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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지역별 유적지와 기념사업 - 무안·함평] 일본군·관군, 각종 기록과 함께 바다에 농민군 수장

동학농민혁명 당시 무안함평의 농민군과 나주 수성군 사이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수많은 농민군이 전사한 고막교(古幕橋). 보물 제1372호로 지정된 이 다리는 현재 절반만 온전히 남아있고, 절반은 원형과는 상이하게 복원돼있으며 동학농민운동과 관련된 안내표지판조차 없다. 배종열 무안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고문은 고막교가 무안함평 지역의 동학농민혁명사를 상징적으로 대변한다고 했다. 지난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으로 명예회복을 이뤄냈지만, 아직까지 이 지역에서는 제대로 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무안함평지역 동학농민혁명은 배상옥 장군을 중심으로 고부나 삼례, 공주 지역 등에 못지 않은 규모와 인원들이 활약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활동했던 만큼의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바로 이웃한 장흥과 나주는 치열한 항쟁이 벌어져 사료 등이 많이 발굴된 편이지만, 전투의 외각지대에 있던 무안함평은 일본군과 관군이 농민군과 함께 각종 기록과 자료를 바다에 쓸어 넣었다.△무안함평지역 동학사백창석 무안문화원장은 무안지역 농민운동이 1862년부터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당시 전국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났는데 전국 70여개 고을 중에서 전남 지방은 무안을 포함한 18개 지방에서 봉기했다. 이때 무안의 박창응 등이 농민들을 소집해 진정서를 올리고 관에 항의하고 감영에 들어가 소를 올렸는데 도리어 잡혀서 태형을 받고 감옥에 갇혔다. 이렇게 시작된 무안 농민들의 부정에 대한 항의와 올곧은 정신은 1892년 11월의 삼례집회나 1893년 2월의 서울 집회 등에서 나타났다. 특히 1894년 3월 백산 집회 때는 전라도 53개 고을 중에서 33개 지방의 동학농민군이 운집했는데, 동학농민혁명 관련 기록에 따르면 참여한 지방 중에서 장령 급이 제일 많이 참여한 곳이 무안이다. 농민 자치 시기에는 청계면 청천리 달성 배씨 사당인 청천사에 집강소를 세워 탐관오리의 징계, 신분해방운동과 사회신분제의 폐지 추진 등을 실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2차 봉기 때에도 무안 농민군은 삼례에 집결하려 했지만 일본군에 의한 배후 세력이 끊어질 것을 염려해 북상하지 않았다. 이어 11월 20일에 나주성 공격에 참여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함평 농민군은 무안 지역 농민군과 긴밀한 연계 속에서 활동을 전개했다. 1894년 11월 무안 농민군이 나주를 향해 진격하다가 함평의 고막포 일대에서 나주수성군과 격전을 치를 때도 함평의 농민군이 참여했다. 당시 함평 동학군을 이끌었던 지도자는 대접주 이화진, 김경옥, 이춘익, 이재민 등이다. △창포장수 배상옥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이 노래는 조선 후기에 구전되던 민요로 전봉준이 주도한 동학농민혁명의 실패를 슬퍼하는 농민들의 처절한 절망을 담아냈다. 무안에도 이와 비슷한 노래가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민중의 절망대신 구체적인 동학의 대장을 지칭하는 노래로 전해져 온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창포장수 울고간다. 기존의 노래와 다른 것은 청포장수를 창포장수로 표현한 점이다. 창포장수는 창포만을 중심으로 동학군을 이끌고 활약하며 호남하도거괴(湖南下道巨魁)라 불려 졌던 무안의 대접주 배상옥 장군을 일컫는다. 창포는 포구로 무안에 문화를 전파하는 해상통로 구실을 했다. 지금은 간척이 되어 농경지로 활용되고 있지만 간척되기 전에는 드넓은 뻘밭으로 인해 각종 해산물이 지천으로 났던 곳이다. 배상옥 장군은 이 일대를 중심으로 농민의 시위나 혁명을 주도했고 혁신적이고 개혁적인 남접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전남 서남부 일대를 장악하고 청계면 청천리에 집강소를 설치해 동학의 정신을 구현했다. 또한 해제면 석용리에 거주하면서 포교활동을 했고 그곳에 연병장을 설치해 혁명군을 훈련시켰다. △주요 유적지붉은 고개= 무안읍 성남리 초당대학교 인근 국도 1호선이 지나는 길에 나지막한 고개가 있다. 무안에서 목포로 가는 길목인 이곳은 붉은 고개로 불린다. 무안지역 주민들의 구전에 따르면 동학농민혁명 당시 매복해있던 일본군에게 몰살당한 농민군의 피가 이곳을 물들였다고 한다. 청천재= 청계면 청천리에 있는 달성배씨 제각인 청천재는 집강소가 설치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이 집강소였다는 데는 이견이 있지만, 당시 동학농민혁명을 배척했던 유교 집안에서 배상옥 장군의 명예훼복을 알리는 문서를 제각에 걸어놓은 것으로 볼 때, 상당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삼의사비= 무안군 해제면 석산 마을 인근에 있는 삼의사비는 최장현, 최기현, 최선현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들은 동학농민군을 모아 마을 인근에서 훈련을 시켰고, 배상옥 장군과 함께 나주성 전투에 나섰다가 붙잡혀 처형당했다.● 배종열 무안동학기념사업회 고문 "혁명정신 계승 안돼...우리 사회 중심 잃어"우리 사회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는 것은 동학농민혁명 정신이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배종열 무안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고문은 대한민국 사회에 사상적 기반이 빈약하다고 꼬집었다. 부당한 권력과 압력에 맞서 일어섰던 동학농민혁명 정신이 빨갱이와 동일 선상에 놓여 평가받고 있는 일들이 지금도 자행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동학농민혁명군의 후손들은 일제시대에는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해방이 돼서는 민주화 운동을 펼쳤습니다. 반면 농민군을 탄압했던 후손들은 친일파가 됐고, 해방 후에는 민주화 운동을 탄압했어요. 배 고문은 이같은 일들이 지금도 자행되고 있고, 동학농민혁명을 왜곡하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고 했다. 이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동학농민혁명을 바로 알리는 일이 시급하다고 진단했다. 이 때문에 배 고문은 지난 2011년 출범한 무안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초대 이사장을 맡았다. 다른 지역에 비해 시작은 늦었지만 무안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는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는 평가다. 아직 갈 길이 멀지요. 무안 지역에는 제대로 된 기념시설조차 없는 상황입니다.배 고문이 가장 공을 들이는 부분은 동학농민혁명 문화콘텐츠 자원화다. 우선 기념공원을 조성하고, 유적지를 연계한 답사 프로그램 개발 등을 통해 무안의 동학농민혁명을 알린다는 계획이다. 또 청소년들에게 보다 쉽게 동학농민혁명을 알리기 위한 교육콘텐츠 개발에도 힘을 쏟고 있다.

  • 기획
  • 김정엽
  • 2014.07.30 23:02

[(29) 지역별 유적지와 기념사업 - 전남 장흥] 농민군 2000명 사망 '최후 격전지' 새롭게 기려

올 연초 전남 장흥군 부산면 용반리에서 합동제례가 있었다. 매년 장흥동학농민혁명유족회에서 주관으로 치르는 합동제례는 이 마을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던 농민군들이 모두 같은 날 처형됐기 때문이다. 제례에 위패가 모셔진 분만 15명. 동학농민혁명에서 치열했던 역사를 말해주는 상징적인 대목이다.동학농민혁명 당시 관군일본군과 농민군 사이 최후 사투가 벌어진 곳이 바로 장흥이다. 그럼에도 장흥은 한동안 혁명연구사의 변방에 있었다. 최근 혁명 유족과 향토 사학계의 줄기찬 노력 덕분에 장흥지역 혁명의 발자취가 점차 세상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다.3만여 명의 동학 농민군들의 최후 전투지인 석대들이 국가사적지로 지정되고, 오는 12월에는 기념공원도 준공을 앞두고 있다.장흥지역은 우금치 전투에서 돌이킬 수 없는 패배를 안긴 일본군의 추적을 피해 농민군이 최후까지 항전한 곳이다. 당시 장흥지역 농민군은 우금치 전투 패배로 위축된 혁명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해 항전했다.반외세 반봉건의 정신을 끝까지 놓지 않았던 장흥 농민군의 시대 정신은 현재까지도 귀감이 되고 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일반인들에게 장흥지역 동학농민혁명사는 낯설기만 하다.△장흥지역 동학 유적장흥지역 동학 지도자의 활동 반경을 중심으로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는 크게 용산면, 관산읍, 회진과 덕도, 대덕읍, 유치면 등에 집중돼 있다.용산면 도르뫼 들판에는 이방언이 농민군을 집결해 훈련을 했던 곳이며, 부용사는 관군의 추적을 피해 몸을 숨긴 농민군의 은신처이다.관산읍에 위치한 옥산전투지는 솔치재를 넘어오는 일본군과 농민군이 죽천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남송마을 무연고 묘지는 옥산전투 중 죽은 이름 없는 수백기의 농민군이 묻혀 있는 곳이다.회진과 덕도의 회령성은 이인환이 이끄는 농민군이 무혈입성, 화포와 조총 등 많은 군수물자를 노획한 곳이다.대덕읍과 유치면에는 월정전투지, 농민군 야전사령부가 있던 연지리가 있다.또한 현재의 유치면 조양리와 신풍리 일대는 영암에서 넘어온 일본군에 맞서 농민군이 항전한 곳이다.△이방언과 푸조나무장흥읍 용산면 어산리에 위치한 푸조나무(천연기념물)는 느릅나무과로 나이가 약 400살 정도로 추정된다. 이 나무 밑에 120년 전 농민군이 집결했다.장흥의 동학지도자 이방언을 필두로 모인 농민군은 이곳에서 전투를 위해 집결하거나 훈련을 했다.이방언은 당시 학식과 덕망을 갖춘 선비로서 1888년에는 전라감사와 담판을 지어 무리한 조세를 시정하는 등 지역에서 높은 신망을 받았다.이방언은 갑오년 전봉준의 무장기포 당시 이인환, 강봉수 등과 함께 장흥지역 농민군을 이끌고 전봉준 진영에 합류했다.그는 장성 황룡전투를 지휘, 대승을 거두어 남도장군이라는 별칭을 얻었다.하지만 이후 석대들 전투 이후 체포되 장대(현 장흥서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처형됐다.옛 역사를 간직한 이 나무에서 예로부터 부락 주민들이 매년 정월 보름날이면 국가의 안녕과 질병 없는 한 해를 기원하는 당산제를 지냈다고 한다.당시 농민군도 더 나은 나라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이곳에서 전의를 불태웠을 것이다.△석대들 전적지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동학농민군과 관군 간의 사투가 벌어진 전남 장흥군 장흥석대들전적지를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제498호)으로 지정돼 있다.석대들 전적지는 정읍황토현전적지(사적 제295호)와 공주우금치전적지(사적 제387호), 그리고 장성황룡전적지(사적 제406호)와 더불어 동학농민전쟁 4대 전적지로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뛰어나고 기 지정된 전적지와 비교 연구할 수 있는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장흥읍 남외리에 위치한 석대들 전적지는 공주 우금치 전투 이후 전봉준을 비롯한 지도부가 모두 체포된 이후 3만명이 넘는 농민군이 참여해 항전을 계속하다 2000명 이상이 사망한 동학농민혁명의 최대최후의 격전지다. 전투 현장인 석대들 벌판과 동학농민군이 깃발을 꽂았다고 전해지는 석대(石臺), 석대들 전투에서 사망한 관군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사당인 영회당(사진)등 모두 3만5700㎡(52필지)가 국가사적이다. 장흥 석대들 전투는 동학농민 혁명과정에서 전봉준을 중심으로 하는 농민군 주력과는 별개로 이루어진 전투로 전봉준을 비롯한 지도부가 모두 체포된 이후에도 항전이 계속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지다.현재 남외리와 석대들판 사이 옛날 작은 석대가 있던 자리에는 장흥 동학농민혁명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소년 뱃사공 농민군 살리다석대들 전투에서 패한 농민군 강진과 석대들 인근 자울재 쪽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관군과 일본군은 농민군을 쫓아 한반도 최남단까지 내려왔다. 동학군은 몸을 숨겼고, 관군의 수색은 집요했다. 500명의 동학군이 좁은 섬 덕도에 숨었다. 관군의 수색망은 좁혀졌고, 농민군들은 생사의 기로에 섰다. 그때 소년 뱃사공이 돛배를 몰고 와 밤마다 조금씩 수를 나눠 동학군을 인근의 다른 섬으로 피신시켰다. 윤성도의 손자 윤병추씨(80)는 어릴 때 할아버지로부터 당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목숨을 내걸고 쫓기던 동학군을 하루가 멀다하고 배에 태워 인근 섬으로 피신시킨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윤병추씨는 남도 끝까지 쫓긴 동학군의 절박한 마음을 외면할 수 없었다던 할아버지의 숭고한 정신을 존경한다고 말했다.● 장흥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 - 중고등학생용 교재 학교 보급, 자치단체 지원 조례 제정 추진2004년 설립된 장흥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는 장흥지역 혁명 유적지 발굴 및 선양 사업에 힘을 보태고 있다. 특히 직접 발로 뛰는 유적지 답사활동을 통해 이야기 장흥동학농민혁명이란 책자도 발간하는 등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문충선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은 오랫동안 역사의 뒤안길로 여겨진 장흥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생생한 발자취를 찾아 헤맸다며 농민군 후손과 향토 사학계의 노력 덕에 석대들 전적지가 국가사적지로 인정 받게 됐다고 말했다.그는 이어 오는 12월이면 석대들 전적지 인근에 기념공원과 기념관이 설립될 것이다며 이후 체계적인 관리를 위해 전남도와 장흥군 차원의 조례 제정에 힘을 쏟겠다고 말했다.기념사업회는 최근 중고등학생용 교재를 일선 학교에 보급, 지역 동학농민혁명사를 체계적으로 알릴 계획이다. 이는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자신이 사는 지역의 생생한 역사를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다.문충선 사무국장은 동학농민혁명은 일제강점기 항일 독립운동, 4.19의거, 5.18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는 한국 근현대사의 정신적 뿌리라며 그 정신을 후대에 알릴 수 있도록 관련 교육 및 홍보에 매진하겠다고 밝혔다.

