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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하나 마나 한 말

최훈 강원대 삼척자유전공학부 교수

‘동어반복’이라는 철학 개념이 있다. 필연적으로 참인 명제를 뜻한다. 필연적으로 참이라고 하니 뭔가 긍정적인 의미로 들리지만 그 반대이다. 누군가가 “아저씨는 남자다.”라고 한다고 해 보자. 그 아저씨에 대해 주는 정보가 아무것도 없다. ‘아저씨’라는 말의 정의에 이미 ‘남자’라는 뜻이 들어 있으므로, 아저씨가 무슨 말인지 안다면 남자라는 것은 이미 알기 때문이다.

꼭 정의된 뜻을 되풀이하지 않는 경우에도 필연적으로 참이 되는 때가 있다. “지금 비가 온다.”고 하면 실제로 비가 오는지에 따라 참이 되기도 하고 거짓이 되기도 하니 필연적으로 참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 비가 오거나 비가 오지 않는다.”라고 하면 실제로 비가 오는지와 상관없이 필연적으로 참이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우산을 가지고 나갈지 말지 결정하는 데는 아무 쓸모가 없다. 동어반복을 영어로는 ‘토톨로지(tautology)’라고 한다. 토톨로지는 동어반복을 뜻하기도 하지만 ‘하나 마나 한 말’이라는 뜻도 있다. 아저씨는 남자이고, 지금 비가 오거나 오지 않고, 모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하나 마나 한 말이다.

정치인들은 동어반복의 달인이다. 일본의 현 방위대신이기도 한 고이즈미 신지로 의원이 특히 이것으로 유명하다. 고이즈미라는 이름이 낯익을 텐데,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아들이다. 고이즈미 의원은 “바뀌기 위해서는 변화가 필요합니다.”라거나 “경기가 좋아지면 반드시 불경기에서 탈출할 수 있습니다.”와 같은 ‘어록’을 남겼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듣고 나면 아무것도 들은 것이 없다. 정치인들이 이렇게 구체적인 내용 없는 뻔한 말을 하는 것은 논란을 피하고 적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 헛웃음을 불러일으키는 고이지미 의원의 말은 그래도 극우 망언을 일삼은 아버지 총리보다는 낫다고 해야 할까?

흥미로운 것은 동어반복처럼 보이지만 동어반복이 아닌 명제도 있고, 반대로 동어반복처럼 안 보이지만 실은 동어반복인 명제도 있다는 점이다.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말이 있다. 겉으로는 같은 말이 반복되므로 필연적으로 참인 명제 같다. 이 말을 들은 사람은 당연히 맞는 말을 한다는 생각으로 상대방의 제안대로 한다. 그러나 잘 알겠지만 이 말은 실제로는 불법이나 부정을 눈감아주면서 서로 이득을 보자는 뜻으로 쓰인다. 그러니 어떤 경우에도 참인 명제는 아니다.

거꾸로 뭔가 내용이 있는 말인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하나 마나 한 말인 경우도 많다. “우리는 국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겠습니다.”라는 정치인의 말을 생각해 보자. 듣기에는 구체적인 약속 같다. 그러나 정치인이 하는 일이 국민의 말을 듣는 것 아닌가? 결국 정치인이 정치를 하겠다는 말밖에 안 된다. 고이즈미 의원처럼 노골적이지 않다뿐이지 결국 하나 마나 한 말이다. 언론의 칼럼에서도 동어반복은 흔하다. 어떤 칼럼니스트가 “앞으로의 세상은 변화에 적응하는 사람이 성공할 것이다.”라고 쓴다면? 뭔가 있어 보이는 말처럼 보인다. 그러나 성공의 정의를 변화 적응 능력으로 본다면 이 역시 동어반복이다. 한 기업인이 “성공하려면 성공하는 사람들의 습관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면 역시 마찬가지다. 성공하는 사람의 습관이란 결국 성공으로 이어지는 습관이니 같은 말을 할 뿐이다.

문제는 이런 말들이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있어서 쉽게 알아채기 어렵다는 점이다. 동어반복은 명제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형식 때문에 참이 된다. 간단한 예는 금방 알아볼 수 있지만, 복잡하게 표현되면 마치 의미 있는 통찰처럼 들린다. 하지만 껍데기를 벗겨내면 “성공은 성공이다.”라는 빈껍데기만 남는다.

새 해를 맞아 새로운 칼럼을 연재하게 되었다. 앞으로 이 칼럼에서 하나 마나 한 말은 하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그게 시간을 내어 칼럼을 읽는 사람에게 예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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