요하다는 것으로 옛 사람들의 글에도 이름에 얽힌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이국필이 어느 날 퇴계 이황선생에게 물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일찍이 국필(國弼)이란 제 이름이 천하기도 하고 뜻도 없는 이름이라 하시면서 늘 고치고자 하였는데, 이제 아버지의 그 뜻을 따라서 아버지의 영전靈前에 고하고 고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또 국필은 본래부터 성질이 경박하여 깊고 무거운 구석이 없으니, 청하건대 그윽한 뜻을 이름자 가운데 넣으면 고명사의(顧名思義이름을 보고 뜻을 생각하는)의 보람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국필의 말을 들은 퇴계 선생이 말했다. 비록 아버지께서 고치고자 하는 뜻은 있었다고 하지만 이미 고치지 않았으니, 지금도 고치지 않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물며 현재의 정한 이름이 뜻이 없다거나 천하지 않은 데에야 말할 수 있는가. 또 그대가 성질이 경박해서 깊고 무거운 곳이 없는 결점을 이미 알고 있었다면, 마땅히 마음을 두고 힘을 써서 허물을 고쳐 착한 데로 옮겨가면 족한데, 어찌 이름을 고친 다음에야 그 결점이 고쳐질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가령 이름을 고치고도 그 허물을 고치지 못한다면, 또 그 허물을 이름이 잘못된데 돌리어, 또 이름을 고쳐서 허물을 고치려고 들 것인가. 이게 또한 그대의 결점이자 병통이다. 퇴계의 제자인 이덕홍이 젊었을 때의 일이다. 퇴계 선생이 이덕홍을 부른 뒤 물었다. 너는 너의 이름의 뜻을 알고 있느냐? 이덕홍이 말했다. 저는 모릅니다. 퇴계가 말했다. 덕(德)자는 행(行)을 따르고 곧음(直)을 따르고 마음(心)을 따를 것이니, 곧 곧은 마음을 행 한다는 말이다. 옛 사람은 이름을 지을 때에, 반드시 그 사람에게 관계를 주는 것이다. 너도 이름을 본받아라. 오래 전 장수 팔공산에 있는 어느 절에 갔을 때의 일이다. 새벽 예불을 마치고 아침 공양을 한 뒤에 주지 스님이 차를 따르며 한자로 내 이름을 물었다. 매울신(辛) 바를정(正) 한일(一)이라고 써주자 한참 있다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처사님 그 이름 짊어지고 사느라 힘들었겠습니다. 주지스님의 말을 듣고 새삼스럽게 내 이름을 뒤늦게야 파자해 보았다. 그런데 내 이름에는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돈이나 명예에 관한 글자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 이름을 열여섯 나이에 내가 스스로 바꾸었기에 누구를 탓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다음에야 내가 많은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내려 놓았고, 그때부터 입에 풀칠은 하게 되었다. 버림으로써 얻는다. 그 말은 만고의 진리다. 이름에 관해 논한 퇴계 선생의 말은 지극히 원론적인 말이고, 이름 때문에 피해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세상에 너무나 많다, 그래서 범죄의 소지가 있다고 개명을 안 해 주던 정부에서도 꼭 문제가 되지 않는 사람의 이름이라면 그 원인을 따지지 않고 개명을 해주는 시대가 이 시대이다. 자기에게 마땅치 않다고 여기는 이름만 바꾸고서도 새로운 삶을 사는 것처럼 기분이 새롭고 여태까지 살았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것처럼 매 순간이 새로운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이름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신정일 문화사학자문화재청 문화재위원

  • 오피니언
  • 기고
  • 2020.06.29 17:23

‘위안부’ 운동의 미래

박문칠 다큐멘터리 '보드랍게' 감독우석대 교수 지난해부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삶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다큐멘터리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내가 그들의 삶을 피상적으로만 이해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사실 위안부 피해자라는 이름으로 묶기에는 그들의 삶의 궤적과 개성은 너무나 다르고 다양하다. 하나로 묶을 수 없는 삶들을 우리는 피해자로 불러내고 있다. 그때부터 한 분 한 분의 사연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 경산 출신의 김순악이라는 분의 이야기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유곽과 기지촌 색시장사를 전전하며 힘겨운 삶을 이어왔다. 전쟁 당시의 삶도 끔찍했지만, 귀국한 이후의 삶이야말로 또 다른 전쟁이었다. 이들의 해방 이후 삶을 들여다볼수록 우리 사회가 이들의 중장년 시절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순수한 소녀 시절에 대한 재현도 많고, 인권운동가로 거듭난 이후의 삶에 대한 찬가도 많지만 이들이 살아남기 위해 악전고투해야 했던 30~50대 시절에 대해서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 자연스럽게 이 시절의 이야기. 그러니까 편견과 차별에 부딪히며 침묵을 강요당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포함해 생애 전반을 그려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다큐멘터리로 그 삶을 재현하는 건 간단치 않았다. 일단, 2010년에 이미 돌아가셨기 때문에 만나서 촬영을 할 수가 없었다. 현존하지 않는 주인공을 찍는 것. 이 과제는 어쩌면 우리 모두 앞에 놓여진 숙제이다. 곧 있으면 당사자들 모두 돌아가시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도 조만간 당사자 없는 운동을 어떻게 해나갈 것인지. 그녀들의 이야기를 먼 옛날의 안타까운 일로 유폐시키지 않고, 어떻게 지금 우리의 현재와 마주치게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리고 영화 역시 이들의 삶을 스크린 위에 어떻게 보여줘야 하는지 고민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직접 촬영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김순악 선생님을 만날 수 있다고 해서 그녀의 삶을 온전히 전할 수 있을까? 그녀의 삶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김순악 선생님이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이 있다. 내 속은 아무도 모른다카이. 어떠한 말이나 이미지로도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 존재한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계셨던 것 같다. 그래서 이번 작품은 온전한 재현이나 온전한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걸 인정한 가운데서 출발해야만 했다. 그리고 자로 잰 듯한 정확한 재현보다는 다양한 재현에 방점을 찍기로 했다. 생전에 김순악을 만나본 활동가, 만난 적은 없지만 그녀의 증언집을 읽어본 사람. 저마다 서로 다른 모습의 김순악을 가슴에 품고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를 보는 관객 역시도 저마다의 김순악을 머릿속으로 그려보기를 원했다. 그러다보면 궁극적으로는 우리 곁에 없는 그분과 대화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소망이 있었다. 우리 사회는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의 삶에 대해 아직 모르는 게 많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피해 생존자, 다양한 과거와의 대화는 지속되어야 한다. 과거의 고통을 마주하며 오늘의 우리 삶이 달라질 수 있고, 달라져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영화와 예술은 이런 대화를 가능케 하는 좋은 매개체이다. 당사자 없는 운동을 준비해야 하는 지금, 주인공 없는 영화를 관람하며 이 대화에 동참해보면 어떨까? /박문칠 다큐멘터리 '보드랍게' 감독우석대 교수

