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단 우유 빛 동전이 저고리의 매무새를 살려낸다. 긴 옷고름도 천천히 다렸다. 정갈한 한복의 맵시는 옷고름에서 마무리된다. 옷고름을 매 본지도 아슴푸레하다. 잠시 옷이 간직한 세월을 헤아려본다. 큰어머니 회갑 잔치 때 맞춰 입은 옷이다. 큰어머니는 이십이 년 전 팔순을 치루셨다. 그러니 옷 역시 스무고개를 넘겼건만 아직도 입고 나서기 손색없는 옷이다. 골 깊은 주름을 펴면서 오래전 그날을 떠올린다.
평생을 혼자 사신 큰어머니는 시집질녀와 친정질녀에게 같은 한복을 입혔다. 다행히 둘은 나이가 같아서일까 진달래 빛 한복이 잘 어울렸다. 그날 모인 축하객들이 딸이 둘이구나 짐작했을 것이다. 우리는 각자 남편과 함께 큰절을 올렸다. 옷이 주는 무게 탓이었을까! 절을 올리는 맘이 숙연했다. 우리부부가 먼저 큰절을 드리고, 친정질녀 부부가 절을 할 순서가 되었다. 왜 그랬을까?
그녀는 좋은 날 분위기를 바꿔버렸다. 눈물범벅이 되어 큰절을 올리더니, 일어서지도 못한 채, 흐느끼더니 이내 통곡이 되었다. 잔치 분위기는 일순간 슬픔의 늪이 되어버렸다. 양가 친인척이야 눈물의 뜻을 이해하고도 남았지만, 축하객들은 그 순간 조금 어리둥절했으리라! 몇 년이 흐른 지금도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 일이다.
그녀는 학교를 나보다 한 해 먼저 입학했다.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취업문을 두드려야 했던 나와 달리, 캠퍼스의 낭만을 만끽하는 여대생이었다. 꿈에라도 대학 정문을 한 번 밟아 보고 싶었던, 당시 내 처지로는 그녀의 생활은 부럽기 그지없었다. 그랬던 그녀가 주체할 수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은, 내겐 겉돌기만 하던 큰어머니의 정을 한 아름 품고 자랐기 때문이었으리라.
큰어머니는 외롭고 고단한 삶을 살았다. 신혼의 달콤함도 모른 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자식 한 명도 없이 평생을 한스럽게 사신 분이다. 다행히 곁에는 늘 그녀가 있었다.
질녀를 위해 새벽밥을 지었고, 도시락을 쌌다. 시장을 갈 때도 목욕탕을 갈 때도 질녀와 함께했다. 주변에서 모녀지간으로 착각하기 마땅했다. 그녀가 성장하는 동안은 큰어머니에게는 모정의 싹을 가꾸는 살뜰한 세월이었다. 결혼해서도 출산까지 친정어머니의 손길이 필요한 자리에는 항상 서 있었다. 직장생활을 하던 그녀의 살림을 거들면서 한동안 서울생활도 하셨다.
그녀는 결혼을 하고 여자에게 목숨 같은 가정의 소중함과 가족의 정을 알아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평생을 외롭게 살아 온 고모의 일생을 반추하면서 복받치는 설움을 가누지 못하고 만 것이다. 자매처럼 옷을 입었지만, 난 그녀를 달래거나 말릴 엄두도 못 내고 지켜만 봐야했다.
그날의 설움이 내 가슴에 맺혔을까, 옷은 한동안 장롱을 벗어나지 못했다. 옷을 장롱지기로 묵혀 두기는 고운물색이 눈에 아른거렸다. 가끔 이런저런 행사에 예복이 필요할 때면 그 한복을 꺼내 입었다. 매번 옷고름을 동이면서 발길 닿았던 곳 소식으로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전해드린다. 그날 눈물을 참지 못했던 그녀는 고모의 설움을 삭혀드리지도 못한 채, 사십대 초반에 세상을 바쁘게 등지고 말았다.
큰어머니는 딸로 의지하던 질녀를 가슴에 묻은 채 의연하게 삶을 가꾸며, 내게 남은 정을 쏟아 주신다. 오랫동안 화초를 가꾸던 화단을 없애고 만든 텃밭에서 가꾼 채소를 다듬어 놓고 가끔 나를 부르신다. 언제나 고운 한복 빛깔만큼 변함없는 큰어머니의 정이다.
*수필가 황점숙씨는 2006년'좋은수필', 2013년 '문예연구'로 등단. (사)한국편지가족전북지회장·한글문해교육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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