  • 기획
  • 최명국
  • 2014.07.23 23:02

[(28) 지역별 유적지와 기념사업 - 완주] 대둔산 '농민군 최후 항전지' 문화재 등록 팔 걷어

전주가 온전한 고을이라면, 완주는 완전한 고을이다. 이름이 그렇고, 지리적인 생김새가 그렇다. 전주를 꼭 감싸고 있는 모양새를 하고 있기 때문에, 전주에서 다른 지역으로 나가려면 완주를 거쳐야 한다.완주가 꼭 감싸고 있는 것은 전주 뿐만이 아니다.동학교도들 사이에서 전봉준과 같은 변혁 지향적인 세력이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 1892년 11월에 완주 삼례에서 있었던 삼례 집회였다.그리고 실패로 끝난 혁명의 최후 항전이 1895년 2월, 완주 대둔산에서 있었다.완주는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를 그대로 꼭 감싸고 있는 곳인 셈이다.△삼례 역참 터석 삼 자에 예도 례 자를 쓰는 삼례(參禮)는 조선 초 회안대군 이방간이 자리잡던 곳이라 사람들이 이곳을 지날 때마다 왕족에 대한 예우로 세 번 예를 갖췄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됐다고 한다.조선시대에는 사통팔달 교통이 편리하고, 특히 서울로 가는 길목이어서 지리적인 요충지로 꼽혔다. 동학 교도들이 이런 곳에서 교조 신원과 포교의 자유를 외치는 집회를 연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동학 교도들이 집회를 연 자리를 정확히 어떤 지점이라고 특정할 수는 없다. 김정호 완주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장은 이 마을 전체가 집회 장소였을 수 있다고 말한다.그래도 한 지점을 꼽자면 대체로 삼례 역참 터를 드는데,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병규 연구조사부장은 역참은 중앙 관리가 파견되는 기관이라며 이곳에 모였다는 것으로 삼례 전체를 장악했다는 추정이 가능한 만큼, 집결장소로서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삼례 역참 터는 역사에 한 번 더 등장한다. 바로 1894년 9월이다.청과 일본이 각각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고 전쟁을 벌이기 시작하자, 전봉준은 이곳에서 제2차 봉기를 준비한다.대도소를 설치하고 각지에 통문을 보내는 등 재기포 준비를 서두른 전봉준은, 준비가 끝나자 10월 12일에 공주로 향했다.이처럼 동학농민혁명이 태동했고 2차 봉기의 중심이었던 지점임에도, 안타깝게도 이곳에는 어떤 안내판이나 표지도 없다. 지금 그 자리에서는 교회 건물 공사가 한창이다.김정호 회장은 한쪽에 몇 평 정도의 땅을 얻어 기념관을 세울 예정이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이에 대해 완주군 문화관광과 관계자는 삼례 집회 지점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학설이 있기 때문에, 문화재 지정을 위해서는 학술적으로 먼저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삼례봉기 역사광장대신, 삼례집회와 봉기라는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는 자리는 조금 떨어진 곳에 조성돼 있다.역참 터에서 삼봉로를 따라 동쪽으로 가다가 삼례도서관과 향토문화예술회관이 있는 곳으로 진입하면, 왼편에 쇠스랑 든 손을 형상화한 커다란 조형물이 눈에 들어온다.힘-하나되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조형물은 동학농민군 출진상, 추념의 장, 동학농민혁명봉기비 등의 다른 조형물과 함께 삼례봉기 역사광장을 지키고 있다.2003년에 조성된 이 광장은 예술적으로 의미가 잘 형상화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특히 힘-하나되어는 동학농민혁명의 상징과도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다.하지만 광장 곳곳에 잡초가 나 있고 석재가 들떠있는 모습이 보여, 관리는 잘 이뤄지지 않는 것 같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김정호 회장은 원래 이 옆에 박물관을 지으려는 계획이 있었다며 하지만 계획대로 잘 이뤄지지 않아 현재는 벽돌공장이 자리해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한편 역사광장에서 도서관 방향으로 50m쯤 걸어 올라가면 이도재영세불망비라는 비석이 서 있다.이도재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라도 관찰사로서 농민군을 진압했던 인물이다. 김개남을 체포한 뒤 서울로 보내지 않고 전주 초록바위에서 처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대둔산 최후항전지다시 차에 올랐다.대둔산은 삼례에서는 한 시간 가량 국도를 타고 달려야만 닿을 수 있다.완주군과 충남 금산군논산시에 걸쳐있는 대둔산은 높이는 해발 879m에 불과하지만 산세가 험준해 쉬이 오르기는 어려운 산이다.동학농민군에 가담해 싸우던 금산지역 유지 최공우는 대둔산의 이런 점을 이용했다. 1894년 말과 이듬해 초 사이에 동학 지도자들이 대부분 체포된 상황에서, 그는 대둔산의 산세를 방패삼아 마지막 항전을 시도했다.앞으로는 일본군이 올라오는 게 보이고, 뒤로는 절벽이 있어요. 그래서 앞만 잘 지키면 버틸 수 있었는데, 일본군이 이걸 역이용해서 뒤로 올라가서 토벌한 거죠.접근조차 하기 어려운 곳에서의 항전은 오래 가지 못했다. 1895년 2월 18일, 뛰어내렸지만 나무에 걸려 목숨을 부지했다는 한 명을 제외하고, 항전하던 농민군은 전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전해진다.케이블카 정거장을 지나 등산로로 접어드는 지점에 이를 기리는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완주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는 매년 삼례봉기 기념광장과 이곳에서 제사를 지낸다고.한데, 기념탑 앞 알림판이 너무 낡아 글자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1894년, 1895년이 1984년, 1985년으로 잘못 표기돼 있기도 했다.대둔산을 자주 찾는다는 한 등산객은 매번 산을 오르내리면서 보기는 했지만 이곳의 의미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고 말했다.조만간에 이것도 전부 고쳐야지요.김정호 회장이 안내판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항전지가 빨리 문화재로 지정되고, 일반인이 접근할 수 있는 통로가 생겼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한편 완주군은 대둔산 최후항전지를 문화재로 등록하기 위한 작업을 서두르고 있다. 산림청 등의 협조를 얻어 절차를 밟아 하반기에 문화재 신청을 하겠다는 것이 군의 계획이다.● 완주동학혁명기념사업회 - 다음달 사단법인으로 독립, 지역 유적혁명사 발굴나서완주군의 기념사업은 완주동학혁명기념사업회가 주관하고 있다. 김정호 변호사가 3년 전부터 기념사업회의 회장을 맡아 활동하고 있다.삼례 출신인 김정호 회장은 동학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고 털어놨다. 그는 동료 변호사를 끌어들여 유적지 답사를 시작했는데, 답사를 계속할수록 동학에 대한 열정이 솟아났다고 말한다.완주기념사업회는 삼례 봉기를 기념하는 행사와 대둔산 최후항전을 기리는 행사를 매년 진행한다.특히 다른 지역에 비해 덜 알려져 있는 완주 지역의 혁명사를 발굴해내는 데 힘을 쏟고 있다.김정호 회장은 뭐든 자료를 문서화해서 남겨놔야 한다고 강조한다. 최소한 유적지의 위치 정도는 남겨놔야 나중에라도 보고 연구든 뭐든 할 수 있다는 것.완주기념사업회는 오는 8월에 사단법인으로 독립할 예정이다.내년에는 완주지역에 있는 유적들을 발굴하는 것이 목표다. 아직까지 알려져 있지 않던 것들을 찾아 내년 10월께 책을 낼 예정이라고.