  • 오피니언
  • 기고
  • 2020.06.22 16:39

선비정신의 꽃 ‘사군자’

이흥재 정읍시립미술관 명예관장 이 세상의 꽃과 나무들은 각자의 특성이 있다. 제 때에 피고 지며 자기 몫을 다한다. 그 가운데서 옛사람들은 특히 매화난국화대나무, 네 가지 식물을 사군자(四君子)라 부르며 애호하였다. 군자(君子)란, 유교 문화에서 지향하는 이상적 덕목을 갖춘 인간상으로 곧, 선비정신을 간직한 고결한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조선시대는 성리학의 유토피아를 꿈꾸던 때였다. 성리학의 이상을 실현해 낼 수 있는 지성을 갖춘 선비를 군자라 했고 이 군자를 상징하는 매난국죽을 사군자라 했다. 사군자는 각 식물에 군자라는 최고의 수식어를 붙여 줌으로써 최고의 가치를 지닌 상징어가 되었다. 옛사람들은 자연 속에서 삶의 이치를 배우며 살았다. 매화가 피는 것을 보고 봄이 오는 것을 알았고, 국화 향이 짙어지면 가을이 깊어 감을 느꼈다. 눈 속에서 꽃을 피우는 매화를 찾아 나섰고, 가냘파 보이지만 그윽한 향기를 뿜어내는 난을 사랑하였다. 꽃들이 지고 난 뒤 서리 속에 피는 국화를 찬양했고, 사시사철 푸르고 곧은 대나무를 선비의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 모진 계절의 변화에도 의연히 제 본분을 지키는 이들 식물에서 군자다운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매화는 겨울 혹한 속에서 망울을 맺고 있다가, 겨울이 가고 새봄이 왔다는 것을 알려주듯 이른 봄에 꽃을 피운다. 추위를 이겨내고 피어나는 매화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자신을 지키는 군자와 비유된다.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는 옛사람들이 봄을 기다리던 그림이다. 매화를 81송이 그려놓고 동지 다음날부터 한 송이씩 붉은색으로 칠해나간다. 그러면 99=81일 되는 날 즈음 봄이 온다고 하는데 대개 3월 10일 전후가 되고, 이때 매화가 피면서 봄이 오는 것이다. 난(蘭)은 잎이 늘 푸르고 곧으며 거름을 탐하지 않아 바위나 돌, 모래 틈에서 척박하게 살아간다. 그런데도 꽃이 피면 그윽한 향이 온 산을 진동시킨다. 그래서 난은 일찍부터 자기절제로 세상을 이롭게 하는 군자로 지칭해 왔다. 가을이면 산야에 핀 국화만큼 수수하지만 멋있는 꽃도 없을 것이다. 국화는 매화나 대나무처럼 단단한 줄기가 있어 강인함을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난처럼 빼어난 자태를 뽐내는 잎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선비들이 국화를 좋아한 것은, 소박한 모습이지만 가을의 서리를 이겨내는 의연함과 은은한 향취 때문이다. 모든 꽃이 지고 없는 계절에 핀 국화는 가히 가을을 대표할 만한 꽃이다. 옛 문인들은 국화를 인내와 지조의 상징으로 시문과 서화는 물론 장식미술의 소재로서도 국화를 사랑했다. 대(竹)는 속이 비고 껍질이 단단해 허심(虛心)과 불굴(不屈)을 자랑하니 일찍부터 군자의 표상으로 꼽아왔다. 당연히 경사시문(經史詩文)에 정통한 문사들이 여기(餘技)로 그리는 그림의 주제가 되고 매화, 국화, 난과 함께 사군자로 일컬어 왔다. 한낱 나무나 풀에 불과한 사군자에 대한 옛사람들의 지극한 사랑이 요즘 현대인들에게는 다소 낯설 것이다. 서구문화에 지나치게 편중된 나머지 우리의 전통미술 문화에 대한 단절에서 오는 일종의 문화적 이질감 때문이다. 인문학의 집약체라 할 수 있는 사군자화(四君子畵)는 과연 요즘 사회에 유효한 것일까? 사람 사는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본질은 똑같다고 한다. 모든 가치가 돈으로 평가되는 요즘 사회에서 사군자화가 상징하는 인문학적 가치는 밤하늘의 샛별처럼 더욱 빛날 것이다. /이흥재 정읍시립미술관 명예관장

