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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전문가 제언 - 미래를 향해] 동학농민혁명 현대적 위상 정립, 세계로 외연 확대 과제

■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이제는 세계화해야 할 때다 "갑오년 미완의 혁명, 세상을 깨우다 연재를 함께 시작한 지 1년이 되었다. 감회가 새롭다. 처음 제의를 받았을 때, 한편으로 걱정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 좋은 기회를 잘 살려보자는 생각도 했었다. 동학농민혁명 연구자로서 그리고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으로서 어떻게 하는 것이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을 의미 있게 기념할 수 있을 것인지 많은 고민을 하였다.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은 민간에서 주도하여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국민적 인식을 난에서 혁명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2014년 120주년에는 정부가 주체가 되어 기념사념을 하였다. 정확히 말하면 정부를 대신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주도적으로 추진하였으며 각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많은 기념사업이 이루어졌다. 말하자면 국가적 또는 국민적인 차원으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인식이 확장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는 동학농민혁명을 주제로 국회에서 국회의장이 주최하는 세미나가 개최되기도 하였다.이제 동학농민혁명과 그 정신은 더 이상 한반도의 문제로 국한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을 세계화해야 한다. 지난 10월 28-29일,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은 동학농민혁명, 평화 화해 상생의 시대를 열다라는 주제도 대규모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학술대회에서는 동학농민혁명을 한반도에 국한시키지 않고 동아시아사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분석하려고 하였다. 한중일 석학들이 모여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한국사연구회지난 11월 21일 청일전쟁동학농민혁명과 21세기 동아시아 미래 전망이라는 주제로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역시 동아시아적 관점에서 동학농민혁명을 새롭게 해석해 보고자 하였다.혹자는 동학농민혁명을 세계4대 시민혁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어쩌면 공허한 메아리가 아닌가 싶다. 한반도를 제외한 지역에서 어느 누구도 동학농민혁명을 세계 4대 시민혁명이라고 칭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를 냉철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동학농민혁명이 세계 4대 혁명으로 위상을 부여받기 위해서는 바로 우리가 동학농민혁명이 가지는 세계사적 보편성과 그 역사적 의미를 철저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세계 속에 알리는 작업을 꾸준히 해 나가야 한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동학농민혁명의 세계화를 위한 플랜을 짜야할 때가 왔다.■ 문병학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처장 "현 시대상황 맞게 재해석을"조선왕조의 극심한 부정부패와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이 최고조에 달했던 1894년 갑오년 반외세, 반봉건이라는 기치를 들고 일어난 우리 역사상 최대 규모의 농민항쟁이 동학농민혁명이다. 이 사건은 일제식민지시기와 세계사적 차원에서 전개된 동서냉전체제 구축시기에 빚어진 민족내부의 극심한 좌우익 대립, 민족분단과 한국전쟁 등의 정치적 혼란을 거치면서 반란사건 혹은 전라도 전봉준사건으로 왜곡되고 축소된 채 역사의 뒤안길에 버려졌다. 나아가 1960~1990년대 군사정권집권기에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이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과정에서 특정종교와 특정지역에 시혜적으로 편중되어 이전시기 이 사건에 가해진 왜곡과 축소가 극복되기는커녕 도리어 심화고착화되었다.다행스럽게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이던 지난 1994년을 전후하여 전국 각지에서 순수 민간 기념사업 단체들이 창립, 왜곡되고 축소된 역사를 바로세우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로써 실로 한 세기만에 동학농민혁명의 변혁지향성과 민중지향성의 현재화가 실현되었다. 그 결실이 2004년 2월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에서 제정공포된 동학농민혁명참여자등의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다. 그런데 특별법이 제정, 공포된 이후 도리어 이 사건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고 기념사업 또한 침체되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의 밑바닥에는 1980~1990년대 동서냉전체제가 해체되고, 21세기로 접어들면서 형성된 이른바 FTA(자유무역협정)라는 시대적 상황이 깔려있다.따라서 향후 기념사업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19세기말 반외세, 반봉건의 기치를 올렸던 동학농민군의 슬로건을 21세기 초입 현재의 시대상황에 맞게 재해석해내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동학농민혁명으로부터 120년이 지난 지금, 다시 한반도를 가운데 두고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 남과 북 그리고 중국러시아, 미국일본으로 구성된 6자회담이라는 회의체의 실재가 이를 증거하고 있다. 이런 시대상황이 그 어느 때보다도 1894년 갑오선열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야할 필요성을 강하게 요청하고 있다.■ 김양식 충북발전연구원 연구원 "동학혁명 새 연구지평 열자"지금으로부터 120년 전에 발발한 동학농민혁명은 근 1년에 걸쳐 전국적으로 전개되었을 뿐 아니라, 갑오개혁과 청일전쟁을 유발하면서 내전인 동시에 국제전쟁으로까지 비화된 역사적인 대사건이었다. 이를 계기로 조선왕조시스템이 파멸을 고하고 중국 중심의 전통적인 중화체제가 일본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로 전환되었다. 이 때문에 동학농민혁명 관련 연구는 상당한 수준으로 축적된 상태이나,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다.첫째, 지난 60여 년 동학농민혁명 연구는 기본적으로 오지영이 저술한 〈동학사〉에 근거를 두었다. 그러나 최근 〈동학사〉 내용이 많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 입증된 만큼, 동학농민혁명사 기본틀은 재정립될 필요가 있다.둘째, 동학농민혁명 연구사에서 지난한 쟁점의 하나는 동학의 역할과 위상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1894년 대사건에서 동학의 비중은 매우 크며 동학을 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동학의 비중은 매우 큰 것이 사실이다. 그 때문에 동학을 매우 강조한 연구자가 있는가 하면, 종교적 외피론, 또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접근하는 연구자가 있는 등 그 인식편차가 매우 컸다. 앞으로 또다른 시각에서 동학을 새롭게 평가하고 농민혁명과의 관련성을 논증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학제가 융합 연구가 반드시 필요하다.셋째, 동학농민혁명은 갑오개혁과 맞물리면서 전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학농민혁명과 갑오개혁을 상호 연계하여 객관적으로 연구한 경우는 매우 드문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두 사건을 상호 대립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보다 전체상을 알기 위해서는 1894-1895년의 조선을 하나의 시공간으로 설정하고 그 전체상을 해명하는 구조론적인 연구방법이 필요하다.끝으로 동학농민혁명사 연구는 동아시아 담론이 반드시 필요하다. 동학농민혁명은 청일전쟁과 맞물리면서 전개되었고 이를 계기로 동아시아의 일그러진 근대가 시작되었다. 일본의 침략과 양민 학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그 상흔이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따라서 앞으로의 동학농민혁명사 연구는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내적 연구에서 벗어나, 좀더 그 외연을 확대하여야만 한다. 그를 통해 조선과 동아시아가 일그러진 근대로 나아가는 일련의 과정 위에서 동학농민혁명의 성격을 새롭게 규명해야만 할 것이다.■ 이동희 전주역사박물관장 "유물유적 보존과 전승을"근래 지역문화와 지역정신 정립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 지역문화를 브랜드화하고 지역공동체를 공고히 하기 위한 지역발전 전략차원이다.전북지역은 외세를 물리치고 새사회를 염원한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발원지요 중심지이다. 따라서 동학농민혁명 정신은 전북의 정신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지역사람들도 동학농민혁명을 지역적 자긍심으로 승화시키는데 망설임이 있다.이는 그만큼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를 현재의 우리 가까이로 끌어오는데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정신을 기리고 그 역사를 지역발전의 토대로 삼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동학관련 유적 유물의 조사와 수집, 보존과 전승은 그 좋은 방안이다.그런 점에서 전북도와 동학관련 단체에서 검토했던 동학관련 자료들을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는 것은 바람직하다. 광주 5.18 관련기록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것에서 비롯되었고, 세계문화유산이 천여개에 이르러 그 가치가 예전만 못한 감이 있지만, 그래도 세계문화유산 지정은 동학농민혁명의 중심인 전북의 역사문화적 가치를 높이는데 매우 유효한 방안이다.얼마전 사발통문 소장자로부터 도지정문화재로 지정이 될 수 있으면 박물관에 기탁할 용의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사발통문은 동학농민혁명의 상징과 같은 유물로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지역정신으로 정립하거나 동학관련 자료를 세계유산으로 지정하고자 할 때 매우 요긴한 자료이다. 발견당시 문화재청에서 문화재지정가치가 있는 것으로 판명했는데 지금까지 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하고 있다. 전북도문화재 지정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동학과 관련해 오랜 숙원이었던 동학농민군지도자 유골의 정읍 황토현 안장이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의 부결로 올해도 무산되었다. 그렇다면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기리고, 그 정신을 지역정신의 구심점으로 삼기 위해, 전라감영이 있었고 동학 대도소가 설치되었던 전주에 동학농민군 지도자 유골을 안장하는 것도 적극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동학농민혁명의 역사와 정신을 지역발전의 토대로 삼기 위해서는 그 정신을 끌어안고만 있지 말고 지역민들과 함께 공유해야 한다. 동학관련 유적유물의 적극적 문화재 지정과 기념물 조성을 기대해 본다. 〈끝〉

  • 기획
  • 전북일보
  • 2014.12.31 23:02

[(49) 동학농민혁명의 세계화] 혁명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가 첫걸음

2014년 갑오년이 불과 며칠 남지 않았다. 올해는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으로 이와 관련하여 많은 기념행사와 학술대회가 있었다. 1994년 100주년만큼 큰 관심을 받지는 못했으나 어느 정도 의미 있는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이 추진되었다. 특히 각 지역에서 각 지역의 기념사업 주체들이 자발적으로 12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다양하게 펼쳤고, 학술적 영역에서 역시 학회와 기관 그리고 기념사업단체들이 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러한 기념행사와 학술대회의 큰 흐름 중에 하나는 동학농민혁명을 보는 관점을 한국사에 국한시키지 않고 동아시아사 더 나아가 세계사적 관점에서 동학농민혁명을 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는 시대적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더 이상 동학농민혁명이 한국사 속에 갇혀있어서는 안된다. 벗어나야만 한다. 그것을 우리는 동학농민혁명의 세계화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동학농민혁명의 세계화할 수 있는 가장 우선적인 방법은 무엇일까?그것은 바로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그 무엇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는 것이다.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하여 세계유산으로 가능성이 있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서는 남아있는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정비하고 보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렇게하기 위해서는 국가적 차원에서 막대한 예산을 투여해야하고 또 여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현재까지 진행된 우리나라의 유적지의 세계유산 등재에는 대략 10년 동안의 노력과 시간이 소요된 것을 볼 수 있다.반면에 세계기록유산은 기록물의 등재 필요성과 목록을 어떻게 잘 정리하느냐에 따라 등재 확률이 매우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현황을 보면, 훈민정음(1997년), 조선왕조실록(1997년), 직지심체요절(2001년), 승정원일기(2001), 해인사 대장경판 및 제경판(2007년), 조선왕조의궤(2007년), 동의보감(2009년), 일성록(2011년), 5.18민주화운동기록물(2011년), 난중일기(2013년), 새마을운동기록물(2013년) 등이다.세계기록유산은 세계적으로 가치가 있는 기록유산을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그 활용을 진흥하기 위하여 1992년부터 유네스코가 도입시행하고 있는 제도이다. 문화재청은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와 함께 우수한 기록유산을 발굴하여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함으로서 뛰어난 기록문화를 보유한 문화국가로서 한국의 위상을 높이고, 우리 기록유산이 인류 공동의 유산으로 보존되고 활용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은 바로 이러한 세계기록유산에 가장 부합되는 기록물이라 할 수 있다.세계기록유산 선정의 기준은 유산의 진정성, 독창적이고 비대체적인 유산, 세계적 관점에서 유산이 가지는 중요성 등인데,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은 여기에 대단히 부합한다. 유산의 진정성이란 해당 유산의 본질 및 기원을 증명할 수 있는 정품이어야 한다는 것인데,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은 모두 정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독창적이고 비대체적인 유산이란 특정기간 또는 특정 지역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음이 분명한 경우인데, 동학농민혁명은 19세기 말 한국, 중국, 일본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사건으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세계적 관점에서 유산이 가지는 중요성이란 한 지역이 아닌 세계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여부인데, 동학농민혁명은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사의 역사적 지향을 변화시켰으며 동학농민혁명 정신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세계사적 사건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 볼 때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의 세계기록유산 등재 이유는 충분하다. 문제는 우리가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유네스코에서 통용될 수 있는 보다 정치한 논리를 만들고, 동학농민혁명 기록물 목록을 체계적으로 잘 정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동학농민혁명 관련 자료를 모두 모아 놓은 <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30권, 1996)를 중심으로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을 성격별로 분류해보면 동학경전 및 천도교 기록(13건), 동학농민군 기록(13건), 민보군유생기록(82건), 조선정부 기록(11건), 관군토벌군기록(29건),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원회 기록(3794건) 등이 있다. 동학농민혁명 관련 기록은 동학교단 기록, 동학농민군 기록, 민보군유생 기록, 조선정부기록, 관군 기록 등 다양한 관점에서 생성된 기록들이 공존하고 있는 특징이 있으며,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기록은 100여년이 지난 다음 한국정부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와 유족들 개개인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조사하고 등록한 자료라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는 동학농민혁명 기록물 전체라고 볼 수는 없다. 여기에 개인들이 소장하고 있는 매우 많은 기록들을 포함해야 한다.현재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은 한곳에 모여 있지 않고 여러 기관과 개인이 소유하거나 보관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을 기록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체계적인 준비가 필요하다.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에 대한 목록을 만들고 기록물을 소장하고 있는 기관과 개인들에게 동의서를 받아야 한다. 이러한 일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의해 설립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추진하는 것이 적절할 것으로 여겨진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범국민적인 동학농민혁명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등재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이어서 소장 기관과 단체와 협력관계를 구축하고 세부 추진계획을 세워 추진한다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또한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을 주제로 대규모 학술대회를 개최하여 세계기록유산 등재의 논리를 구축하고 기본적인 데이터를 집적할 필요가 있다.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은 2년마다 지정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일정에 맞춰 준비해야 한다. 문화재청은 2015년 11월 세계기록유산등재대상을 선정하고 유네스코는 2017년 7월 세계기록유산을 최종결정하게 된다.동학농민혁명의 세계화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당면과제이다. 동학농민혁명에는 자유, 평등, 평화, 민주, 개혁, 인간존중 등 인류의 보편적 가치가 내재되어 있다. 그러나 세계인뿐만 아니라 한국인들도 이러한 정신이 동학농민혁명에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 등재는 동학농민혁명에 내재되어 있는 이러한 높은 가치를 세계인에게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당면과제인 동학농민혁명의 세계화를 실현하는 것이다.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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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2.24 23:02

[(48) 유적지·기념시설 관리 실태] 전국 동학혁명 유적지 353곳 중 국가지정문화재 6곳뿐

동학농민혁명 2주갑(120주년)을 맞았지만 전국에 관련 유적지는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특히 동학농민혁명의 중심지였던 전북은 다른 지역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유적지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적지의 문화재 지정 및 등록 숫자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또 졸속 복원과 함께 동학농민혁명 정신에 맞지 않는 기념물 설치 등은 동학농민혁명의 세계화에 여전히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현재 문화재 등록이 시급한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중심으로 현황과 과제 등을 진단해 본다.△유적지 문화재 지정 거북이 걸음동학농민혁명 유적지는 현재 체계적인 보존관리가 되지 않아 하루가 다르게 훼손되고 있다. 유적지에 대해, 문화재 지정등록을 시급하게 추진해야 하는 이유다.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따르면 전국에 있는 동학농민혁명 관련 유적지는 모두 353개소이며, 전북에 있는 유적지는 156개소(43%)로 가장 많다. 광주전남(83개)이 다음으로 많았고, 충남(40개), 대구경북(30개) 등의 순을 기록했으며, 서울울산(1개)이 가장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유적지 숫자에 비해 문화재 지정 및 등록 현황은 턱없이 부족하다.현재까지 전국 유적지 가운데 6개가 국가지정문화재, 시도지정 문화재 9개, 시군 향토문화유적 3개, 등록문화재 1개 등이 문화재로 지정됐다.동학농민혁명이 아닌 다른 사유로 문화재에 지정된 유적지는 모두 52건으로, 이곳은 동학농민혁명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곳이다. 하지만 동학농민혁명 만으로 지정됐다고 보기는 어렵다.이 경우까지 합해도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중 문화재로 지정된 곳은 71개소로 등록률은 20%에 불과하다.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동학농민혁명이 세계사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역사적 사건인 만큼 유적지에 대해 철저한 연구 및 고증을 거쳐 문화재로 등록하는 게 시급하다면서 100주년, 2주갑 등 특별한 이벤트가 있는 해에만 문화재 등록을 추진할 게 아니라 평소에도 꾸준히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김제 원평집강소수십년 째 방치된 동학농민혁명 중요 유적지인 원평집강소는 붕괴의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자치단체의 무관심 속에 방치돼 왔었다. 지난 3월 전북일보가 원평집강소의 붕괴 위험성을 지적한 뒤, 관계 당국의 대처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자 지난 6월 23일부터 3일 동안 연속 보도를 통해 보존 대책을 촉구했다.보도 직후 김제시는 원평집강소 긴급 보수공사를 실시했고, 대대적인 보수 공사와 함께 등록문화재 지정을 추진했다. 또 새정치민주연합 최규성 국회의원(김제완주)은 원평집강소 보수공사에 특별교부세 투입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원평집강소 보존 문제는 결국 문화재청이 11월 집강소 건물과 부지를 긴급 매입해 복원한 후 김제시에 위탁관리를 맡기기로 최종 결정하면서 일단락됐다.△완주 대둔산 최후 항전지완주군은 현재 운주면 대둔산 7-8부 능선에 자리잡은 대둔산 최후 항전지 문화재 지정을 추진하고 있다.완주군 운주면 산북리 산15-1번지 해발 715m의 거대한 암반의 상단에 자리한 최후 항전지는 동학농민군이 1894년 11월 중순부터 다음해 2월 18일까지 3개월여 동안 관군일본군에 맞서 싸우던 곳이다.대둔산 최후 항전지는 다른 지역의 동학농민군이 대부분 사라진 이후에도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저항, 동학혁명의 정신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최후 항전지는 암벽등반가들이 아니면 접근하기 힘든 곳에 자리잡아, 당시 원형이 상당부분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더하다.△전남 장흥 최후 전적지 석대들전남 장흥의 동학농민혁명 최후 전적지인 석대들 성역화 사업은 두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난 2009년부터 추진되고 있는 성역화 사업이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고, 석대들 일대가 사적지로 지정되면서 인근 주민들과 갈등을 빚고 있기 때문이다.전남 장흥군은 지난 2009년 장흥읍 남외리 석대들 일대 3만5201㎡의 부지에 96억원을 들여 장흥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성을 알릴 수 있는 기념관과 조형물 등을 설치할 계획을 세웠다.장흥군은 애초 지난 2009년 5억5000만원을 들여 기본 및 실시설계를 실시하고 부지를 매입, 2010년에는 10억원을 들여 착공할 예정이었다. 또 기념관 및 조경사업은 2011년부터 80억5000만원의 예산으로 추진해 2012년 완공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국비 마련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완공은 내년으로 미뤄졌다.이에 더해 지난 2009년 석대들 전적지가 국가지정 사적지로 지정되면서 주민들이 재산권 침해를 이유로 반발하며 한동안 공사 속도를 내지 못했다.한편 장흥 석대들 전적지는 전봉준을 비롯한 지도부가 모두 체포된 이후 3만명이 넘는 농민군이 참여해 항전을 계속하다 2000명 이상이 사망한 동학농민혁명의 최대최후의 격전지다.△충북 보은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지난 2007년 70억원의 예산이 투입돼 완공된 보은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은 건립 과정에서 홍역을 치러야 했다. 충북지역 시민단체들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거나 유적지를 훼손했다는 비판을 제기하면서다.실제 공원 입구에 세워진 기념물에는 1894년 7월 일본군의 경복궁 침범 1894년 7월 청일전쟁 발발 전쟁 참화에 시달린 백성 1894년 8월 보은의 동학도 의병봉기 계획 세워 순으로 표지석이 세워졌다.하지만 이는 동학농민운동을 제대로 기술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보은 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박달한 사무국장은 보은의 동학농민운동은 1893년 보은취회부터 시작됐다. 이 표지석의 설명대로라면 동학농민혁명은 왜세의 침입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일어났다는 것으로 귀결된다면서 하지만 동학농민혁명은 자주적 자발적으로 발생한 운동이며 결코 피동적으로 누구에 의해서 봉기한 게 아니다고 말했다.

