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王宮)의 음탕 대신에/오십(五十)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이만 나왔다고 분개하고/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옹졸하게 욕을 하고/한 번 정정당당하게/붙잡혀 간 소설가를 위해서/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越南) 파병에 반대하는/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이십(二十)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찾아오는 야경군들만 증오하고 있는가/…중략…/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이발쟁이에게/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야경군에게 이십(二十)원 때문에 십(十)원 때문에 일(一)원 때문에…
이 시는 '어느날 고궁(古宮)을 나오면서'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김수영 시인이 그린 서민들의 모습이자 자화상이다. 30여년이 지나고 민주화된 세상이 된 지금, 서민들의 모습은 많이 달라졌다. 그 중 하나가 지난 대통령선거를 통해서 극명하게 드러났던 네티즌들의 활동이었다. 정치와 사회의 현안에 대해서 자신들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사이버 공간은 평범한 사람들이 서로의 생각을 확인하고 공감대를 형성해 나가는 좋은 장(場)이 되어 준 것이다.
그런데 서민들의 활발한 의견개진이 그 도를 넘은 것일까? 검사에게 항의성 전자우편을 보낸 교사가 검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은 일이 생긴 것이다. 검찰 조사의 핵심은 전자우편 주소를 알게 된 경위인 듯 하다. 그리고 검찰조사 결과, 편지를 보낸 교사의 행위가 범죄는 아니라고 밝혀진 모양이다.
우리나라에서 검사는 법무부에 속하는 단독제의 행정관청으로, 국가 또는 공익의 대표자 지위를 갖는다. 이는 피해자의 개인적 감정이나 이해보다 국가적 관점에서 공소권을 적절하게 행사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피해 당사자가 아닌 동료 검사가 내사를 벌인 것 등은 아무런 법적 문제가 없다고 본다.
하지만 이번 일은 서민들의 법감정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다시 확인 시켜주었다. 전자우편 주소를 가진 사람들은 원하지 않은 편지를 일상적으로 받는다. 심지어는 전자우편 주소록을 팔겠다는 광고편지까지도 받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이번 일이 어떻게 다가올까? 문득 김수영의 시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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