  • 오피니언
  • 기고
  • 2020.06.15 16:43

남북국시대

이재규 우석대 교수 유월은 망종과 하지가 있어 농사가 기본이던 시절에는 보리를 마저 베고 모내기를 준비하는, 일년 중 제일 바쁜 시기였다. 비가 끊임없이 내려야 할 절기에 오랜 가뭄이 지속되면 기우제를 지내며 하늘을 올려다보느라 목이 꺾이던 사람이 많았다. 그러던 것이 현충일과 625가 끼면서 유월은 호국의 달이 되었고 사람들의 시선은 땅 위의 것들에 오래 붙들렸다. 남쪽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나라를 지키는 것은 70년 전의 침입자 원수 북을 섬멸하고 전 국토에서 실질적 주권을 행사하는 일이 된다. 북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미제를 물리쳤으나 미완에 그친 조국해방전쟁을 완수하는 것이 당면한 임무의 첫 순위가 되었다. 전쟁의 기억은 남과 북 양쪽에서 제 방식으로 해석되며 인민과 국민을 일사분란 총화단결의 궐기장으로 내몰았다. 잿더미 위에서 각자의 나라를 건설하는 중에도 남북은 끊임없이 사이렌을 울리며 이 땅은 전쟁 중임을 잊지 않게 했다. 초반에는 북이 기세를 올렸다. 해방과 신생 독립의 기운이 넘쳐나던 세계대전 직후의 분위기에 힘입어 북의 집권세력은 항일투쟁의 정통성을 내세우며 집단주의의 한 길을 개척해갔고 동서냉전과 제3세계의 약진으로 주변환경도 나쁘지 않았다. 남북민간교류의 일원이 되어 북을 수십 차례 방문하게 되었을 때 현장에서 확인한 북측의 살림집들은 대개 60~70년대에 건설한 것들이었다. 남쪽에서는 쉬쉬했지만 경제규모나 생활수준에서 북이 한동안 남쪽을 앞선 시기였던 이때, 북은 당연히 남북관계나 통일론에서도 공세적이었다. 그러던 것이 80년대 중후반 이후 확연하게 전세가 역전되었다. 소련과 동구권 사회주의 진영의 몰락에 북한경제는 배후지를 잃었고 재해가 겹치면서 난관에 빠졌다. 남쪽 체제는 산업화와 민주화가 맞물리면서 내부의 긴장과 격돌도 끊이지 않았지만 동아시아에서 주목할만한 성장을 이루어냈다. 친일파의 득세와 군사독재정권의 지속이라는 정통성 문제도 수십 년 민주화운동의 결과인 김대중 정부의 등장으로 해소되었다. 수구세력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을 지금까지도 붉게 덧칠하려고 들지만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제대로 세우고 남쪽의 주도성을 확보한 이는 확실하게 김대중이었다. 제2의 건국이라 자부할만했다. 남북관계를 다르게 접근한 그의 햇볕정책은 노무현 정부 10.4선언으로 확대되었는데 정상회담을 마치고 돌아온 노무현 대통령은 포용정책이라는 말도 남쪽의 처지에서 일방적으로 규정하는 말이므로 북의 입장을 고려하여 신중하게 써야겠다. 매우 중요한 발언을 남겼다. 남북관계가 한 쪽이 우세하다고 해서 상대를 제압하거나 멸시하는 우위 확보의 게임이 아니라는 것을 천명하고 수십 년 대치의 세월을 넘어서는 통합의 새로운 전망을 향해 가는 남쪽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환기한 것이다. 남북관계는 김대중 정부에서의 극적인 전환 이후에도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9월, 15만 평양 시민 앞에서 남측 대통령으로 공개 연설을 한 것은 경천동지할 대사건이었으나 북미협상의 교착국면이 지속되면서 남북관계도 눈앞이 뿌연 안개속이 되었다. 김정은 위원장이 판문점 분계선을 넘어와 남쪽 땅을 밟은 최초의 기록을 새겼을 때 한 말이 떠오른다. 그 길에는 외풍과 역풍도 있을 수 있고 좌절과 시련도 있을 수 있습니다. ... 언젠가는 힘들게 마련되었던 오늘의 이 만남과 그리고 온갖 도전을 이겨내고 민족의 진로를 손잡고 함께 헤쳐간 날들을 즐겁게 추억하게 될 것입니다. 역사책에서 우리 민족의 한 시기를 삼국시대-고려-조선으로 부르는 것처럼 나는 남과 북으로 나뉜 분단과 대결의 수십 년 현 시기를 남북국시대라 이름 붙인다. 어느 한 체제로 영원한 것은 없고 무엇으로 압도하든 억눌린 것은 튀어 오르게 마련이다. 통일시대는 내가 사는 이 자리의 유한성을 고백하고 상대의 시선으로 나를 돌아보는 것에서 시작된다. 6월에는 모쪼록 이런 평화의 종자를 뿌리자. /이재규 우석대 교수

  • 오피니언
  • 기고
  • 2020.06.08 16:35

역사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자

신정일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기묘사화가 일어났을 때의 일이다. 조광조, 김정 김식 등의 운명이 바람 앞에 등불 같았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병조판서 이장곤 등은 조광조 일파의 처벌을 극력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들 사림이 과격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붕당이라고 지목하여 역사책에 쓰면 후세에 보기에도 아름답지 않고 지금 처벌하면 기껏 활성화된 언론이 다시 움츠러들 것입니다. 이들을 요직에 앉혀 그 말을 다 들어준 것도 다 임금께서 하신 일인데 하루아침에 죄를 주면 함정에 빠뜨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요순 같은 임금을 만났다고 생각하고 온갖 이야기를 하다 보니 과격해진 것입니다. 실제로 조광조는 체포 명령을 듣고 중간에서 누가 농간을 부리는 줄 알고 집에서 나오기를 주저할 정도로 마지막 순간까지 상(임금)의 마음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임금은 그 상소에 꿈쩍도 하지 않고 그들을 벌주려고 하였다. 조광조가 하옥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성균관과 사학의 유생들이 대궐로 달려왔다. 순식간에 천여 명의 유생들이 광화문밖에 모여들어 연좌농성을 벌렸고 밀지를 받은 남곤, 심정, 성운(成雲) 훈구파들이 신무문을 통해 궁중에 들어온 뒤 사림파들과 다투었다. 그 사이 중종은 특명을 내렸다. 남곤을 이조판서에 김근사(金謹思)와 성운을 가(假)승지에, 심사순(沈思順)을 주서에 각각 임명한다. 주서 심사순이 미처 들어오지 못하여 검열 채세영(蔡世英)으로 하여금 대신 조광조 일파에게 죄 주는 교지(敎旨)를 쓰게 하였다. 그러나 주서의 역할을 대신하게 한 채세영은 붓을 쥐고서 그들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 채세영은 몸이 약하여 그가 입고 있는 옷조차 버거운 사람이었다. 그는 중종 임금이 지켜보는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들의 죄가 뚜렷하지 않으므로 빈말을 교지를 차마 쓸 수 없다 성운이 붓을 다시 뺏으려하자 채세영은 손을 부르르 떨면서 소리쳤다. 이것은 역사를 쓰는 붓이다. 아무나 함부로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임금과 훈구파 앞에선 부질없는 일이었다. 훗날 채세영이 길을 가면 사람들은 저 사람이 임금 앞에서 붓을 뺏은 사람이다라고 칭송했다고 한다. 잠시 동안 주서를 맡은 채세영은 그 역할을 잠시 무사하게 맡고 있다가 나가면 되는데,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과 인간의 도리를 제대로 실천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걸고 항변했던 것이다. 이런 선비, 이런 사관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의 역사가 그 오랜 세월 동안 이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작금의 이 나라는 어떤가? 자기 자신의 작은 이익과 명예, 그리고 권력 앞에서라면 회사의 기밀도 나라의 기밀도 빼돌리는 경우가 다반사다. 의리나 지조는 헌 신짝 버리듯 버리고도 아무런 가책을 받지 않고 도리어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비아냥거리는 시대가 오늘의 이 시대다. 나하고 생각이 같으면 군자고, 나하고 생각이 다르면 소인이라는 생각이 고착되어 정의는 사라지고 불의가 판치는 세상이 되어서 그 문화가 어느 사이 고착되고 말았다. 그냥 답답할 뿐, 방법도 없다. 이 중차대한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역사가 우리에게 그 길을 제시해 준다. 그래서 올바른 역사가 중요한 것이다. 고위 공직도 그렇지만 아래 자리라도 국가의 녹, 즉 월급을 받고 산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런 만큼 그 자리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그 임무를 다하는 것, 공직자들의 임무이자 의무다. 역사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공직에 임해서 그 직분을 다한다면 얼마나 떳떳하고 자랑스러울까? 그래도 이 땅에 올바른 사람들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 그 바람이 희망만은 아니길 기원하고 또 기원한다. /신정일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 오피니언
  • 기고
  • 2020.06.01 17:53