  • 기획
  • 권혁일
  • 2014.07.16 23:02

[(27) 지역별 유적지와 기념사업 - 전주] 동학농민혁명 불꽃 가장 찬란하게 피운 곳인데…

1894년 사건에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데는 전주가 있었다. 민중들이 감영을 점령한 것이 조선역사상 처음이었고, 집강소를 통해 민중에 의한 통치가 이루어진 것도 한국 역사상 최초였다. 여전히 논란이 있고 동학농민운동이나 갑오농민전쟁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학자도 있지만, 특별법으로까지동학농민혁명으로 정리된 데에 바로 전주의 역할이 컸다. 전라도 수부, 전라감영이 자리한 전주성의 점령과 이를 바탕으로 한 집강소 설치가 당시 봉건주의적 이념과 제도에 결정적 타격을 주었기 때문이다.이렇게 1차 봉기의 화룡점정이었으며, 2차 봉기로 가는 중요한 열쇠를 쥐었던, 동학농민혁명사에서 가장 빛났던 그 전주가 오늘에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 시민들 가까이에 있는 전주 덕진공원이 그 답을 대신할 것 같다.덕진공원에는 전북의 법조3성의 동상을 비롯, 간재 선생 유허비, 신석정백양촌 신근김해강이철균 시비 등 전북인 낳은 많은 인물들의 동상과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동학농민혁명을 이끌었던 3대 지도자를 기리는 시설도 여기에 들어서 있다.시민들 가까이에, 여러 위인들 속에 3대 지도자를 기억할 수 있는 장소라는 점에서 덕진공원 시설물이 나름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유적지도 아닌 곳에 제각각으로 설치된 지도자 3인의 시설은 별 울림을 주지 못하고 있다. 실제 안내판 하나 설치되지 않은 공원 구석에 설치된 시설물들을 알고 있는 시민들이 얼마나 될 지 궁금하다.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를 푸는 데 전주가 중요한 키워드이지만, 전주에서 동학농민혁명을 찾기란 이렇게 힘들다. 집강소 설치와 폐정개혁을 단행해 근대 민주정치를 열었던 상징적 공간에서 조차 그 역사를 떠올릴 수 없는 것이 현주소다. 정읍과 고창 등지에서 동학농민혁명의 과잉이라면, 전주에서 왜 상대적으로 외면을 받고 있을까.덕진공원에서 보듯이 전주의 역사적 자원이 풍부한 점이 한 이유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후백제의 도읍지조선왕조의 발상지로서 이미지를 살리는 데 정책의 힘을 실으면서 동학이 끼어들 틈이 적었다. 특히 그동안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저평가 속에 조선왕조와 대척점에 있었던 동학을 힘있게 부각시키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여기에 전주를 지역권으로 하는 기념사업회가 없었던 점도 전주에서 동학의 위상을 세우지 못한 배경이 될 듯하다. 전주 소재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일찍이 발족돼 많은 사업들을 벌였지만, 전국적 사업쪽에 관심을 두면서 상대적으로 전주를 소홀히 했다고 사업회 관계자들도 자성하고 있다.△전주입성비 조차 점령 의미 못살려현재 전주에서 동학농민혁명을 기억할 수 있는 기념시설은 덕진공원을 포함해 손으로 꼽을 정도다. 기념시설 또한 역사적 사실과 다르게 기술되거나 고증작업 없이 설치돼 보완이 요구되고 있다. 1981년 전주청년회의소와 풍남청년회의소에서 설치한 덕진공원내 전봉준선생상의 경우 선생이라는 이름부터가 낯설다. 전봉준 장군이 한 손에 사발통문 뭉치를 움켜잡고 패랭이를 쓰고 있는 형상의 동상 얼굴 또한 본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는 게 학계 의견이다.가장 대표적인 전주지역 기념시설인 동학농민군 전주입성비도 전주성 점령의 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전주 완산공원내에 설치된 이 비는 1991년 전북도 문화재위원회에서 건립한 전주성 점령과 관련된 유일한 기념물이다. 완산은 동학농민군과 관군이 전주화약을 맺은 후 농민군 스스로 전주성에서 철수하기까지 농민군과 관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이이화 선생은 전주성 입성은 잘못이며, 전주성 점령이 적확하다고 주장한다. 아무리 무혈입성이라도 농민군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보기 때문이다. 비문에 새겨진 동학농민군이부안 백산기포 또한 사실과 달라 교정이 필요하다. 배항섭 성균관대 교수는 전주입성비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해나 시민적 공감이 없이 세워져 전주성 점령의 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며, 이곳의 역사적 의미를 되살릴 수 있는 새로운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주성 점령에 앞서 금구에서 진격했던 용머리고개, 전주성을 점령하기 직전 농민군이 숙영했던 전주 삼천, 완산칠봉 전투지 등을 안내하는 기념시설이 전무하다. 다만 김개남 장군이 처형됐던 초록바위 안내판에는 처형지임을 안내하고 있고, 천도교에서 100주년을 기념해 전주 한옥마을에 건립한 동학혁명기념관이 그나마 상징적인 기념시설이 되고 있다.△전북의 대표정신, 전주에서 살려야전북일보가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앞두고 1992년 6월 창간호에서 전북도민의식 조사를 실시한 결과 동학농민혁명이 전북의 정신이 되어야 한다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전북도가 1999년 조사한 도민의식 조사에서도 동학농민혁명의 저항정신이 전북의 대표정신으로 생각하는 데 80% 이상이 동의했다. 혁명의 불을 지핀 곳이 정읍이라면 혁명의 불꽃을 찬란하게 피운 곳이 전주라는 점에서 전주가 동학농민혁명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 지 고민이 필요한 대목이다.현재 추진되고 있는 전라감영 복원과 관련해 전라도 전체를 통괄했던 역사에만 머무르게 할 지, 근대민주주의의 역사를 쓴 집강소의 역사에도 힘을 실어야 할지 논의가 필요할 것 같다.문병학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처장은 전라감사의 집무실을 핵심으로 삼더라도 뜰 앞에 전라감사 김학진과 동학농민군 최고지도자 전봉준의 화약을 기리는 조형물이라도 설치해 전주화약의 의의를 새겨야 한다고 말했다.문 처장은 또 동학농민군의 전주성 점령은 프랑스 혁명군이 바스티유감옥을 점령한 것과 비견된다며, 프랑스대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에펠탑을 세운 것처럼 전주에 상징적인 조형물이나 기념시설이 꼭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21세기 전주 역사문화정책 핵심 기제- '근대민주주의 태동시킨 고장' 역사적 위상에 대한 재인식을19세기말, 전라감영이 있던 전주는 동양적 근대와 서구적 근대가 극적으로 교차한 역동적인 공간이었다.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것이 1894년 5월 31일이었고, 전라도 전역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근대적인 폐정개혁을 단행한 것이 그해 여름이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896년 지금의 서문교회 자리에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가 들어왔고, 곧이어 예수병원과 신흥학교 터전이 마련되었다. 이처럼 전주성 주변은 근대 초기에 형성된 중요한 역사문화유적들이 즐비하다. 이는 전주가 조선 건국자의 본향일 뿐만이 아니라 전제왕조체제를 극복하고자 적극적으로 근대를 수용, 우리나라 근대민주주의를 태동시킨 매우 중대한 역사적 위상을 지닌 고장임을 말해주고 있다. 인류역사 전체 틀에서 보면 전주가 지닌 조선왕조의 본향이라는 위상은 역사발전의 역방향이고, 근대적 폐정개혁 단행으로 전제왕조를 극복하고자 했던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는 역사발전의 순방향이다.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 척양척왜 보국안민의 기치를 든 동학농민군은 전라도 수부이자 조선건국자 본향인 전주성을 함락시켰다. 이후 동학농민군 총대장 전봉준은 전라감사 김학진에게 전라도 전역에 집강소 설치를 요구, 감사 집무실이었던 선화당에 집강소 총본부격인 대도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을 단행했다. 이는 친일내각의 갑오개혁을 강제한 실질적인 힘이었다. 이처럼 전주는 조선건국자의 본향이자 전제왕조체제를 극복하고 근대민주주의를 실현시킨 역사적인 고장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전라북도(전주시)의 역사문화정책은 풍패지향(豊沛地響)에 붙들려 근대민주주의 효시라는 전주가 지닌 역사적 위상을 지역발전의 핵심기제로 활용하지 못했다. 이는 행정기관의 역사인식 부재 탓도 있지만 지난 한 세기 동안 극심하게 굴절되어온 근현대사의 부침에 더 큰 원인이 있다. 동학농민군이 쓰러진 후 조선은 일제식민지로 전락했고, 해방 후에는 세계사적 차원의 동서냉전체제 구축과정에서 빚어진 극심한 좌우대립 민족분단 한국전쟁 등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다. 그 연장선상에서 1960~1990년대 군사정권시기가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근대민주주의 효시라는 전주의 역사적 위상은 역사의 뒤안길에 암매장된 채 철저히 망각되었고, 조선건국자의 본향이라는 박제화 된 절름발이 역사인식이 자리했다. 21세기 문화관광시대, 우리는 서둘러 지난 한 세기 동안 박제화 된 전주의 역사적 전통과 문화에 대한 재인식에 나서야한다. 풍패지향이라는 외날개짓의 한계를 서둘러 깨닫고, 더 늦기 전에 퇴화 일보직전인 역사발전의 순방향, 근대사 관문으로서의 역사적 위상이라는 날개를 활짝 펴야한다. 근대 민주주의 효시라는 날개의 핵심깃대가 동학농민혁명사와 그 역사유적들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문병학 시인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처장

  • 기획
  • 김원용
  • 2014.07.09 23:02

[(26) 지역별 유적지와 기념사업 - 남원] 천도교 성지이자 전라좌도 심장부…'동학과 혁명' 공존

경주에서 포교활동을 펼치던 동학 창시자 최제우는 갑자기 짐을 꾸려야 했다. 졸지에 도망자 신세가 된 것이다. 1861년 성리학을 숭상하는 유생들이 최제우가 가르치는 도를 서학으로 몰기 시작한 뒤, 음력 11월 경주관아에서 그의 활동을 중지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최제우는 경주를 떠나 울산, 부산 등을 거쳐 전라도 남원으로 왔다. 그해 음력 12월이다. 이후 남원 교룡산성 은적암에서 6개월간 체류하며 동학의 근간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의 핵심 사상을 가다듬는다. 정확히 32년 후 남원은 동학농민혁명에서 전라좌도 중심지가 된다. 1894년 전주성 점령 이후 여러 지역에 집강소가 설치됐지만, 지방토호 등 보수세력이 강했던 남원과 운봉은 집강소 설치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김개남 장군은 농민군을 이끌고 남원성에 도착 동학대도회소를 설치한다. 김개남은 남원도호부의 관할인 담양순창무주임실곡성진안용담장수를 넘어 순천광양낙안보성 등까지 남원대도회소의 관할에 포함시켜 전라좌도를 호령했다. 이처럼 남원은 동학농민혁명에서 동학과 혁명이 공존하는 유일한 장소다. 남원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는 지역의 상징적인 장소들을 엮어 남원동학농민혁명 순례길 벨트를 만들었다.△동학 교리의 모태 은적암순례길 벨트 출발지인 남원 교룡산에 위치한 은적암(隱蹟庵). 한병옥 전 남원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장이 길을 잡았다. 남원지역 동학농민군이 주둔했던 선국사(善國寺)를 지나 20여분 정도를 오르자 작은 암자터가 나왔다. 오르기 어려운 곳은 아니지만 한 전회장의 안내가 없었다면 찾아가기 힘든 곳이었다. 관아로부터 활동중지 명령을 받게 된 최제우는 이곳으로 몸을 피했다. 1861년 11월 제자 최중희와 함께 경주를 떠나 울산부산진해고성여수구례를 거쳐 약 두 달 만에 남원에 도착했다. 은적암은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불교계를 대표해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백용성이 처음 출가한 곳이기도 하다. 최제우는 이곳에서 6개월간 머물며 동학 교리의 근간을 마련하고 집필과 포교에 들어간다. 천도교 전주종리원 연혁과 오하기문에 따르면 최제우는 이 시기에 전주지례금산진산까지 왕래하며 포교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최제우가 남원에 머문 약 6개월은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많은 집필을 한 시기다.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이나 포교가사집인 용담유사의 핵심을 이루는 글들이 이 기간에 작성됐다. 특히 주목해야 할 글은 동학론이다. 최제우는 그동안 유림들에 의해 서도 혹은 서학으로 불리는 천주교도로 내몰리고 있었는데, 이에 대한 잘못을 지적하고 자신의 신념체계를 분명히 하기 위해 쓴 글이 동학론이다. 최제우가 동학이란 용어를 처음 쓰면서 동학을 신념체계로 정립한 곳이 바로 남원이며 교룡산의 은적암이다. △전라좌도 동학대도회소 남원유림사상을 기반으로 한 지방토호 등 보수세력이 강했던 남원에서 김개남 장군을 맞이한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양반 토호들이었다. 남원지역에 집강소 설치가 불가능하자 김개남은 1894년 6월 12일 태인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순창옥과담양창평순천 등을 돌아 6월 25일 남원성에 도착한다. 이 때 김개남을 남원으로 인도한 사람은 김홍기 남원접주와 이사명 진안접주다. 한학을 공부하며 경제적으로도 풍족했던 장인 최봉성의 영향을 받은 김홍기는 남원대접주 등을 역임하면서 5000여호를 동학에 입문시켰다. 이사명은 본관이 전주 이씨로 수 차례 과거 시험을 치렀을 정도로 학식이 높았다. 이들의 도움으로 남원성에 입성한 김개남은 옛 남원군청 자리에 전라좌도 동학대도회소를 설치한다. 김개남은 동학대도회소가 자리를 잡아가자 백성들을 착취했던 아전, 유림, 토호들의 재물을 반환케 했고 노비들을 해방시켰다. 지주들의 토지를 농민들의 대표를 뽑아 공평하게 분배하는가 하면 과부의 재가를 허용하면서 포교에 힘쓰는 한편, 식량무기 등을 비축해 장기전에 대비했다. 이를 기반으로 그해 7월 15일 남원대회에 5만여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집회를 열수 있었다. 아쉽게도 김개남 장군과 남원지역 동학농민군이 활약했던 대도회소는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현대화가 진행되면서 건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나, 사라진 자리에는 기념비 하나 없는 실정이다. △혁명의 꿈 묻힌 방아재남원 산동면에서 관음재와 방아재를 넘으면 곧바로 운봉이다. 120년 전 동학농민군은 운봉으로 가는 길목이 한 눈에 보이는 이곳에 깃대바위를 만들고 승전을 다짐하는 기를 꽂았다.그러나 지금은 차를 타고 채 10여분이 안돼 갈 수 있는 이곳은 동학농민군에는 갈수 없는 길이었다. 남원시가지는 평균 해발 100m, 운봉고원은 460m 정도다. 350m 이상 고도차이가 있는데다 백두대간 산줄기로 막혀있어 삼국시대 이전부터 국경 등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험난한 지형이었다. 결국 남원지역 동학농민군의 꿈은 이 능선에서 좌초되고 말았다. 김개남 장군이 제2차 봉기에서 청주성 공격에 나선 뒤 남원에 남은 농민군 1만여명 중 7000여명은 산동방 부동에 진을 치고 운봉 공격 준비를 완료했다. 당시 운봉에는 박봉양을 주축으로 한 민보군이 남원에 있는 동학군을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었다. 이들은 영남지방으로부터 300정의 무기와 화약 등을 지원받아 전투력을 강화했고, 영남지방 보수 세력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 박복양은 2000여명의 병력을 방아재에 배치하고 선제공격할 기세를 보이다가 도망치는 척하면서 농민군을 유인했다. 계략에 말려든 농민군은 회복할 수 없는 치명상을 입었다. 오하기문(梧下記聞)에는 당시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적이 산상에 오르기를 기다렸다가 천보총을 일제히 발사해 골짜기를 진동시켰다. 소들이 놀라 뒤돌아 달리며 미친 듯이 울부짖고 난폭하게 날뛰며 뿔로 찌르고 발길질을 하니 밟히고 찔려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었다.△남원 동학혁명기념사업회처음에는 동학에 동자도 몰랐지요.지난 2004년 남원 동학혁명기념사업회 초대 회장을 맡은 한병옥 전 회장은 시민사회단체 운동가 출신이다. 동학농민혁명을 연구해 온 학자도 아니고 유족도 아니다. 그런 그가 초대회장을 맡게된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 유족들을 중심으로 기념사업회를 조직하려 했으나 아무도 도움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할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고 하는데 거절할 수가 있어야지.한 전 회장은 어쩔 수 없이 나섰다고 말했지만, 그의 말 속에는 남원지역 동학농민운동 역사를 보존계승하고 알려야 한다는 신념이 묻어났다. 남원 동학혁명기념사업회는 한 전 회장을 중심으로 매년 유적지에 기념비를 건립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전개해왔다. 또 남원동학을 알리는 데 선구자적 역할을 하고 있으며 책자발간 및 학술대회를 지속적으로 개최하고 있다. 이와 함께 전라좌도 동학농민혁명 희생영령 추모제를 진행하고 있다. 특히 남원동학농민혁명 순례 벨트는 기념사업회가 역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사업 중에 하나다. 은적암(최제우 경전집필)-교룡산성(동학농민군주둔지)-구 남원역(남원성전투지)-구 군청지(대도소설치지)-광한루원(서형칠약방)-요천(동학농민군훈련장)을 잇는 1코스와 방아치전투지-쪽뚤-깃대바위-류태홍묘-여원치-박봉양공적비 2코스 등을 관광자원으로 개발해 남원 지역 동학농민혁명사를 널리 알린다는 계획이다.

