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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기다리며 - 송 순 녀

정초부터 쏟아지는 폭설은 십년 된 제 중고차의 발목을 묶어 놓고야말았습니다. 시외지역이라 더 많은 눈이 내리곤 하는 지형 탓에 버스로 출퇴근을 하기로 작정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녁 퇴근길에 아무도 없는 빈 정류장에서 홀로 버스를 기다리는 일은 저의 인내력을 시험하고도 남을 정도였습니다.

 

겨우 저녁 일곱 시가 지났을 뿐인데 산골의 겨울은 이미 깊은 어둠에 쌓여 있습니다. 버스가 들어오는 방향만을 향해 목을 빼고 기다리다보니 이 순간 가장 부러운 것은 따뜻한 차 안에서 여유롭게 운전하고 가는 사람입니다.

 

승용차 불빛이 다가오면 마음은 간절하면서도 차마 손을 들 용기가 나지 않아 애꿎은 손가락만 주머니 속에서 꼼지락거립니다. 그러면서도 다가온 승용차가 멈출 듯 그냥 미끄러져 가면 차 꽁무니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참, 인정머리가 없는 사람들이군. 아니, 가는 길에 태우고 가면 기름이 더 들기라도 하나? 내가 먼저 손들기 전에 그치면 안 되는 거야?' 하고 투덜댑니다. 그러다가 이번엔 '왜, 버스는 안 오는 거야? 그러니까 니들이 파업을 해도 시민들이 모르는 척하는 거라고. 시간을 지키지 않은 운전자가 도대체 누군지, 내 그 얼굴을 똑똑히 봐두고 말테다.' 씩씩거리며 거친 발길로 옆에 쌓인 눈을 툭툭 차보지만 화는 좀처럼 풀리지 않습니다. 한 시간의 좌선은 거뜬한데 버스를 기다리는 일은 단 십 분을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십분. 삼십분. 오십분…. 온몸이 덜덜 떨려오고 손발이 쑤셔옵니다. 자꾸 콧물이 새어나오고 코와 입 주변이 칼로 베이는 듯 아파옵니다. 나중엔 머리가 지끈거립니다. 저기 멀리서 아주 큰 불빛이 산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게 보입니다. 튕기듯 일어나 차도에 다가섭니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빨간 불빛을 향해 손을 마구마구 흔들어대지만 웬걸, 큰 차는 나를 비켜 지나치고 맙니다. 직행버스였습니다.

 

그렇게 주머니 속에서 손가락만 꼼지락거리거나 시내버스인 줄 알고 손을 들었다가 뒤로 물러서기를 반복하는 사이 몸은 점차 굳어져가고 얼굴은 새파래져 갑니다. 이 적막한 겨울 산속에서 이대로 영영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 건 아닐까? 두려운 생각이 고개를 들기도 합니다. 이렇게 추위와 공포에 떨고 있는 나를 데리려 와달라고 부탁해 볼만한 사람이 단 한사람도 없다는 사실이 가슴을 후빕니다. 그러다가 입장을 바꾸어, 누군가가 지금의 이 상황에 맞닥뜨려 있는 걸 알았다면 그를 위해 이 폭설을 뚫고 갈 용기가 있는가?'하고 자문해봅니다. 절로 고개가 흔들립니다.

 

각박하고 흉흉한 일들이 무시로 일어나는 세상에, 그것도 눈이 쏟아지는 인적 드문 한밤중에 낯선 사람을 선뜻 태우기란 제가 운전자라 하여도 내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제 앞을 지나친 운전자들에 대한 미움도 사라집니다. 우리 인생에 오지 않는 게 어디 버스 하나뿐이던가요. 청춘이, 꿈이, 성공이, 건강이 다 그렇지요.

 

이제 온 몸이 아리다 못해 눈물이 그렁그렁 맺힐 때쯤 다시 저기 멀리서 지금까지 봐왔던 불빛과 다른 녹색불빛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가슴이 뜁니다. 아! 시내버스입니다. 진짜로 기적처럼 저 눈발을 헤치며 용감하게 버스가 오고 있습니다. 손을 들지 않았는데도 버스는 제 앞에서 멈춥니다. 정확히 한 시간 사십오 분 만에 '촤르르 끼이익~ 덜컹' 문이 열립니다. 세상에 부러울 게 없습니다.

 

버스는 폭설 속에서도 천리마처럼 달려 나갑니다. 한 사람뿐인 승객을 태우고 시내로 향하는 버스에게 되려 제가 미안해집니다. 버스기사를 욕하던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무한한 감사와 고마움이 가슴에 찹니다. 안전하게 집 앞에 내려준 기사님께 정중히 절을 올리며 첨으로 입을 엽니다.

 

"기사 아저씨, 정말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조심히 살펴가세요."

 

오늘도 눈이 내립니다. 저는 완전무장을 하고 저녁 정류장에 서 있습니다.

 

 

 

* 수필가 송순녀씨는 2004년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했다. 완주 송광사 입구에서 차(茶)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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