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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옥상 미술가는…

미술적 언어로 시대와 소통… 도시농업의 전도사

임옥상은 1950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공부 잘하고 그림도 잘 그렸던 그는 특히 미술에 재능이 빼어나 동네에서 그림 잘 그리는 아이로 소문났다. 초등학교 3학년, 장래희망을 써넣는 칸에 망설임없이 '화가'라고 썼다. 중학교 2학년 때 가족이 서울로 이사를 했다. 고등학교는 용산고를 다녔는데, 그때 미술반에서 만난 스승이 조각가 강태성씨다. 작업에 몰두하는 모습이 구도자 같았던 스승을 보며 작가의 자세가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서울대 미대와 대학원을 다닐 때에는 연극반에서 활동하기는 했지만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러다 서울대 법대 앞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데모현장을 만나며 예술의 시대적 역할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시대와의 조우는 대학원을 졸업한 직후 이루어졌다. 그에게 미술은 곧 시대와 소통하는 통로였으며 그가 담아내는 미술적 언어는 모두가 시대적 발언의 상징이 되었다. 70년대 말부터 80년대의 뜨거운 시기를 그는 광주와 전주에서 보냈다. 79년 광주교육대 교수로 2년 남짓 근무했고, 81년부터 91년까지 10여년을 전주대 교수로 재직한 덕분이었다.

 

그는 80년대 거리의 민주화 함성을 온전히 체득할 수 있었던 전주에서의 10여년 삶을 생애에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기억한다.

 

92년엔 대학교수직을 스스로 버리고 전업 작가가 되었다. 91년 호암갤러리에서 가진 개인전이 자극이 됐다. 당시 문제작가로 분류되어 있던 임옥상은 한국화단의 질서(?)로 보자면 주류가 아닌 비주류 작가였지만 이 전시를 계기로 한국미술계의 주목받는 작가로 떠올랐다. 외국 갤러리의 초대가 이어지면서 그는 국제적인 활동을 새로운 목표로 세웠지만 94년 IMF가 터지면서 무산됐다. 다시 새로운 궤도를 만들어 전시장의 벽을 위한 그림에 몰두하는 대신 거리로 나갔다. 자신이 하고자 했던 예술에 근본적인 회의를 갖고 시작한 고민과 갈등이 준 답이었다. 한국 미술계의 이슈를 불러일으켰던 '당신도 예술가'는 그래서 만들어졌다. 인사동과 여의도에서 4년 동안 진행됐던 이 프로젝트는 대중들의 미술에 대한 인식을 확실하게 변화시켰다. 90년대를 거쳐 2000년대 들어서면서 그가 지향하는 미술의 공공성은 더 큰 폭으로 확대됐다. 전시장 밖으로 나와 지하철역에서, 분단의 경계에서, 극장에서, 거리에서, 아파트에서, 공원에서 대중들을 만나는 그의 작품들은 오늘을 사는 대중들의 정신을 일깨우면서도 단순한 감동의 언어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대중들을 깨우고 흔들어 시대를 읽게 하고 움직이게 한다. 86년 프랑스 앙굴렘 미술학교에서 공부하기도 한 그는 지난해 가나아트에서 가진 '토탈 아트전'까지 14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2000년대 중반, 서울 평창동에 '임옥상연구소'를 열어 창의적인 젊은 미술가들과 작업하고 있는 그는 일상이 예술이고, 예술이 곧 일상인 사회를 꿈꾸며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일을 지치지 않고 구상하며 실현해나가고 있다.

김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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