‘예술인’ 복지는 되고, 권리는 안 된다?

박문칠 다큐멘터리 감독우석대 교수 최악의 국회로 평가받는 현 20대 국회가 밀려 있던 법안들에 대한 막판 벼락치기를 끝냈다. 지난 5월 20일 예술인 고용보험 가입을 가능케 하는 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됐다. 언론에서는 이제 예술인도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다며 축포를 터뜨렸다. 그러나 같은 날, 예술인들의 기본적인 지위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민관이 함께 추진해온 예술인권리보장법은 법사위원들의 반대로 폐기되고 말았다. 야당의 반대가 컸지만, 여당 역시 별다른 의지를 보이지도 않았다. 현 상황을 요약해보면 예술인들에게 실업급여는 줄 수 있지만, 권리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불우한 이웃에게 적선은 할 수 있지만, 그 불쌍한 사람이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우면 불온하게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오랜 편견과 마주하는 것 같아 마음이 못내 불편하다. 혹자는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실업급여라도 주는 게 어디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예술인들의 불안정한 고용 형태를 감안한다면 물론 환영할 만한 변화이다. 하지만 예술인들의 창작 활동은 돈만으로 보장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인권리보장법이 추진된 것이다. 이 법안은 자유로운 예술 노동을 펼쳐나가기 위해 표현의 자유, 예술노동권 보장, 성평등에 기초한 안전한 창작환경 보장을 담고 있다. 가령 이런 것이다. 필자도 지자체에서 주최하는 한 전시회에 참여하려다가 검열을 당한 적이 있다. 언론에도 호소해보고,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에도 호소를 하여 공무원들이 검열과정에 개입했다는 조사보고서도 받았으나, 실제 검열 담당자에 대한 징계나 피해 예술인들에 대한 보상 같은 후속조치는 없었다. 예술인의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줄 만한 법률이나 제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김기춘이나 조윤선 같은 블랙리스트 집행자들만 구속하면 끝난다고 생각하지만, 예술 현장에서는 재발방지를 위한 실질적인 제도 마련이 절실하다. 공기관과 일을 할 때도 이럴진대, 야생의 정글 같은 시장에서는 오죽하겠는가? 일을 의뢰하는 갑의 횡포, 선후배 사이의 부당한 요구, 업계 내 지위와 명망이 있는 비평가나 심사위원들의 횡포 등. 이렇게 힘 있는 쪽이 마음대로 주무를 수밖에 없는 구조를 그냥 두고 상식이 지켜지길 바라는 건 순진하다 못해 무책임한 일이다. 이런 현장이 젠더폭력에 취약한 것은 당연하다. 한국 사회의 미투 운동의 불씨를 당기며 OO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이 시작된 분야가 바로 예술계이다. 도제식 시스템과 업계 내 평판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예술계의 속성 때문에 위계에 의한 성폭력이 만연해 있음에도 피해자는 적절한 문제제기를 할 수 없었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는 절실한 마음으로 문화예술계 성폭력을 폭로한 여성들은 어떻게 되었나? 적절한 피해구제와 예방을 위한 조치들이 부재한 상태에서 어렵게 폭로에 나섰던 여성 예술인들은 외롭게 법정 투쟁을 감당하거나 예술현장을 조용히 떠날 수밖에 없었다. 예술인들이 자유롭게 창작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이 필요하다. 돈도 분명 빼놓을 수 없는 필요조건이다. 하지만 지금 예술가들이 근본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시혜적 복지가 아니다. 이 사회의 당당한 시민이자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이에 맞서 싸우고, 시정을 요구할 수 있는 최소한의 법적 토대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이런 절박한 외침에 우리 사회가 답할 차례이다. 특히 곧 출범하는 21대 국회가! /박문칠 다큐멘터리 감독우석대 교수