  • 기획
  • 김정엽
  • 2014.12.17 23:02

[(47) '뜨거운 감자'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제정] "10년간 끌어온 논쟁…기념재단 중심 기념일 결론 내야"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제정은 이제 남북통일보다 어려운 일이 돼버렸네요.지난달 27일 대전에서 열린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제정 토론회에 참석한 한 관계자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10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소모적인 논쟁에 종착점을 찾을 수 없다는 푸념이었지만, 기념일 제정을 둘러싼 현 상황을 정확하게 진단한 말이기도 하다.올해 동학농민혁명 2주갑(120주년)을 맞아 국가기념일 제정에 대한 기대가 있었지만 끝내 무산됐다. 기념일 제정에 있어 무엇이 문제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러나 합의는 쉽지 않다. 소모적인 논쟁이 벌어지는 사이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후대에 널리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은 어느덧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이날 참석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상황이 정말 창피하다. 동학농민혁명과 무관한 사람들이 이를 본다면 한심하다고 생각할 것이다면서 미완의 혁명을 완성시켜야 하는 과제를 수행하기에도 부족한 데 기념일 제정 문제만 나오면 서로 다투고 있는 모습이 지겹다며 자조 섞인 목소리를 냈다.이날 기념일 제정이 이뤄지지 않았지만, 분명한 점은 이제는 기념일 제정을 더 이상 미룰 수 없고 기념일 제정을 계기로 동학농민혁명을 더욱 널리 알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대다수였다는 사실이다.△소모적 논쟁만 10년 째동학농민혁명을 기리는 국가기념일 제정 논의는 지난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시작됐다.이를 계기로 기념일 제정 토론회가 지난 2004년 6~11월까지 3차례 열렸지만, 결론을 맺지 못하고 해를 넘겼다.이듬해인 2005년부터 2007년까지 동학농민혁명 명예회복심의위에서 기념일 제정을 위한 심의를 8차례 개최했지만, 격론 끝에 다시 무산됐다. 당시 관련 단체들은 표면적으로 기념일 제정을 서두를 이유가 없다는 점을 들어 결정을 미뤘다.그렇지만 속으로는 각 지역에 대한 이해관계가 깔려있어 무산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때부터 기념일 제정을 둘러싼 갈등이 본격화됐다.이후 3년 동안 이 문제는 수면 아래로 내려갔다. 누구도 뜨거운 감자를 손대기 싫어했고, 총대를 메고 나서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반전의 계기는 있었다. 지난 2010년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특수법인으로 출범하면서다. 기념재단은 정읍 이전 등 당장 닥친 현안을 해결한 뒤 곧바로 기념일 제정에 돌입했다.그리고 이듬해인 2011년 동학농민혁명기념일제정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재단은 언론문화법조학계 인사 등 23명으로 기념일 제정을 맡을 추진위원 선정해 2개월 동안 활동했지만 끝내 합의점을 찾아내지 못했다. 지역 간 갈등의 골만 다시 확인하는 자리였다.합의점을 찾지 못하자 기념재단은 지난 2012년 국민여론조사로 기념일을 제정하자고 제안했지만 이마저도 무산됐고, 재단은 기념일 제정 잠정 중단 결정을 내렸다.이후 기념재단은 첨예한 입장차를 보이고 있는 정읍과 고창의 관련단체 관계자들과 합의점을 찾으려 했지만, 동학 2주갑(120주년) 기념대회 이후 재논의키로 결정했다.동학농민혁명 관련 단체들은 2주갑을 맞은 올해는 기념일 제정이 이뤄지길 기원했다. 지역 간 갈등을 풀고 대승적으로 이 문제를 풀 수 있을 것이란 반전 드라마를 기대했다. 하지만 지난달 27일 열린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제정 토론회에서는 고성과 욕설이 오가며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물거품으로 만들었다.△기념일 제정 주요 제안일그동안 많은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여러 가지 기념일 후보군이 제안됐다. 현재 △고부봉기일(2월14일정읍) △특별법공포일(3월5일유족회) △무장기포일(4월25일고창) △황토현전승일(5월11일정읍) △전주성입성일(5월31일전주) △2차 봉기일(10월11일) △우금치전투일(12월5일공주) 등이 거론된다.이 가운데 가장 첨예한 대립을 벌이고 있는 곳은 정읍과 고창이다.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제정 흑역사(黑歷史)는 무장기포일을 주장하는 고창과 황토현전승일을 주장하는 정읍의 해묵은 갈등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무장기포일은 농민군이 정식으로 포고문(결의문)을 발표하고 전국 봉기를 선포했던 날이다. 고창지역 관련 단체들은 무장포고문을 발표함으로써 혁명의 대의를 표명했고 이를 통해 동학교도나 일부지역에 머무는 것이 아닌 혁명의 전국화의 계기가 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포고문 발표를 계기로 조직적 대오를 갖춰 혁명이 시작됐다. 학계는 고창 무장의 봉기를 계기로 국지적 농민항쟁에서 전국적 농민전쟁으로 전환했다고 본다. 따라서 동학농민혁명을 대표하는 역사성상징성이 있다는 의견이다.고창지역 단체들은 고부봉기를 최초의 봉기로 보는 시각에 대해 민란 수준이었으며 곧 실패했기 때문에 무장기포일의 상징성이 더 크다고 주장한다.정읍지역 관련 단체들이 주장하는 황토현전승일은 동학농민군이 최초로 승리를 거둔 날이다. 전라감영군 등 연합부대 2400명을 거의 전멸에 이르게 한 전과는 동학농민혁명기간 중 최대의 승전이었다. 이 승리에서 자신감을 얻은 동학군들은 호남의 전 지역으로 봉기를 확대시켰다. 황토현전투가 최초의 전쟁 양상을 띤 전투로서, 관군을 격파해 혁명의 불길이 전국으로 확산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는 것이 황토현전승일을 기념일로 삼아야 한다는 쪽의 주장이다. 정읍지역 단체들은 최초의 전투일이자 승전일로 역사적 상징성과 대표성은 물론, 무장기포에 비해 대중적 인지도에서도 앞서기 때문에 황토현전승일을 기념일로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기념재단이 종지부 찍어야지난달 열린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제정 토론회에서는 기념일 제정 절차에 대한 논의가 오갔다. 첫 번째 안으로 기념재단, 유족회, 천도교령 3자 협의체가 결정하자는 의견이 제시됐다. 결론이 나지 않는 소모적인 논쟁을 끝내고 대표성을 가진 단체들이 결정을 하자는 취지다.하지만 반대 의견에 부딪혀 끝내 채택되지 못했고 내년 2월에 관련 단체들이 모두 모여 결정하자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셈이다.기념재단도 이에 맞춰 오는 2015년까지 공청회 등을 통해 다시 의견을 모은다는 계획을 내놨다. 10년 동안 이어졌던 논쟁을 다시 이어가겠다는 결정에 무책임하다는 비판이 쏟아지는 이유다.기념일과 관련된 논쟁은 그동안 충분히 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생각이다. 지난 10년 동안 충분히 논의된 만큼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그리고 그 중심에는 기념재단이 있어야 하고, 관련 단체들은 어떤 결정이든지 수용할 수 있는 관용이 필요한 시점이다.

  • 기획
  • 김정엽
  • 2014.12.11 23:02

[(46)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 혁명의 '시작과 끝' 한눈에…희생 농민군 넋 기린다

반봉건과 반외세를 외쳤던 동학농민혁명은 이 땅에서 일어난 최대 규모의 민중항쟁이었다. 호남지방만이 아닌 조선 땅 대부분에 걸친 거대한 변혁의 움직임인 혁명의 불길은 당시 조선과 청나라, 일본을 둘러싼 동북아시아 정세를 뒤흔든 대역사였다. 하지만 그동안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가치를 일반시민들이 엿볼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한 탓에 혁명에 대한 인식은 뒤떨어졌다.이처럼 제반여건이 미흡한 점이 여러차례 관련 학계·유족회측에서 지적되면서,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 조성에 대한 공감대도 확산됐다.그 결과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미와 이념을 현대적 가치에서 재조명하고, 총탄에 스러져간 무명 농민군을 추모하기 위한 역사적 공간인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이 조성이 눈 앞으로 다가왔다.하지만 기념공원의 운영비 부담 주체 등을 두고 잡음이 일고 있어, 이런 산적한 문제를 지혜롭게 풀어나가야 하는 것이 숙제로 남아 있다.△기념공원 조성 배경문화체육관광부 산하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과 전북도, 정읍시는 정읍 황토현전적지 일대 33만5800㎡에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다.앞서 이 사업은 1990년대 말 당시 전북도가 정읍 황토현 유적지에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을 설립하면서부터 가시화됐었다.현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담지 못하는 역사적 현장의 사실성을 극대화하기 위해선 기념공원이 조성돼야한다는 필요성이 강하게 부각된 것이다.하지만 사업 주체 선정이나 예산 확보면에서 어려움에 부딪히면서, 기념공원 설립에 대한 논의는 수면 아래로 들어갔다. 그러던 중 학계·유족회측에서 기념공원 설립을 강하게 요구하자, 2010년 김생기 정읍시장은 민선5기 시장공약사항에 ‘동학농민혁명 희생자 공동묘역 조성’이라는 계획을 포함시켰다.이후 시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협약을 맺은 후 발주와 시행을 맡아 공동추진한 연구용역은 대학교수, 건축, 건설, 디자인 전문가들이 함께 참여해 기본계획을 만들어 냈다.이 기본계획은 기념재단 명의로 문체부와 기재부의 심의,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적정성 검토 등을 거쳤고 정읍시와 전북도의 적극적인 예산확보활동까지 더해져 국회를 통해 383억원의 예산이 반영됐다.△2017년 완공 예정기념공원은 2017년 완공될 예정이다. 부지는 정읍시와 전북도가 모두 제공했다. 이곳에는 혁명 당시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공간과 위령탑 등의 시설이 들어설 예정이다. 또 청소년 역사교육프로그램 운영을 위한 역사문화체험관과 연수동, 야외캠핑장, 숙박시설 등을 마련한다.황토현전적지는 1894년 4월 7일(양력 5월 11일)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치른 최초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전승지다. 1963년 10월 3일 첫 기념시설물인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이 이곳에 건립됐다. 이 탑은 ‘동학란’이라 불리던 당시의 역사에 대해 최초로 ‘혁명’이란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희생자 명예회복의 초석을 다졌다는 의미가 크다.앞서 지난 10월 정읍시 덕천면 황토현 전적지 일대에 건립될 예정인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의 설계 공모 당선작이 발표됐다.동학농민혁명 기념재단은 해당 공모 최우수상(당선작)으로 ‘땅의 기억을 환기’라는 주제의 안계동(대표설계자, 동심원 조경기술사 사무소)·노윤경(공동설계자, 우리 동인 건축사 사무소)·정욱주(서울대)·최정민(순천대) 씨의 작품을 선정했다.동학농민혁명 기념재단 관계자는 “기념공원은 혁명 초기, 가장 중요한 전투였던 황토현 전투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공간이자, 전국적으로 발생했던 혁명의 역사적 기록을 담아내는 중심공간으로서 기능해야 한다”면서 “동학 이념의 현대적 가치를 널리 전파하기 위한 거점 공간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역사적 체험 공간으로기념공원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기억을 전시하는 곳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을 상상하고 체험하는 장으로 꾸며질 계획이다.방문객이 동학혁명의 의미를 다층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기억의 들판’을 통한 경관적 체험, ‘동학의 길’에서의 서사적 체험, 장소적 상징성을 지닌 ‘울림의 기둥’, ‘씨앗을 뿌려 헌화’하는 추모공간, 전장과 경작을 체험하는 ‘체험의 장’ 등으로 꾸며진다.이 중 기억의 들판은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다양한 경험의 기회를 제공하는 공간이다. 방문객들은 황토현의 옛 길을 걷고, 바라보며 황토현 전투의 현장을 감상할 수 있다.또한 옛 농경생활과 황토현 전투를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마련된다.전국 각지에서 들불처럼 일어났던 농민 항쟁의 지역적 분포를 알 수 있는 상징물도 조성된다.기존의 사발통문 광장을 시작으로 방문자센터, 캠핑장, 연수동, 교육관, 편의시설, 기념관, 전시추모공간을 거쳐 전적지를 연결한다.이 동선은 단순한 연결 및 통과동선이 아니라 시설구역과 들판을 매개로 휴식과 조망할 위한 장소이다.이 밖에도 총탄에 스러져간 농민군을 추모하는 공간도 꾸며진다.한 동학관련단체 관계자는 “동학농민혁명의 시작과 끝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기념공원이 설립되면, 그동안 체계적으로 기리지 못했던 혁명의 정신과 의미가 자손만대까지 이어질 것이다”면서 “정읍 황토현 기념공원이 우리나라를 뛰어넘어 세계 속에서 빛나는 농민혁명 기념시설의 ‘메카’로 자리잡길 기대한다”고 말했다.△기념공원 운영비 부담 주체 ‘논란’ 국비 사업으로 추진되고 있는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의 향후 운영비 부담 주체를 두고 전북도와 문화체육관광부의 이견이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있다. 표면상으로는 모두 기념공원 국비 운영에 긍정적 의견을 내고 있지만, 공원부지(전북도·정읍시·정부 공동소유) 통합관리 주체를 두고 의견이 엇갈리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현재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문광부 특수법인)에서 운영하는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의 경우 부지 소유가 전북도라는 이유로 매해 운영비를 도가 부담하고 있어, 기념공원 부지 통합관리가 이뤄지지 않으면 자칫 전북도가 운영비를 부담해야 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앞서 전북도와 문광부 등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 조성 관련 기관들은 지난 8월 27일 기념공원 부지통합 관리에 대한 협의를 진행했다. 이 자리에서 기념공원 예정부지(정읍시 덕천면 하학리 33만6992㎡) 대부분을 소유한 전북도와 정읍시는 정부에 부지 무상양여 의사를 밝히면서 통합관리 주체를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으로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기념공원 부지 소유 비율은 전북도 44.68%, 정읍시 49.78%, 국유지 5.41%, 사유지 0.13% 등이다. 앞서 전북도는 법률 검토를 마친 결과 행정재산의 무상양여에 문제가 없다는 의견을 받았다. 반면 문광부는 행정재산의 무상양여는 현행 법을 위반할 소지가 있는 만큼 부지 통합 관리는 어렵다는 입장을 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은 2011년부터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을 전북도로부터 위탁받아 운영하고 있다. 당시에도 전북도는 문광부 산하 기관인 기념재단에 운영비 부담을 요구했지만, 재단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아직 자치단체의 운영비 부담 여부는 논의 단계에 있지만, 최근 정부가 지역에서 국비로 추진하는 사업에 대해 자치단체의 운영비 부담을 요구하고 있는 추세로 봤을 때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 기획
  • 최명국
  • 2014.12.10 23:02

[(45) 교과서 속 동학농민혁명] "농민군 정신 현대적 재해석, 미래지향적 내용 담아야"

