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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을 다리며

▲ 황점숙
밝은 진달래 빛 한복을 다렸다. 한복도 유행이 있다지만, 여전히 곱고 아름다운 빛깔이 유행쯤은 무색케 한다. 진분홍 겉감과 어우러진 연분홍 속감에 금박무늬가 곱다. 물을 뿌리고 가열된 다리미로 주름을 펴간다. 옷장 속에서 묵혔던 오랜 세월이 서서히 사라진다.

 

새로 단 우유 빛 동전이 저고리의 매무새를 살려낸다. 긴 옷고름도 천천히 다렸다. 정갈한 한복의 맵시는 옷고름에서 마무리된다. 옷고름을 매 본지도 아슴푸레하다. 잠시 옷이 간직한 세월을 헤아려본다. 큰어머니 회갑 잔치 때 맞춰 입은 옷이다. 큰어머니는 이십이 년 전 팔순을 치루셨다. 그러니 옷 역시 스무고개를 넘겼건만 아직도 입고 나서기 손색없는 옷이다. 골 깊은 주름을 펴면서 오래전 그날을 떠올린다.

 

평생을 혼자 사신 큰어머니는 시집질녀와 친정질녀에게 같은 한복을 입혔다. 다행히 둘은 나이가 같아서일까 진달래 빛 한복이 잘 어울렸다. 그날 모인 축하객들이 딸이 둘이구나 짐작했을 것이다. 우리는 각자 남편과 함께 큰절을 올렸다. 옷이 주는 무게 탓이었을까! 절을 올리는 맘이 숙연했다. 우리부부가 먼저 큰절을 드리고, 친정질녀 부부가 절을 할 순서가 되었다. 왜 그랬을까?

 

그녀는 좋은 날 분위기를 바꿔버렸다. 눈물범벅이 되어 큰절을 올리더니, 일어서지도 못한 채, 흐느끼더니 이내 통곡이 되었다. 잔치 분위기는 일순간 슬픔의 늪이 되어버렸다. 양가 친인척이야 눈물의 뜻을 이해하고도 남았지만, 축하객들은 그 순간 조금 어리둥절했으리라! 몇 년이 흐른 지금도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 일이다.

 

그녀는 학교를 나보다 한 해 먼저 입학했다.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취업문을 두드려야 했던 나와 달리, 캠퍼스의 낭만을 만끽하는 여대생이었다. 꿈에라도 대학 정문을 한 번 밟아 보고 싶었던, 당시 내 처지로는 그녀의 생활은 부럽기 그지없었다. 그랬던 그녀가 주체할 수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은, 내겐 겉돌기만 하던 큰어머니의 정을 한 아름 품고 자랐기 때문이었으리라.

 

큰어머니는 외롭고 고단한 삶을 살았다. 신혼의 달콤함도 모른 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자식 한 명도 없이 평생을 한스럽게 사신 분이다. 다행히 곁에는 늘 그녀가 있었다.

 

질녀를 위해 새벽밥을 지었고, 도시락을 쌌다. 시장을 갈 때도 목욕탕을 갈 때도 질녀와 함께했다. 주변에서 모녀지간으로 착각하기 마땅했다. 그녀가 성장하는 동안은 큰어머니에게는 모정의 싹을 가꾸는 살뜰한 세월이었다. 결혼해서도 출산까지 친정어머니의 손길이 필요한 자리에는 항상 서 있었다. 직장생활을 하던 그녀의 살림을 거들면서 한동안 서울생활도 하셨다.

 

그녀는 결혼을 하고 여자에게 목숨 같은 가정의 소중함과 가족의 정을 알아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평생을 외롭게 살아 온 고모의 일생을 반추하면서 복받치는 설움을 가누지 못하고 만 것이다. 자매처럼 옷을 입었지만, 난 그녀를 달래거나 말릴 엄두도 못 내고 지켜만 봐야했다.

 

그날의 설움이 내 가슴에 맺혔을까, 옷은 한동안 장롱을 벗어나지 못했다. 옷을 장롱지기로 묵혀 두기는 고운물색이 눈에 아른거렸다. 가끔 이런저런 행사에 예복이 필요할 때면 그 한복을 꺼내 입었다. 매번 옷고름을 동이면서 발길 닿았던 곳 소식으로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전해드린다. 그날 눈물을 참지 못했던 그녀는 고모의 설움을 삭혀드리지도 못한 채, 사십대 초반에 세상을 바쁘게 등지고 말았다.

 

큰어머니는 딸로 의지하던 질녀를 가슴에 묻은 채 의연하게 삶을 가꾸며, 내게 남은 정을 쏟아 주신다. 오랫동안 화초를 가꾸던 화단을 없애고 만든 텃밭에서 가꾼 채소를 다듬어 놓고 가끔 나를 부르신다. 언제나 고운 한복 빛깔만큼 변함없는 큰어머니의 정이다.

 

*수필가 황점숙씨는 2006년'좋은수필', 2013년 '문예연구'로 등단. (사)한국편지가족전북지회장·한글문해교육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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