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령 20000호 그대에게
시우쇠를 시뻘겋게
달구는 대장간의
풀무 되거라
그 풀무가 되어
시우쇠가 펄펄펄
끓을 때 까지
바람이란 바람이 살고 있는
지구의 끝바람까지
몰고 오너라
처마 낮은 집도 들르고
솟을대문 집도 들러서
울고 웃으며
밥 나눠먹고
사는 이야기 들어라
무엇인가
그대 때문이었다고
비웃음 받는
허수아비 같은
초상 되어서는 안 된다
무엇인가
그대 때문이었다고
손뼉 치며 환호하는
눈부신 발광체가 되거라
1988년이니 28년 전이다. 그해 전북일보에 노동조합이 결성되면서 처음으로 노조가 주관한 직선제 편집국장이 임명됐다. 회사 경영진이 결정하면 하루아침에도 보직이 바뀌던 환경에서 직선제 편집국장의 등장은 그만큼 낯선 문화였다. 그러나 노사의 갈등 국면이 화합으로 모아진 지점에서 직선제 편집국장은 편집권 독립을 상징하는 전북일보의 새로운 시작이었다.
전북일보 역사의 새로운 페이지를 열었던 첫 직선제 편집국장은 취임하던 그날, 기자들 앞에서 이야기 했다.
“나는 이제 저 하늘의 별을 따려고 한다. 여러분이 나에게 준 과제다. 여러분은 내가 그 별을 딸 수 있도록 장대를 높이 높이 올려주어야 한다. 등루거제(登樓去梯), 다락에 오르도록 권하고 사다리를 치워버리면 안 된다.”
별과 장대. 언론의 엄중한 역할을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감성적 언어로 안겨준 사람. 김남곤 전 전북일보 사장(79)이야기다.
전북일보 지령 2만호. 그 역사 위에는 언론탄압의 엄혹한 시절을 지켜낸 대쪽 같은 선배나 인생의 등불이 되어준 정신적 지주와도 같은 선배들이 있다. 존경의 대상인 그들 선배 언론인들의 궤적을 돌아보며 많은 후배들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인터뷰는 어려웠다. 단호한 거절이었다. 삼고초려 끝에 간신히 얻어낸 인터뷰는 그만큼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어느 상황에서건 반전은 있는 법인 모양이다.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그는 특유의 글씨체로 너울너울 쓰인 작은 메모지 몇 장을 건넸다. ‘지령 20000호 그대에게’ 제목의 시였다. 여러해 전 그랬던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전북일보가 지령 2만호를 맞았습니다. 사장님께도 각별한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지령 2만호가 주는 무게감이 크죠. 전북일보가 태동 했을 때를 생각해봤습니다. 1950년, 전란의 위기와 혼란 속에서 전북일보를 창간했던 뚜렷한 목표가 있었겠지요. 오늘까지 전북일보가 걸어온 길 또한 순탄치만은 않았을 것인데 위기를 맞을 때마다 지혜를 발휘하고 마음을 모아 극복해온 시간이 참으로 위대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상투적이긴 하지만 지령 2만호의 전북일보에 한 말씀 주시죠.
“2만호라는 지령에 대한 벅찬 감회에 그치지 말고 20001호를 주목하라고 전하고 싶습니다. 이제부터는 더 역동적인 의지를 갖고 구성원들이 전북일보를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 깊이 고민하면서 새로운 방향을 열어가야 합니다. 2만호라는 역사에 담겨 있는 가치와 의미를 살리는 일이겠지요.”
-신문 창간의 뜻을 이어가라는 말씀이군요.
“1950년 전란 속에서 우리 선배들은 백지 한 장 위에 전북일보라는 제호를 올려놓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 뜻이 굴절되거나 중단되지 않고 무구한 역사를 끌고 여기까지 온 것은 구성원들이 의지를 갖고 그때그때 시대를 충실하게 살았던 덕분이지 않겠어요.”
-전북일보 지령의 의미를 되짚어보면 사장님 말씀처럼 그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는 책임으로 두려워지기도 합니다.
“그런 책임감을 갖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자긍심도 가져야 해요.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 전반에 걸쳐서 하나하나 빠짐없이 그날그날을 기록했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어떤 역사가가 그렇게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었겠어요. 전북일보의 지령은 역사의 보고입니다.”
-말씀 들으면서 역사의 보고인 전북일보 지령만으로 자신감을 갖는 일이 괜찮은 일인가 싶기도 합니다.
“자긍심이 있어야 책임감도 있는 것이거든요. 자긍심에서 그냥 끝나면 안 되죠. 그렇다면 직무유기예요.(웃음)”
-어린 시절부터 문학에 소질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왜 작가가 아닌 기자를 택하셨습니까.