1894년에 동학이라는 종교 집단을 중심으로 농민들이 들고 일어난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사건의 의미, 영향, 그리고 명칭과 같은 기본적인 내용들까지도, 보는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르다. 사실은 하나지만, 그 사실을 현재로 불러내는 사람의 관점이 새로운 진실을 구성한다. 그리고 그 여럿 중에서 국가가 택한, 또는 수용 가능한 관점이 교과서에 실려 학교로 간다.교과서는 곧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관점을 엿볼 수 있는 잣대다. 여기에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시각을 형성시킨다는 점에서도 교과서의 서술 내용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해방 직후의 교과서와 동학난광복 직후부터 한국전쟁 휴전 직후인 1954년 4월까지는 교수요목기였다.미군정청은 1945년 9월, 60명을 위촉해 한국교육심의회를 발족시키고, 이를 통해 교수요목이라는 교육방침을 내놓았다.1954년에는 교육과정 시간배당 기준령이 공포됐고, 이듬해 8월에 정식으로 교과과정이 공포됐다. 이 시기를 1차 교육과정기로 구분하고 있다.이 무렵까지 사용된 역사 교과서들은 동학농민혁명을 동학난으로 표현하고 있다.기본적으로 동학농민혁명과 같은 농민봉기는 조선이라는 왕조국가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성질의 것이었고, 이 때문에 이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도 대체로 반란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무엇보다도, 조선대한제국이 멸망하고 곧바로 제국주의 일본의 강압적 식민통치가 이어짐으로써 이 사건에 대해 제대로 역사적인 평가를 할 겨를이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다.△정권 입맛 따라 바뀐 해석이 같은 시각이 수정된 것은 1963년, 제2차 교육과정이 나오면서부터였다.1973년(일반계 고등학교는 1974년, 실업계 고등학교는 1976년)까지 지속된 이 시기에, 역사교과서들은 동학난(란)이 아닌 동학혁명이라는 용어를 들고 나왔다.왜 갑자기 동학난에서 동학혁명으로 점프한 것일까?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자신의 정변을 정당화하기 위해 혁명이라는 개념을 빌려 쓰면서 그 역사적 정통성을 동학농민혁명에서 찾으려 했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다.김한종 교원대 교수의 동학농민전쟁의 명칭과 그 의미(2005)라는 논문에 따르면, 이 시기에는 국적 있는 교육을 표방하면서 대외항쟁사를 교육과정 속에서 많이 강조했다.이에 따라 자연히 동학농민혁명이 가진 반외세의 성격에 교육의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70년대 중반부터 3차 교육과정이 시행되면서, 교과서상 명칭은 동학혁명운동으로 바뀌었다.이 역시 개념적으로 잘 다듬어진 용어는 아니었고, 반외세에 초점을 맞추는 교육 기조 역시 크게 바뀌지는 않았다. 다만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의 농민사회운동이자 농민전쟁과 같은 표현을 통해 반봉건, 사회운동적 성격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2차 교육과정기의 교과서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1980년대 시행된 4차 교육과정에서는 혁명이라는 표현이 빠지고 동학운동이라는 명칭이 붙었다.김 교수는 앞의 논문에서 1212 쿠데타와 517 비상계엄 확대, 그리고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무력 진압을 거쳐 집권한 전두환 정권으로서는 구태여 동학농민전쟁의 성격을 혁명이라고 부를 이유는 없었다고 짚었다.이 시기에는 또한 서술 자체도 단순한 여러 민족운동 중 하나 정도로 간소화됐다.1987년 민주화를 겪으면서, 교육과정이 다시 한 번 바뀌게 됐고, 명칭도 동학농민운동으로 다시 바뀌었다. 명칭에 동학과 함께 농민이 나란히 놓이면서, 드디어 주체가 동학교도 뿐만 아니라 당대의 농민들이기도 했음이 교과서에서 인정된 셈이다.그리고 이 용어는 67차 교육과정을 지나 2009 개정교육과정이 시행되고 있는 현재까지도 계속 쓰이고 있다.△ 혁명과 운동 사이에서2004년에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시행되면서, 일단은 동학농민혁명이라는 명칭이 국가적으로 공인됐다고 볼 수 있다.하지만 교과서들은 동학농민운동으로 이 사건을 표기하고 있다. 정부의 편수 지침에 따른 것이다.김양식 충북학연구소 소장은 그 원인으로, 현행 교과서 자체가 개화운동 및 독립운동 중심으로 집필이 이뤄지다보니 혁명이라는 표현을 쓰게 되면 교과서의 틀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는 점을 들었다.그는 혁명이라고 하면 체제의 변화를 동반하는 개념인데, 운동 차원으로 보고 있다 보니 운동이라는 수준에 맞게끔 짧게 소개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결국 혁명이 되지 못한 운동은 갑오개혁의 부수적 요소 정도로밖에 서술되지 않는다.현행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8종 중 동학농민혁명을 별도 단원으로 두어 설명하는 것은 1종에 불과하고, 대부분 갑오개혁과 한 단원으로 묶어 설명하고 있다. 근대 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으로 뭉뚱그리는 교과서도 있다.왕현종 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가 수정판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의 개편내용과 근대사 서술 비판(2006)이라는 논문에서 언급한 대로, 민중운동을 하나의 독립적인 주체로서 다루려고 하지 않으려는 태도 때문일 것이다.△젊은이에 감동 주는 미래지향적 서술을배항섭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는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역사교과서 서술 내용의 새로운 모색(2012)이라는 논문을 통해 농민군이 지향했던 바나 실제로 보여준 행동 등을 들어, 교과서에서 나눔과 배려의 정신을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009 개정교육과정에서 추구하는 인간상에 세계와 소통하는 시민으로서 배려와 나눔의 정신으로 공동체 발전에 참여하는 사람이라는 항목이 명시된 만큼, 동학농민혁명의 이 같은 정신을 교과서를 통해 교육해야 한다는 것이다.배 교수는 반봉건 반외세만 외치는 것은 이제는 의미가 없다면서 농민군의 정신을 현대적으로 얘기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미래지향적으로 깊이 성찰하고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이어 그는 위정자들이 약속을 외면하고 가렴주구하지 않도록 감시할 수 있어야 한다면서 사회경제정치의 민주화를 언급했다. 이같이 현대적으로 재해석된 미래지향적인 내용이 교과서에 담겨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전북교육청 발간 동학농민혁명 교재 - 교과서로 제작한 첫 사례, 평등민주자주정신 주목전북도교육청은 지난달 초등학생용 및 중고등학생용 동학농민혁명 교재를 발간했다.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학교 교재 발간은 처음 있는 일이다.초등학생용 교과서는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사실 △동학농민혁명의 정신 △함께하는 동학농민혁명 등 크게 세 단원으로 구성됐다.특히 동학농민혁명의 정신 단원은 평등민주자주라는 세 가지 주제로 구성돼 있다. 이를 통해 민주주의인권 교육과도 연계할 수 있다는 것이 도교육청 관계자의 설명이다.평등민주자주라는 세 가지 주제는 중고등학생용 교재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세 번째 단원인 동학농민혁명이 이루려는 세상은 무엇인가요?라는 단원에서 이를 다루고 있는데, 평등을 시민의 저항권과, 민주를 지방자치와, 자주를 주체적자주적인 삶과 연결 짓고 있다.발간 작업에 참여했던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은 전국적으로 처음 만들어졌고, 자료나 내용도 전문가 및 교사들의 토의를 거쳐 완성돼 의미가 있다면서 새로운 시각을 많이 반영해 긍정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기획
  • 권혁일
  • 2014.12.03 23:02

[(44) 예술작품 속 동학농민혁명] "혁명정신 대중화 꾀할 기념비적 대형 작품 나와야"

모지도다 모지도다 우리 사또가 모지도다. 어린 것이 쪼금 잘못을 허였다 저런 매질이 또 있느냐 집장사령놈을 눈 익혀 두었다 사문 밖을 나가면 급살을 내리라 저런 매질이 또 있느냐 나 돌아간다 내가 돌아간다 떨떨거리고 나는 간다.남원에 부임한 신임 사또가 수청을 거부한 춘향에게 가혹한 횡포를 가하는 모습을 그린 춘향가 중 못 보것네 대목이다. 폭정을 가하는 탐욕스러운 탐관오리의 가렴주구에 대한 민중들의 비난과 분노가 담겼다. 1894년 1월 전봉준 장군의 동학농민군이 고부관아를 습격했을 당시 농민군들이 춘향전 중의 사또를 비판하는 대목을 부르면서 쳐들어갔다고 한다.민중 안에서 오랜 시간 전래되며 그 생명력을 이어온 판소리가 동학의 함성으로 표현됐다고 진보성 박사는 분석했다. 인간다움을 갈망하던 농민군들의 강렬한 몸짓을 판소리와 연결시킨 것이다.판소리 예술로 까지 끌어올려진 당시 농민군의 함성이 오늘의 문화예술에 어떻게 투영되고 있을까.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전후로 음악연극무용미술 등 다양한 장르에서 동학농민혁명을 기억하는 작업들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역사가 갖고 있는 무게에 비춰 여전히 미흡하다.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본격적인 재조명 작업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문화예술계에서의 관심이 거의 없었으며, 100주년 때 활발했던 작품활동도 그 후 잠잠해졌다. 2주갑을 맞은 올해도 기념비적인 작품들을 거의 만날 수 없었다는 게 학계와 예술계의 평가다.세계사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아래로부터의 거대한 변혁운동임에도 예술작품들이 너무 빈약한 실정에서 동학농민혁명의 전국화세계화를 위해 예술 작품을 통한 혁명의 대중화가 또 하나의 과제가 되고 있다.△관립 예술단체 중심 한계동학농민혁명 2주갑을 맞은 올해 전북지역 문화예술계에서 혁명을 소재로 한 창극, 마당극, 연극, 음악, 무용 등이 이루어졌지만 기대에 못미쳤다. 그나마 명맥을 이은 게 관립 예술단에 의해서였다. 전북도립국악원 창극단이 7월 무명의 농민군을 그린 꽃불을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무대에 올렸고, 도립국악원 관혁악단이 10월 칸타타 황토재 희망의 노래를 같은 장소에서 공연했다. 전주시립극단은 연극 녹두의 꿈으로 관객들을 만났다.또 전주시가 주최하고, 스토리텔링 문화그룹 얘기보따리(사)푸른문화가 주관한 가보세 갑오년, 전주성이 8월 전주한옥마을 특설무대에서 열흘간 진행됐다. 민간 차원에서는 10월 전주 경기전 앞에서 열린 모악 천하 대동제가 120주년의 의미를 실었다.또 사단법인 전북민예총이 2014 전북민족예술제 타이틀로 대한민국? 대한민국!을 걸고 120년 전 혁명의 역사를 주제로 내세웠다. 과거 동학농민은 현재의 서민이며, 이들의 희노애락을 예술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미래의 희망을 모색하는 자리였다.전시 쪽에서는 전북민족미술인협회가 2014년 정기회원전으로 7월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를 들었다. 가보세 통일로의 전시회에는 27명의 미술인들이 120년 전,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높이들고 이 땅의 백성들이 사람사는 세상을 열고자 했던 동학농민군들의 열망을 가슴에 품고 침몰하는 세월호, 침몰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위에 희망의 돛을 달자에 동참했다.(사)전북민족미술인협회 10명의 작가들은 릴레이 개인전을 통해 혁명의 역사를 한국화, 유화, 판화, 담채화, 도예, 테라코타, 조각 등으로 보여줬다. 농민화가 박홍규 씨는 릴레이전과 별도로 전주 서신갤러리에서 동학혁명 120주년 기념 판화전 피노리 가는 길을 갖기도 했다.△전국 각지서 예술축제로동학농민혁명 기념행사가 단순한 기념식에서 벗어나 예술축제 형태로 나아가고 있는 점은 고무적이다. 120주년을 맞아 전북에서뿐 아니라 동학농민혁명이 활발했던 전국 각지에 다양한 형태의 예술제가 열렸다. 6월 충북 보은에서 열린 동학농민혁명 120년 역사맞이 보은생명평화대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회인 보은취회를 재현하고, 전국민족극한마당이 펼쳐졌다.극단 모시는사람들의 뮤지컬 들풀2는 동학을 소재로 한 올 무대 작품 중에서 가장 대중성 있는 작품으로 꼽혔다. 6월 과천시민회관에서 올려진 이 작품은 2주에 걸쳐 5000명에 육박하는 관람객을 동원, 흥행몰이에도 성공한 것으로 전해졌다. 들풀Ⅱ는 20년 전에도 관심을 모았던 작품으로, 뮤지컬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합류해 손질을 가했다.극단측은 사랑을 테마로 삼아 너무 무겁지 않게 접근한 것이 주효했다고 분석했다. 뮤지컬에 나오는 노래 OST에 대한 구입 문의가 이어질 만큼 관객들의 호응을 바탕으로 오는 8일 천도교 중앙총부 초청으로 무료 공연을 가질 예정이다.또 전남 무안을 배경으로 삼은 국악뮤지컬 파랑새 공연이 극단 갯돌에 의해 11월 무안군 승달문화예술회관 무대에 올려졌다. 남도 씻김과 신명의 원형을 현대적 어법으로 재해석한 이 작품은 마당극, 민요, 놀이, 무예, 퍼포먼스, 풍물, 탈춤 등 전통연희를 결합시켰다.부산에서도 동학농민혁명은 숨을 쉬었다. 극단 새벽이 20년 전 공연을 손질해 발림극(몸짓과 손짓)으로 재연한 새야 매야를 무대에 올렸다.△영화드라마 통한 대중화도 과제다양한 장르에서 예술작품으로 담아내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120주년을 맞은 오늘에까지 대혁명의 역사에 턱없이 못미치는 문화예술계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올 전북도립국악원과 전주시립극단의 동학농민혁명을 소재로 한 작품에 대부분 참여했던 김정수 전주대 교수는 100주년 때와 달리 120주년이 갖는 의미가 상대적으로 작기도 하지만, 민주화 운동을 경험한 세대가 퇴장하고 젊은층의 무거운 주제에 대한 외면과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보수화가 기념공연의 감소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민주화 운동의 힘이 넘쳤던 100주년 때는 임진택 문호근 김명곤 등 서울에서 활동하는 인사들까지 동학쪽에 힘을 실어 모든 예술장르에서 기념 공연들이 활발했던 것과 대조를 보인 현실을 두고서다.이와 함께 관립 단체의 작품들이 대형 작품으로 만들어지지 못하거나 단발성으로 그치는 데는 재정문제와 시스템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도립국악원만 하더라도 회계연도가 1년 단위여서 2~3년에 걸쳐 대규모 작품을 만들기 어렵고, 창극관현악무용단 3개 단체가 각기 성과를 내야 하기에 협력을 통한 대형 작품제작에도 한계가 있는 것으로 보았다. 여기에 어렵게 무대에 올린 작품도 순회공연이나 상설공연을 할 여력이 없어 사장되는 문제가 있다고 분석했다.그는 또 기념비적인 작품이 아니라도, 작아도 알차고 진지하고 애정어린 작품이 계속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전북도에서 운영하는 문예진흥기금 중 동학콘텐츠 관련 예산을 별도로 편성하거나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서 지원책을 마련하는 방안도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혁명의 대중화를 위해서는 TV드라마영화 등 영상매체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영화로는 1991년 동학 2대 교주로 혁명에 참여했던 해월의 삶을 조명한 개벽(임권택 감독) 이후 특별하게 주목받는 영화가 나오지 않았다.다만, 일본인 감독 마에다 겐지가 다큐멘터리 영화계획을 발표하고, 영화제작에 들어가 주목을 받았다. 마에다 감독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통해 동북아뿐 아니라 온 세계의 사람들에게 동학농민혁명의 깊은 의미와 진실을 알려주고자 한다고 제작 취지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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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원용
  • 2014.12.02 23:02

[(43) 문학 속에 나타난 동학농민혁명] '농민투쟁'·'민중운동'…시·소설에 '혁명 정신' 담아

태평양시대 개막 전야였던 19세기 중엽 한반도는 거대한 태풍의 눈이었다. 서구 제국주의 열강이 몰고온 거대한 태풍이 중국과 아시아 대륙을 통째로 날려버릴 기세로 휘몰아쳤다. 태평양에서 솟구치고 대륙에서 내리꽂히던 태풍이 1894년 갑오년 한반도에서 폭발하였다. 이런 대폭발 앞에서 민족의 안전과 안전의 기본토대인 국가의 자주권을 지키고자 동학농민군들은 의연히 봉기했다. 그것이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다. 그때로부터 120주년이 지난 지금 태평양의 움직임과 중국 대륙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1894년 갑오선열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절실한 때인 것 같다.동학농민혁명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차지하는 중대한 위상으로 인해 일제식민지시기, 해방 이후 세계사적 차원에서 전개된 동서냉전체제구축시기에 빚어진 좌우대립과 민족분단 그리고 한국전쟁이라는 정치적 혼란 속에서 그 정신이 제대로 이어지지 못하고 도리어 극심하게 왜곡되고 축소되었다. 나아가 동서냉전체제 하부구조로 볼 수 있는 군사정권시기를 거치면서 극심하게 굴절되기까지 했다.한국 근현대사의 극심한 굴절과 부침으로 인하여 동학농민혁명에 대하여 반란과 혁명이라는 극단적인 인식이 공존해왔다. 역사는 두 차원의 시간성을 지닌다. 실제로 사건이나 행위가 일어난 시점과 그 사건을 기록하고 해석하는 시점에서의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지난 120년 동안 한국문단의 시인, 소설가들은 동학농민혁명을 어떻게 인식했을까?동학농민혁명이 끝난 이후 지금까지 한국문단에 발표된 문학작품은 장편소설 22편, 장편시 9편, 단편시 265편으로 총 296편에 달한다. 이들 작품들은 편의상 1980년 전과 후로 구분해서 살펴볼 수 있다.동학농민혁명을 주제로 창작된 최초의 작품은 1947년 〈연간조선시집〉을 통해 발표된 조운의 시(詩) 고부 두승산(古阜 斗升山)이다. 이 작품은 31운동 이후 사회주의사상이 국내에 보급되면서 동학농민혁명을 마르크주의 유물사관에 입각하여 해석한 역사학계 연구와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일제식민지시기 일본인 역사가들은 동학농민혁명의 반외세 민족운동으로서의 인식을 철저히 통제하고 차단하는 한편 조선왕조의 부패상만을 부각시켜 식민통치를 미화하는데 이용했다. 나아가 동학 사교집단의 반란 혹은 고부군수 폭정에 따른 전라도 고부지역의 민란, 전봉준 사건으로 축소했다. 마치 세월호 침몰사고의 원인을 세모해운 유병언의 개인문제로 호도하는 것과 비슷한 양상이다.조운 시인의 고부 두승산(古阜 斗升山)은 일제의 위와 같은 역사왜곡과 축소를 강하게 질타하는 역사인식을 보여준다. 이 시는 농민대중을 농민혁명의 주체로 확고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명확하게 보여준다.한국문단에서 동학농민혁명을 주제로 한 두 번째 시는 전북일보 1963년 9월 29일자를 통해 발표된다. 신석정 시인의 갑오동학혁명의 노래가 그것인데, 이 시는 1963년 당시 516정권이 동학농민혁명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느라 전북지역 원로와 서울의 갑오동학혁명기념사업협회 건의를 수용하여 1963년 8월 25일 기념탑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 9월 6일 착공식을 가진 후 혁명정부가 서둘러서 공사를 추진하여 27일 만인 1963년 10월 3일 정읍 황토현의 갑오동학혁명기념탑 제막식을 가졌다. 이 기념탑 제막식 나흘 전에 전북일보 지면을 통해 신석정의 시가 발표되었다.새야 새야 파랑새야녹두밭에 앉지 마라녹두꽃이 떨어지면청포장수 울고 간다징을 울려라 죽창도 들었다이젠 앞으로 앞으로 나가자눌려 살던 농민들이 외치던 소리우리들의 가슴에 어련히 탄다갑오동학혁명의 뜨거운 불길받들고 나아가자 겨레의 횃불오늘도 내일도 더운 피 되어태양과 더불어 길이 빛내자 - 신석정, 갑오동학혁명의 노래전문(全文)한편, 419혁명을 계기로 민주주의 의식이 높아지면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관심도 함께 상승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1967년 신동엽의 장편서사시 금강과 껍데기는 가라외 3편의 단편시가 발표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이 사건에 대한 문단의 관심은 1970년대 김관식황동규문병란 등 10편의 시 발표로 이어졌고, 소설은 1960년대 서기원 〈혁명〉(1965), 최인욱 〈전봉준〉(1967)이 발표되었고, 1970년대 이용선 〈동학〉(1970), 유현종 〈들불〉(1976), 박연희 〈여명기〉(1978) 등이 발표되었다.이후 1980년부터 2014년까지 문학작품 창작은 크게 늘었다. 시 분야에서 장편 8편, 단편 247편, 소설분야에서 중장편 16편으로 총 271편 발표되기에 이른다. 이는 1895년부터 1979년까지 25편의 문학작품이 발표된 것에 비하면 가히 폭발적인 증가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1980년대로 넘어오면서 민족민주운동 세력이 급성장하여 동학농민혁명의 민중성과 변혁지향성의 현재화를 구현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1980년대 이후 발표된 시는 임홍재 청보리의 노래(1980), 안도현 서울로 가는 전봉준(1985), 양성우 만석보(1985), 고운기 봉준이 성님(1987), 고은 첫닭 울면(1988), 김남주 황토현에 부치는 노래(1988) 등이 있고, 소설은 안도섭 〈녹두〉(1988), 박태원 〈갑오농민전쟁〉(1988), 문순태 〈타오르는 강〉(1989), 한승원〈동학제〉(1994), 송기숙 〈녹두장군〉 등이 있다.한국문단의 작가들이 발표한 문학작품에 나타난 동학농민전쟁 인식은 크게 다섯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농민해방투쟁적 인식이다. 이는 1920년대 국내에 유입되기 시작한 마르크스주의 영향을 받은 사회주의 반일민족해방운동가들의 역사인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조운의 고부 두승산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둘째, 서구적 근대문명 부정에 따른 무정부주의적 경향으로 이는 419혁명을 계기로 창작발표된 신동엽의 장편서사시 금강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셋째, 반외세운동적 인식으로 1960년대 신동엽, 1970년대 김관식, 황동규, 문병란. 1980-90년대 김남주, 곽재구, 김용락 등의 시들에서 볼 수 있다. 넷째, 반독재운동적 인식으로 장효문, 송수권 등의 장편서사시에 잘 나타난다. 다섯째, 민중해방운동적 인식으로 1980-90년대 창작발표된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인식이다.주목할 것은 1980년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했던 문학작품 발표가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 작품 발표가 급격하게 둔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현상의 배경으로 근대 이후를 자처했으며 또 그렇게 인식되었던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함께 형성되기 시작한 탈근대주의(Post-modernism) 담론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아울러 최근 뉴라이트 계열의 식민지근대화론 등의 시대적 상황변화 등도 배경으로 들 수 있을 것 같다.역사를 돌이켜보면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으로 이어지는 세계사적 판도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여 우리는 망국(亡國)과 일제식민지라는 치욕을 맞았다. 오늘 한반도 주변상황은 짙은 안개속이다. 일본의 아베정권은 군국주의 추구하고 있고, 한반도에는 정체불명의 6자회담이 실재한다. 갑오선열들의 넋을 불러 오늘 우리의 좌표를 묻고, 내일을 향해 나가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는 말이 그 어느 때보다도 의미심장할 대가 지금이 아닌가 싶다.문병학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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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1.26 23:02

