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만에 안부 전화를 드렸다. 이제 여든을 앞둔 최목사는 시각장애인이다. 초등학교 졸업 즈음 시력을 잃었으니 거의 평생을 어둠속에서 살아온 셈이다. 부부는 1982년 전주에 개척교회를 열었다. 선교를 위한 목회일도 중요했지만 시각장애인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자립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하는 일에 마음을 쏟았다. 김장김치 나누기 사업도 그 중 하나였다. 시각장애인들은 대부분 부부가 같은 장애를 갖고 있어 김장김치 담그는 일이 쉽지 않다. 자연히 입소문을 들은 시각장애인들의 요청이 밀려들었다. 첫 해 650포기로 시작했던 김치는 해마다 늘어 어떤 해에는 4000포기를 담아야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사랑의 김치 나누기’는 2008년 최목사의 은퇴와 함께 끝이 났다.
그는 전주로 오기 전 서울에서 시각장애인 복지를 위한 단체를 운영했다.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60-70년대만 해도 시각장애인의 유일한 생업은 안마술이었다. 그나마 안마는 남성시각장애인의 전유물이어서 여성시각장애인의 삶은 더 절박했다. 최목사는 시각장애여성들이 겪는 사회적 고통을 가슴아파하며 안마술을 전수하고 안마시술소를 열어 일자리를 만들었다. 안마사 자격을 시각장애인에게만 허용하는 법안을 제정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장본인이기도 하다. 2006년 마사지계에서 ‘직업선택의 자유와 평등권 침해’를 들어 헌법소원을 제기, 위헌판결이 났을 때는 그야말로 ‘사투’를 벌여 이 법을 지켰다. 그러나 최목사는 은퇴한 후, 더 큰 과제를 안게 됐다. 안마업소가 퇴폐업소로 전락해간다는 사회적 지탄에 당당하게 맞설 수 없는 상황 때문이다. 시각장애인의 안마사 자격증만을 앞세워 문을 연 안마시술소가 늘어나면서 시각장애인들의 안마가 제 기능을 못하고 악용당하고 있는 현실 앞에서 그는 해야 할일을 다시 찾았다. 시각장애인들에게 안마술을 가르치고 직업의식을 갖게 하는 일이다. 노목사의 의지는 결연해 보인다. 그만큼 절실하다는 증거다. 이제 더해져야 할 것이 있다. 시각장애인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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