“처음부터 기자가 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에요. 직업을 갖는다는 것이 꼭 자기 뜻이나 계획만으로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계기가 있었어요. 고모부가 전북일보 공무국에 근무했거든요. 고모 집에 놀러 가면 ‘게라지’라고 부르는 활자 인쇄지가 많았어요. 앞에는 기사가 인쇄되어 있지만 뒤는 백지여서 종이가 귀한 시절에 쓰임이 좋았죠. 덕분에 기사도 읽게 되었는데 재미있었어요. 고등학교 시절엔 제가 쓴 시나 콩트가 실리기도 했습니다.”
-당시에도 신문사는 경제적으로 궁핍한 직장 아니었을까요.
“1965년 12월 삼남일보에 입사했는데, 73년 통합이 되고서도 형편은 어려웠어요. 박봉이었으니까요. 그때는 점심을 먹으러 몇 명 동료들과 나가면 밀가루 빵 두 개 먹고 물 한잔 마시는 것이 전부였어요. 어쩌다 먹게 되는 콩나물국밥이나 설렁탕은 특식이었죠.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이었어요. 가난으로 고통 받았던 시절이니 배고픔이 곧 삶이었죠.”
-기자생활은 어떻셨습니까.
“교정부에서 시작해 편집부 지방부를 거쳐 문화부에서 일했죠. 문화부에서는 도교육청을 출입했는데, 교육 기사를 많이 썼어요. 문화부는 출입처가 없는 부서여서 발로 찾아다니지 않으면 기사를 쓸 수 없었죠. 덕분에 고생스럽긴 했지만 많은 사람들과 교유하고 정서적으로 풍요롭게 일할 수 있었어요. 개인적으로는 행운이었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기사를 쓰셨습니까.
“기사는 진실과 균형이 생명이라고 생각했어요. 올바른 방향이나 비평도 그 바탕에서 이루어져야 하니까요. 그런 정신을 지키려고 노력했어요. 독자들의 관심을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와 가치를 담는 것이어야 하는가를 늘 고민했지요.”
-특종 경쟁이 그 시절에는 더 치열했을 것 같은데요. 속보성으로도 그렇고.
“물론이죠. 지금은 인터넷 시대가 되어 속보성에 대한 민감함이 좀 덜한 것 같더군요. 당시에도 전북지역에 몇 개 신문사가 있었는데, 아침에 상대방 신문에 어떤 기사가 났느냐가 최대 관심이었어요. 특종 낙종의 후유증이 컸죠.”
-기억에 남는 기사도 많을 것 같습니다.
“교육분야를 담당하고 있을때 고교 평준화가 시작되었어요. 일류니 삼류니 고등학교 등급이 확연했던 환경에서 평준화는 엄청난 사건이었죠. 그때 새로운 환경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집중 취재했어요. 학교시리즈였는데, 큰 반향이 있었죠. 격려와 항의를 동시에 받았던 기사인데, 대부분의 학교가 자극을 받았죠.”
-문화 쪽에서는 가람 이병기 생가 이야기를 지금도 하시는 분들이 있던데요.
“기자 생활하면서 보람을 느꼈던 기사예요. ‘가람가가 무너지고 있다’는 기사였는데, 아마 72년일 겁니다. 가람이란 거목의 생가가 썩어 무너지고 있던 상황이었거든요. 기사가 나가자 성금이 들어오고 관심이 커지면서 복원되었죠. 생활고로 어려움을 겪던 가족들의 삶이 조명되면서 도움도 줄 수 있었어요.”
-기자라는 직업은 곤궁한 삶이지만 ‘내가 쓴 기사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는 가치 있는 직업이지 않습니까.
“물론이지요. 그런 정신적 보상이 없으면 기자 정신을 지키기 어렵습니다. 편집국장 시절 일인데, 당시 김용태 국회 예결위원장이 전라도 예산투쟁에 대해 ‘뜨거운 꼴을 봐야 한다’고 막말을 했어요. 처음에는 1단 가십처리로 처리하자 했는데 이것은 아니다 싶어서 1면 톱으로 바꾸었죠. ‘전라도 하대발언’으로 엄청난 이슈가 되었어요. 곤욕도 치렀지만 끝내 밀고 나갔죠. 언론은 권력과 대칭관계에 있기 때문에 분명한 비판의식이 있어야 해요. 옳은 것을 견인해야 한다는 정신이 있어야 하죠.”
-편집국장의 판단이 참 중요한 것 같아요.
“물론이죠. 편집국장(리더)이 어떤 식으로 판단하느냐에 따라 손바닥 위냐 아래냐가 결정되니까요. 어려운 상황에서 내 선택이 필요할 때면 누가 훈수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 선택은 편집국장 몫이죠.”
-편집권 독립의 마지막 보루니까요.
“언젠가 축구 국가대표 골키퍼였던 김병지 선수가 ‘내 뒤에는 볼이 없다’는 신념으로 뛴다고 하더군요. 기자들도 그런 골키퍼가 되어야 합니다. 사회의 정의를 지키고 불의에 맞서는. 그러려면 전북일보 앞에는 아무것도 없어야 해요. 어떤 걸림돌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기자로서 소명의식이 중요할 것 같은데, 현실을 보면 정신만을 강조하기에는 너무 많은 제약이 있습니다.