  • 기획
  • 김정엽
  • 2014.07.02 23:02

[(25) 지역별 유적지와 기념사업 - 김제] '전봉준 최후 항전지' 구미란엔 이름없는 무덤들만…

요즘은 하늘만 쳐다보는 게 일상이 되버렸습니다., 40년째 위령제를 지내오고 있어요. 한 해 한 해 무명 동학군의 무덤이 좁아지고 있습니다.지난 19일 김제 원평 구미란 유적지. 수풀을 헤치며 이곳을 오르던 최고원 김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국장과 김남근 구미마을(구미란) 노인회장은 걱정이 앞선다. 원평 동학농민혁명 역사의 현장이 날로 훼손되고 있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들기 때문이다. 김제지역 동학농민혁명사는 거의 원평 일대에서 벌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평은 동학농민군에게 전략적 요충지였다. 당시 교통의 요지기도 했고, 조선 말기 상설시장이 들어설 정도로 번화가였다. 지리적 여건도 당시 지도부들이 모여 거사를 도모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원평 김덕명 장군 생가 동남쪽 상두산 자락을 넘으면 김개남 장군의 생가가 있는 정읍 지금실이다. 두 지역의 거리는 불과 20리가 안된다. 동학농민혁명의 거두인 이들이 혁명 이전부터 교류를 가지며 미래를 꿈꿨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전봉준 장군의 활동 동선도 원평과 인연이 깊다. 원평취회를 통해 지도자로 급부상한 전봉준 장군은 이듬해 4월 원평에서 김덕명 장군의 세력을 규합, 황토현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또 전주성을 점령하기 직전 전열을 가다듬은 장소이며, 전주화약 이후 집강소가 설치된 곳이다. 전봉준 장군이 이끈 농민군의 최후 항전지도 바로 이곳 원평이다. 그러나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했던 것에 비해 원평지역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에 대한 관심은 저조한 편이다. 바로 이웃 동네 고창정읍은 전담부서까지 두고 관련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생소하게 들릴 뿐이다.△구미란구미란 전적지. 간단한 안내표지판 하나가 구미마을 뒤쪽 조그마한 야산을 가리키고 있었다. 김남근 회장의 길안내가 없었다면 이곳을 찾기도 어려웠다. 무명 동학농민군의 무덤으로 가는 길도 험했다. 무덤이 있는 곳은 해발 40여m 중턱에 지나지 않지만, 수풀을 헤치고 미끄러운 오르막을 걸어야 했다. 1년에 3번 실시하는 잡초 제거작업이 구미란 유적 관리의 전부다. 외형상 초라한 모습이지만 구미란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전봉준 장군이 이끈 농민군의 최후 항전지기 때문이다. 신영우 충북대 교수는 구미란 전투를 참혹했다고 기술했다. 이 전투에 관한 기록은 진압군이 쓴 몇 구절밖에 없기 때문에 전투상황조차 재구성할 수 없지만, 생존자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통해 본 구미란 전투는 참혹했다는 것이다. 기록에는 단지 시체 37구와 쌀 500석 조총 등을 포획했다고 적혀 있지만, 이는 일본군이 우금치전투의 희생자를 대폭 축소해 기록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는 분석이다. 이이화 역사학자도 구미란 전투의 치열했던 상황을 여러 기록을 통해 전하고 있다. 그는 우금치에서 패한 전봉준은 다시 세를 규합해 3000여명의 농민군을 원평 구미산에 집결시켜 진을 펼쳤다. 뒤따라 온 일본군과 관군 300여명은 진을 치고 대치하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새 없이 포격을 퍼부었다. 서로 진의 거리는 1000보쯤 됐다고 한다. 거리가 가까울수록 재래식 무기를 쓴 농민군은 불리했다. 뒷걸음을 칠 수밖에 없었지만, 농민군은 더욱 결사 항전하며 거리를 유지했다. 결국 저녁 무렵 관군은 먼저 산위에 올라 육박전을 벌인다. 그리고 수많은 시체가 쌓였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우금치에서 대패한 전봉준은 이 전투에서 반전의 계기를 잡고자 했으나 결과는 참담한 패배였고 재기의 기회를 다음으로 미룬 채 도피 길에 올랐다. 이 때문에 전주역사박물관에 있던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유골을 이곳에 봉안해 추모묘역 조성사업을 진행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이를 계기로 구미란 전적지에 대한 고증과 방치되고 있는 유적지에 대한 보존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그러나 일본군에게 목이 잘린 뒤 120년 동안 방치된 동학 농민군 지도자의 유골 역시 김제에서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농민군무명묘역이 있는 이곳을 성역화할 수 있는 계기 또한 무산될 듯하다.△원평집강소동학농민혁명에서 집강소가 갖는 의미는 크다. 당시 농민들이 폐정 개혁을 골자로 국가를 대신해 행정, 치안 등을 직접 도맡는 것은 파격중의 파격이다. 전주성을 점령한 농민군은 전주화약을 맺고 철수한 뒤 전라감사 김학진이 농민군으로 하여금 집강소를 설치해 치안을 유지케 했다. 사실상 농민군 조직과 활동을 인정하고 향촌사회의 자치기능을 농민군들에게 위임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농민군은 바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다시 김학진과 전봉준 장군이 전주성에서 회담을 갖고 관민상화의 원칙에 따라 대타협으로 전면 설치 운영됐다. 이에 따라 전라감영에 전라좌우도소가 설치됐고, 전라도 지역 53군에 집강소가 설치됐다. 당연히 전략적 요충지인 원평에도 집강소가 세워졌고, 현재는 민가에 설치된 집강소 자리로는 유일하다. 원평집강소의 상징적 의미는 크다. 당시 도축을 하며 재산을 모은 백정 동록개가 건립한 뒤, 동학농민혁명이 본격화되자 신분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며 김덕명 장군에게 헌납한 것으로 전해진다.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생각해보면 상징성이 매우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그러나 원평집강소는 수 십년 동안 방치 상태였다가, 올해 동학농민혁명 2주갑을 맞아서야 겨우 문화재 등록이 추진되고 있는 실정이며,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붕괴 위기에 처해 있다. △김제지역기념사업회김제지역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은 지난 1987년 모악향토문화연구회(회장 故최순식)에서 김덕명장군 추모비를 건립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고 최순식 회장이 지내온 동학농민군위령제를 지난 1994년부터 구미마을(구미란전적지) 주민들이 마을행사로 주관했다. 위령제의 명맥과 기념사업을 위해 2008년 7월, 구미마을 주민들과 함께 원평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라는 명칭으로 준비위원회를 구성했고, 그 뜻이 김제 전역으로 전해지면서 김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구성됐다. 12월 22일에 위령제와 함께 학술강연회를 진행하는 창립대회를 열었다. 2009년 3월 사단법인으로 승인되었고, 2010년 3월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 지원조례가 김제시의회에서 통과됨으로써 김제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사의 위상정립과 유적지를 보존 관리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 2009년부터 원평장터 기미독립만세운동 기념행사와 구미란전투 희생자를 위한 추모행사를 주관해오고 있으며, 지난 5월 9일, 120주년 동학농민혁명과 금구원평취회 121주년을 기념하는 다시여는 원평취회를 개최, 올해를 기점으로 김제의 동학농민혁명 문화제를 매년 5월마다 추진할 예정이다. 2013년도에 동학농민군지도자의 유골을 구미란 무명 동학농민군 묘역에 안장하기 위해 나섰지만 무산되었고, 구미란동학농민군무덤 발굴과 집강소건물 문화재 등록을 위한 절차를 진행했으나 문화재청의 공감을 얻지 못했다. 지난해에 이어 금년에도 구미란 동학농민군무덤과 집강소건물의 토지와 건물 소유주로부터 동의를 얻어서 등록문화재 지정을 재차 추진하고 있다.

