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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기고

[청춘예찬] 골목문구생활 ②고물자골목이라는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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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채람 문화기획자

문구점을 어디에 열지 고민했을 때 우리가 생각했던 몇 가지 조건들이 있었다. 번잡한 도로나 상권보다는 사람들이 걷다가 자연스레 방문할 수 있는 길 안쪽. 켜켜이 쌓인 세월의 흔적이 편안한 공간. 또 기왕이면 전라감영과 도보로 멀지 않은 곳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조건들을 따라가다 보니 자연스레 구도심으로 이어졌다. 시간이 날 때마다 ‘임대’가 붙은 건물들, 오래된 상가들, 빈집들을 보러 다녔다. 몇 개월간 이어졌지만 딱 여기다 싶은 곳을 만나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우연히 오랜만에 ‘고물자골목’에 들렀을 때, 오래전부터 눈여겨보던 공간이 비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건물 코너에 자리 잡아 입체적이고 특이한 공간 구조, 내실이 딸려 있어 쓰임에 따라 분위기를 달리 할 가능성, 무엇보다 오래된 골목이 주는 편안함. 우연처럼, 아니 운명처럼 우리는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고물자골목’. 도대체 무슨 뜻인지 가늠조차 어려운 이 골목은 오랜 시간을 품고 있다. 풍남문에서 전주보건소로 이어지는 이 지름길은 조선시대 고지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세기 전라감영이 있었던 시절에는 ‘은방거리’로, 한국전쟁 이후 미군의 구호물자가 활발히 유통되며 ‘구호물자골목’이 되었고 빠르게 발음하며 줄이다 보니 ‘고물자골목’이 되었다는 말이 전해진다. 구호물자와 함께 흘러온 청바지를 수선하고 판매하는 가게들이 자연스레 생겨나 한때는 ‘청바지골목’, ‘양키골목’이라고도 불렸다. 강정을 만드는 ‘오꼬시’가게들이 여럿 생기며 ‘오꼬시골목’이라 불리던 시절도 있었다. 또 1970년대에는 남부공동배차장이 골목 인근에 있었기 때문에 ‘배차장골목’이라고 불렸다. 남부시장에서 배차장으로 이어지는 길이었기 때문에 오가는 사람들이 서로 어깨를 부딪칠만큼 번잡한 골목이었다. 한복을 만들던 크고 작은 집들이 많이 있었을 때는 ‘한복골목’, 1980년대 초반 교복 자율화 정책 전까지는 교복을 짓고 수선하던 집들도 많아 ‘교복골목’, ‘수선골목’이라고도 불렸다. 

골목은 그때그때 이름을 덧입으며 변해왔다. 2000년대 이후 이 골목은 거의 멈춰있는 듯했다. 남은 건 오래된 한복집, 몇 채의 주택들. 그러다 ‘바늘소녀공작소’가 먼저 골목에 자리를 잡았고, 도시재생사업이 진행되며 ‘공유공간 둥근숲’이 문을 열었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월세와 구도심이 가진 특유의 분위기에 이끌린 젊은 사장님들이 인근에 카페와 소품 가게, 작업실을 하나둘 내면서 골목 밖에도 변화가 생겼다. 

문구점을 고물자골목에 내고 나니, 우리가 상상했던 가게의 분위기와 골목이 똑 닮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묵묵하게 자신들만의 속도로 자리를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 신도시나 상권에서는 절대 만날 수 없는, 낡았지만 따뜻한 분위기까지. 시대에 따라 매번 조금씩 달라진 얼굴을 하며 이어져 온 곳. 시대의 풍경과 함께 자신만의 리듬으로 조용히 살아온 거리. 

우리는 그 사이에 들어와 있다. 오래된 흔적들이 걷히지 않은 채 남아, 모든 것이 또렷하지는 않지만 다정한 분위기를 만드는 곳. 골목의 시간을 너무 빠르게 바꾸지 않으면서 이곳의 결을 따라 조심스레 살아가고 싶다. 낡았지만 견고하고, 완벽하지는 않지만 온전한 공간 속에서. 그렇게 우리는 지금 오래된 것들과 새로운 일상이 겹쳐지는 이 세계에 스며들고 있다. 그 이름은 ‘고물자골목’이다. 

김채람 문화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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