  • 오피니언
  • 기고
  • 2020.05.25 17:49

하마비와 홍살문

이흥재 정읍시립미술관 명예관장 전주천 남천교를 지나 한벽루 쪽으로 걷다 보면 길 왼편에 하얀 돌기둥과 붉은 색칠을 한, 나무문처럼 생긴 조형물을 볼 수 있다. 바로 전주향교 하마비와 홍살문이다. 전주향교 앞 하마비에는 과차자개하마(過此者皆下馬-이곳을 지나가는 사람은 누구나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추어야 한다)라고 쓰여 있다. 경기전 앞 하마비에는 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여기에 이른 사람은 모두 말에서 내려라. 그리고 잡인은 출입을 금한다)라고 쓰여 있다. 남원 향교 하마비엔 대소인원 개하마(大小人員 皆下馬-대인, 소인 모두 다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추어라)라고 쓰여 있다. 이렇듯 하마비는 이곳은 선현들의 위패가 모셔진 신성한 곳이므로 이곳에 이르러서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탈것에서 내려 예를 갖추어야 한다라는 의미이다. 전주향교 홍살문은 양쪽 2개의 붉은색 둥근 기둥이 있고 윗부분엔 끝이 뾰족하여 마치 화살처럼 생긴 살 7개가 양쪽에 있다. 가운데는 삼지창처럼 생긴 창과 태극문양이 있다. 그래서 붉을 홍(紅)자와 화살의 살을 합해 홍살문이라 한다. 경기전이나 향교, 서원 등, 유교문화 공간 입구에는 하마비와 홍살문이 있다. 홍살문의 붉은색은 오방색 중, 양(陽)의 기운을 지니고 있어 이곳에 삿된 기운이 함부로 범접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홍살문 중앙에 있는 태극문양은 이 세상에는 양의 기운과 음의 기운이 존재하는데 이 두 기운의 상호작용으로 이 세상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의미의 상징적 표현이다. 음양오행 사상에 의하면, 우주 생성의 근본원리에 해당하는 기본색으로 청, 적, 백, 흑, 황색이 있다. 이 중 청색과 적색은 양에 해당한다. 옛날 사람들은 태양과 불의 적색에서 자신들을 지켜줄 수 있는 강력한 상징성을 느꼈고 식물과 하늘의 푸른색에서는 왕성한 생명력과 희망을 느꼈다. 이처럼 오랜 옛날부터 적색과 청색은 힘과 생명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이에 따라 옛 선조들은 삿되고 나쁜 기운으로부터 보호해 줄 수 있는 청색과 적색을 즐겨 사용해 왔다. 적색, 청색 모두 생명력이 강한 색이지만 실제 벽사(辟邪-사악한 기운을 막아줌)의 색으로 사용된 것은 적색이 압도적이다. 전통 혼례 때 신부의 얼굴에 바르는 붉은 연지 곤지는 시집가는 여인에게 시기와 질투로 인한 공방살이 들게 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사용되었다. 아들을 낳으면 금(禁)줄에 고추를 매단 것도 붉은색의 양의 기운으로 나쁜 일이 생기지 않게 하려는 뜻이었다. 여름에 백반을 섞어 손톱에 들이던 봉숭아물 역시 몸에 붉은색을 지니면 나쁜 일이나 사탄이 범접하지 않는다는 믿음이었다. 동짓날에는 팥죽을 끓여 먹었다. 동지는 1년 중 해가 가장 짧은 날이라 귀신이 활동하기 좋고, 태양의 운행으로 보면 남반구의 마지막을 찍고 다시 북반구로 올라오기 시작하는 첫날이다. 그래서 새롭게 시작하는 모든 것에 악귀로 인한 나쁜 일이 일어나지 말라고 붉은색의 팥죽을 집 사방에 뿌린 것이다. 정읍의 무성서원에서는 봄, 가을 향사를 지낼 때 깨끗하고 붉은빛이 나는 흙을 홍살문에서부터 사당인 태산사까지 마당 중앙에 두 줄로 뿌린다. 일상생활에서의 불행이나 질병과 같은 부정적인 일들이 나쁜 기운을 가진 귀신들의 소행으로 생각하고 그 악귀들이 두려워하는 붉은색을 상징적 힘으로 사용한 것이다. 무심코 지나친 홍살문의 붉은색에 옛날 선조들의 이런 깊은 뜻이 담겨 있을 줄이야. /이흥재 정읍시립미술관 명예관장

  • 오피니언
  • 기고
  • 2020.05.18 16:19

40년

이재규 우석대 교수 그 여자의 목소리가 텅 빈 광장에 울려 퍼졌다. 새벽 4시가 가까워오는 시간이었다. 시민 여러분,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도청으로 모입시다. 광주를 지킵시다. 누구 하나 나서는 이 없이 도시 전체가 무거운 침묵에 잠겨 있을 때 적막을 깨고 드르륵 드르륵 총소리가 들렸다. 탱크 캐터필러가 줄을 지어 가더니 연이어 폭음이 났다. 새벽이 지나고 아침이 올 때까지 도청이 한 블록 바로 앞인 김정형외과 5층 창에 붙어 앉아, 나는 불을 끈 병실의 커튼 사이로 바깥 풍경을 내다봤다. 전남여고와 중앙초등학교 담벼락을 넘어 도망치는 시민군 뒤를 쫒듯 투항하라, 투항하라 계엄군의 선무방송이 1980년 5월 27일 아침의 광주 시내를 뒤덮었다. 6월 초가 되어 깁스를 풀고 퇴원하던 날 금남로를 달리는 택시에서 도청 쪽을 힐긋 보았을 때 이제 여름인데도 내 몸을 덥치던 괴괴한 냉기를 잊을 수 없다. 그 새벽의 목소리가 자꾸 나를 따라오는 것만 같았다. 다시 나가게 된 학교는 더 휑했다. 총탄에 신체의 상당 부분이 날아간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던 친구 전영진의 책상에는 국화꽃이 담긴 화병이 주인을 대신해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어린 시민군으로 도청을 사수하다가 체포된 김효석, 이덕준, 김향득 등의 빈 의자를 보았다. 주먹 좀 쓰던 뒷줄 친구들은 사회를 정화하겠다는 집권 군부의 명분에 희생되어 삼청교육대로 끌려가고 말씀이 좋았던 선생들은 모두 학교에서 쫓겨나고 없었다. 우리들은 다시 선생들의 매를 맞으며 쥐 죽은 듯이 학교를 다녔고 학력고사 점수에 따라 대학으로, 공장으로, 어둔 거리로 흩어졌다. 그로부터 40년. 10년이면 강산이 바뀐다는 세월을 네 번 거듭하는 동안 이 땅의 대통령은 여덟 번 바뀌었다. 그 시간 사이로 유행가가 해마다 바뀌고 스포츠와 드라마의 명장면들이 흘러갔다. 거리의 아우성과 이유를 달리 하며 죽은 시신과 지상에서는 더 의지할 데가 없어 고공으로 올라간 사람들의 얼굴이 콜라주처럼 뒤섞이며 이어졌다. 수많은 목소리와 선전 전단과 밀실의 술잔이 강물처럼 더해지는 동안 도시는 끝없이 아파트를 지었다 부수며 외곽으로 확장되었고 주적이라고 일컬어지는 북에서 가장 가까운 수도권이 진공청소기처럼 먼지같은 사람들을 빨아들이며 욕망의 마천루를 쌓았다. 40년 세월을 뒤로 하고 우리는 어디만큼 걸어 나왔나. 이만하면 자리 잡아가는 거 아닐까. 한때의 시간을 저다마의 방식으로 보상받고 때로는 잊고 잊혀지며 그렇게 흐릿해진다고 생각했는데 전두환 그자의 광주가 나랑 무슨 상관인데. 말을 듣는 순간, 다시 피투성이 시간대로 돌아가고 만다. 광주를 겪은 우리 세대에게 그 피투성이 시신들, 그 거리와 새벽의 장면들은 미라처럼 굳어져 부석부석 회벽으로 부서질망정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나는 지금도 문득 문득 도청이 나오는 꿈을 꾼다. 내 꿈에서 전두환은 여전히 푸른 군복을 입은 오십대의 장군이다. 다만 다른 것은 전세가 역전되어 시민군들이 시신으로 널브러졌던 그 광장에 전두환이 포승줄에 묶여 있다. 그 옆에 학살의 대가로 장관이 되고 몇 대에 물려줄 돈을 그러모은 자들이 굴비로 엮여 있다. 5월 27일 새벽에 차마 발사하지 못했던 시민군의 총에서 불꽃이 피어 오르자 훈장을 주렁주렁 매단 자들이 연이어 쓰러진다. 나는 환호하다가 눈물에 젖은 얼굴로 한낱 꿈에서 깨어나온다. 내게 오월은 꽃잎처럼 흩어져 내린 여린 목숨들의 몸에서 흘러내려 길바닥에 말라붙은 핏덩이이다. 그 피값을 제대로 돌려받기 전까지 우리의 오월에는 꽃이 피지 않는다. 아 우리들의 오월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 그날 장군들의 금빛 훈장은 하나도 회수되지 않았네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 소년들의 무덤 앞에 그 훈장을 묻기 전까지 (정태춘 노래 518) /이재규 우석대 교수