[(42) 청일전쟁 그 이후 - 중국 난징의 희생자들] 1937년 일본군, 민간인 30만명 학살…'목 베기 시합'까지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을 기점으로,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우위를 점했다.그래도 아직은 일본이 열강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한, 그리고 을미사변(1895)으로 인해 일본에 대한 공포와 반감이 극에 달한 조선은 러시아를 끌어들이며 줄타기 외교를 시도했다(아관파천1896).하지만 조선의 이런 중립국화 전략도 1905년,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돌아가며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일본의 독주를 견제할 세력은 동아시아에 없었다.청은 무술변법 등을 통해 재기하려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신해혁명으로 무너졌다.쑨원(손문孫文) 측과의 약속을 깨고 신생 중화민국의 독재자가 된 위안스카이(원세개袁世凱)가 사망한 이후에는, 대륙은 대군벌시대에 빠져들었다.그리고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중국의 역사는 민국 수도 난징(남경南京)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난징은 무덤 도시?난징에 올 때마다 공기가 무거운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동행한 통역 겸 가이드는 이렇게 말했다. 난징이라는 도시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이 죽었기 때문이란다. 가이드들 사이에서는 난징 관광을 가리켜 무덤 관광이라고까지 표현한다고.일단 난징의 무덤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중산릉이다. 중국의 국부(國父)로 일컬어지는 쑨원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1926년부터 1929년까지 3년에 걸쳐 건립됐다.중산릉이라는 이름은 그의 호 중산에서 따온 것이다. 황제의 무덤에만 붙이는 릉이라는 글자는 황제를 끌어내리고 공화국을 세우려 했던 이에겐 어울리지 않는 글자지만, 중국인들이 얼마나 그를 추앙해왔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당시 중국 인구 3억9200만명을 나타내는 392개의 돌계단 위에 그의 사상인 삼민주의(민족민주민권)를 나타내는 현판이 걸린 묘당이 자리잡고 있다.중산릉 옆에는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朱元璋)이 묻혀 있는 명효릉도 있다. 명은 강남에서 건국된 국가로서는 처음으로 대륙을 통일한 나라다.지금은 특별한 도시로 대우를 받고 있지는 않지만, 난징 시내에는 자부심이 숨어 있다.1912년 중화민국이 수립되면서 수도로 정해진 곳이 난징이었고, 따라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주요 활동 무대도 난징과 그 인근이었다.중화인민공화국이 승리를 거둔 1949년 이후에도, 대만으로 피신한 중화민국은 여전히 이곳을 헌법상 수도로 명시해두고 있다.그래서 총통부 관저 옆에는 중화민국 수립 무렵을 재현한 1912 거리가 조성돼 있기도 하다.하지만 자유롭고 평등한 주권국가를 향한 열망이나 어떤 영광만이 이 도시를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잊히지 않을 숫자 30만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대공황이 전 세계를 휩쓸었다.물론 동아시아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나치 독일이나 파쇼 이탈리아가 그랬듯, 일본은 이런 상황의 타개책으로 군국주의적 팽창 카드를 꺼내들었다.1931년,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이후 동북3성을 점령한 뒤 괴뢰정권인 만주국을 수립해 청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푸이溥儀)를 수장으로 앉혔다.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은 이 때부터 시작된 중-일 간의 군사적 충돌의 연장선에 있다. 일각에서는 중일전쟁의 시발점을 만주사변으로 보기도 한다.1937년 7월, 우연히 발생한 병사 실종사건을 구실 삼아 대대적인 대륙 침공에 나선 일본은, 속전속결로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중국의 거센 저항에 직면했다.하지만 그 해 10월에는 상하이(상해上海)가 함락됐고, 장제스(장개석蔣介石)의 국민당 정부는 11월에 충칭(중경重慶)으로 수도를 옮겼다.그리고 12월, 난징이 함락됐다.구타와 가혹행위가 만연한 비인간적 병영 문화와 전쟁 스트레스는 집단 광기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것은 난징과 주변지역에 살던 민간인 30만명이 학살되는 참극으로 나타났다.무카이 도시아키(向井敏明)와 노다 쓰요시(野田毅)라는 두 군인은 누가 먼저 100명의 목을 베는지를 놓고 시합을 벌였고, 일본의 언론들은 이를 대서특필했다.전쟁은 중국을 비롯한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고, 중국인은 물론 이 참극을 잊지 않았다.2007년에 확장 개관한 난징 대학살 기념관은, 건물 자체에 그런 한이 사무쳐있는 듯했다.기념관 앞 광장에 설치된 십자가 모양의 대형 구조물 앞에서 한 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는 공간을 지배하는 무거운 분위기에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모든 전시물에는 중국어와 영어, 그리고 일본어로 된 설명이 붙어있다. 희생자의 유가족 등을 추적해 모은 희생자 각각에 대한 정보를 일종의 아카이브로 전시해놓은 것도 눈에 띄었다.△국민당과 공산당, 그리고 희생자난징에는 희생자를 기리는 공간이 또 있다.우리 역시 겪은 일이지만, 중국에서도 공산당과 국민당 간의 이념 대립이 당연히 존재했다. 오죽하면 두 차례나 내전을 치렀을까.1927년 장제스의 공산당원 숙청으로 시작된 제1차 국공내전은 1936년 서안 사건으로 국민당과 공산당이 일단 힘을 합쳐 일본에 대항하기로 하면서 일단 종결된다. 하지만 1945년 일본이 항복한 뒤 제2차 국공내전이 벌어졌다. 이 내전의 결과로 대륙을 지배하게 된 것은 공산당이었다.위화타이(우화대雨花臺)는 그런 이념 대립의 역사를 안고 있는 곳이다. 난징 국민당 정권은 당시 활동했던 공산주의자들을 잡아 이곳에서 처형했다. 중국 공산당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처형당한 공산주의자가 10만여명에 달한다고 한다.그 처형장 자리를 내전 끝에 다시 밟게 된 중국 공산당은, 1950년 그 자리에 혁명열사릉원을 건립했다.기념관 안, 추모 자리에는 수천 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한 명도 잊지 않겠다는 선언처럼 보였다.그런 중국 공산당이 나중에 문화대혁명이나 천안문 학살을 자행한 것을 떠올리면, 역시 역사는 한 쪽만의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그리고 정말로 이 같은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지 않을 수 없다.그런 감정 속에서, 스스로에게, 그리고 대한민국에게, 우리는 어떤가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자작고개나 우금치, 구미란 등에서 희생된 이들을 기억할 의지가, 뒤이은 일제의 강압 식민통치 과정에서, 이어진 전쟁과 각종 사고와 여러 폭력 속에서 희생된 이들을 잊지 않을 자신이 우리에게 있는가?우리가 당한 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저지른 일에 대해서도 잊지 않으며, 다시는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끔 하려는 노력은 있는가?난징이 준 숙제다.

  • 기획
  • 권혁일
  • 2014.11.12 23:02

[(41) 청일전쟁 중국 역사현장- 산동성 웨이하이]7000톤급 북양함대 철갑함 복원 '치욕의 역사' 되새겨

난은 평정됐다.홍수전이 숨을 거둔 지 한 달 만에 천경이 함락됐다. 다시 청의 남경으로 돌아온 도시에는 양강 총독이 머무르게 됐다.내우는 정리돼가는 듯 보였지만, 외환은 여전했다.제2차 아편전쟁(1860)에서 또다시 굴욕을 당한 청은, 이어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고 제국주의의 길을 걷기 시작한 신흥 일본제국의 대만 침공(1874)과 류큐 합병(1879)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1876년에는 조공국이었던 조선이 일본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개항을 하게 되면서, 조약문을 통해 자주국을 선언했다.청으로서는, 이대로는 중화제국의 면모가 서질 않았다.△북양함대의 도시 웨이하이산동성 웨이하이(위해威海)는, 조금 과장 섞어 말하자면 중국어 좀 많이 쓰는 여수 같은 느낌이었다.바다를 끼고 달리는 도로변에는 하나 걸러 하나 빈도로 간판에 한글이 적혀 있었고, 그만큼 한식당도 많았다. 정돈된 도로망과 건축물이 이루는 경관도 비슷했다. 웨이하이가 여수와 비슷한 이유는 또 있다. 바로 이곳이 근대 청 제국의 자존심이었던 북양함대의 근거지였다는 것이다. 전라 좌수영이 있던 여수와 닮은꼴이다.서로가 닮은 걸 알았는지 1996년 두 도시는 자매결연을 했고, 그 관계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산동반도 동쪽 끝에 위치한 웨이하이는 그 지리적 이점 때문에 오래 전부터 군사적경제적 요충지로 여겨졌다. 당 대에는 신라의 법화원이 세워졌고, 명 대에는 왜적에 대비한 요새가 들어섰다.지형적으로도, 완만하게 들어간 만을 류공다오(유공도劉公島)가 막아서는 모양새로, 군항으로서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리홍장(이홍장李鴻章)이 북양함대를 건설하면서 이곳을 근거지로 삼은 이유로 이 정도면 충분했을 것이다.△양무운동과 청의 중흥해군 건설은 20년 동안 이뤄졌습니다. 대만 침공(1874) 등에서 일본의 야심을 파악하고, 해군이 약한 것이 청의 문제라는 인식에서 해군 건설이 추진됐죠.왕지화(王記華49) 중국갑오전쟁박물관 연구관원은 청일전쟁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면서 이같이 말했다.1874년부터 1880년께까지는 준비단계였다. 당장 해군을 건설할 수 있는 기반이 없으니 열강에 가서 운용법과 같은 것들을 배워나갔다.1880년대에 접어들면서, 청의 해군은 대대적인 확장을 거치게 된다. 중앙정부의 지원도 탄탄했고, 리홍장의 의지도 강력했다. 북양대신이었던 그는 북양함대에 모든 자원을 집중했다.그는 독일에서 딩위엔(정원定遠)과 천위엔(진원鎭遠)이라는, 7000톤이 넘는 철갑함도 도입했다. 이는 당시 동아시아 최대최강이었다.그 결과, 1890년대에 접어들면서 북양함대는 명실상부한 동아시아 최강의 함대로 떠올랐다.△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전쟁톈진조약(1885) 이후 겉으로는 평화로워보이던 동아시아도, 속사정은 상당히 복잡했다.메이지 유신을 통해 성공적으로 자본주의 체제로의 전환을 마친 일본은 원료 공급지와 상품 시장을 찾아 팽창할 수밖에 없었다. 급격한 사회 변화에 따른 국내 갈등은 말할 것도 없었고, 1870년대에 대두한 정한론(征韓論일본의 이익을 위해 조선을 정벌하자는 주장)의 그림자도 여전했다.청도 사정이 복잡했다. 이미 일본의 대만 침공과 류큐 합병에 무기력하게 끌려간 경험이 있는지라, 조선에 대해서만큼은 종주권을 놓칠 수 없는 입장이었다.이런 양국의 입장은 군비 경쟁으로 귀결됐다. 청의 북양함대가 급부상하자 일본은 그에 맞설 신형 함선들을 경쟁적으로 도입했다.이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불씨를 당겨버린 것이 바로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이었다.농민군의 기세에 놀란 조선은 청에 파병을 요청했고, 조선에 대한 종주국으로서의 의무를 다함으로써 세를 과시하고 싶었던 청은 곧바로 아산만에 원병을 상륙시켰다.문제는 톈진조약이었다. 이 조약에 들어있던 양국은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 경우 서로 통보한다는 내용을 근거로 일본도 군대를 파견한 것이다. 전주 화약으로 농민군이 해산하고 조선 조정도 양국에 군대를 물릴 것을 요구했지만, 이런 기회를 일본이 놓칠 리가 없었다.왕지화 연구관원은 동학농민혁명은 구실에 불과했다고 잘라 말했다.청일전쟁이 공식적으로 시작하기 전인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하며 조선을 영향력 아래에 두고자 했다. 동아시아를 향한 팽창의 야욕이었다.일본 아사히신문이 보도한 내용을 엮은 책 동아시아를 만든 열 가지 사건은 아예 청일전쟁은 경복궁에서 시작됐다고 언급하고 있다.△청의 잃어버린 20년괴상하게도, 청이나 일본이 아닌 조선 땅이 전쟁터가 됐다.1894년 7월 25일 아산 인근 풍도 앞바다의 포성으로 시작된 전쟁은 평양, 압록강 하구 등에서의 전투를 거친 뒤 1895년 3월, 일본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이 났다. 청이 자랑하던 북양함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전후 맺어진 시모노세키 조약의 결과, 청이 지불해야 했던 전쟁배상금만 2억냥이었다. 당시 청의 연간 재정이 8000만냥이었으니, 재정난은 뻔한 결과였다.여기에 일본은 대만, 요동 반도 등의 영토도 요구했다. 독일프랑스러시아의 3국 간섭으로 이 같은 요구는 철회됐지만, 대신 이들 열강이 중국의 도시들을 떼어갔다.안 그래도 힘들었던 중국 장삼이사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태평천국운동이 진압된 지 30년 만의 일이었다.전쟁은 끝났다. 하지만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왕지화 중국갑오전쟁박물관 연구관원 "일본 국제정세 위협은 현재도 진행"- 청일전쟁의 패배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시는지?메이지유신 이후의 근대화 노력으로 일본의 군사력은 강해졌다. 당시 중국은 리홍장의 주도 하에 군함을 구입하는 등 군비 증강에 주력했는데, 이것이 북양함대다. 하지만 청일전쟁 즈음에는 정부의 재정난과 서태후의 사치 등으로 인해 투자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훈련도 부실해졌다. 반면 일본은 전쟁에 대한 준비가 철저했다. 1890년 이후 4년 동안 이뤄진 집중 투자로 군세를 따라잡았다.- 청일전쟁 당시와 지금의 국제정세를 비교해본다면?공통점이라면 일본의 위협을 들 수 있겠다. 이것은 현재진행형이다. 평화헌법 재해석으로 인해, 일본은 현재 동북아의 가장 큰 불안 요소다. 120년 전의 길을 일본이 걷고 있는데, 한중 학자들이 힘을 합쳐 견제해야 한다. 물론 다른 점도 있다. 120년 전에는 청나라가 조선의 종주국이었다면, 현재는 동등한 관계다. 또 120년 전과는 달리 지금의 중국은 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다. 다만 중국도 주변국과의 마찰이 자꾸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 또 하나의 불안요소라고 할 수 있다.- 청일전쟁 후 중국 민중의 반응은 어땠는지?막대한 배상금으로 인해 재정난이 가속화했다. 또 중화민족의 자존심에도 큰 상처가 났다. 뤼순(여순旅順), 칭다오(청도靑島)가 각각 러시아와 독일에 넘어가고, 웨이하이도 영국에 넘어가면서 위기의식이 생겨났다. 무술 변법이 실패한 뒤 의화단 운동이 일어났고, 이후 신해혁명으로까지 이어졌다. 이런 상황일수록 민족이 단결하게 된다.- 청일전쟁을 국가적으로 기리는 기념일은 있는지?국가적으로 통일된 기념일은 없다. 다만 전국 각지에 갑오전쟁 박물관이 있다. 기념일이라고 하면 9월 3일이 항일전쟁기념일인데, 이 날은 후에 일어난 중일전쟁을 기리는 날이다.