“어느 시대에서건 언론 환경은 늘 열악했습니다. 그럼에도 이 직업을 택한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상황을 따라가지 말고 스스로 혁신해야 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혁신의 요체가 되어야 겠다는 생각을 늘 새롭게 다져야해요. 2만호 동력이 무엇이겠습니까. 언론 환경, 특히 지역 언론의 상황은 어렵지요. 그래서 구성원이 한마음으로 뭉쳐야 합니다. 그런 힘이 없으면 2만호 역사를 우뚝 세울 수 없게 됩니다.”
-지령 2만호를 들여다보면 전북일보만이 할 수 있었던 일들이 많습니다. 그것이 전북일보가 쌓아온 역사겠지요.
“시대 시대마다 있었죠. 연륜이나 역사는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그때그때의 일들이 모아져서 우뚝 서있게 되는 거죠.”
-그럼에도 현실을 되돌아보면 지방지의 환경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자본과 물량면에서 거대한 중앙지들이 있고, 지역에서는 또 같은 상황에 놓인 지역신문사들이 있고.
“지방지는 한계가 분명합니다. 역할을 명확하게 설정해야 해요. 경제적으로는 그런 어려움이 있죠. 그러나 지역신문으로서 지켜야 할 역할을 제대로 지켜간다면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지역신문에 대한 지역 주민들의 신뢰가 중요한데 여전히 탄탄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거든요.
“그것이 전북일보가 풀어야할 과제예요. 독자와의 소통과 신뢰가 생명 아니겠어요. 전북일보라는 깃발을 꽂는다고 할 때 무엇을 위해 어디에 둘 것인가. 주민들의 아픈 곳, 고통스러운 곳과 열망하는 것이 어디이고 무엇인가를 찾아내야지요. 그 중심에 깃발을 꽂고 휘날리게 하는 것이 전북일보의 사명입니다. 단순한 전달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전북에는 많은 신문사가 난립하고 있죠. 그래서 전북일보의 역할이 더 중요합니다.”
두 시간 인터뷰 동안 단호하지 않지만 부드러움으로 상대방을 더 깊이 감화시키는 특유한 화법은 힘이 되어 대화를 이끌어갔다.
40여년 기자를 천직으로 삼아온 원로 선배는 인터뷰 내내 기자정신을 지키고 사람을 소중히 여기라고 강조했다. 젊은 세대들에게는 자존감 없이 자기정신을 표류시키고 있다고 경고했다.
생각나는 풍경이 있다. 그가 전북일보 전무로 취임하면서 직원들에게 준 취임사다.
“전북일보라는 깃발을 높이 세우고 마음껏 흔들어라. 내가 그 깃발을 나부끼게 하는 바람이 되겠다.”
전북일보 지령 2만호 앞에 새바람이 분다. 전북일보의 깃발이 더 힘차게 나부낄 차례다.
● [김남곤 사장은] 지역문화 저널리즘 산증인…시인 등단 수많은 창작활동
김남곤 사장은 1965년 12월 삼남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나이 스물여덟살이었다. 1973년에는 전북지역의 3개 신문사가 통폐합하면서 새롭게 출범한 전북일보로 자리를 옮겨 1995년 정년퇴임때까지 편집국 기자와 부국장, 편집국장, 제작국장, 업무국장, 수석논설위원을 거쳤다. 퇴임 후에는 전북문인협회 회장과 전북예총 회장으로 8년동안 외유(?)하다 2000년 12월 전북일보 전무로 취임해 사장을 거쳐 2013년 은퇴했다.
문화 교육분야에서 오랫동안 일해온 그는 전북문화의 음과 양을 조명하는 다양한 기획기사로 지역문화를 저널리즘의 중심에 들여놓았다. 그와 교유했던 예술인들은 오늘의 전북문화가 풍요로운 맥을 정립할 수 있었던데 에는 60년대와 70년대 문화부기자로 활동했던 그의 역할이 컸다는 평가를 아끼지 않는다.
문화부 기자로 활동하던 1979년 〈시와의식〉으로 등단했다. 첫 시집 〈헛짚어 살다가〉를 펴낸 이후 〈푸새 한 마당〉 〈새벽길 떠날 때〉 〈녹두꽃 한 채반〉 〈사람은 사람이다〉 등의 시집과 산문집 〈비단도 찢고 바수면 걸레가 된다〉, 칼럼집 〈귀리만한 사람은 귀리〉 등을 냈다.
은퇴 후에는 언론계 동료와 문인들과 폭넓게 교유하면서 창작활동을 하고 있으며 올해는 연초부터 쓰기 시작한 동시를 모아 동시집을 펴낼 계획이다. 지금도 전북일보 사옥 앞을 지날때면 안에서 일하고 있을 후배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자랑스러워하고 마음의 격려를 보낸다는 그를 많은 후배들은 가장 존경하는 대선배로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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