  • 오피니언
  • 기고
  • 2020.05.11 16:47

사는 지역에 따라 사람들의 품성과 습속이 다르다?

신정일 문화사학자문화재청 문화재 위원 어디에서 살 것인가?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근원적인 고민이자 물음이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사느냐에 따라 사람들이 그 땅의 영향을 받는가? 괴테는 대자연의 어머니인 땅이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보며 태초에 인간들은 그들 자신들에게 적합한 땅을 선택해서 자리를 잡았다고 보고 있다. 괴테와 비슷한 견해를 피력한 사람이 조선 중기의 실학자인 성호 이익이다. 한 민족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리적기후적 배경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 그는 경상도의 풍성(風聲)과 기습(氣習)은 굳게 뭉치어 흐트러짐이 없다. 여러 사람의 마음도 함께 모여서 외치는 이가 있으면 반드시 화답하여 일을 당하면 힘을 아울러서 가담한다. 순후한 옛 풍속은 변함없이 남아 명현을 배출하니 나라 안에서 으뜸 되는 고장이오, 그러나 전라도의 물길은 산발사하(散髮四下)와 같이 되어 국면을 이루지 못하는 땅인지라 재덕 있는 사람의 출현이 드물고 인풍(人風)이 획교(獲狡)하여 사대부가 귀의할 수 없는 땅이며, 차령 이북에 대하여 역세의 모양임을 부인할 수가 없는 땅이다 지도를 펼쳐 놓고서 전라도를 흐르는 강의 흐름을 보면 이익의 말이 나름대로 일리는 있다. 장수에서 발원하여 군산으로 빠져드는 금강과 완주군 동상면 사봉리 운장산 기슭에서 발원한 만경강, 그리고 내장산에서 발원한 동진강은 서해로 빠져들고 담양에서 발원한 영산강은 전라도 서남쪽으로 빠져든다. 백운면 신암리 상초막골에서 발원한 섬진강과 장흥의 탐진강은 남해 바다로 흘러든다. 이처럼 전라도의 산천을 흐르는 모든 강들은 제각각 다른 방향으로 방사성으로 흩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경상도의 물줄기가 동해로 흐르는 형산강, 대종천, 울진의 왕피천 등 몇 개의 하천을 제외하고는 하나같이 태백에서 말원한 낙동강에 합류하여 다대포 앞바다로 빠져나간다. 이익은 금강에 대해서는 풍수감여가들이 말하는 활을 거꾸로 쥔 모양으로 반궁수(反弓水)가 되어 서울과 개성에 역심을 드러내고 있다고 한 반면 영남 지방에 대하여는 좋게 평하고 있다. 세계 지도를 펴 놓고 보면 프랑스의 물길도 전라도의 물길에 못지않다. 프랑스의 강들은 국토의 중앙에 위치한 마시프 상트랄(Massif Central)이라는 고원 지대에서 시작되어 사방으로 흩어져 나간다. 세느강은 영국해협으로, 르와르강은 비스케이만으로, 소느강과 로느강은 지중해로 흘러 들어간다. 전라도를 물길과 같은 형세로 흐르는 프랑스의 물줄기를 보고 이익과 같이 동시대를 살았던 독일의 풍토학자 헤르더(herder 1744-1803)는 〈인류역사 철학고>에서 전혀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 지세와 기후가 극단을 피하고 있으므로 프랑스인의 인간적 기질도 중용적이고 하천이 삼면의 바다로 유입되니 사람들도 가슴을 활짝 열고 오는 자를 환영하는 해방성을 갖고 있으며, 주민을 낙천적 사교적으로 만드는 은근성과 균형 잡힌 풍토로 인한 언어 논리 표현의 명석성이 뛰어나다.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두 사람의 풍토와 문화를 바라보는 관점은 동양과 서양의 차이만큼이나 크다. 중요한 것은 시대에 따라 어디서 사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삶도 결정되는 것인데,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 중종 때의 문인으로 요절한 곽시(郭詩)의 <서북의 인재는 동남의 인재와 다르다(西北人才與東南不同)라는 글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각지역마다 성함과 소함, 강함과 약함이 차이가 있는 것은 그저 풍성(風聲)과 기습(氣習)에서 온 것이고, 풍성과 기습의 차이는 본성과 리(理)를 다 못 지켜 그런 것일 뿐이다. 어찌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본질에 관계된 바이겠는가? 요지는 사는 지역이 아니라 사람이 중요하고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신정일 문화사학자문화재청 문화재 위원

