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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신년기획] 천년의 종이, 전북의 내일을 쓰다

천년의 종이, 남아 있는 시간과 사라지는 시간 사이에서

전주전통한지원의 2대의 반자동 한지 뜨는 기계 중 1대만 운영되고 있다. /전현아 기자

전주의 한지 공방에서 가장 조용한 순간은 종이가 마를 때가 아닌 물을 올리지 않는 날이다. 

대야는 비어 있고, 대나무 발은 벽에 기대 있다. 장인은 공방에 나와 있지만 종이를 뜨지 않는다. 햇빛과 바람, 물의 온도는 나쁘지 않다. 그럼에도 “오늘은 안 뜹니다”라는 말이 돌아온다. 종이를 만들지 않는 날이 늘어났다는 사실은, 한지가 사라지고 있다는 신호라기보다 한지를 둘러싼 시간이 달라졌다는 징후에 가깝다.

견오백지천년(絹五百紙千年).

비단은 오백 년을 가고, 한지는 천 년을 간다는 이 말은 여전히 인용된다. 실제로 한지는 시간을 견뎌왔다.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한 장의 종이가 1300 년 가까운 세월을 통과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종이는 기록을 지켜냈고, 기록은 역사를 남겼다. 그러나 종이가 견딘 시간과, 그 종이를 만들어온 시간은 같은 속도로 흐르지 않는다.

 지난 26일 전주전통한지원에서 한지 장인이 한지를 뜨고 있다. /전현아 기자

전주는 오랫동안 한지의 도시였다. 조선시대 전국 한지 생산의 상당 부분이 이곳에서 이뤄졌고, 전주한지는 왕실 진상품이자 외교 문서로 쓰였다. 닥나무가 자라고, 철분이 적은 물이 흐르며, 종이를 뜨는 기술이 지역 안에서 축적됐다. 종이는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기록과 행정, 예술을 떠받치는 문화의 바탕이었다.

이 바탕 위에서 전주의 문화도 함께 성장했다. 출판과 서예, 공예가 종이를 중심으로 엮였고, 종이를 만드는 사람과 쓰는 사람이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한지를 쓴다는 것은 특별한 선택이 아니라 일상이었다. 종이는 소비재이기 이전에 생활의 일부였고, 한지는 삶의 속도에 맞춰 쓰였다.

하지만 지금 전주에서 한지는 일상보다는 상징에 가깝다. 공방은 남아 있지만 매일 종이를 뜨지는 않는다. 생산보다 체험이 앞서고, 판매보다 전시가 많아졌다. 장인은 종이를 만드는 사람인 동시에, 종이를 설명하는 사람이 됐다. 한지를 사러 오는 사람보다 ‘보러 오는 사람’이 많아진 풍경은 한지가 놓인 현재의 좌표를 보여준다.

 지난 26일 전주전통한지원에서 한지 장인이 한지제작 작업 중이다. /전현아 기자

전주한옥마을에 위치한 전주전통한지원을 운영하는 강갑석 전주한지장은 이 변화를 누구보다 체감하고 있다. 그는 “지금은 상황이 안 좋은 정도가 아니라, 쓰임새가 없어지다 보니 마지막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고 말했다. 한지를 만드는 일이 더 이상 ‘업’으로 유지되기 어려운 현실이라는 뜻이다.

 전주전통한지원에서 판매 중인 전주 한지. /전현아 기자

강 장인은 “예전에는 직원이 40~50명씩 있었고, 판로가 있었기 때문에 큰돈은 못 벌어도 유지는 됐다”며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사양길로 접어들더니 지금은 버틸 힘조차 없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공방을 줄이고, 팔복동에 있던 공장도 정리했다. 한지 장판 생산을 위해 새로 지었던 시설 역시 코로나19를 거치며 문을 닫았다. 그는 “지금은 팔리지도 않는데 재고만 계속 쌓이고 있다”고 했다.

종이를 뜨는 일은 손의 노동이자 시간의 노동이다. 닥나무를 베고, 찌고, 삶고, 벗기고, 두들기고, 섞고, 뜨고, 말리는 과정은 수십 번의 손길을 거친다. 옛사람들이 한지를 ‘백지(百紙)’라 부른 것도 아흔아홉 번의 손길 뒤에 마지막 백 번째 손이 더해져야 비로소 완성된다는 뜻에서였다. 그러나 지금 그 백 번째 손을 이어갈 사람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밥벌이가 안 되는데 누가 이 일을 하겠습니까.”

강 장인의 말은 담담했지만 무거웠다. 기술을 온전히 이어받을 후계자는 없고, 오랜 세월 함께 일해온 인력만 남아 있다. 그는 “지금 남아 있는 분도 40년 가까이 함께한 사람이라 끝까지 같이 가는 것뿐”이라며 “그분이 그만두는 날이 오면, 그날이 한지원을 정리하는 날이 될 것”이라고 했다.

올해 한지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가 거론되는 상황에 대해서도 그의 시선은 냉정하다. “등재가 된다고 해서 쓰임새가 생기느냐”는 반문이 먼저 나왔다. 그는 “기록으로 남는 건 의미가 있지만, 실제로 사용되지 않으면 만드는 사람은 살아갈 수 없다”며 “이제는 산업으로 보기는 어렵고, 문화로서 보존하지 않으면 몇 년 안에 사라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일본처럼 국가가 장인을 고용해 보존하는 구조가 아니라면 지속은 어렵다는 지적이다.

전주공예품전시장에 전시된 김선애 지승장의 투각화병.

한지는 천 년을 간다고 말하지만, 장인은 그렇지 않다. 전주에 남은 전통 한지 장인들의 평균 연령은 높아졌고, 기술을 전수할 구조는 충분하지 않다. 종이는 남아 있어도, 종이를 만드는 시간은 줄어드는 역설이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한지가 ‘문화유산’으로 불리는 순간, 동시에 ‘현재의 기술’에서 멀어지는 아이러니도 함께 존재한다.

 전주전통한지원에서 판매 중인 전주 한지 지끈. /전현아 기자

그럼에도 한지는 여전히 가능성의 재료다. 기록과 예술, 공예와 디자인, 보존과 복원의 영역에서 한지는 다른 종이가 대신할 수 없는 자리를 지닌다. 중요한 것은 한지를 과거의 유산으로만 남길 것인가, 아니면 지금 이 시대의 선택지로 다시 불러올 것인가다.

본보는 이 질문에서 기획 ‘천년의 종이, 전북의 내일을 쓰다’를 시작한다. 이 기획은 한지가 얼마나 오래됐는지를 다시 증명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지금 이곳에서 한지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지, 종이를 뜨는 사람과 종이가 쓰이는 자리를 기록하려 한다. 천 년을 견딘 종이와, 지금 사라지고 있는 시간을 함께 바라보는 것, 그것이 이 기획의 출발점이다.

천년의 종이는 아직 남아 있다. 이제 묻는다. 이 종이를 만드는 시간은, 앞으로 얼마나 더 이어질 수 있을까.

전현아 기자

전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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