  • 기획
  • 권혁일
  • 2014.11.05 23:02

[(40) 중국 태평천국운동 역사현장을 가다-②기념시설] 1951년 박물관 개관…봉기부터 난징 함락까지 '한눈에'

장쑤성(江蘇省)의 성도 난징은 풍요로운 양쯔강 하류 평원에 자리하고 있다.명나라 태조 홍무제(洪武帝) 주원장이 도읍으로 삼았던 도시이고, 중국 혁명의 아버지 쑨원이 중화민국의 임시정부를 설치했던 도시다. 이 외에도 여러 왕조의 도읍지였던 도시답게 고색창연한 멋이 가득하다.전국시대(戰國時代)에는 금릉읍(金陵邑)이라 불렸으나 삼국시대 들어 오나라의 손권(孫權)이 건업(建業)이라고 개칭했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초기에는 응천부(應天府)라 부르다가 후에 난징으로 명칭을 바꾸었고, 이때의 도시 이름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난징은 그러나 화려한 이력 이면에 난징조약, 난징대학살과 같은 역사의 큰 아픔도 지니고 있다. 이렇게 새겨진 역사의 다양한 흔적들은 난징 곳곳에 많은 명승고적을 남겼다.태평천국운동 당시 태평천국의 수도가 바로 난징이었고, 이를 기념해 태평천국역사박물관이 들어서 있다.△동학혁명 통해 만난 태평천국중국 난징(南京)의 부자묘 서쪽에 있는 태평천국역사박물관에는 1850년 태평천국 봉기부터 1864년 태평천국의 수도인 난징 함락에 이르기까지의 각종 사료가 전시돼 있다.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 곳은 원래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이 황제가 되기 전해 사용했던 오왕부(吳王府)였다. 이후 명나라 개국공신 서달(徐達)에게 주어져 정원으로 바뀌었다.또 청대에는 건륭제가 이곳을 첨원이라 이름 짓고, 남행 때 머물었다. 태평천국 시대에는 동왕 양수청(楊秀淸)이 왕부로 삼았던 곳이기도 하다. 반세기 가까운 시간 주인이 수차례 바뀐 이 곳은 1951년, 태평천국 100주년을 맞아 중국 유일의 태평천국박물관으로 개관했다.박물관에는 당시 태평천국군이 사용하던 무기의복, 주요 지도자의 행적, 태평천국군의 세력도를 그린 지도 등 2800여점에 달하는 관련 자료가 전시돼 있다. 특히 태평천국 관료 관복인 단룡마괘(團龍馬掛), 태평천국이 인쇄한 흠정사계조례(欽定士階條例) 등 희귀 원판본을 소장하고 있다.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과 태평천국역사박물관은 2012년 교류협력에 관한 양해각서를 체결한 뒤 두 민중운동의 학술 연구의 성과와 간행물자료의 상호 교환, 학술대회 공동 추진 등을 추진해 왔다.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을 맞이한 해인 올해 8월에는 정읍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서 열린 동학농민혁명 120주년 기념 특별전시회를 통해 태평천국역사박물관의 자료유물이 국내에 처음으로 전시되기도 했다.△태평천국군이 함락한 난징난징시내에는 근대사 역사박물관이 있다. 이곳은 청나라 시대 양강 총독서, 태평천국의 천조궁전, 중화민국 임시정부 쑨원(孫文) 임시 대총통부, 국민정부 총통부 등으로 사용됐다. 그동안 집주인이 바뀐 것을 다 따지면 40번에 가깝다. 그만큼 권력의 무상함을 말해주는 곳이다.총통부는 현재 근대사 역사박물관으로 꾸며졌다. 총통부는 건물과 정원으로 구분되고 앞쪽의 건물들은 청 때부터 있던 전통 건축들과 20세기에 지은 양식건축들로 이뤄져 있다.건물로 들어서면 우측은 태평천국 당시 궁전으로 쓰였던 흔적이 조금 남아 있다. 천왕 홍수전의 집무실, 태평천국 100주년를 기린 기념비 등이 이곳이 옛 태평천국의 궁전 자리라는 것을 알려준다.1851년 3월 홍수전이 이끄는 수십만의 태평천국군은 난징의 성벽을 무너뜨렸다. 열흘 후 훙수전은 천왕(天王)의 복장을 갖추고 정식으로 입성했다. 이후 11년간 난징은 태평천국의 수도였다. 홍수전이 1851년 1월 청조 타도와 평등한 지상천국 건설을 내걸고 1만여명의 추종자와 봉기한 이후 그의 사망과 함께 태평천국이 멸망하기까지 13년간, 무려 2000만명 이상이 전투와 기근으로 목숨을 잃었다.총통부는 오랜 세월이 흐르고, 주인이 여럿 바뀌면서 태평천국의 화려했던 시대를 보여줄 유물이 다소 아쉬웠다. 1982년 총통부는 전국 중점문물보호기관으로 지정됐고, 2004년 국가 4A급 풍경구로 선정됐다.● 장티에바오 태평천국역사박물관 연구원 "중국 학계, 반청 기치 높게 평가, 1990년대 후반 연구 폭 넓어져"동학농민혁명에는 태평천국운동에서 찾아볼 수 없는 민족의식이 깊게 자리했습니다. 불합리한 사회체제 개혁에 앞서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려는 애국심이 동학농민군의 면면에 흘렀다고 봅니다.이달 14일 중국 현지에서 만난 장티에바오(張鐵寶60) 태평천국역사박물관 연구원은 중국의 대표적인 태평천국운동 전문가이다.그는 낯선 이방인들의 질문 하나하나에도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의 차가 식는 줄도 모른 채 성심껏 답변했다.-태평천국운동과 동학농민혁명에는 많은 공통 분모가 있습니다.동감합니다. 두 사건 모두 농민소지주 등 피지배층이 주도가 된 민중운동입니다. 또한 종교를 전면에 내세운 것과 당시 청나라와 조선이 이후 외세의 침략을 받았다는 점에서 닮은 점이 많습니다.-태평천국이 바꾸려했던 것은 무엇입니까.천왕 홍수전은 반만흥한의 기치를 내거는 등 처음부터 끝까지 청나라의 반대편에 섰습니다. 그는 또 봉건적 토지제도를 혁파하려 했고, 엄격한 종교적 금욕주의를 견지했습니다. 남녀평등 사상을 내세우는 등 기존의 봉건적 질서와 다른 길을 갔습니다.-동학농민혁명과 태평천국운동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인지.태평천국은 시종일관 청나라에 반대했습니다. 청나라 정부에 대한 반감이 거센 탓에 당시 물밀듯이 밀려오는 서구 열강세력에 대해 정부와 함께 대응하려는 노력이 없었습니다. 반면 동학농민군은 조선 정부에 대한 변혁 보다 탐관오리 등 당시 지배층에 칼 끝을 겨눴습니다. 또한 외세의 침략이 가시화되자 당시 정부와의 타협을 모색하는 등 국가를 위기상황으로 몰고 가는 일에 선을 그었습니다. 동학농민군에 깊게 자리한 민족의식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태평천국이 몰락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지도부의 갈등과 반목이 심해지는 등 수면 아래 잠자던 내부모순이 태평천국을 결국 파멸로 몰고 갔습니다. 또 주요 구성원이 농민, 소지식인으로만 제한되면서 구현하려는 사상의 폭도 좁았습니다. 게다가 청 정부와의 전쟁이 길어지면서 애초 적게 걷던 세금이 많아지면서, 주 지지층인 농민들의 이탈이 가속화한 것도 몰락의 주요 원인입니다.-현재 중국에서는 태평천국운동을 어떻게 바라보고 싶습니까.시대별로 다른 관점에서 바라봤습니다. 중화민국 시대에는 청나라 정부에 저항한 점이 높이 평가되면서 학계정치계에서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후 100주년인 1951년을 기점으로 태평천국운동에 대한 학계 연구가 활발해졌습니다. 다만 문화대혁명기를 거치면서 태평천국의 역사적 의미사상이 저평가됐습니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연구의 폭이 크게 넓어졌습니다. 이때부터 태평천국군과 반대편에 선 당시 청나라 정부의 입장, 대응전략 등에 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 기획
  • 최명국
  • 2014.10.29 23:02

[(39) 중국 태평천국운동 역사현장을 가다-①프롤로그] 반봉건·반외세 '아래로부터의 개혁' 동학혁명과 닮아

● 동학혁명과 유사점 - 종교조직 기반 피지배계층 주도 봉기, 토지 균등분배근대화 운동에 영향● 동학혁명과 차이점 - 반청 기치 건국교주가 천왕에 올라, 내부 지도층 간 살육전으로 몰락의 길올해로 120주년을 맞은 동학농민혁명은 갑오년 당시제폭구민(除暴救民),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내걸었다. 민중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봉건사회의 구조로부터 벗어나려는 반봉건 근대화운동이며,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는 제국주의 세력을 타파하기 위한 몸부림이기도 했다.이런 동학농민혁명의 궤적은 프랑스혁명과 중국 태평천국운동과 견줄 수 있다. 특히 종교조직을 기반으로 하고, 반제국주의를 표방한 점에 있어서는 태평천국운동(1851~1864년)과 깊은 유사점을 갖는다.이 두 사건 모두 결국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지만, 청나라와 조선의 근대화운동에 일정부분 영향을 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이에 전북일보는 지난 12일부터 16일까지 중국 근대 최대 민중혁명이었던 태평천국운동의 본거지였던 중국 난징(南京)과 동학농민혁명의 국제적 배경이 된 갑오 청일전쟁의 무대였던 웨이하이(威海)를 방문했다. 중국 현지 태평천국운동청일전쟁 기념시설 답사를 통해 동학농민혁명과 태평천국운동의 연계점, 두 사건이 이후 국제정세에 미친 영향 등을 알아보기 위한 것이다.중국 현지 취재를 바탕으로 태평천국운동의 배경과 이념, 중국 현지 태평천국운동청일전쟁 기념시설, 역사적 사건에 대한 중국의 관점 등에 대해 4회에 걸쳐 짚어본다.△태평천국운동의 배경과 전개과정청나라 말기 관료와 군대의 부패와 지주제 등 경제적 모순이 심화하면서 사회적 무질서현상이 빚어졌다.인구의 급격한 증가에도 불구하고 경작 면적은 제자리이고, 아편 유입에 따른 은의 해외유출로 인해 농민 가계는 더욱 악화됐다.태평천국운동의 진원지인 광시성(廣西省) 역시 이런 일반적 현상을 보이고 있었다.특히 아편전쟁 이후 상하이(上海)가 개항되자 전통적으로 대외무역의 독점을 누리던 광저우와 연결된 교역로가 갑자기 불황이 빠지면서, 실업자가 된 운송업자와 전쟁 후 해산된 지방군으로 인해 사회불안 요소도 커졌다.이 가운데 독특한 관습과 방언을 이어오면서 광동성 내 화북 출신 이주민들과 현지 한족 사이 분쟁도 격화됐다.이주민들은 힘을 모으기 위해 하나의 단체로 규합됐다. 태평천국운동은 바로 이런 이주민들의 종교결사로부터 시작됐다. 종교결사인 배상제회의 창시자이자 태평천국운동의 지도자인 홍수전(1814 ~1864년)은 광둥성 출신으로, 먼 선대가 화북에서 이주해왔다.몇 차례 과거시험을 치르는 등 관리를 꿈꿨던 홍수전은 과거시험을 치르는 길에서 우연히 읽게 된 그리스도교 선교책을 본 뒤 독자적인 그리스도교리를 바탕으로 1844년 배상제회를 창시했다. 배상제회는 홍수전의 지인인 풍운산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신도가 급격히 늘어났다.배상제회는 우상 파괴와 향촌민의 개종을 적극 추진하면서 향촌사회 기존 세력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과정에서 배상제회는 신도들을 무장조직화했다.또한 이들은 당시 청나라 지배계층인 만주족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 청나라와의 결전도 피할 수 없었다. 2만여명에 달하는 강력한 무장집단을 이루게 된 배상제회는 1850년 7월 봉기해 청나라 군대와 곳곳에서 충돌하며, 북진했다. 이 과정에서 1851년 1월 11일 홍수전은 태평천국의 수립을 선언하고 3월 천왕(天王)에 즉위했다.이후 홍수전은 휘하의 양수청을 동왕, 소조귀를 서왕, 풍안산을 남왕, 위창휘를 북왕, 석달개를 익왕에 각각 봉하는 등 군사정치적 지도체제를 확립했다.이 즈음 태평천국군의 병력은 50만명으로 늘었고, 1853년 3월 드디어 강남의 중심지 난징을 점령한 뒤 수도로 삼았다.△태평천국의 이념태평천국의 정치권력은 종교적 권위를 매개로 하고 있다. 하나의 국가인 태평천국에서의 생활은 엄격한 종교적 금욕주의의 규제를 받았다. 술담배아편은 물론 남녀의 접촉 또한 엄격히 금지됐다.1853년 간행된 천조전무제도(天朝田畝制度)는 태평천국의 지향점이 될 정치경제사회의 체제이념과 정책이 정립한 것이다.이를 보면 토지와 생산물을 포함한 만물을 국가가 관리분배하도록 했다. 토지의 경우 노동력에 따라 균등하게 분배하되 분배를 위해 기존의 토지소유권을 박탈한다는 규정은 없었다.이는 대체로 사유권의 강력한 통제를 통한 균등한 경제체제를 지향한 것으로 볼 수 있다.또한 태평천국은 난징 점령 직전부터 반청혁명을 기치로 내걸고, 새로운 질서의 도래를 광범위하게 알렸다. 이는 농민광산노동자유민 등 사회 피지배층의 절대적인 호응을 받는 계기가 됐다.반면 이 때문에 당시 지배계층인 신사, 지주, 부유한 상인의 외면을 받기도 해 향후 태평천국의 고립을 좌초하기도 했다.△태평천국의 몰락태평천국운동이 몰락한 가장 중요한 계기는 지도층의 반목이었다.난징에 도읍을 둔 후 천왕 홍수전은 명목상의 지도자로 전락하고 실질적인 통치는 동왕 양수청이 장악했다.양수청의 전횡에 대한 주위의 견제가 심해지면서 북왕 위창휘가 양수청을 제거했다. 이 과정에서 그의 친족과 부하 등 2만여명이 살해되면서 태평천국군 전력은 큰 손실을 입었다.이후에도 내부 지도층간 살육전과 숙청이 이어지면서 내부 갈등은 심화됐다. 또한 향촌에서의 세력을 지키기 위해 조직된 한인 관료 및 지주층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무장세력과 청나라 군대는 점차 포위망을 좁히면서 태평천국을 압박했다. 그러면서 초반 사태를 주시하던 서구 열강이 청군에 대해 근대무기와 훈련법을 전수하면서 청나라 군대의 위세도 강화됐다.전방위적인 압박에 시달리던 태평천국은 1864년 7월 수도인 난징이 증국번의 군대에 점령되면서 몰락의 길을 걸었다.△동학농민혁명과의 비교태평천국운동과 동학농민혁명은 모두 농민 등 피지배층의 주도로 일어났다.이들 농민군은 부패하고 탐욕스러운 지배층의 억압과 수탈에 맞선 투쟁, 외세의 침략행위에 대한 부정적 인식 등에서 유사성이 두드러진다.또한 종교조직을 통해 봉기의 명분을 쌓고 세력을 규합한 것과 이후 청나라와 조선이 외국 열강의 침략대상으로 전락했다는 점에서 보면 두 사건을 같은 선상에서 바라볼 수 있다.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태평천국이 시종일관 청나라와의 전쟁을 통해 국가전복을 꾀한 것에 비해 동학농민군은 때론 조선 조정과 타협하기도 하는 등 국가를 위기상황으로 몰아가는 일에는 선을 그었다는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은 정부체제를 변혁하기 보다 백성들을 수탈하는 탐관오리지주에 대한 저항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장티에바오(張鐵寶) 난징 태평천국역사박물관 연구원은 이상적인 사회구현을 꿈꾸고, 반외세를 기치로 내건 점에서 두 역사적 사건은 공통점이 많다며 이런 민중혁명이 이후 양국 근대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 기획
  • 최명국
  • 2014.10.22 23:02

