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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청일전쟁 중국 역사현장- 산동성 웨이하이]7000톤급 북양함대 철갑함 복원 '치욕의 역사' 되새겨

군사·경제적 요충지, 전남 여수와 '닮은 꼴' / 동학농민혁명 구실로 조선 땅서 전쟁 벌여 / 막강 청 해군, 일본과 동북아 패권 경쟁서 져

▲ 웨이하이 항구에 전시돼 있는 딩위엔 함. 딩위엔 함은 청나라가 독일에서 도입해 북양함대에 배치해 청일전쟁 당시 사용했으나 침몰됐고, 후대에 실제 크기로 복원됐다.

난은 평정됐다.

 

홍수전이 숨을 거둔 지 한 달 만에 천경이 함락됐다. 다시 청의 ‘남경’으로 돌아온 도시에는 양강 총독이 머무르게 됐다.‘내우’는 정리돼가는 듯 보였지만, ‘외환’은 여전했다.

 

제2차 아편전쟁(1860)에서 또다시 굴욕을 당한 청은, 이어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고 제국주의의 길을 걷기 시작한 신흥 일본제국의 대만 침공(1874)과 류큐 합병(1879)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1876년에는 조공국이었던 조선이 일본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개항을 하게 되면서, 조약문을 통해 ‘자주국’을 선언했다.

 

청으로서는, 이대로는 ‘중화제국’의 면모가 서질 않았다.

 

△북양함대의 도시 웨이하이

 

산동성 웨이하이(위해·威海)는, 조금 과장 섞어 말하자면 ‘중국어 좀 많이 쓰는 여수’ 같은 느낌이었다.

 

바다를 끼고 달리는 도로변에는 하나 걸러 하나 빈도로 간판에 한글이 적혀 있었고, 그만큼 한식당도 많았다. 정돈된 도로망과 건축물이 이루는 경관도 비슷했다. 웨이하이가 여수와 비슷한 이유는 또 있다. 바로 이곳이 근대 청 제국의 자존심이었던 북양함대의 근거지였다는 것이다. 전라 좌수영이 있던 여수와 닮은꼴이다.

 

서로가 닮은 걸 알았는지 1996년 두 도시는 자매결연을 했고, 그 관계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산동반도 동쪽 끝에 위치한 웨이하이는 그 지리적 이점 때문에 오래 전부터 군사적·경제적 요충지로 여겨졌다. 당 대에는 신라의 법화원이 세워졌고, 명 대에는 왜적에 대비한 요새가 들어섰다.

 

지형적으로도, 완만하게 들어간 만을 류공다오(유공도·劉公島)가 막아서는 모양새로, 군항으로서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리홍장(이홍장·李鴻章)이 북양함대를 건설하면서 이곳을 근거지로 삼은 이유로 이 정도면 충분했을 것이다.

 

△양무운동과 청의 중흥

▲ 딩위엔 함 조타장치.

“해군 건설은 20년 동안 이뤄졌습니다. 대만 침공(1874) 등에서 일본의 야심을 파악하고, 해군이 약한 것이 청의 문제라는 인식에서 해군 건설이 추진됐죠.”

 

왕지화(王記華·49) 중국갑오전쟁박물관 연구관원은 청일전쟁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1874년부터 1880년께까지는 준비단계였다. 당장 해군을 건설할 수 있는 기반이 없으니 열강에 가서 운용법과 같은 것들을 배워나갔다.

 

1880년대에 접어들면서, 청의 해군은 대대적인 확장을 거치게 된다. 중앙정부의 지원도 탄탄했고, 리홍장의 의지도 강력했다. 북양대신이었던 그는 북양함대에 모든 자원을 집중했다.

 

그는 독일에서 딩위엔(정원·定遠)과 천위엔(진원·鎭遠)이라는, 7000톤이 넘는 철갑함도 도입했다. 이는 당시 동아시아 최대·최강이었다.

 

그 결과, 1890년대에 접어들면서 북양함대는 명실상부한 동아시아 최강의 함대로 떠올랐다.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전쟁

 

톈진조약(1885) 이후 겉으로는 평화로워보이던 동아시아도, 속사정은 상당히 복잡했다.

 

메이지 유신을 통해 성공적으로 자본주의 체제로의 전환을 마친 일본은 원료 공급지와 상품 시장을 찾아 팽창할 수밖에 없었다. 급격한 사회 변화에 따른 국내 갈등은 말할 것도 없었고, 1870년대에 대두한 정한론(征韓論·일본의 이익을 위해 조선을 정벌하자는 주장)의 그림자도 여전했다.

 

청도 사정이 복잡했다. 이미 일본의 대만 침공과 류큐 합병에 무기력하게 끌려간 경험이 있는지라, 조선에 대해서만큼은 종주권을 놓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이런 양국의 입장은 군비 경쟁으로 귀결됐다. 청의 북양함대가 급부상하자 일본은 그에 맞설 신형 함선들을 경쟁적으로 도입했다.