  • 기획
  • 김정엽
  • 2014.06.25 23:02

[(24) 지역별 유적지와 기념사업 - 고창] '무장기포지~운곡저수지' 농민군 진격로, 마실길로 단장

고창군이 자랑하는 특별한 행정조직이 두 개가 있는데요, 하나는 고인돌계고 다른 하나는 동학농민혁명계예요.운전대를 잡은 안기성(38) 씨가 말했다. 2010년에 문화관광과 산하조직으로 편성된 동학농민혁명계는 혁명 성지화 사업, 학술홍보 사업, 유적지 답사관리 사업 등을 하고 있다. 안 씨는 여기서 담당자로 일하고 있다.지자체가 나서서 전담부서까지 두고 관련 사업을 진행한다는 이야기가 조금은 생소하게 들렸다. 바로 얼마 전에도 도내 유적지 몇 곳이 지자체의 무관심 속에서 훼손돼가고 있다는 보도가 나온 적이 있지 않았나.이강수 군수가 기념사업회 이사장도 맡고 의욕적으로 사업을 했죠. 진윤식(71) 고창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부이사장이 말했다. 지자체와 민간이 함께 혁명을 기려 나간다니, 관민상화(官民相和)가 따로 없다. 안 씨가 모는 자동차가, 큰 석조 조형물이 세워진 광장 같은 곳에서 멈췄다. 무장기포 기념지였다.△구수내 모래뜰의 혁명 기치옛날에는 구수내라고 해서, 아홉 갈래의 물이 내려오던 곳이었어요. 그 물에 쓸려 내려온 모래가 여기에 넓은 모래사장을 형성했죠.진윤식 부이사장이 두암저수지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지형이 마치 연병장 같은 곳이라, 농민군이 모여 훈련하기에 좋은 곳이었죠.기념지에는 죽창과 농민군의 모습을 형상화한 조형물과 안내판, 비석이 놓여 있었다. 한켠에는 무죄 판결을 받고 방면돼 귀향하던 중에 다시 잡혀 죽었다는 고창주라는 사람을 기리는 비석도 있었다.고부봉기 후 안핵사 이용태의 폭정에 농민들의 시름이 깊어지던 1894년 3월, 이곳에 농민군 3500여명이 모였다. 이 지역을 기반으로 큰 세력을 거느리고 있던 손화중과 전봉준, 김덕명, 김개남 등 이름 있는 동학 지도자들이 세상을 바꿔야 한다며 뜻을 모은 것이다.이것을 무장현에서 포(동학교도의 단위)가 들고 일어났다 해서 무장기포라고 한다. 해마다 이를 기념하는 행사가 열리는데, 올해 기념제에는 1000여명이 참석했다고 한다.이곳에서 전봉준은 포고문을 읽고,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말고 가축을 잡아먹지 말라, 서울로 쳐들어가 권귀를 모두 없앤다는 등의 내용이 담긴 4대 명의와 항복하는 자는 대접한다, 불충한 자는 제거한다는 등의 내용이 담긴 12개조 규율을 발표했다.충과 효를 강조하는 내용이 많다는 점으로 보아 동학군의 지도자들이 유교적 문화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는 점을 읽을 수 있다. 선비, 훈장 출신이 많았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이곳은 아직 문화재로 등록돼 있는 곳은 아니다. 안기성 씨는 지난 4월에 문화재 등록 신청을 했고, 오는 24일에 현장 실사가 있을 예정이라고 말했다.△혁명을 품은 산 여시뫼봉공음면사무소를 지나 왕제산로를 타고 동쪽으로 달렸다. 아니, 가다 서다를 반복했기 때문에 달렸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도로에 자주 멈춰선 이유는 바로 이 길 주변 군데군데에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유적들이 산재해있기 때문이었다. 왕제산로 주변에는 동학농민군이 숙영했던 여시뫼봉, 농민군이 타고 넘었던 소숙재, 과실재 등이 있다.여시뫼봉은 왕제산의 다른 이름인데, 해발 151m의 야트막한 산이다. 무장기포 당시에는 농민군의 훈련장으로 쓰이기도 했고, 황토현 전투에서 승리한 후 고창을 거쳐 남하할 때에는 주둔지로 쓰이기도 했다.또 전봉준, 김덕명, 김개남 등 동학 지도자들이 여시뫼봉 근처에 있던 김성칠 접주의 집에서 신중론을 펴던 손화중을 설득해 무장기포를 모의했다는 내용도 전해져 오고 있다.여시뫼봉의 한 쪽 자락에는 지금은 폐교된 산왕초등학교가 있다. 폐교된 후 고창군이 이를 사들였는데, 옛 교사에 귀농귀촌학교와 동학농민혁명 홍보관이 들어서 있다.지난 4월 24일에 문을 연 홍보관은 아직 상시개방이 이뤄지지는 않고 있다. 기념사업회 인력이 부족해 상주인원을 둘 수 없기 때문이다. 아직 전문 해설사도 없어, 홍보관이라는 이름이 무색하다.진 부이사장은 유품 같은 거라도 전시해놓아야 하는데 아쉽다면서 앞으로 이 건물 사무실에 사무국장과 해설사를 배치해 활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농민군 진격로와 무장읍성도로가 새로 깔려서 없어졌는데, 저쪽 둑부터 이쪽으로 쭉 이어지는 옛 길이 있었거든요. 이게 농민군의 당시 진격롭니다.무장읍성을 향해 가다가 다시 멈춰선 어느 골목길에서, 진 부이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골목길 한쪽으로 좀더 작은 길이 갈라지는데, 무장읍성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서 있었다.고창 지역의 농민군 진격로가 밝혀진 것은 전적으로 진 부이사장의 공이다.농민운동을 하다 2000년대에 동학혁명사 연구에 뛰어든 그는, 온갖 자료를 뒤지고 현장을 답사하며 진격로를 밝혀냈다. 2011년 12월에 동학 마실길이라는 이름으로 개통된 길(무장기포지~운곡저수지)은 그가 밝혀낸 농민군 진격로를 따른다.진격로는 무장읍성 안으로 바로 이어지지 않고, 읍성 바로 앞에서 꺾인다. 세몰이를 하며 진격하던 농민군은 무장읍성을 그냥 지나친 뒤 줄포를 지나 고부성으로 곧장 진격했다. 진 부이사장은 이를 처음부터 고부성-전주-서울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있다.농민군이 무장읍성을 점령한 것은, 황토현 전투 승리 후 홍계훈의 경군이 온다는 소식에 진로를 돌려 고창무장 지역으로 남하하면서다.사적 제346호인 무장읍성은 현재 그 성곽과 동헌 복원 공사의 마무리 작업이 진행 중이다.■ 손화중, 마애불 배꼽서 '비결 훔치다'- 고창 지역 동학혁명 관련 유적 총 21곳고창군에 따르면 고창 지역에는 동학농민혁명에 관련된 유적이 총 21곳이 있다. 사적 제145호 고창읍성은 모양성이라는 이름과 답성놀이로 잘 알려져 있다. 조선 단종 원년(1453)에 축조됐다는 설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다.1894년 4월 7일 황토현 전투에서 승리한 농민군은 다음날 고창을 점령했다. 농민군은 이 때 고창읍성에 들어가 갇혀 있던 동학교도 7명을 구출하고 관아 시설을 파괴했다.농민군은 또 흥성에도 들어가 관아를 점령하고 접주 자치구를 설치했다. 흥덕면에 있는 흥성 관아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77호로 지정돼 있다.보물 제1200호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은 고려시대 혹은 조선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가 15.6m에 달하는 국내 최대의 마애불상이다. 바위에 새겨져 있는 이 불상의 배꼽에 신비한 비결이 들어있고, 이 비결이 세상에 나오면 한양이 망할 것이라는 전설이 있었다. 1892년에 대접주 손화중이 이를 탈취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이 사건 이후 세상이 바뀔 것을 바라고 동학에 입도하는 이들이 늘어났다고 한다.한편 고창 지역은 손화중 포의 세력권이었던 만큼 손화중의 거점도 여러 곳에 있었다. 현재는 괴치 도소와 양실 도소 두 곳이 전해지는데, 안타깝게도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고창은 또 전봉준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그간 고부, 태인, 전주 등 여러 설이 분분했지만, 이기화 전 고창문화원장을 비롯한 연구자들이 전봉준의 출생지가 고창 죽림리 당촌마을임을 밝혀냈다. 전봉준이 태어난 집은 고창읍 죽림리에 복원돼 있는데, 군과 기념사업회는 하반기에 문화재 등록을 신청할 예정이다. 바로 옆에 전봉준 장군 생활전시관이 자리해 있다.

  • 기획
  • 권혁일
  • 2014.06.18 23:02

[(23) 지역별 유적지와 기념사업 - 정읍 ②] 기념제를 축제로 승화…유적지 세계유산 등재 박차

올해 동학농민혁명 2주갑을 맞아 혁명의 중심지로 꼽히고 있는 정읍지역에서는 여러 기념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전국에서 가장 먼저 기념문화제를 시작했으며, 관련 유적지가 곳곳에 산재해 있어 역사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여지도 가장 많은 곳이 정읍이다. 실제 정읍에 기반을 둔 단체들을 중심으로 혁명 성지에 걸맞은 위상정립과 지역민들의 자긍심 고취에 적극 나서고 있다. ㈔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와 동학농민혁명유적보존회, 정읍시 동학농민혁명 선양팀의 그동안 활동을 통해 정읍에서 동학농민혁명이 어떻게 기려지고 있으며, 향후 과제는 무엇인지 살펴보았다.△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정읍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이사장 이갑상이하 사업회)는 1968년 갑오동학혁명 기념문화제를 시작으로 47년째 혁명의 역사적 의의와 정신을 기리고 있다.기념문화제는 2008년 황토현 동학축제로 명칭이 바뀐 뒤 다시 2012년부터 황토현 동학농민혁명기념제로 이름 지어 내려오고 있다.올해 행사는 세월호 참사로 인한 희생자의 슬픔을 함께하는 의미에서 이벤트성 프로그램을 지양한 채 기념식과 위패봉안례, 전시 등 공식행사 위주로만 진행됐다.기념식에서는 전국유족회, 동학농민혁명 관련 단체 회원, 천도교 관계자를 비롯한 시민 등 참석한 가운데 제4회 동학농민혁명대상 시상식이 함께 열렸다.대상은 평생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발굴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던 고(故) 표영삼 선도사에게 수여됐다.사업회는 앞으로 시민단체로서의 활동영역을 넓히기 위해 지역사회 현안사업에 적극 동참할 계획이다.이 단체는 다음달 말 제16기 전봉준 역사캠프를, 오는 10월에는 1박 2일 일정으로 제32차 문화유산답사에 나설 계획이다. 11월에는 역사의 길 걷기가 예정돼 있다.혁명사를 정리한 서적 발간과 혁명 정신 알리기 사업에도 박차를 가한다. 현재 정읍지역 근현대 민족운동사 발간을 준비 중이며, 무형문화재 및 관련 기록물의 유네스코 등재에도 힘을 기울일 계획이다.이갑상 사업회 이사장은 황토현동학농민혁명 기념제의 내실화를 꾀하는 한편 혁명 정신과 의의를 시민들에게 알릴 수 있는 강좌 개설, 유적지 답사 등 문화교육사업에도 힘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동학농민혁명유적보존회1996년 설립된 후 2008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에 나선 동학농민혁명 유적보존회(이사장 김동길 이하 보존회)는 황토현동학농민혁명 기념제, 고부봉기 재현 등 각종 동학 관련 행사에 빠지지 않고 발길을 놓았다.보존회는 혁명을 기리는 사업 뿐만 아니라 혁명의 발자취와 유적 등을 정리하는 일에도 앞장서왔다.특히 농민군의 최초 집결지로 꼽히는 정읍 말목장터의 역사적 의의를 부각시키는데 주력했다.조선시대 정읍지역의 큰 시장터인 말목장터는 1894년 1월 일어난 고부농민봉기 당시 농민군들이 주둔해 있던 곳이다. 이 일대는 2001년 전북기념물(제110호)로 지정됐으며, 말목정등 기념물이 건립돼 있다.이 밖에도 보존회는 혁명을 논할 때 그 주체가 되는 농민군의 역할에 대한 조명이 부족하다는 인식 아래 혁명의 처음과 끝을 함께한 농민들의 투쟁 방법과 정신을 기리는데 힘썼다.또한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제정을 위해 관련 기관과의 연대에도 주력했다.보존회는 앞으로 바뀌는 국정교과서에서 고창 무장지역을 혁명의 시작으로 다루려는 것에 대해 적극 반대 입장을 표명한다는 입장이다.김동길 보존회 이사장은 혁명의 숨은 주인공인 무명 농민군의 역할에 대해 조명하는 한편 잘못된 역사교과서를 바로잡는데 혼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정읍시청 동학선양팀정읍시는 동학농민혁명 2주갑을 맞아 거둔 가장 큰 성과로 황토현전적지 부지에 추진되는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을 꼽았다.올해부터 2017년까지 국비 388억원과 부지 95억원 등 모두 480억원을 들여 정읍시 덕천면 황토현전승지 33만5826㎡ 부지에 기념공원이 조성될 예정이다.기념공원에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숭고한 넋을 추모하고 정신계승을 위한 희생자 공동묘역과 위령탑 등 추모시설, 연구소와 연수동 등 연구시설, 동학농민혁명을 체험하고 교육할 수 있는 교육시설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특히 이 사업이 완료되면 정읍지역이 동학농민혁명의 메카(Mecca)로 우뚝 서게 됨은 물론 전국화와 세계화의 중심이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또한 주변 유적지 및 관광지와 연계돼 지역 관광산업의 활성화에도 크게 기여할 전망이다.공원이 들어서게 될 황토현전적지는 1894년 4월 7일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치룬 최초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전승지이며, 1963년 10월 3일 공식적으로 혁명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기념시설물인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이 건립돼 있다.1981년 12월 10일 국가문화재 사적 제295호로 지정됐고, 1987년 이후에는 전봉준 동상과 사당인 구민사 등을 비롯하여 기념시설이 조성됐다.또 2004년에는 동학농민혁명 기념관이 맞은 편에 들어섰고 2010년부터 특수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상주하고 있다.시는 기념공원 조성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 된 고부봉기를 상징하는 동학농민혁명 최초 봉기탑도 세울 계획이다.시는 18921893년 진행된 교조신원운동과 1893년 11월 결의된 사발통문 거사계획을 거쳐 결행된 1984년 1월 고부관아 점령은 이후 무장기포와 백산대회를 통해 더욱 조직화됐다며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쳐 혁명이 시작됐다고 말했다.△지역성 탈피, 전국세계화 과제이갑상 동학농민혁명 계승사업회 이사장은 각종 기념사업을 추진할 때 정읍시와 민간단체 사이 원활한 의사소통이 이뤄지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고 지적했다.그는 시는 과거처럼 민간단체 위에 군림하려 해서는 안 된다며 동등한 입장에서 동학농민혁명의 정신과 역사적 의의를 기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그는 이어 동학농민혁명 2주갑을 맞아 정읍이라는 지역성을 탈피하고 전국화, 세계화를 지향하는 기념사업으로 거듭나야 한다며 이를 위한 관련 기반 조성을 위해 무형문화재혁명 관련 기념물 유네스코 등재에 힘쓰겠다고 덧붙였다.역사학계 역시 정읍지역의 단체간 선명성 경쟁과 관 주도의 기념사업에 우려의 시선도 나오고 있다. 지역이기주의에 바탕을 둔 역사적 해석이나 기념사업은 전국화세계화로 향해가는 동학농민혁명에 큰 걸림돌이 될 것으로 보는 것이다. 정읍을 놓아야 정읍이 더욱 동학농민혁명의 중심지로 우뚝 설 수 있다는 역사학자들의 말을 새겨볼 일이다.