  • 오피니언
  • 기고
  • 2020.04.27 16:22

코로나 시대 온라인 교육 체험기

박문칠 다큐멘터리 감독우석대 교수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대학에서는 온라인 교육이 한창이다. 필자가 속해 있는 대학에서도 몇 주째 비대면 화상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물론 시행착오가 없지는 않다. 수업 중 마이크가 켜진 줄 모르고 떠드는 학생의 목소리 때문에 방해가 되는 경우도 있고, 누워서 수업을 듣는 학생을 일으켜 세우거나, 놀러 가면서 차 안에서 수업에 접속한 학생에게 주의를 줘야 하는 황당한 상황들도 있었다. 화상 수업이 어느덧 익숙해지니 장점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평소 수업시간에 대답을 안 하는 학생들도 채팅창을 통해 질문이나 의견을 말하라고 하니 훨씬 활발하게 의견을 개진한다. 또한 온라인상의 각종 설문조사나 투표 기능을 활용해 학생들의 내용 이해 정도를 편하게 확인할 수도 있다. 화면상에서 학생들의 얼굴이 모두 동일한 크기로 보이니, 멀리 뒷자리에 앉아 있는 학생을 소홀히 대할 일도 없어졌다. 하지만 아무래도 직접 눈을 마주치고, 인간적인 유대를 형성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다. 수업을 하다 보면 교수와 학생 간에 주고받는 기라는 게 있다. 학생들이 수업에 흥미를 느끼고 눈을 반짝이기 시작하면 교수자도 덩달아 에너지가 올라가서 마치 서로 팽팽한 줄을 잡아당기고 있는 듯한 긴장감인데, 아쉽게도 온라인으로는 이런 기를 주고 받을 수가 없다. 강의가 단지 지식을 전달하는 기능에 머무르지 않고, 여러 교육주체 간 상호작용과 전인적인 교육을 목표로 한다면 대면 수업의 중요성을 간과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제 전 세계가 온라인 교육의 맛을 봤으니, 코로나 상황이 종료되더라도 그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을 지도 모른다. 벌써부터 4차 산업혁명이라는 레토릭을 써가며 포스트-코로나 교육 패러다임의 전환을 설파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실제로 최근 대학 총장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 설문조사에서는 73%가 대학교육의 생태계를 온라인 중심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데 전적으로 동의했다고 한다.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걱정이 앞선다. 온라인 교육의 장점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이러한 온라인 교육이 일반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평생교육에 활용될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온라인 전환의 진의가 교육의 질 향상이라기보다 비용 절감에 있는 것으로 보여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온라인 교육은 학생 수의 제한이 없고, 강의실도 배정하지 않아도 되어 학교 입장에서는 소위 가성비가 훌륭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교육부나 대학들은 갖은 방법으로 온라인 강의를 확대하려고 애를 써 왔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 온라인 강의가 급속히 확대됐을 때 교육의 질 저하는 불가피하다. 사이버대학에서 오랫동안 온라인 강의를 해온 교수들에 따르면 온라인 강의는 단지 오프라인 강의를 그대로 온라인에 탑재하면 되는 게 아니라고 한다. 품질 좋은 사이버 강의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한두 달 전부터 5~6명의 제작진이 교수와 함께 기획 회의를 갖고, 영상, 디자인, 프로그래밍 등 전문 인력이 함께 해야만 한다. 또한 온라인 환경에 걸맞은 교육학적 고민과 방법론도 수반되어야 한다. 지금 각 대학들이 이런 부분들을 얼마나 종합적으로 고려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현재 코로나로 인해 각 대학은 비상 운영 중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족하더라도 여러 교육 주체들이 서로 참고 양보해가며 온라인 교육을 하고 있다. 예외 상황은 어디까지나 예외 상황이지, 상시화를 위한 발판으로 이용되어서는 곤란하다. 부디 교육부와 각 대학이 구조조정과 비용절감의 유혹에 빠져 교육의 질을 떨어드리는 자충수는 두지 않기를 바란다. /박문칠 다큐멘터리 감독우석대 교수

  • 오피니언
  • 기고
  • 2020.04.20 15:39

산벚꽃, 꽃비로 내리다

이흥재 정읍시립미술관 명예관장 올해도 봄은 왔다. 벚꽃잎이 거리마다 속절없이 눈처럼 날린다. 벚꽃은 군락을 이루어 피기 때문에 한순간에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봄기운에 취하게 한다. 세상 속 벚꽃이 질 무렵이면 봄 산은 나무에 새순이 연두로 피고 안개인 듯, 구름인 듯, 군데군데 산벚꽃이 피어 아련하고 아름다운 산으로 태어난다. 우리가 벚나무라 부르는 나무 가운데 진짜 벚나무는 아주 드물다고 한다. 벚나무와 비슷한 나무 중에 산벚나무, 왕벚나무, 개벚나무 등이 있다. 일본 국화인 왕벚나무가 자생하는 것을 일본에서는 발견하지 못했는데, 1908년 한국에 선교 차 와있던 신부가 한라산에서 처음 왕벚나무를 발견했고 이어 1912년 독일인 식물학자에 의해 정식 학명이 등록되어 우리나라가 왕벚나무 자생지임이 밝혀졌다. 우리나라 왕벚나무는 높은 곳에서 자라는 산벚나무와 낮은 곳에서 자라는 올벚나무와의 잡종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나무는 씨를 맺는 것이 매우 부실하여 자연적으로 많이 퍼지지 못한다.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 경로도 아직 명쾌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요즘, 완주 불명산 계곡엔 산벚꽃이 봄바람에 흩날리고 있다. 불명산에 산벚나무가 많아서 아름답기도 하지만 불명산 화암사는 조선 초 우리나라 불경간행의 메카였다. 산벚나무는 조직이 조밀하나, 너무 단단하지도 무르지도 않고 잘 썩지 않아 글자를 새기는 데 좋다. 그래서 책을 간행하기 위한 경판제작에 최적의 나무이다.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에 사용한 나무 중 60% 이상이 산벚나무라고 한다. 화암사가 불경간행의 중심사찰이 된 데는 이 절을 중창한 성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달생은 조선 초 전라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절을 중창하고 불경을 간행했다. 무인 출신이었지만 아버지와 성달생, 그리고 그의 아들 모두 글씨를 잘 썼다 한다. 그의 손자는 사육신 중 한 사람인 성삼문이다. 경판을 만들려면 먼저 경전의 내용을 글씨로 써야 하는데 명필이었던 성달생의 글씨로 찍은 화암사판 불경은 세종 때부터 나와 12종에 이른다. 심지어 화암사판 법화경은 복각본이 24종이나 되어 조선 시대 법화경은 성달생 글씨로 판각한 것이 대부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화암사는 성달생이란 인물로 조선 초 불경간행의 중심사찰이 된 것이다. 조선 초 성달생의 글씨로 찍은 화암사판 불경은 전국에서 간행이 되었고, 조선 중기에는 정읍 무성서원에서 일종의 상업용 책을 만들어내기 위한 방각본이 간행된다. 조선 후기에는 전주에서 완판본이 간행되어 한양에서 나온 경판본과 함께 우리나라 출판문화의 양대 축을 이루었다. 안도현 시인의 시「화암사, 내 사랑」에 인간세 밖에도 있고 안에도 있는 곱게 늙은 절이라며 찾아가는 길을 굳이 알려주지는 않으렵니다라고 한 절이 불명산 화암사이다. 화암사에는 국보로 지정된 극락전과 꽃비 내리는 누각이라는 보물, 우화루의 유명세에 가려 철영재라는 한 칸짜리 사당을 눈여겨보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극락전과 불명암 사이에 있는 유교 문화의 공간인 이 사당, 철영재가 바로 성달생을 모신 사당이다. 철영재 현판은 대나무를 잘 그리는 조선 3대 화가 중 한 사람인 자하 신위가 썼다. 화암사 요사채는 적묵당이라 한다. 적묵(寂?)은 여유로움을 뜻한다. 봄 같지 않은 올 봄, 화암사 우화루(雨花樓)에 내리는 산벚나무 꽃비에 답답한 마음 씻어 보면 어떨까? /이흥재 정읍시립미술관 명예관장