[(38) 지역별 유적지와 기념사업 - 강원도] 홍천 풍암리 전적지에 1977년 위령탑 세우고 매년 제사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서석 5일장이 들어선 날이었던 데다, 마침 또 장터 입구에 휴대폰 가게가 새로 문을 열면서 개업 행사를 벌여 일대가 떠들썩했다. 우스꽝스런 분장을 한 사람이 연신 북을 치며 노래를 하고 있었고, 막 하교하는 참이던 학생들이 멈춰 서서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서석면이 통째로 나 아직 안 죽었어! 하며 존재감을 발산하는 듯했다.서석은 예로부터 원주, 강릉, 인제, 횡성 등과 연결되는 교통이 편리해 장돌뱅이들의 주요 거점이기도 했고, 오늘날에는 홍천군 동부 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서석은 그리고 강원도 지역 동학농민군이 보루로 삼던 거점이기도 했다.△피가 고여 자작자작 했다던 자작고개장터를 뒤로 하고 야트막한 구릉을 시나브로 오르다보면 서석면사무소와 보건지소가 바로 눈에 들어온다. 보건지소를 오른쪽에 끼고 계속 올라가면 자작고개라는 고갯길이 나오고, 그 왼편으로 동학농민혁명군 전적지가 있다.1977년에 세워진 위령탑과 2012년에 조성된 기념공원이 전적지를 구성하고 있는데, 기념공원은 다른 어느 기념공원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깔끔하게 조성돼 있었다.어릴 적에 이 길을 지나서 학교를 다녔는데, 장마철만 되면 사람 뼈가 튀어나오곤 했어요. 그 땐 한국전쟁 생각만 했었지, 유골들이 동학농민혁명과 관련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죠.서석면장을 지냈고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에 헌신했던 심형기 씨가 고갯길을 가리키며 말했다.여기서 희생된 농민군이 학자 조사에 따르면 800명이라고 하는데, 갑오실기 같은 기록을 보면 수천 부지기라고 돼 있거든요. 그만큼 많이 희생이 있었다는 거죠.1894년 9월에 농민군 2차 봉기가 시작되고, 북접 교단도 기포령을 내렸다. 홍천대접주 차기석은 홍천 동부 지역과 봉평 등지를 근거로 활동하면서 농민군과 투쟁 물자를 모았다.10월 13일에 홍천 내면 동창을 친 것도 그런 활동의 일환이었다. 이 때 농민군이 집결한 내촌면 물걸리 일대에 지금은 기미만세공원이 조성돼 있다.차기석 부대는 세곡을 모아두는 곳이었던 동창을 침으로써 물자를 충당하면서, 서쪽 경기도 일대에서 홍천을 넘어오던 민보군과 관군을 상대할 준비를 했다. 이 때 창고를 관리하던 김덕원이라는 사람이 물자를 풀어 농민군을 도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이들은 그러나 장야평 싸움에서 30여명의 전사자를 내고 동쪽으로 밀려 서석 방향으로 후퇴했는데, 이 때 농민군이 진을 쳤던 자리가 바로 전적지 자리다. 산과 고개로 둘러싸인 분지 가운데서 홀로 섬처럼 머리를 내밀고 있는 듯한 지형으로, 사방 곳곳이 잘 보여 방어진을 치기에는 아주 좋은 자리였다.10월 22일, 민보군과 관군이 서석에 들이닥침으로써 풍암리 전투가 벌어졌다. 지형 상으로는 농민군이 유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기의 차이는 극복할 수 없었다. 농민군은 적들의 총에서는 빨간 물이 나올 뿐이라는 주술적 믿음에 의지해 싸웠지만, 낫과 쇠스랑 정도로 신식 소총을 든 군대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이 전투에서 결국 농민군 8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그 광경이 어찌나 참혹했던지, 이 때 흘러내린 농민군의 피가 고개를 적셔 길바닥이 자작자작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래서 고개 이름이 자작고개란다.△전라충청도만 생각하는 인식 아쉽다홍천 지역에서는 서석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가 활동하고 있다. 번듯한 사무실도 없는 형편이지만, 서석면홍천군과 함께 매년 전적지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제삿날을 잡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70년대까지도 음력 10월 23일 즈음에 동시에 제사를 지내는 집이 27가구나 됐었기에, 자연스레 이 날이 제삿날이 된 것이다.1977년에 위령탑이 세워지고 나서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는데, 당시에는 천도교 예법으로 청수봉전이라는, 맑은 물을 떠놓고 예를 갖추는 방식으로 제사를 지냈다.하지만 지금은 추위 등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양력 날짜로 기념을 하고, 이 때 서석면민집회를 함께 진행한다고 한다.원래는 동학 관련한 이야기는 서로 쉬쉬하고 그랬는데, 70년대 이후에 위령탑도 세워지고 혁명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이제는 역적으로 보는 정서는 많이 없어졌죠.고장의 역사를 들춰내고 기념하려는 노력이 거둔 결실이 바로 이런 걸까.사람들이 우금치, 전라도, 이런 곳만 생각하지 서석은 모르거든요. 이렇게 희생자가 많았던 곳인데.△강릉 관아의 농민군 4일 천하백두대간을 넘어가는 길은 험하기가 그지없었다. 크게 돌아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달렸으면 좀 수월했으련만, 무슨 고집이었는지 해발 1000미터가 넘는 운두령을 넘기로 했다.서석을 뒤로 하고, 동학농민혁명군이 관아를 점령하고 자치를 실현했던 강릉을 찾아가는 길이었다.1894년, 홍천 지역의 차기석 세력과는 다른 세력이 그보다 먼저 평창, 강릉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다.동학 교단과 연관이 있었고 경기충청도의 북접 주력과 합류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던 차기석 세력과는 달리, 반봉건보국안민의 기치를 내걸고 자생적으로 나선 세력이었다.평창의 오덕보라는 이를 중심으로 모인 농민군은 1894년 9월 초 강릉 방면으로 진격했다.대관령을 넘은 농민군은 9월 4일 강릉 관아를 점령하고 자치를 실시했다. 이들은 억울하게 붙잡힌 이들을 풀어주고 이서배(하급 관료)를 잡아 가뒀다. 또 지주들의 땅 문서를 거뒀으며, 농민들에 대한 징세를 감면했다.2011년에 복원된 강릉 관아에는 이와 관련된 설명은 붙어 있지 않았지만, 농민들이 호령하고 이서배들이 벌벌 떨며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을 상상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농민군 자치는 그러나 4일 천하에 그쳤다. 경포 인근 선교장의 대부호 이회원이 지휘한 반농민군의 습격으로 농민군은 평창 쪽으로 물러나야 했다. 농민군이 선교장을 공격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선수를 친 것이다.패퇴한 농민군은 전열을 정비해 강릉을 다시 치려 했지만, 민보군과 관군,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평창 등지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결국 11월 하순 무렵에는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11월 12일에는 홍천 내면 지역에서 항전을 벌이던 차기석 또한 접전 끝에 체포됐다. 그는 강릉부로 압송돼, 11월 22일에, 강릉 관아의 교장에서 처형됐다.이런 역사를 기억이나 하는지, 강릉 선교장은 그저 말없이 으리으리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수많은 관광객이 초가을 햇볕 속에서 양반 가옥을 찾았고, 그들의 눈길이 닿는 곳 어디에도 이곳이 동학농민혁명 시기 반농민군 활동과 관련이 있었다는 설명은 없었다.

  • 기획
  • 권혁일
  • 2014.10.15 23:02

[(37) 지역별 유적지와 기념사업 - 경상도 지역(하)] '살림과 모심' 정신으로 유적지 보존·기념물 건립 나서야

현재까지 파악확인된 경북지역 유적지 혹은 기념시설물은 모두 31곳(약8.8%)인데, 이들 유적지 정비 및 기념시설물 건립설치가 타 지역에 비해 그 실적이 매우 저조하다. 경북지역 기념사업 추진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 파악되고 확인된 유적지를 보존하는 것과 함께 해당 유적지의 성격에 맞게 기념시설물 건립설치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점이다. 유적지 정비는 지역주민에게 동학농민혁명이 남의 일이 아니라 자기 지역의 역사라는 친근감과 함께 긍정적인 인식의 기틀로 자리하는 매개체로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나아가 21세기 문화관광의 시대 해당 시군의 역사적 전통과 문화적 전통을 확인하여 지역 정체성으로 정립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까지 경북지역의 역사문화적 전통의 핵심적인 위상은 양반문화라고 볼 수 있다. 엄밀하게 말해서 신분제를 골간으로 하는 중세시대의 산물인 양반문화는 인류역사발전의 흐름에서 보면 역사발전의 역방향에 해당한다. 이와 반대로 동학농민혁명은 한국 근대민주정치 구현을 위한 대규모 민족민주항쟁으로 인류역사발전의 순방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동안 경북지역이 지녀온 양반문화라는 위상을 한쪽 날개라고 한다면 다른 한쪽 날개는 근대민주정치를 구현하고자 했던 동학농민혁명이다. 동학의 본고장의 면모를 살려 21세기 경북지역 발전의 양쪽 날개를 활짝 펼쳐야할 때라고 생각한다.이처럼 동학농민혁명 정신과 그와 관련 유적지를 경북지역 역사문화관광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는, 지역발전의 핵심기제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런 인식의 전환을 바탕으로 그동안 전국 각 지역에서 추진된 동학농민혁명 관련 유적지 및 기념시설물 건립설치 현황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과 폭넓은 검토를 통해 경북지역 유적지 성격에 부합하면서도 타 지역 기념사업과는 확연하게 구별되는 독창적인 기념시설물 건립설치를 적극적으로 추진할 필요성이 있다.나아가, 경북지역 기념사업 추진의 기본토대의 하나로 살림과 모심을 제안한다. 그동안 추진된 기념사업이 1980~2000년대 한국사회의 민주화 요구에 붙잡힌 나머지 불가피하게 반제 반봉건 항쟁으로서의 1894년 농민전쟁에 집중된 감이 없지 않다. 따라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살림과 모심을 기본토대로 가져가는 것도 의미 있는 진전일 것으로 여긴다. 이는 21세기 초입 한국사회의 매우 중대한 해결과제인 사회적 양극화 해소와 물질중심주의가 불러온 각자위심을 딛고 참된 공동체로 나가야한다는 시대적 과제와도 부합된다. 살림과 모심이라는 기본토대는 동학창도, 탄압, 포교 등과 관련된 경북지역 유적지들을 아우를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시군별 기념사업단체 창립 필요경북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기념사업단체는 상주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한 곳뿐이다. 지난 1996년 창립되어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전기항의사기념비와 생매장 당한 동학농민군을 기리기 위해 생매장 터에 위령비를 세우는 등의 활동을 펼쳤던 예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는 현재 활동이 중단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기념사업을 추진하는 단체의 숫자와 그 지역에서 추진된 기념시설물 건립설치 및 각종 기념사업 추진 경과가 정비례한다는 것을 앞에서 확인했다. 따라서 경북지역에서 기념사업을 활성화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경북지역 각 시군 주민들로 구성된 민간 기념사업단체 창립이 이루어져야 한다. 문화체육관광부 특수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과 경상북도, 그리고 경북지역 각급 지방자치단체는 해당지역 주민이 중심이 되는 기념사업단체 창립에 적극 지원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단체 창립 이후에도 이들 단체들이 스스로 자기 지역의 특수성에 맞는 기념사업을 발굴하여 추진해나갈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지난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전후하여 서울의 역사문제연구소 동학농민전쟁백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와 전주의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혼신의 힘을 기울여 전국 각 지역단체 창립 및 그 활동 지원을 통해 백주년 기념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해냈던 사례에서 교훈을 찾아야 한다.△역사발전의 순방향에서 인식전환을경북지역이 지녀온 양반문화는 인류역사발전의 큰 틀에서 살펴보면 역사발전의 역방향이다. 그러나 근대민주정치를 구현하고자 온몸으로 떨쳐나섰던 동학농민혁명은 인류역사발전의 순방향이다. 그동안 경북지역이 양반문화라는 한쪽 날개만 폈다면 이제는 역사발전의 순방향에 자리한 동학농민혁명이라는 한쪽 날개를 마저 활짝 펼쳐야 한다. 두 날개를 활짝 펴는 바로 그곳에 21세기 경북지역의 창공이 있음을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다.120주년을 맞은 지금 향후 기념사업 전망은 그다지 밝지 않다. 지난 1994년 전후부터 헌신적인 기념사업 추진을 통해 특별법을 이끌어냈던 기념사업 추진주체들의 헌신과 정성이 다시 한 번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다. 21세기 기념사업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지난 시기에 견지했던 동학농민혁명 역사인식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1980~2000년대 한국사회는 보다 진전된 민주화를 강력하게 요청하였고,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도 위와 같은 시대적 요청에 부응했다. 이로 인해 불가피하게 지난 시기 기념사업이 반봉건 반외세의 틀에 메인 측면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나아가 일제식민지시기, 동서냉전체제 구축기, 군사정권집권기 등을 거치면서 연구자체가 금기시되어 역사적 사실이 제대로 규명되지 못했던 시대적 제한성도 역사인식의 외연확장을 가로막는 주요한 요인의 하나였음은 물론이다.21세기 기념사업 추진방향 모색은 이전시기 기념사업의 중심축이었던 반외세, 반봉건 항쟁으로서의 역사인식에 대한 면밀한 재검토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특히 경북지역의 기념사업 추진방향을 모색하는데 있어서는 이전시기와는 사뭇 다른 역사인식이 필요하다. 예컨대 제1단계(1860~1893) 동학운동, 제2단계(1894. 1~4월) 제1차 동학농민전쟁, 제3단계(1894. 5~8) 근대민주정치구현, 제4단계(1894. 9~12) 제2차 동학농민전쟁, 제5단계(1895~1945.8) 항일독립투쟁 등으로 다소 위험하지만 획기적인 역사인식의 확장이 필요하다.또한, 동학에 대한 이해도 중세문명과 근대문명, 서양문명과 동양문명이 충돌하던 19세기 전반으로 그 폭을 넓혀서 재검토할 필요성이 있다. 재검토를 통해 서구적 근대는 무엇이고, 동학에서 추구한 동양적 근대는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의문 혹은 문제제기가 필요하다. 이런 과정에서 수운이 문명전환의 방안으로 제시했던 시천주사상(侍天主思想)과 후천개벽사상(後天開闢思想)을 다시금 깊이 재고할 필요가 있다. 각자위심(各自爲心)이 만연한 세상을 동귀일체(同歸一體)의 세상으로 바꾸고자했던, 수운이 살았던 19세기와 또 다른 차원의 각자위심이 만연한 오늘이 어떤 점에서 같고 무엇이 다른가를 생각하면서 시천주의 시(侍)를 내유신령(內有神靈) 외유기화(外有氣化) 일세지인(一世之人) 각지불이자야(各知不移者也)라고 설명했던 수운의 생각도 곰곰 되새김질할 필요가 있다.문병학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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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9.24 23:02

[(36) 지역별 유적지와 기념사업 - 경상도 지역(중)] 경북 '동학' 창도한 지역임에도 보수성 짙어 사업 미약

경북지역에서 백주년 기념사업을 추진한 단체는 상주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념사업회였다.상주기념사업회는 1993년 12월 18일 준비모임을 시작으로 발기인대회 등을 거쳐서 1994년 4월 2일 창립되었다. 창립 후 상주기념사업회는 6월 13일 궁궁을을(상주문화회관 대공연장)이라는 주제의 연극공연을 펼쳤고, 7월 7일 상주문화회관 전시실에서 녹두꽃 떨어진 그 후라는 주제로 그림 전시회도 열었다. 10월에는 22~23일 양일간 가자! 장주읍성으로, 자주 평화의 세상을 향하여라는 주제 아래 상주지역 동학농민군 합동 위령제 및 유적지 답사를 추진했으며, 상주 동학농민혁명 기념상을 제작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2007년부터 연례사업으로 추진하던 동학농민혁명 전국 기념대회를 충남 공주, 서울, 충남 태안, 전남 장흥에 이어 문화체육관광부 특수법인으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출범한 후인 2010년도에 그 다섯 번째 전국기념대회를 상주시에서 개최하였다. 한편, 예천에서는 1996년 예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창립되어 동학농민군지도자전기항의사기념비를 세웠고, 1999년에는 보수집강소 민보군에 의해 농민군이 생매장 당한 장소에 위령비를 세우기도 했다. △전봉준 중심의 전라도, 불온한 반란사건으로 축소왜곡그러나 경북지역에서 추진된 기념사업은 같은 시기에 서울, 경기 그리고 충청도와 전라도 등지에서 펼쳐진 기념사업에 비해 다소 미약했다. 타 지역에 비해 경북지역에서 추진된 백주년 기념사업이 다소 미약할 수밖에 없었던 주된 요인은 한국근현대사의 극심한 굴절과 부침으로 이 사건이 전봉준 중심의 전라도 사건 혹은 불온한 반란사건으로 왜곡축소되어온 것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동학이 창도된 고장, 동학의 모태였던 경북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이 불출되지 않고 전라도에서 분출되어 충청도 등지에서 거세게 타올랐던 1894년의 상황과 다른 지역에 비해 경북지역에서 백주년 기념사업이 다소 미약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일정한 사회역사적 배경을 찾을 수 있다. 그 사회역사적 배경으로는, 19세기 당시 경북지역은 조선왕조체제에서 권력의 핵심부를 이룬 안동김씨 본향으로 두터운 보수양반층과 유림세력에 의해 보수적 향토지배질서가 강력하게 구축되어 있었다는 점과 20세기 한국현대사에서 권력의 핵심부를 차지한 이른바 TK지역이라는 경북지역이 갖고 있는 지역적 특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19세기 때나 20세기 때나 경북지역은 집권층의 위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보수적 향토지배질서가 견고했고, 이런 사정으로 인해 동학을 창도한 고장이면서도 그 힘의 분출이 타 지역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백주년을 전후한 시기에도 경북지역은 집권층의 위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보수적 향토지배질서가 견고하여 타 지역에 비해 기념사업이 미약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사회역사적 배경으로 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경북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의 성과적인 추진을 위해서는 먼저 역사적으로 형성된 경북지역의 정치적 특수성을 잘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경북지역의 정치적 특수성을 섬세하게 파악하고 이를 면밀하게 분석한 것을 바탕으로 지역주민의 거부감을 최소화할 수 있는 기념사업 내용과 형식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이에 따른 대안의 하나로 전라도, 전봉준 중심의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역사인식을 새롭게 재정립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예컨대 그동안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인식이 반외세, 반봉건 중심이었는데 이것을 조선 혹은 동양적 근대민주정치 추구라는 측면으로 외연을 확장하고, 그 깊이를 더해가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해서 경북지역 주민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새로운 역사인식의 틀을 모색해나가는 것과 함께 우선 당장에는 지난 한 세기 동안 반란사건으로 치부되던 동학농민혁명이 2004년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에서 의원입법을 통해 명실상부하게 복권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릴 수 있는 사업에 힘을 기울일 필요성도 있다. △반외세 다루는 기념사업 필요또 다른 대안으로 반외세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기념사업을 추진할 것을 제안한다. 지난 시기 반외세, 반봉건 항쟁이라는 관점에서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이 추진되었다. 그런데 그동안 전국 각지에서 추진된 기념사업이나 기념시설물 건립설치 현황을 살펴보면 정작 반외세와 연관된 기념사업 혹은 기념시설물 건립설치 등이 매우 미흡하거나 아예 없다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경남 하동군 고성당산에 건립된 고성산동학혁명군위령탑 비문에 고성당산이 대일군전적지(對日軍戰迹地)라는 것이 명기되어 있으나 반외세 혹은 반일에 대한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런 현상은 그동안 추진된 기념사업에서 반외세 문제가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 본격적으로 반외세 문제를 다루고 있다기보다는 다분히 구호적인 차원에서 접근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본군 병참소 등의 유적지가 있는 경북지역에서 반외세 문제를 핵심으로 동학농민혁명 반외세 역사공원 등의 건립을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경북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 반외세 역사공원 조성사업 기획추진을 통해 갑오년 당시 일본군이 조선의 민간인을 학살하고, 동학농민군을 상대로 저질렀던 반인도적인 범죄행위인 사람을 불태워 죽이는 화형(火刑) 집행 장면 등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하여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역사공원을 조성한다면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의 새로운 전형으로 자리매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사회구성원간의 계급적 문제보다는 인류의 보편적인 문제 혹은 민족적인 문제를 중심에 두고 기념사업을 추진한다면 상대적으로 완고한 경북지역의 보수적인 향토정서를 극복하는 것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나아가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 등 도발적 행보로 동북아시아 정치정세가 급속도로 달구어지고 있는 21세기 초입 현재의 시대상황과도 부합한 시의적절한 기념사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문병학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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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원용
  • 2014.09.17 23:02