  • 기획
  • 최명국
  • 2014.06.11 23:02

[(22) 지역별 유적지와 기념사업 - 정읍 ①] 동학농민혁명 첫 함성 울려퍼진 곳…유적지 '전국 최다'

동학농민혁명의 중심지였던 정읍지역은 혁명의 발자취가 담긴 유적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농민 수탈의 상징이 되고 있는 만석보와 혁명을 계획한 사발통문 작성지, 관군을 맞아 대승을 거둔 황토현 전적지 등이 당시 모습을 떠올리게 하고 있다.특히 동학혁명의 함성이 가장 힘차게 울려퍼진 곳인 정읍은 전국적으로 가장 많은 유적지와 혁명을 기리는 기념탑비가 건립돼 있기도 하다.혁명의 산실이자 혁명의 진행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정읍지역은 동학농민혁명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정읍시에 따르면 정읍지역 동학 문화재로는 국가에 의해 3건(전봉준 고택황토현 전적지백산성), 전북도에 의해 3건(만석보 터말목장터와 감나무고부관아 터)이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이와 함께 정읍시는 유적지의 관광자원화로 지역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도내 비지정 문화재인 유적지 11곳과 유물 3건의 문화재 지정 추진을 논의하고 있다.유적지 11곳은 전봉준 단소, 원평 농민군 무덤집강소, 대둔산 최후항전지, 태인 전투지, 삼례 봉기 터, 전봉준 피체지, 김개남 고택 터, 은적암, 전봉준 생가 터, 초록바위다. 유물 3건은 대원군 효유문, 종리원사부동학사, 정읍 순교약력이다.이에 동학농민혁명 2주갑을 맞아 정읍지역의 혁명 유적지를 찾아, 그 역사적 의미와 시사점에 대해 짚어본다. 답사에는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이 동행했다.△수탈의 상징, 만석보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된 만석보는 정읍천과 태인천이 합류하는 동진강 상류에 세워졌다. 1892년 고부군수 조병갑은 인근에 이미 제 기능을 다하던 예동보가 있었음에도 군민들을 강제로 동원 만석보를 쌓았다.특히 조병갑은 보세(洑稅)라 하여 보의 윗논은 1마지기에 2말, 아랫논은 1말씩 징수해 농민들의 원성을 샀다. 이에 전봉준, 김도삼, 정익서 등 고부 군민들은 1893년 11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고부관아에 수세감면을 진정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분노한 농민들은 전봉준의 지도 아래 1894년 1월 10일 고부관아를 들이쳤다.현재도 만석보는 조병갑의 악랄한 농민 착취 등 수탈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다.넓디 넓은 배들평과 만석보에 서린 농민군의 땀과 눈물은 역사의 물줄기를 따라 현재까지 유유히 흐르고 있다.△동학혁명 모의탑농민군 위령탑정읍시 고부면에 위치한 동학혁명 모의탑은 1969년 사발통문 거사계획 참여자 후손들이 중심이 돼 만든 것이다. 이 탑은 인근에서 혁명을 계획하고 실행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모의탑 옆면에는 사발통문과 결의문이 새겨져 있다. 또 후면에는 사발통문 서명자 20명의 생몰연대와 그 후손들의 거주지 등이 기록돼 있다.이 사발통문은 1968년 사발통문 서명자의 한 사람인 송국섭의 아들 송기태가 여산 송씨 족보를 보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으로, 고부농민항쟁이 우발적 감정의 폭발이 아닌 철저한 계획 아래 진행됐음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현재 원문은 송씨 일가에서 보관하고 있다. 모의탑 인근에는 실제로 사발통문을 작성한 곳이 자리하고 있다. 옛 모습은 찾을 길이 없지만 혁명 거사를 준비한 곳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가까운 곳에는 1994년 세워진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이 있다. 사발통문 모양의 둘레석안에 5m 크기의 주탑과 주탑을 둘러 싼 1~2m 크기의 보조탑 32개에 각각 이름 없이 사라져 간 농민군을 상징하는 얼굴과 당시 무기로 사용됐던 죽창 등이 조형물로 조성돼 있다. 밥그릇 모양의 조형물은 당시 농민군이 들고 일어서게 된 이유로 꼽히는 모두가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을 표현한 듯 했다.△말목장터와 감나무조선시대 정읍지역의 큰 시장터인 말목장터는 1894년 1월 일어난 고부농민봉기 당시 농민군들이 주둔해 있던 곳이다. 이 일대는 2001년 전북기념물(제110호)로 지정됐으며, 말목정등 기념물이 건립돼 있다.농민봉기 당시 전봉준은 통문을 돌려 갑오년 1월 9일 저녁 농민들을 이곳에 모이게 했다고 한다. 당시 여기 모인 500여명의 농민군은 고부관아로 쳐들어갔다. 그리고 옥문을 열어 억울하게 갇혀 있던 군민들을 풀어주는 한편 고부군수 조병갑의 악정에 조력한 자들을 소환하거나 잡아들였다.여기 있는 감나무는 당시 집결해 있던 농민군들이 잠시 기대어 쉬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높이 21m, 둘레 1.8m이며 수령은 180년 정도인 이 감나무는 현재 동학농민혁명기념관으로 옮겨져 있다.△황토현 전적지동학혁명기념탑정읍시 덕천면에 자리한 황토현 전적지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이 관군을 맞아 대승을 거둔 곳이다. 또한 정부 차원에서 최초로 동학혁명을 기린 기념유적인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이 세워진 곳이기도 하다.1963년 세워진 탑은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주도로 건립됐다.이전까지 동학란으로 치부되다가 당시 혁명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함으로써 혁명사 연구의 획기적 계기를 마련했고,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국민적 인식 변화를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매우 크다.황토현 전적지의 한 높다란 언덕에 세워진 탑에서는 정읍지역의 혁명 유적지가 손에 잡힐 듯이 보였다.기단부에는 甲午東學革命紀念塔이라는 글이, 뒷면에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와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되면 못가보리라는 구전민요가 새겨져 있었다.탑을 내려오면 인근에는 전봉준을 기리는 사당과 전투 중 전사한 농민군의 위패가 보관된 구민사가 자리하고 있다. 어지럽던 세상을 구하기 위해 일어섰다 한 줌 흙으로 사라진 농민군의 혼이 면면이 흐르는 듯 했다.동행한 이병규 박사는 황토현 전적지 인근은 국가 차원에서 동학혁명을 기렸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장소라며 최근 정부에서 이 일대를 기념공원으로 조성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전봉준 고택과 부모묘정읍시 이평면에 자리한 전봉준 고택은 사적 제293호로 지정돼 있다. 1890년대 당시 일반적인 농가의 모습을 재현한 고택은 정면 4칸, 측면 1칸이다. 전봉준이 28세 때인 1878년에 지워진 고택은 1894년 안핵사 이용태에 의해 일부 소실됐다가 1974년 보수했다.고택 옆에는 초가로 지은 관리동이 있고, 인근에는 당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우물이 자리하고 있다. 전봉준은 이곳에서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친 것으로 알려졌다.인근에는 전봉준 단소가 있다. 전봉준의 가묘인 이곳에 자리한 단비에는 갑오민주창의통수 천안전공 봉준지단이라고 쓰여있다. 1954년 천안 전씨 문중에서 말들었고, 단비명은 사학가 김상기 박사가 이름 지었다. 전봉준과 비를 세운 이들의 행적을 적은 비가 가득 세워져 있어 어지러울 정도였다.여기서 150m 가량 떨어진 곳에는 전봉준 부모묘가 있다.△유적지 체계적인 관리보전 시급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은 혁명 정신을 널리 구현하기 위해선 유적의 체계적인 관리와 보전이 급선무라며 특히 고부관아터의 경우 역사적 의의가 큰 만큼 국가사적으로 지정돼야 한다고 말했다.그는단지 거쳐가는 곳이 아닌 오래 머무를 수 있는 유적지가 되려면, 유적 하나하나에 특색 있는 이야기를 입혀야 한다면서 이로써 관광자원화가 된다면 많은 관광객들이 정읍을 찾게 될 것이다고 말했다.그는 이어 동학혁명의 본고장인 정읍지역 유적의 역사적 가치와 시사점을 유지계승하기 위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차원의 선양 사업이 좀 더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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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명국
  • 2014.06.04 23:02

[(21) 동학 연구 어디까지 왔나 - 성과와 과제] "100주년 이후 답보상태…120주년 맞아 다시 꽃 피워야"