 

이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불씨를 당겨버린 것이 바로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이었다.

 

농민군의 기세에 놀란 조선은 청에 파병을 요청했고, 조선에 대한 ‘종주국으로서의 의무’를 다함으로써 세를 과시하고 싶었던 청은 곧바로 아산만에 원병을 상륙시켰다.

 

문제는 톈진조약이었다. 이 조약에 들어있던 ‘양국은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 경우 서로 통보한다’는 내용을 근거로 일본도 군대를 파견한 것이다. 전주 화약으로 농민군이 해산하고 조선 조정도 양국에 군대를 물릴 것을 요구했지만, 이런 기회를 일본이 놓칠 리가 없었다.

 

왕지화 연구관원은 “동학농민혁명은 구실에 불과했다”고 잘라 말했다.

 

청일전쟁이 공식적으로 시작하기 전인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하며 조선을 영향력 아래에 두고자 했다. 동아시아를 향한 팽창의 야욕이었다.

 

일본 아사히신문이 보도한 내용을 엮은 책 ‘동아시아를 만든 열 가지 사건’은 아예 “청일전쟁은 경복궁에서 시작됐다”고 언급하고 있다.

 

△청의 ‘잃어버린 20년’

 

괴상하게도, 청이나 일본이 아닌 조선 땅이 전쟁터가 됐다.

 

1894년 7월 25일 아산 인근 풍도 앞바다의 포성으로 시작된 전쟁은 평양, 압록강 하구 등에서의 전투를 거친 뒤 1895년 3월, 일본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이 났다. 청이 자랑하던 북양함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전후 맺어진 시모노세키 조약의 결과, 청이 지불해야 했던 전쟁배상금만 2억냥이었다. 당시 청의 연간 재정이 8000만냥이었으니, 재정난은 뻔한 결과였다.

 

여기에 일본은 대만, 요동 반도 등의 영토도 요구했다. 독일·프랑스·러시아의 ‘3국 간섭’으로 이 같은 요구는 철회됐지만, 대신 이들 열강이 중국의 도시들을 떼어갔다.

 

안 그래도 힘들었던 중국 장삼이사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태평천국운동이 진압된 지 30년 만의 일이었다.

 

전쟁은 끝났다. 하지만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 왕지화 중국갑오전쟁박물관 연구관원 "일본 국제정세 위협은 현재도 진행"

- 청일전쟁의 패배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시는지?

 

“메이지유신 이후의 근대화 노력으로 일본의 군사력은 강해졌다. 당시 중국은 리홍장의 주도 하에 군함을 구입하는 등 군비 증강에 주력했는데, 이것이 북양함대다. 하지만 청일전쟁 즈음에는 정부의 재정난과 서태후의 사치 등으로 인해 투자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훈련도 부실해졌다. 반면 일본은 전쟁에 대한 준비가 철저했다. 1890년 이후 4년 동안 이뤄진 집중 투자로 군세를 따라잡았다.”

 

- 청일전쟁 당시와 지금의 국제정세를 비교해본다면?

 

“공통점이라면 일본의 위협을 들 수 있겠다. 이것은 현재진행형이다. 평화헌법 재해석으로 인해, 일본은 현재 동북아의 가장 큰 불안 요소다. 120년 전의 길을 일본이 걷고 있는데, 한·중 학자들이 힘을 합쳐 견제해야 한다. 물론 다른 점도 있다. 120년 전에는 청나라가 조선의 종주국이었다면, 현재는 동등한 관계다. 또 120년 전과는 달리 지금의 중국은 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다. 다만 중국도 주변국과의 마찰이 자꾸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 또 하나의 불안요소라고 할 수 있다.”

 

- 청일전쟁 후 중국 민중의 반응은 어땠는지?

 

“막대한 배상금으로 인해 재정난이 가속화했다. 또 중화민족의 자존심에도 큰 상처가 났다. 뤼순(여순·旅順), 칭다오(청도·靑島)가 각각 러시아와 독일에 넘어가고, 웨이하이도 영국에 넘어가면서 위기의식이 생겨났다. 무술 변법이 실패한 뒤 의화단 운동이 일어났고, 이후 신해혁명으로까지 이어졌다. 이런 상황일수록 민족이 단결하게 된다.”

 

- 청일전쟁을 국가적으로 기리는 기념일은 있는지?

 

“국가적으로 통일된 기념일은 없다. 다만 전국 각지에 갑오전쟁 박물관이 있다. 기념일이라고 하면 9월 3일이 ‘항일전쟁기념일’인데, 이 날은 후에 일어난 중일전쟁을 기리는 날이다.”

권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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