  • 오피니언
  • 기고
  • 2020.04.13 16:10

명부

이재규 우석대 교수 집으로 두툼한 선거공보 봉투가 왔다. 일부 후보자들의 방송토론과 길거리 인사를 제외하고는 예년의 선거 분위기를 느끼기 힘든 코로나 시국에서 총선 날짜가 코앞이라는 것을 비로소 실감한다. 세어보니 지역구 후보자 홍보물이 7개, 보궐선거인 시의원 후보가 2, 비례대표 정당홍보물이 12개다. 비례후보를 낸 정당이 35개에 달하는데 몇 정당은 전국에 배포할 홍보물조차 찍지 못해 선관위 홈페이지를 찾아보는 수고를 더하지 않는 한 누굴 내세웠는지 명부를 알 수 없다. 지금 감옥에 갇혀있는 박근혜 사진을 전면에 내건 정당도 두 곳이나 있는 것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정치적 견해를 자유롭게 표방할 수 있는 사회이지만, 모든 노조를 폐지한다거나 대통령이 모든 국민의 관혼상제를 챙김에서는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지역구 후보자의 공약도 모두 신기루 같은 건설 공약, 수백 수천 억의 돈을 쏟아 붓는 뻥카들이 즐비하다. 공직자를 투표로 선출하는 선거는 지지하는 정당과 인물을 밀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유권자인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말을 몰아가는 채찍질이 본질이다. 누구를 열혈 지지하여 그가 어떻게 변심하든 연심을 거두지 않는 추종, 정치 소비자로 남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세상으로 정치인들을 몰아세우는 참여가 선거라는 과정의 알갱이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로 제시되는 주권재민에서 핵심은 국민에게 있다(在)는 것이다. 지갑 안에 든 돈처럼 그저 거기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쓰여야 비로소 구현이 되는, 있다 이다. 주권자인 민이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실천적 주문이 거기 들어있다. 그러므로 저잣거리에서 물건을 살 때처럼 부지런하게 내 눈 앞에 있는 상품을 살피고 뜯어봐야 한다. 가짜 상품은 반품하고 고발하며 부실한 제조사를 문 닫게 해야만, 매대가 훨씬 보기 좋아진다. 정치 시장에서 상품은 명부로 존재한다. 만지고 뜯어볼 수 없기에 그 이름자가 걸어온 내력과 언행을 살펴서 앞으로 어떻게 일할지 짐작하는 것이 물건을 잘 고르는 첩경이다. 내가 바라는 최고의 상품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면 발길을 거두고 돌아가는 것도 한 방법이겠으나 지금 가능한 최선(어쩌면 차차선=차차악)을 골라야 시장이 그쪽으로 움직인다. 구매를 포기하지 않아야 더 나은 상품을 내놓으려고 제조사가 분발하는 이치다. 이번 총선은 참으로 복잡다단한 우여곡절을 거쳐 시장에 명부가 나왔다. 지역구 후보자 선출도 그렇지만 정당의 지향이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비례 대표 후보자 명부는 막판까지 요동쳤다. 그 과정에서 아쉽고 답답한 여러 일들이 있었지만, 정치는 내 생각과 100퍼센트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면 모든 것이 0(Zero)이 되는 영역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님 말고 단절하며 돌아서는 순간 더 나쁜 것들이 문 앞에서 칼을 들고 기다린다. 정치는 현재 가능한 선택지 중에서 고르고 고르는 일이다. 정당이나 유권자 모두가 거기에서 최선을 다해야 할 의무가 있다. 분단과 전쟁, 그 이후 수많은 정국의 부침을 겪으면서 우리 국민들은 피눈물 속에서 어디 두고 보자 주먹을 움켜쥐는 지혜와 용기를 발휘해왔다. 다 죽은 것 같은 잿더미 위에서도 단 한 발 나갈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쪽으로 길을 뚫었다. 총칼이 목덜미를 겨누는 순간에도 한 잎의 싹이라도 보이는 정치인을 세워 다음 승부의 발판을 마련했다. 며칠 후 투표장에 들어서는 마음도 그러할 것이다. 공감하는 지인, 가족들과 함께 공동구매 방식으로 표를 나누는 지혜도 발휘하면서, 내일은 좀 더 나은 명부를 만나리라 기대하면서. /이재규 우석대 교수

  • 오피니언
  • 기고
  • 2020.04.06 16:52
오피니언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