△폭발적 성과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고 올해로 120년이 되었다. 그동안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인식은 역사의 발전과정에 호응하여 변화되어 왔다. 그리고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연구도 그러한 인식의 변화에 짝하여 크게 발전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 직후부터 일제강점기는 동학란이라는 기본적인 인식위에서 연구가 이루어졌다.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그리고 선구적인 연구인 김상기의 동학과 동학란에서 그러한 흐름을 확인할 수 있다. 해방 이후 1950년대를 거치면서 반봉건 반외세의 기조위에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1958년 김용섭의 〈전봉준공초의 분석〉이 이러한 흐름을 가지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이는 또한 내재적 발전론에 따른 근대사의 실재적 모습을 찾는 연구가 한국사 연구의 핵심과제로 부각하면서 특히 각광을 받게 되었다. 1980년대 민중운동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가하면서 역사발전의 주체로서 민중이 부각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아래 동학농민혁명을 주도한 동학농민군이 바로 민중의 실재적 모습이라는 주장이 큰 관심을 받게 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이 바로 민중임을 증명하는 구체적 연구보다는 선언적 의미의 연구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100주년이 되는 1994년을 전후하여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동학농민혁명의 사회경제적 배경, 주체세력, 조직으로서 동학교단의 역할, 동학농민군의 이념, 동학농민군의 지향 등 다각적인 관점에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은 지속되지 못하였다. 100주년을 기점으로 폭발적인 연구 성과가 도출되었으나 이후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고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연구는 한순간에 시들어버렸다. 그러한 흐름이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 2004년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국가적 차원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지고, 2010년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설립되어 정부 차원에서 기념사업을 전개하게 되는 상황이 만들어졌지만 실상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연구는 답보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학제간 연구로 통섭적 접근 중요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단 1년 동안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한국 역사발전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제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을 맞이하여 새로운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의 전환이라는 바탕위에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연구가 획기적인 진전이 이루어져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보는 인식의 폭을 확장하는 것이다. 첫째, 학제간 연구가 절실하다. 그동안의 연구는 역사적 사건으로서 역사학이라는 관점에서 주로 연구되어 왔다. 그러기 때문에 역사적 관점에서 벗어날 수 없고 연구 성과도 이에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철학, 종교학,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민속학. 인류학, 심리학, 지리학 등 새로운 학문적 관점에서 동학농민혁명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별개의 연구가 아니라 종합적 연구 즉 통섭의 관점에서 동학농민혁명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둘째, 1894년이라는 시간, 조선이라는 공간에서 있었던 모든 구성원의 관점에서 동학농민혁명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농민군 주도세력, 농민군을 구성하고 있은 수많은 농민들, 동학농민군의 가족, 동학농민군 토벌에 참여한 토벌군, 동학농민군 토벌에 직접 참여한 민보군, 동학농민군을 인정하지 못하는 유생, 조선의 중앙관료, 조선의 지방 관리와 아전, 국왕인 고종과 대원군 그리고 민비, 동학농민군을 토벌한 일본군, 그리고 최시형과 손병희로 대표되는 동학 교단세력 등 다양한 세력들이 1894년 조선에 존재하고 있었다. 각각의 입장에서 동학농민혁명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에 대해 어떻게 대응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이렇게 했을 때 동학농민혁명의 실체에 더 가깝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갑오개혁 등 통시적 연구 필요셋째, 철저하게 지역적 관점에서 동학농민혁명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의 연구는 전봉준과 중심세력이 어떻게 동학농민혁명을 끌어가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 때문에 전국적으로 있었던 동학농민혁명이 제대로 인식되지 못하고 전라도 일부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인식되는 한계를 가져왔다. 최근에 와서 지역적 관점을 견지하고 이루어지는 연구가 조금씩 나오고 있다.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각각의 지역에서 다양한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지역을 구성하는 사람들이 달랐고,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방식이 달랐고,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 주력과 연결고리가 대부분 취약했으며, 동학교단과의 관계도 지역마마 큰 차이를 보였다. 때문에 이렇게 다른 조건으로 인해 각 지역마다 동학농민혁명의 양상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지역의 관점에서 연구가 이루어지고 전국적 차원에서 이를 종합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넷째, 통시적 관점의 연구가 필요하다. 우선적으로 동학농민혁명과 갑오개혁과의 관련성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가 절실하다. 1894년이라는 시간위에서 동학농민혁명이 원인이 되고 갑오개혁이 결과가 되었다고 볼 수 있는 측면이 있는데, 이에 대한 실증적 연구가 필요하다. 그리고 1894년을 기점으로 이전과 이후를 비교하는 종합적이고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물론 그러한 작업이 지극히 어려운 작업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러한 연구가 이루어질 때 진정으로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상이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 1894년 이전의 사회구조 및 경제적 상황과 1894년 이후 사회구조 및 경제적 상황을 비교해 봄으로서 동학농민혁명이 한국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그리고 어떤 위상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흔히 동학농민혁명이 3.1운동, 독립운동, 4.19혁명, 5.18광주민주화운동, 6.10항쟁으로 이어졌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는 단지 선언적 측면이 강하다. 이에 대한 논증적 연구도 반드시 필요하다. 이러한 연구가 논증적으로 확고하게 이루어진다면 대한민국의 시작을 1919년 임시정부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세계혁명과 비교 연구해야다섯째, 동아시아적 관점에서 동학농민혁명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은 청일전쟁을 야기했고,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동아시아의 패권을 가지고 된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상의 연구가 진행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동아시아적 관점에서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 그리고 삼국간의 관계를 파악하는 연구가 필요하다. 그리고 여기에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과 120년 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동아시아적 관점에서 깊이 있는 연구를 통해 현재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도록 연구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여섯째, 세계사적 관점에서 세계의 혁명과 비교하는 연구가 필요하다. 이는 동학농민혁명을 세계화하는 데도 반드시 필요하다. 동학농민혁명을 세계의 혁명과 비교하여 연구하는 데는 주체로서 농민, 조직으로서 종교(동학), 성격으로서 반봉건 ,반외세, 자치(집강소) 등의 관점을 가지고 비교 연구할 필요가 있다. 주체로서 농민은 독일농민전쟁, 중국의 태평천국운동, 동유럽의 농민반란, 라틴아메리카의 농민반란 등이 이에 해당하며, 조직으로서 종교는 중국의 태평천국운동, 독일농민전쟁이 이에 해당하며, 성격으로서 반봉건은 프랑스혁명, 러시아혁명 등이 이에 해당하며, 성격으로서 반외세는 필리핀, 베트남, 싱가폴의 반외세운동과 미국독립선언이 이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격으로서 자치(집강소)는 세계사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세계의 혁명과 비교연구를 통해 동학농민혁명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앞으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연구의 방향은 세계사적 보편성을 추구한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증명하는데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통해 한국의 미래 비젼을 제시해야 하며, 세계사의 미래 비젼을 제시할 수 있는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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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5.28 23:02

(20) 동학 연구 어디까지 왔나 - 자료 현황, 1996년 '사료총서' 발간, 동학혁명 자료 총망라

△ 〈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 연구사에 획기적 진전 디딤돌역사연구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사료의 확보이다. 사료기록을 가지고 역사적 사건을 재구성하거나 새롭게 역사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역사적 사건으로서 동학농민혁명도 사료의 확보를 통해 연구의 발전을 가져왔다.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관심은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기점으로 크게 증가하였고 이러한 분위기 하에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자료들이 새롭게 발굴되었다. 새롭게 알려진 자료들은 동학농민혁명 연구의 질적 성장을 가져왔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획기적인 일은 이렇게 새롭게 발굴된 자료들을 총망라하여 자료집을 발간한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이하 사료총서)이다. 1996년 발간된 이 사료총서는 편자 역사문제연구소동학농민전쟁백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발행인 이종학, 발행처 사운연구소로 되어 있다. 이 자료집이 발간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이 자료집의 편찬은 역사문제연구소(당시 소장 이이화)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는데, 재정적으로 어렵게 됐다. 이 소식을 알게 된 사운연구소 이종학 소장이 비용을 부담하기로 하여 사료총서를 발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편집위원으로 표영삼(천도교 상주선도사), 정창렬(한양대 사학과 교수), 신용하(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이이화(역사문제연구소 소장), 조광(고려대 사학과 교수), 신영우(충북대 사학과 교수), 강창일(배재대 교수), 이해준(공주대 사학과 교수), 이종범(조선대 사학과 교수), 우윤(서강대 강사), 박맹수(영산 원불교대 교수), 왕현종(연세대 강사) 등이 참여하였다(당시 직함). 총 30권으로 구성된 사료총서에는 동학사 등 동학농민군으로 참여한 사람들이 남긴 기록, 수록, 취어 등 조선 관리들의 공문서, 양호초토등록, 양호우선봉일기 등 토벌군의 공문서, 오하기문, 나암수록, 석남역사, 의산유고 등 유생과 민보군의 기록, 동경대전, 용담유사, 갑오동학란 등 동학 천도교 기록, 일본외무성자료, 일본신문자료 등 일본기록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사료총서에는 당시까지 발굴된 거의 모든 동학농민혁명 관련기록들이 총망라되었다. 사료총서의 발간은 동학농민혁명 연구의 획기적인 진전을 가져왔다. 여기에 역사발전의 주체로서 민중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면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연구는 많은 연구자들의 핵심과제가 되었다. 결국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주제는 한국사의 주제 중 단일주제로는 가장 많은 연구결과물이 도출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연구결과물이 축척되어, 동학농민혁명은 반봉건 민주화, 반외세 자주화, 역사발전의 주체로서 민중의 등장과 집강소를 통한 자치의 실현, 한국근대사의 방향을 결정하고 동아시아의 세력재편, 한국민족민주운동의 시발점이라는 역사적 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한국사에서 위상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사료총서의 발간이라는 기본적 토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종합지식정보시스템 구축사료총서의 아쉬움은 여기에 수록된 자료가 한문이나 일본어로 된 원문이라는 점이다. 이 때문에 사료총서의 이용은 일부 전문가들만이 할 수 있었다. 초서 등으로 된 일부자료는 전문가들도 보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또한 사료총서가 30권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으로 이를 구입하는데 많은 비용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한 것이 바로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의 동학농민혁명종합지식정보시스템(www.e-donghak.go .kr)의 구축이다.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고 이 법에 따라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원회가 설치되어 운영되었다. 위원회에서는 많은 예산을 투여하여 동학농민혁명종합지식정보시스템을 구축하였다. 이 시스템은 자료마당, 연구논저, 증언록, 연표, 일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주목되는 공간은 자료마당이다. 여기에는 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 30권에 수록된 자료에 대하여 원문이미지, 원문, 번역, 해제 등을 볼 수 있다. 일부 자료는 번역이 진행중인 것도 있지만 일본어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자료가 수록되어 있다. 다시 말해 인터넷만 연결되면 국민 누구나 동학농민혁명 관련 자료를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사이트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운영하는 역사정보통합시스템에도 연계되어 운영되고 있다. 현재는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를 승계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운영하고 있다. 기념재단은 계속해서 이 시스템에 대한 업데이트 작업을 하고 있으며,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를 발행하여 국민들이 손쉽게 동학농민혁명 자료에 접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국역총서는 2013년까지 11권이 발행되었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어려운 한문 자료를 이렇게 누구나 쉽게 볼 수 있고 접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놓았는데, 이를 활용하여 연구를 진전시킨 결과물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에 조금만 관심이 있다면 여기에 탑재된 번역된 자료를 활용하여 매우 의미 있는 연구를 진행할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을 맞이하여 새로운 연구자들이 많이 나와서 동학농민혁명 연구의 질적 심화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발굴된 새 자료, 꿰어야 보배 1996년 사료총서가 발간된 이후 새롭게 발굴된 동학농민혁명 관련 자료가 매우 많다. 그러나 아직까지 자료집으로 만들어지지 못하고 있다. 새롭게 발굴된 자료는 고흥군교구역사, 남원군동학사, 순교약력, 남원군종리원, 천도교임실교사, 구례군교구사, 천도교 장흥 동학혁명혈사, 동학난중기 등 동학 교단자료, 학초전, 김산 소모사실, 임동호약력 등 지역 수집자료, 창계실기, 동와유고, 겸산집, 둔헌유고 등 유생 문집자료, 미나미고시로 자료, 동학당상황 등 일본군자료, 國民新聞, 讀買新聞, 福岡日日新聞 등 일본신문 자료, 동학농민혁명 유족등록 과정에서 발굴된 자료, 그밖에 전봉준실기, 동학당 폭동, 원려당유사, 순도자명단 등 많은 자료들이 새롭게 발굴되었다. 여기에 일본 공문서관 자료, 일본 방위성자료, 그리고 일본 국회도서관 자료 등이 계속해서 발굴되고 있다. 이렇게 새롭게 발굴된 자료들은 〈동학농민혁명 자료총서〉로 발간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분량은 대략 20권 정도일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자료총서에 수록된 자료들은 번역과정을 거쳐 국역총서라는 형태로 발간되고, 이 모든 자료는 동학농민혁명종합지식정보시스템에 탑재되어 국민들이 누구나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난망하다. 무엇보다 정부의 예산지원이 절실하다. 1996년 자료집 발간은 민간인들이 자발적으로 발간하였다. 그런데 특별법이 제정되고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설립된 상황에서 자료집을 발간하지 못하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동학농민혁명의 세계화는 자료집 발간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료집을 발간하여 번역을 하고 이를 바탕으로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특히 동학농민혁명이 가지고 있는 세계사적 보편성에 대한 연구가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이를 통해 다함께 잘 사는 세상, 화해와 상생 그리고 평등을 꿈꾼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확인할 수 있는 연구가 이루어진다면 이것이 바로 동학농민혁명을 세계화하는 초석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료집(자료총서) 발간이 시급한 과제이다.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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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5.21 23:02