[(35) 지역별 유적지와 기념사업 - 경상도 지역(상)] 경주시, '동학 발상지 용담정 성역화' 370억 투입 추진

△서부지역, 호남농민군 활동 영향동학이 창도된 고장, 동학의 모태였던 경상도에서 전개된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동학에 입도한 농민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경상도 각지에는 1894년 봄부터 여름사이에 동학 교단에 농민들이 대거 입도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기존 교단조직의 포교활동에 의한 것이기도 하였으나, 무엇보다 호남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한 이후 전라도 농민군이 보여준 승리와 폐정개혁활동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특히 전라충청도와 인접한 경상도 서부지역은 호남지역의 농민군 소식이 수시로 전해졌다. 이는 관이나 보수층에게 위기의식으로 작용하였으나, 농민들에게는 오히려 변혁에 대한 열망을 부추기며 많은 농민들을 동학으로 몰려오게 하였다. 경상도 농민군의 활동은 크게 경상도 북서지역과 남서지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북서지역은 6~7월경 매일 1000여 명이 동학에 입도할 정도로 교세가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이에 따라 각 면마다 접이 만들어지고 예천(醴泉) 등 교세가 강했던 지역은 만여 명 또는 수천 명으로 구성된 대소접이 형성되었다. 봉기 초기 경상도 농민군의 거점은 읍치(邑治) 지역 외곽에 있었으며, 읍치 지역에 대한 공격을 자제하였다. 폐정개혁활동도 읍권을 완전히 장악한 다음 집강소를 통해 추진한 전라도와 달리 농민군의 거점인 읍치 외곽에서부터 시작하였다. 농민군의 개혁활동이 경상도 전 지역 차원에서 동시에 추진되거나 공통 강령을 내건 것은 아니었지만, 대체로 부호를 대상으로 한 토재(討財) 활동을 비롯한 반신분 활동과 부세수취제도 모순이나 지방관이서배의 부당한 수탈에 반대하는 반관(反官) 활동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전라도와 달리 지방권력을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읍치 외곽의 농민군 거점을 중심으로 제한적으로 추진된 폐정개혁활동은 곧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다. 농민군의 세력이 미치지 못한 읍치 지역을 중심으로 이서배와 양반지주층에 의해 반농민군세력이 결집되고 보수집강소가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농민군과 보수집강소를 중심으로 한 반농민군 사이에는 물리적 충돌이 빈발하였다. 8월 초순 예천에서는 토재(討財) 활동을 벌이던 농민군 11명이 보수집강소에 체포되어 매살(埋殺)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농민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읍치 지역을 봉쇄하면서 수성군과 대치하는 국면이 전개되었다. 양측은 수차례 협상을 하였으나, 결국 결렬되고 8월 28~29일 양일에 걸쳐 대대적인 공방전을 벌였다. 끝까지 전투를 피해보려던 농민군 지도부가 적극적으로 전투에 임하지 않는 상태에서 전투는 농민군의 패배로 끝났다. 경상도에서 농민군이 봉기하자 감영에서도 관군을 파견하였지만, 특히 북서부지역에서는 관군보다 오히려 지역 이서배양반지주층으로 구성된 보수집강소의 민보군, 정부에서 임명한 소모사(召募使)가 모집한 소모영군 등이 반농민군의 중심세력이었다. 경상도에서는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이 서울에 이르는 연로에 병참(兵站)을 설치하고 연로의 주민을 강제로 동원하여 노역시키는 등 전라충청지역에 비해 일본군과 직접적인 마찰이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농민군은 봉기 초기부터 각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경상도 농민군이 다른 지역에 비해 먼저 진압된 것도 일찍부터 일본 병참수비대가 진압에 가담한 데 기인하는 바가 컸다. △경북지역, 유적지 및 기념시설 현황 경북지역 동학농민혁명 관련 유적지와 기념시설은 크게 세 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 맥락으로는 1860년 수운 최제우에 의한 동학 창도와 탄압, 동학의 포교활동과 그 과정에서 발생한 1871년 이필제 영해봉기, 그리고 개항 이후 일제의 경제적 침투 등으로 고조된 척왜정서가 임진왜란 300주기를 맞아 한층 비등해지던 때인 1892년을 전후하여 전개된 교조신원운동 관련 활동 등을 들 수 있다. 해월 최시형은 상주군 공성면 왕실로 들어와서 교조신원운동을 지도했다. 두 번째 맥락은 1894년 봄 전라도 지역에서 발발한 농민봉기 때로부터 미온적 태도에서 입장을 바꿔 9월 18일 동학교단에 총동원령을 내리고 일본군과 관군, 민보군 등의 연합세력과 맞서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던 것을 들 수 있다. 세 번째 맥락은 조선을 침략하여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일본의 청일전쟁 도발에 따른 동향을 들 수 있다. 첫 번째 축과 관련된 유적지는 수운 최제우의 동학창도와 탄압, 그리고 해월 최시형의 동학포교 활동과 1871년 이필제 영해봉기, 1892~93년 교조신원운동 등과 관련된 유적들이다.수운 최제우의 동학창도, 탄압과 관련한 유적지 및 기념시설물은 수운 생가이자 무극대도(無極大道)를 깨닫고 동학을 창도한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이다. 이곳 입구에 대신사 수운최제우상이 세워져 있고, 정비된 용담정에는 천도교 대신사 수운 최제우 유허비도 세워져 있다. 경주시는 지난 2009년부터 이곳 용담정에 총예산 370억원을 투입하여 2017년까지 마무리할 계획으로 동학 발상지 성역화 사업을 수립, 추진 중이다. 이밖에도 대구시에는 수운 최제우가 체포되어 1864년 3월 10일 처형된 장소인 관덕정 터가 있고, 달성공원에는 대신사수운최제우상(최제우동상)이 세워져 있다. 다음으로, 해월 최시형이 은거하면서 포교활동을 하던 중 발생한 1871년 이필제 영해봉기 관련 유적으로 병풍바위, 영해관아 등이 있으며, 최시형이 은거하면서 1892년 10월과 11월 충청도 공주와 전라도 삼례에서 전개된 교조신원운동과 1893년 2월 광화문 복합상소, 3월 보은집회 등을 지도했던 상주시 공성면 효곡리 왕실마을이 있다. 두 번째 축인 1894년 동학농민군 활동 관련 유적지 및 기념시설물을 시군별로 살펴보면, 상주시에는 상주관아터, 남사정터, 상주 동학농민혁명기념비, 모동 중모장터, 모서 농민군지도자 김현영 집터, 농민군 지도자 강선보가 살던 마을이자 농민군 본거지 가운데 하나인 임곡리 등이 있다. 예천군에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민보군에 의해 보수집강소로 사용되었던 예천관아객사가 있고, 예천 동학농민군 근거지 가운데 하나였던 금당실 마을과 농민군과 관군민보군 사이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던 송림이 있다. 또한 예천 금당실 일대 농민군 지도자였던 전기항의 묘소와 동학농민군지도자 전기항의사 추모비가 있으며, 금당실 함양박씨 유계소와 동학농민혁명 당시 예천 보수집강소와 민보군이 체포한 예천 동학농민군 11명을 생매장했던 생매장 터가 있다. 이곳에 생매장된 농민군을 추모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 공격으로 읍내가 모두 불에 타다시피 할 정도로 피해가 심했던 현재의 성주군에는 성주관아, 성주읍내가 있으며, 동학농민혁명 당시 안동 유생들의 척왜봉기가 기도되었던 안동향교가 있다. 그리고 영덕군에는 1971년 3월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을 비롯한 동학교도들이 대거 참여한 이필제 영해봉기가 일어난 곳으로 영해관아가 그 유적지이다. 구미시에는 선산읍에 선산 관아와 선산읍성문 앞의 선봉장 한정교 선산입성비, 선산읍성 옆 소공원에 세워진 갑오전쟁선산창의비 등이 있다. 김천시에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 도소가 설치되었던 곳이자 이후 농민군 지도자들의 처형이 이루어졌던 장소였던 김천장터가 있으며, 문경시에는 1880년대 중반부터 동학접주 최맹순이 경상도 북부지역에 포교활동을 편 근거지이자 1894년부터 공개적으로 동학의 접 조직을 설치하고 농민군을 규합했던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 소야리(경북 문경시 산북면)가 있다. 현재 이곳에는 기념물이나 기념시설물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세 번째 축은 일본군의 군수품 이동경로 등 일본군과 관련된 유적지이다. 경북 구미시 해평 일본군 병참소(쌍암고택), 문경시 산북면 이곡리 석문마을, 상주시 낙동면 일본군 병참소 등이 있다. 문병학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처장

  • 기획
  • 김원용
  • 2014.09.03 23:02

(34) 지역별 유적지와 기념사업 - 충북 보은 '북접 농민군 최후 전투지에 붉은 진달래 꽃 흐드러져'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일 년 전 동학교도들은 보은에 집결했다. 당시 민생은 파탄에 이르렀고 열강의 침탈은 날로 거세지고 있는 시기였다. 동학교도들은 보은취회에서 척왜척양을 외치며 왕실이 중심을 잡고 백성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줄 것을 요구했다. 수 만명이 집결하자 왕실은 이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듯 했고 동학교도들은 왕실을 다시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그러나 이미 좌초 직전까지 내몰린 왕실은 백성과 동학교도들의 요구를 끝내 외면했다. 보은취회가 열린지 일 년 5개월 만에 북접의 동학농민군은 다시 보은에 모여 우금치로 향했다. 하지만 우금치전투에서 대패를 했고, 먼 길을 돌아 다시 보은에 돌아온 북접 동학농민군은 최후를 맞이했다.△장내리 집회터보은군 장내리 집회터는 동학교단 본부가 있던 곳으로 1893년 3월 이곳에서 보은집회가 개최됐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제2차 기포에도 북접의 동학농민군들이 집결했던 곳이기도 하다. 1892년 충청도와 전라도 감영에 교조신원과 포교의 자유를 요구하는 단자를 울린 동학교단은 1893년 2월 서울로 올라가 광화문복합상소 운동을 전개했다. 다음 달에는 보은 장내리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고 척왜척양 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동학 지도부가 장내리를 취회지로 결정한 이유는 삼남 각지로 오가는 길목에 위치했고, 속리산을 포함한 소백산 줄기를 타고 경상도와 강원도로 피신하기가 좋았기 때문이다. 1893년 3월 10일부터 4월 5일까지 계속된 장내리 집회에는 약 2만3000여명의 동학교도들이 집결해 척왜양운동을 전개했다. 이곳에 모였던 교도들은 척왜양을 주장하다가 조정에서 선무사 어윤중을 보내는 등 효유하자 자신들의 주장이 충분히 전달된 것으로 판단하고 해산했다. 장내리는 동학농민혁명의 2차 기포에서도 많은 농민군들이 집결한 곳이다. 1894년 9월 18일 청산에서 기포령을 내린 최시형은 휘하 두령들에게 군중을 인솔하고 보은 장내리의 대도소로 총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북실 전투지북실 전투가 벌어졌던 곳에는 붉은색 진달래가 많이 핍니다. 수많은 동학농민군이 붉은 피를 흘렸기 때문 아닐까요. 보은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박달한 사무국장은 인(원소기호 P) 성분이 많은 곳에 진달래가 많이 핀다고 설명했다. 몇 년 전 북실 전투가 벌어졌던 곳에서 지표조사를 진행한 결과 인 성분이 다량으로 검출됐다. 동물의 뼈이 등에 주요 성분이 바로 인 이다. 실제 한 보고서에는 인 성분이 많은 토양에서 진달래가 잘 자란다고 기술한 바 있다. 북실 전투는 동학농민혁명 전 과정에서 농민군이 가장 참혹한 희생을 당한 전투 가운데 하나다. 일본군은 전투 중에 총을 맞고 죽은 농민군의 수를 300여명으로 보고하고 있다. 학살한 농민군의 수는 의도적으로 보고하지 않았다. 상주 소모사 정의묵은 전투 중에 전주 도합 395명이 총에 맞아 죽고 골짜기와 숲속에 널려있는 시체가 몇 백 명인지 알지 못한다고 했다. 이 외에 다른 문헌들을 종합해 보면 최소 400여명이 사망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에 비해 일본군이나 민보군의 피해는 2명의 부상자만 나왔을 뿐이다. △보은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지난 2007년 70억원의 예산이 투입돼 완공된 보은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은 건립 과정에서 홍역을 치러야 했다. 충북지역 시민단체들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거나 유적지를 훼손했다는 비판을 제기하면서다. 실제 공원 입구에 세워진 기념물에는 1894년 7월 일본군의 경복궁 침범 1894년 7월 청일전쟁 발발 전쟁 참화에 시달린 백성 1894년 8월 보은의 동학도 의병봉기 계획 세워 순으로 표지석이 세워졌다. 하지만 이는 동학농민운동을 제대로 기술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박달한 사무국장은 보은의 동학농민운동은 1893년 보은취회부터 시작됐다. 이 표지석의 설명대로라면 동학농민혁명은 왜세의 침입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일어났다는 것으로 귀결된다면서 하지만 동학농민혁명은 자주적 자발적으로 발생한 운동이며 결코 피동적으로 누구에 의해서 봉기한 게 아니다고 말했다. △김소촌 생가터우금치에서 대패한 북접농민군은 일본군의 추격은 물론 매서운 추위와 싸워야 했다. 1894년 11월 27일 태인을 떠나 임실, 무주, 황간, 용산, 청산을 거쳐 다시 보은으로 몸을 피했다. 동학교주 최시형과 북접의 지도부 임국호, 정대춘, 이국빈, 손병희, 배학수는 김소촌 가(金昭村 家)에 머물며 후일을 도모했다. 하지만 이를 알아차린 일본군의 습격으로 다시 몸을 피해야 했다. 김소촌 가의 소촌은 어떤 인물의 호나 명이 아니고 소촌찰방을 지낸 김세희의 집이다. 그는 당대에 부를 이뤄낸 입지적인 인물이다. 그가 동학교도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이유는 명확히 전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구전으로 전해진 그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부를 이뤄낸 상황에서도 동학에 뜻을 같이 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후손 김중구씨는 동네 어르신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그 일(일본군의 습격)이 있던 날 하얀 도포자락을 입고 마을을 떠났다고 말했다. △보은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지난 1999년 창립한 보은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회장 구왕회)는 동학농민혁명 특별법이 제정된 이후 참여자 후손에 대한 유족발굴에 전념해왔다. 또 지난 2007년 건립된 보은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활성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이와 함께 보은관내 청소년 대상 역사체험 학습, 일반 관람객 대상 역사체험 학습, 역사해설, 나무공작 체험, 조선시대 민속체험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보은 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박달한 사무국장 "차별없는 공동체 문화 꿈꿔요"동학은 일반 대중들의 보편적 정서였습니다. 이는 현대사회에서도 마찬가지고요.보은 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박달한 사무국장은 어느 시대든지 일반 대중들이 꿈꾸는 새로운 세상은 있었다고 말했다. 또 일반 대중들이 꿈꿨던 새로운 세상에는 항상 동학의 정신이 함께 했다고 했다.박 사무국장이 말하는 동학의 정신은 함께 하고, 함께 나누며, 함께 잘 사는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그는 동학 100돌 무렵인 20여년 전부터 보은에서 생활문화공동체 아사달을 만들고 계승사업회 일을 시작했다. 100년 전 동학혁명의 시발지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깨닫고 그 정신을 잇는 일을 하고자 귀향했다. 1893년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보은에 모인 동학교도들처럼 박 사무국장은 새로운 꿈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이곳에서 사람들이 차별없이 사람을 대하는 마음을 깨달아 세상을 바라본다면 더 바랄 게 없다면서 공동체 문화가 가장 잘 이뤄진 보은을 만들어 120년 전 동학농민군이 못 다 이룬 꿈을 이루고 싶다고 말했다.

  • 기획
  • 김정엽
  • 2014.08.27 23:02

[(33) 지역별 유적지와 기념사업 - 충남 예산] 대접주 박인호 생가터에 축사…혁명의 역사 '방치'

충남 예산은 동학농민혁명군 6만여 북접군의 활동 중심지였다. 당시 농민군을 지휘했던 덕의대접주 춘암 박인호(1855~1940) 선생은 내포지역에서 보국안민과 광제창생을 기치로 도탄에 빠진 민중들을 교화, 동학교단을 조직했다.그는 충청 서부지역의 북접을 이끌면서 지방관대지주의 수탈과 착취가 극심했던 1880년대 이 지역에서 교세를 확장했다. 특히 유림세력이 강성했던 지역 특성상 지방관과 지역 유력자가 결탁, 농민들을 억압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자 그를 비롯해 접주들은 갑오년 2월 덕산 봉기를 시작으로 농민군을 규합했다.박인호 선생의 9월 기포령을 시작으로, 인근 각지에서 들불처럼 농민군이 들고 일어나 태안서산대흥 등 인근 관아를 점령했다. 혁명의 불꽃이 고창정읍지역을 넘어 양반의 고장이라고 불리던 충청도로까지 확산된 것. 하지만 인근 아산만에서 벌어진 청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군이 관군과 함께 농민군 진압에 나서면서, 농민군의 수난은 시작됐다.지금도 예산지역 곳곳에는 한순간이라도 반짝였던 농민군의 승리의 역사와 이를 이어가고자 했던 농민군 지도자들의 고뇌에 찬 숨결이 자리하고 있다.△예포대도소 1880년대 예산에 처음으로 전파된 동학은 관의 감시와 탄압, 유림세력의 배척에도 불구하고 지도부의 꾸준한 포덕활동으로 많은 교인을 양성했다.그러던 중 갑오년 전북지역에서 혁명의 불씨가 거세게 타올랐고, 사태를 관망하던 예산지역 동학지도부도 혁명에 동참하면서 혁명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갑오년 9월 30일 기포한 내포 농민군들은 10월 1일 태안과 서산관아를 공격, 수감돼 있던 농민군을 석방시켰다. 이후 당시 농민군을 이끈 박인호와 박덕칠은 현재 예산 삽교읍, 덕산에 전진기지 성격의 대도소를 설치했다. 특히 삽교읍에 설치된 예포대도소는 농민군지도부가 전투준비를 위한 군수물품을 비축하거나 인근 지역과의 연락을 맡았다.하지만 이를 저지하기 위한 관군의 공세도 매서웠다. 갑오년 10월 11일 호연초토사 이승우는 내포동학농민군 본부인 예포대도소를 불시에 공격했고, 이에 농민군은 패퇴했다. 관군은 대도소를 불태우는 동시에 혁명군에 협조한 농민들의 세간살이를 약탈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지난 17일 찾은 삽교 예포대도소 옛터에는 현재 주거지가 들어서 있고, 인근에 세워진 안내판만이 이곳이 당시 농민군의 사령부였다는 것을 어렴풋이 상기시켰다. 바로 인근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삽교읍 하포리에는 박인호 선생의 유허비, 생가터가 있다. 생가터는 현재 축사로 쓰이고 있었다.갑오년 일대를 호령했던 대접주의 위상과는 동떨어진 너무나 초라하고, 방치된 생가터를 보며 충청지역이 왜 동학의 불모지로 불리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대흥관아터예산군 대흥면에 위치한 대흥관아는 갑오년 10월 7일 예포대접주 박덕칠이 이끈 농민군이 일시 점령한 곳이다. 당시 박덕칠은 목천 유진수, 홍주 박성순, 대흥 차경천 등을 앞세워 군량창고와 무기고를 부쉈다. 군수 이창세는 옷가지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부랴부랴 현장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1979년까지 대흥면사무소로 사용되던 관아터는, 면사무소를 신축하면서 현재 바로 옆 자리로 이전복원됐다. 관아로 들어서는 길에는 이승우 영세불망비를 비롯해 농민군 토벌에 참여한 관료들의 업적을 기린 비석 등 수십기가 나란히 서 있었다. 걸어서 5분 가량 거리에는 고부군수 조병갑의 생가가 있던 마을이 있다. 지역 대토호였던 조병갑 일가의 99칸 기와집은 당시 농민군이 헐고 불태워 현재 남아있지 않았다.혁명의 불씨를 제공했던 조병갑을 단죄하고자 했던 농민군의 불같은 기세를 엿볼 수 있었다.△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예산읍 관작리에 위치한 기념공원은 2010년 관작리 전적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자리에 조성됐다. 관군일본군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펼치던 농민군은 갑오년 10월 24일 승전곡에서 대승을 거둔다. 이후 같은 달 26일 농민군은 홍주목 중군 김병돈과 군관 이석범이 이끄는 관군의 습격을 받는다. 이에 농민군은 전열을 다시 정비, 다음날 3만여명의 병력을 모아 이날 관군과 일대 격전을 펼친다. 4000~5000여명에 달하는 토벌군은 농민군을 향해 포를 쏘며 접근했다.농민군은 화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에 굴하지 않고 토벌군 진영의 야산을 포위, 육탄전을 벌여 끝내 토벌군을 패퇴시켰다. 이 전투는 농민군의 최대승전으로 평가되고 있다.예산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은 2007년 기념사업회가 정부 지원을 받아 설립했다. 하지만 이후 정권이 바뀌면서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면서 현재는 제대로 된 관리가 되지 않고 있다.공원에는 전적비만이 덩그러니 서 있어 황량하기 그지 없었고, 잡초마저 제때 제거하지 못해 길목 곳곳이 끊긴 채 방치돼 있었다.동행한 박성묵 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회장은 정치권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찾는 사람도 없어지면서 공원을 유지보수하기도 힘든 처지이다면서 동학농민혁명 2주갑을 맞아 다양한 선양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사업회의 역량을 모으고 있다고 말했다.● 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박성묵 씨 주도 2006년 발족농민군 유족 명예회복 앞장기포 후 한 달간의 짧은 항전 때문에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던 예산지역 동학농민혁명은 지역의 한 시민활동가의 노력에 의해 빛을 보게 됐다.박성묵 회장은 발로 뛰며 예산의 혁명사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박인호 선생의 발자취를 연구하던 그는 예산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계승선양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나머지 2006년 기념사업회를 발족했다.이 일은 농민군 유족을 만나면서부터 기획됐다.동학농민혁명의 불모지로만 알았던 예산에서 동학농민혁명군 유족을 찾았을 때 정말 희열을 느꼈습니다. 역적의 자손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숨죽이며 살아왔을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한을 풀어주고 싶었습니다.그는 동학의 정신은 1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효하다고 믿는다.3.1운동을 비롯해 5.18민주화운동 정신의 뿌리인 동학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주체적 역량을 확립할 수 있다고 믿어서다.그는정체성 없는 역사의식을 가진 지도자와 국민이 있기 때문에 일본이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등 터무니없는 일을 벌이고 있다며 확실한 민족의 주체성을 갖기 위해서는 동학을 우리 민족의 중심사상으로 이끌어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 기획
  • 최명국
  • 2014.08.20 23:02

[(32) 지역별 유적지와 기념사업 - 충남 내포] 자생·독립적 군세…전라도 외 지역 중 기념사업 가장 활발

살아남은 사람은 수십 명에 불과했다.우거진 소나무 숲 속에서,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거칠게 몰아쉬는 숨소리만 가득했다.올라온다! 일본군이 올라온다!다급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총소리가 이어졌다.일방적인 화력이었다.최후까지 맞서 싸우리라 다짐했던 내포 지역 동학농민군은 그렇게 하나하나 총에 맞아 죽거나 끌려가 참혹하게 살해됐다.1894년 11월, 태안 백화산은 그렇게 피로 물들어야 했다.△내포 지역에 동학이 전래되다내포 지역은 지금의 충남 서북부, 즉 태안서산당진홍성예산 등의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이중환이 택리지에 충청도에서 내포가 가장 좋다고 언급할 정도로 풍요롭고 안정된 지역이었다.하지만 제아무리 평화롭고 살기 좋은 내포 지역이라 해도, 조선 말기 사회의 모순은 피할 수 없었다. 수탈과 학정에 지친 사람들에게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말하는 새로운 종교의 등장은 가뭄의 단비 같은 것이었다.1890년, 최형순이라는 사람이 동학 교주 최시형을 찾아 입도한 뒤 태안 지역에 동학을 퍼뜨렸다. 최형순과 함께 박희인이 적극적인 포교에 나섰으며, 불과 3년여 만에 내포 지역에서 동학은 상당한 위세를 구축하게 됐다. △봉기, 그리고 실패갑오년에 전라도에서 대규모 봉기가 일어나고, 내포 지역에서도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봉기가 있었다. 하지만 대체로 1차 봉기 기간에는 커다란 움직임이 보이지는 않았다.시간이 흐르자 상황은 바뀌었다.청일전쟁이 일어났고, 전라도에서는 남접의 2차 봉기가 이뤄졌다.1894년 10월 1일, 농민군은 태안 원북 방갈리에서 기포했다.이 때 기포한 농민군은 전봉준 등이 이끈 전라도 지역의 농민군과 최시형손병희 등의 북접 세력과는 큰 연결고리를 갖지 않는, 자생적독립적인 군세였다고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병규 연구조사부장은 말했다.관아를 공격해 군수를 잡아 죽이고 갇혀있던 동학 지도자들을 구출한 농민군은 이어 서산, 해미 등을 석권하고, 기세를 몰아 홍주성(지금의 홍성) 공격에 나섰다.그리고 농민군은 대패했다. 비록 내포 지역을 석권하면서 기세가 올랐다지만, 우수한 무기를 갖추고 성 안에서 굳게 방비 태세를 갖추고 있던 일본군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결국 진격로를 따라 다시 그대로 쫓겨간 농민군은 태안을 최후의 보루로 삼았다. 지금 추모탑과 전래비, 그리고 지도자들이 이곳에서 잡혔음을 알리는 비석이 있는 백화산 자락이 그들의 마지막 자리였다.냇물 흐르는 거 아까 보셨죠? 여기가 전부 피로 물들었다고.△교장바위, 혹은 교살바위추모탑과 전래비 뒤편에는 바위 봉우리가 있다. 일본군이 동학농민군을 잡아 참혹하게 죽이던 곳이 바로 그 바위였다.그 당시에 일본군이 여기서 공개처형을 한 거예요. 그래서 교살바위라고 했지.교살바위라는 말의 어감이 너무 섬뜩해서였을까? 지금은 교장바위라고 불리고 있다.장살, 장형이라는 말에 쓰이는 지팡이 장자를 쓰는데, 안내문의 내용은 사뭇 다르다.일제 강점기, 일본인이 운영하던 정류소에 돌을 던지던 조선인 어린이들을 감싸주며 그 아이들과 바위에서 점심을 먹곤 했다는 보통학교 일본인 교장의 일화가 적혀 있었다. 그 교장의 인덕을 기리는 의미에서 교장바위가 됐다는 것.물론 그것도 역사지만, 일본인을 기리는 내용이 안내판에 있으니까 좀 그렇잖아요. 동학 관련 내용은 빠져 있고. 문영식 선생은 이 때문에 태안군에 민원을 여러 차례 넣었단다. 이에 대해 태안군 문화관광과 관계자는 동학 관련 내용을 담은 새로운 안내판을 준비하고 있으며, 조만간 교체 예정이라고 답했다.△태안 지역 기념사업 현황내포 지역, 그 중에서도 태안 지역은 동학 교세가 대단했고, 혁명의 열기는 전라도의 그것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전라도 이외 지역 중에서는 태안 지역의 동학 관련 기념사업이 가장 큰 규모로 이뤄지고 있으며, 정리된 자료도 방대하다.태안 지역의 동학농민군 관련 자료들은 대부분 문 회장의 아버지인 문원덕 선생이 밝혀낸 것들이다. 특히 1965년에 작성된 순국 혁명군 명단 288인 기록물은 국가기록물로 인정돼, 후에 동학농민군 유족 인정 관련 자료로서 요긴하게 활용됐다.1978년 세워진 추모탑 역시 문 선생의 작품이다. 관의 주도로 세워진 다른 지역의 기념물과는 달리, 선생이 설계부터 모금까지 발로 뛰어가며 완성시켰다.문 선생이 이처럼 헌신적이었던 것은, 그가 바로 내포 지역의 동학농민군을 이끌었던 문장로 접주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다.그리고 문영식 회장은 그의 유지를 이어받아 지금까지 태안 지역의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을 주도해오고 있다.동학 정신을 미래 세대에 물려주고 싶다고 말하는 그에게는 목표가 몇 가지 있다.하나는 기념관 건립 사업을 잘 매듭짓는 것. 태안군은 이번 주부터 건립 준비 작업에 착수했는데, 이를 제대로 해내는 것이 일단의 목표란다.또 하나는 원북면 방갈리 기포지에 기념물을 세우는 것.현재 기포지에는 화력발전소가 들어서 있다. 문원덕 선생이 생전에 그 자리에 기념탑을 세우려고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는데, 그 유지를 잇고 싶다는 것이었다.발전소 내에라도 조형물을 세우려고 여러 번 찾아갔어요. 그런데 좋다, 세워주겠다고 약속을 받아도 이 사람들이 자꾸 바뀌고 발령이 나니까 또 처음부터 설명을 해야 하고.이에 대해 태안화력발전소 측에 문의한 결과,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답변만 들을 수 있었다.● 태안 지역의 다른 유적들 - 농민군 처참하게 쓰러져간 '목네미샘'내포 지역 항쟁의 중심지였던 만큼, 태안에는 유적도 많이 남아있다.농민군이 습격했던 태안 관아는 백화산에서 바로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있다. 관아 자체는 없어졌지만, 경이정이라는 건물은 기념사업회 사무실 바로 근처에 남아 있다.이원면 사창리에는 목네미샘이라는 곳이 전해진다. 이곳은 1894년 11월 일본군의 토벌작전 당시 농민군이 처형당했던 장소다.일본군은 큰 작두에 농민군의 목을 놓고, 다른 농민군에게 서로 밟게 했다고 전해진다. 이 때 농민군의 목 넷이 굴러 떨어졌다고 해서 목네미샘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서산 지역에서는 1차 봉기 기간에 이 지역 최초 봉기가 있었던 원벌 집결지와 2차 봉기 당시 농민군이 공격했던 서산 관아가 대표적인 유적지로 전해져오고 있다.또 당진 지역에는 승전곡 전투지가 있다. 1894년 10월 24일 2만여명의 농민군이 지형을 활용한 전술로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곳으로, 이후 농민군은 홍주성까지 진격할 수 있었다.

  • 기획
  • 권혁일
  • 2014.08.13 23:02

[(31) 지역별 유적지와 기념사업 - 충남 공주] 혁명의 꿈 묻힌 우금티 '역사의 그늘' 오늘날에도 여전

동학농민혁명사에서 정읍 황토현 전승지와 전주성 점령이 빛이라면 공주 우금티는 그림자다. 서울을 향해 진군하던 동학농민군이 당시 충청도 수부였던 공주감영을 점령하기 위해 모든 역량을 결집했으나 한일연합군의 벽을 넘지 못하고 처참하게 무너졌던 곳이 바로 이 우금티였다. 우금티의 그림자는 오늘에까지 역사적 상흔을 안은 채 길고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농민군이 우금고개를 넘지 못하고 혁명의 꿈을 고개에 묻었듯이, 공주에서 그 혁명의 역사는 오늘날도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해 보였다. 최대의 격전지를 연상시킬 수 있는 기념시설도, 선양사업도 지역사회의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나마 농민군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제를 중심으로 매년 열리는 추모예술제가 공주에서 동학농민혁명의 존재감을 알리고 있었다.△잘못 끼운 단추 위령탑기념탑 타일이 이렇게 흉물스럽게 벗겨졌는데 어떻게 이리 방치할 수 있나요? 지난달 30일 동학농민군위령탑이 세워진 우금티 사적지에서 만난 방문객의 첫 반응이었다. 공주가 고향으로, 현재 경기도에서 교사를 하고 있다는 그는 고향을 지키는 아버지와 함께 이곳의 역사적 의미를 고교생 딸에게 알려주려고 찾았단다. 뙤약볕을 뚫고 찾은 이곳의 모습에 실망한 그는 더 이상 내용물들을 들여다보지 않은 채 서둘러 현장을 떴다.2차례의 공주전투에서 수천 명의 농민군이 숨졌던 우금티의 피어린 역사가 위령탑에 상징적으로 새겨졌으나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역사적 희생물로 평가되고 있다. 정읍 황토현에 세워진 기념탑보다 10년 늦은, 1973년 건립된 우금티 위령탑은 당시 천도교 공주교구장이었던 이창덕 씨를 중심으로 건립위원회를 꾸려 만들었다. 100여 ㎡ 부지에 황토현기념탑을 닮은 8m 높이 위령탑의 비문은 동학농민혁명이 5.16과 10월유신으로 이어진다고 새겼다. 님들이 가신 지 80년, 5.16혁명 이래의 신생조국이 새삼 동학혁명군의 순국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면서 빛나는 10월 유신의 한 돌을 보내게 된 만큼 우리의 피어린 언덕에 잠든 그 님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이 탑을 세우노니(중략) 그 위대한 혁명정신을 영원무궁토록 이어받아 힘차게 선양하라 5.16과 10월유신, 박정희 대통령 등의 비문은 누군가에 의해 뭉개지면서 탑 자체가 수난의 역사가 됐다. 농민군의 원혼을 볼모삼아 정권을 정당화시키려 했던 기념물로 전락하면서 이 기념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시민사회 활동가들을 곤혹스럽게 했다. 얼핏 벗겨진 외형이 안타까울 수 있지만, 농민군의 원혼을 욕보인 기념물로 평가하는 쪽에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기념물이 되어버린 셈이다.실제 본보 취재팀이 100주년 당시 이곳을 답사한 후 20년이 흘렀지만 공주에서 우금티전투를 기리는 사업들은 몇 걸음 나아가지 못해 보였다. 20년 전 우금치에서 우금티로 이름이 바뀌고(동학농민혁명 당시 이름), 1994년 이 일대가 사적지로 지정됐으며, 주변에 조형물 몇 개가 설치된 정도가 변화된 모습이었다. △보수적 지역풍토 속에 한계 드러내동학농민혁명 전체 과정에서 큰 상징성을 갖는 공주에서 당시 역사가 외면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지역적으로 보수적 풍토가 강해 동학농민군을 진압한 곳이라는 데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동학농민군의 서울 진격을 막아 나라를 지켰다는 자부심이 더 우위라는 이야기입니다.동학농민전쟁우금티기념사업회 윤여관 운영위원장(51)은 이런 풍토 속에서 진행되는 기념시설과 기념사업의 한계를 지적했다. 공주시에서 위령탑의 보수작업과 리모델링을 하려 하지만, 사업회에서 이를 막는 것도 그 이유란다.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게 사업회의 사업인 셈이다. 한 번 만들어졌으면 수명이 다할 때까지 지켜야 한다. 위령탑 역시 마찬가지다. 얼마나 성급하게 만들어졌으면 30년 밖에 안 된 탑이 이런 몰골이겠는가. 이 자체가 우리의 모습을 성찰할 수 있는 반면교사로 보는 것이다.윤 위원장은 100년, 200년이 지난 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이곳이 폐허가 되면 거기서 상상력이 발휘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또 땅을 다룰 줄 아는 미적 시각이 생기기 전까지는 어설피 건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오늘날처럼 성장주의 사회에서 배고파 일어난 농민군의 마음을 살필 수 없다고 여겼다. 내 배만 채우려는 시대에 사는 우리가 기념할 만한 자격이 되느냐는 근본적인 의문도 던졌다. 나눔과 배려의 동학사상을 바탕에 깔지 않은 기념물은 언젠가는 다시 쓰레기가 될 것이며, 이것저것 조악하게 만든 시설만을 설치하는 것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역사적 공간 적극 활용 필요이런 현재의 시민사회 활동과 모습이 너무 소극적이고 미온적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초기 우금티사업회를 이끌었던 조재훈 충남교육연구소 이사장(67, 전 공주교대 교수)은 동학농민혁명 관련 공주의 역사적 공간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역의 보수적 특성상 100주년 당시만 해도 위령제에 대해서도 지역사회의 거부감이 강했습니다. 전라도 사람들의 제사를 왜 공주시민들이 지내야 하느냐고 반대운동까지 있었습니다.조 이사장은 기념일을 만들고 예술제 등 여러 행사들을 진행하면서 그런 위화감이 많이 없어지고 이해가 넓어졌다고 했다.그는 특히 공주시에서 추진하려 했던 우금치 전적지 성역화 사업이 무산된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공주시는 애초 2002년까지 전시관 등을 건립할 계획으로 주변 토지를 매입하는 등 의지를 가졌으나 무산됐고, 이후에도 대학에 용역을 맡겨 사업계획을 세웠으나 흐지부지 된 것을 두고서다.공주가 교육의 도시 아닙니까. 탑도 다시 만들고, 전투지 탐험로를 만들어 학생들 체험도 할 수 있는 산교육장을 만들면 역사관광자원으로서도 가치를 높일 수 있을 것입니다. 기념관이 만들어지면 관련 자료 수집과 연구에도 큰 힘이 될 것입니다.그는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백제가요 정읍사 등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고, 공주부여에 갇힌 백제문화제를 익산 등으로 확대하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정신적인 측면도 강조했다.● 우금티기념사업회, '시청 책상 엎어가며' 우금티 전투지 지켜동학농민혁명의 최대 전투지였던 공주는 우금티 외에도 동학 관련 유적지가 산재해 있으나 위령탑 외에 달리 기념시설들이 많지 않다. 혁명의 전사를 이룬 교조신원운동이 최초로 일어났던 충청감영이 있던 공주집회 터, 공주에서 농민군과 관군 간 첫 전투가 벌어졌던 남월 전투지, 우금티 전투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지 견준봉과 두리봉, 우금티 전투에 앞서 공방을 벌였던 이인전투지와 효포능치 전투지 등에는 표지석 하나 세워지지 않았다. 다만 농민군 18명이 숨졌다는 송장배미에는 기념석과 기념조형물(윤여관 작)이 설치돼 공주전투를 알리고 있다. 이곳은 도로가 뚫리면서 자칫 사라질 위기에 있었으나 우금티기념사업회에서 시청 책상을 엎어가며 지켜냈다.공주대공주대 교수와 향토사학자, 농민운동가 등을 중심으로 꾸려진 우금티사업회는 공주의 동학농민혁명을 지켰던 파순꾼. 우금티 고개 자체를 없애려는 도로공사에 맞섰고, 현재도 원래 능선을 복원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매년 추모 제례와 연극공연, 체험프로그램, 토론회 등의 추모예술제를 열어 당시의 역사를 시민들에게 기억하도록 해왔다. 올해는 도올 김용옥 선생의 작품을 대본으로 우금티 극단과 함께 연극을 준비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각 지역에서 사용하는 혁명대신 동학농민전쟁 우금티기념사업회명칭도 눈에 띈다.

  • 기획
  • 김원용
  • 2014.08.06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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