(19) 동학 연구·활동가들 - 신명국 이사장 "공동체 의식 되살릴 수 있는 기념사업 고민해야"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전후해 당시 사건을 새롭게 조명하고 기리는 작업들이 민간차원에서 활발히 이루어졌다. 그 선봉에 섰던 곳이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념사업회(이사장 이영호, 약칭 동백사)다. 100주년을 앞두고 1992년 창립된 이 단체는 학술·출판사업, 문화예술사업, 기념조형물 건립사업 등을 통해 갑오년의 역사를 곧추 세우고 대중들과 호흡해왔다.학계 전문가·언론인·시민활동가·종교인 등이 모여 탄생시킨 동백사는 20여년간 시민사회단체 활동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으며, 현재 전국 각지의 동학 관련 20여개 단체가 태동할 수 있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실제 동백사에서 작업했던 그간의 편찬 자료와 기념조형물, 문화예술사업들은 100주년 이후 지금까지도 학계의 연구와 기념사업의 교과서가 되고 있다는 평을 받는다. 동백사의 중심에 섰던 대표적 인사 중 한 분이 신명국 원광학원 이사장(63,옛 이름 신순철)이다. 그는 동백사 출범의 산파역이었으며, 10여년간 사무처장·사무총장 등으로 활동했고, 현재도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학계와 현장을 아우르며 20여년간 ‘동학’을 사랑해온 신 이사장을 지난 8일 만나 동학농민혁명을 기리는 일이 왜 중요하고, 어떻게 기려야 하는지 들어보았다.신 이사장은 이날 인터뷰에서 동학농민혁명의 그림을 바꾸고, 기념사업의 상징적 공간을 만들자는 데 힘을 줬다. 또 민간차원에서 기념사업의 중심적 역할을 해왔던 동백사의 해체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제안했다.-100주년기념사업회가 어떻게 발족됐습니까.“1989년은 프랑스혁명 200주년이 되던 해입니다. 당시 국내에서 이를 기념하는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결성됐습니다. 80년대 중반부터 준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전북에서 한국근대사의 분수령이 됐던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기리는 움직임이 없었습니다. 〈문화저널〉에 ‘동학농민혁명 백주년을 준비하자’는 기고를 했으며, 전북대 호남사회연구회가 정읍에서 세미나를 가지며 분위기가 조성됐어요. 이후 91년 문화계·언론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기념사업회 발기인 모임이 결성됐고, 이듬해 준비위원회 발족을 거쳐 창립대회를 가졌습니다. 한승헌 변호사·조용술 목사·김삼룡 전 원광대 총장이 공동 대표를 맡아주셨습니다.”-개인적으로 동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 혹은 배경이 있다면.“87년 민주화운동으로 이룬 정치적 민주화가 우리사회를 변화시킬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원불교 전공자로서 원불교 대종상이 추구하는 개벽으로 연결될 것이라는 믿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희망과 기대는 대선에서 여지없이 깨졌고, 며칠간 울었습니다. 사회구조의 변화가 그리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인간으로서 한계를 느꼈습니다. 학교 강의만 할 수 없어 ‘동학’으로 도망을 간 겁니다.”-10여년간 동백사 사무처장, 사무총장 등을 맡으며 여러 활동을 주도하셨는데, 동백사의 성과를 꼽는다면.“제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동학란으로 배웠습니다. 5.16혁명 이후 동학혁명으로 정리됐지만, 정부는 국가사업으로 키우지 않고 정읍사건으로 묶었습니다. 동백사 발족 당시 기업들은 협찬을 꺼렸고, 교수들 조차도 발기인 참여를 꺼려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반정부운동으로 보고 뒷감당이 어렵다는 이유에서였죠. 동백사만의 역할은 아니지만, 시민운동 차원으로의 확대와 특별법 제정을 통해 이런 의식들을 불식시키는 데 일조했다고 봅니다. 또 연구사업을 많이 했습니다. 당시 내부적으로 연구분야에 편중되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었지만, 국내외 학술대회 개최와 동백사에서 펴낸 여러 권의 책들은 동학 연구에 큰 자산이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그런 활동과 성과에도 불구하고 동백사의 발전적 해체를 제안했다고 들었습니다.“이사회에서 제안했는데, 농담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진지하게 고민하고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설립된 만큼 재단으로 힘을 모아줄 필요가 있습니다. 정부의 돈으로 기념사업을 할 경우 방향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가 기념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고, 방향을 잘못 잡더라도 시간이 흐르면서, 혹은 견제를 통해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재단에서 잘 해야하고, 그래야 통합효과가 있겠지요.”-2주갑, 어떻게 기려야 하겠습니까. 우선 연구부문을 짚어주시죠.“동학농민혁명 2주갑은 연구 쪽에서도 의미있는 해가 돼야 합니다. 그동안 연구가 전봉준 중심의 호남 주력부대 위주로 연구됐습니다. 이 부문은 어느 정도 다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이 전국적인 봉기인 데, 다른 지역의 연구는 아직도 초보적 수준입니다. 황해도에서는 전북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동원됐고, 서산·태인 홍성 등 충청 내포지구 역시 주력 못지 않게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입니다. 호남의 주력들이 체포된 후에도 전남 장흥, 경북 영해단, 충북 청주 등에서 이듬해 7월까지 싸운 기록이 나옵니다. 북한지역의 연구는 미답지 입니다. 지역연구로 혁명의 그림이 덧붙여져야 합니다. 그래서 1930년대 김상기 박사가 고부봉기에서부터 우금치 패퇴로 끝낸 혁명의 그림을 다시 그려야 합니다. 박정희 정권에서 호남 사건으로 묶은 혁명의 원판을 복원해야 합니다. 지역 연구로의 확대와 함께, 세계사적 의미를 조명해야 합니다. 중일관계 혹은 대국사만이 아닌, 아일랜드·필리핀 등 작은 국가들의 농민전쟁과 비교하는 등 세계사적 안목에서의 시야 확대가 필요합니다. 세계사에서 농민이 중심이 돼 근대화를 이룬 국가는 없었습니다. 동학이 그랬다면 우리의 오늘은 어땠을까 생각해봅니다.”-기념사업이 왜 필요하며,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는 게 바람직한지.“자라나는 후배들에게 어떻게 보여줘야 하느냐가 기념사업입니다. 그것은 교육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교육은 어떻습니까. 가정에서부터 경쟁으로 가고, 친구도 경쟁 상대인 데, 어떻게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쳐라고 할 수 있으며, 친구에게 구명조끼를 벗어줄 수 있겠습니까. 공동체 의식을 되살릴 수 있는 기념사업이 되도록 고민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기념조형물, 역사기념물만 하더라도 몇 m올리느냐 경쟁을 합니다. 느낌이 있는 기념물을 만들어야 합니다. 모든 기념사업이 새로운 방향에서 진행돼야 합니다. 특히 관련 대표적 공간이 필요합니다. 다행이 정읍에 기념공원조성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느낌이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신명국 이사장의 못다한 이야기 "동학농민혁명 원인은 사회구조적 문제"신명국 이사장은 안동이 고향으로, 전북과의 연고는 원광대 원불교 학과에 진학하면서다. 애초 사업회 사무처장에 전북대 이종민(영문과)·하우봉 교수(사학과)가 거명됐으나 두 분이 고사하는 바람에 맡게 됐단다. 익산을 오가면서 사업회 일을 맡는 게 버거웠으나 10년 가까이 사무처장 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사무처장을 그만둘 수 있었던 것은 1998년 갑상선암(4기) 수술을 받고 병실에 누우면서다. 그럼에도 한승헌 이사장이 처장직 사퇴를 받아주지 않아 간절한 심정을 담은 편지로 한 이사장을 감동(?)시켜 얻어냈다.별도의 외부 지원을 받지 않고 회원들 회비에 의존하던 현실에서 사무처 직원들 월급을 감당하지 못해 이종민 교수와 함께 각각 1000만원씩 개인 대출을 받을 만큼 사업회의 사정은 어려웠다. 그럼에도 많을 때는 500명의 회원이 있어 든든한 힘이 됐단다.학자 개인으로서는 연구분야에서 많은 것을 잃었다. 사업회에서 여러 권의 책을 냈지만, 그 자신의 이름이나 자신이 소속한 대학(원광대 사학과)으로 욕심을 내지 않았다. 사무처장을 맡은 관계로, 주요 학술대회 등에서도 사회나 토론을 주로 맡아 주제발표에서 멀어졌다.현재 쟁점이 되고 있는 기념일 제정과 관련, 그는 논란 자체가 불명예라고 했다. 기념일을 제정하지 못한 것 자체가 ‘그 분’들에게 불효며, 안에서 치고 받고 싸우더라도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것은 문제라고 했다. 그는 또 동학농민혁명의 원인을 사회구조적인 문제로 보지 않고 조병갑의 삼정문란으로 몰고 간 당시 상황과, 세월호 사건을 유병언이라는 개인 책임으로 몰고 가는 현상도 100년을 뛰어넘어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았다.

  • 기획
  • 김원용
  • 2014.05.14 23:02

(18) 동학 연구·활동가들 - 故 최순식 선생과 딸 최고원 씨 "지역에 대한 애정" 부녀가 김제 원평 혁명사 연구 헌신

교토애니메이션사가 만든 애니메이션 타마코 마켓의 주무대는 우사기야마 상점가다. 상점가란 마을 단위의 재래시장인데, 쇠락해가는 이 상점가들을 활성화하는 것이 요즘 일본 지자체들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다.야마다 나오코 감독은 교토에 실제로 존재하는 데마치 상점가를 모델로 애니메이션을 기획했다. 상점가와 상점가 사람들의 디테일 하나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그림 속에 담아냈다. 이 애니메이션 덕에 데마치 상점가를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고, 상인들의 기대감도 커지고 있다고 한다.지역에 대한 애정은 이렇게 지역 문화와 사람들 속에서 컨텐츠를 찾아내고 이를 지역 활성화의 발판으로 삼게 한다. 그리고 그 컨텐츠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역사다.지역의 역사를 연구하려면 지역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안 돼요. 지역 사람들의 정서를 모른다면 밝힐 수 없는 것들이 있어요.선친인 향토사학자 故 현학 최순식 선생(1933~2008)의 뜻을 이어받아 김제 원평 지역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는 최고원 김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국장(44)은 이렇게 말했다.이 부녀를 움직인 것은 원평 지역에 대한 깊은 사랑이었다.△삶의 공간과 맞닿아 있는 무덤최고원 씨가 앞장서서 휘적휘적 걸었다.풀이 무성한 야산길을 지나 얼마 후 당도한 곳은 원평 구미란 전투 때 전사한 동학농민군들이 묻힌 무덤.구미란 전투는 우금치 전투에서 패하고 퇴각하던 농민군이 다시 일본군과 맞선 전투다. 이 때 희생된 이들의 시신을 수습해 무덤을 만들어놓은 것이 바로 이곳 무덤군이었다.마을과는 직선거리로 100m나 떨어져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가까웠다.그런데 보존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봉분임을 알리는 흰 표지와 원평 구미란 전투 동학농민 무덤군이라고 적힌 알림판이 서있지 않았더라면 도저히 무덤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었을 모습이었다. 2005년 태풍 때 쓰러졌다는 나무가 여전히 누워있고, 봉분의 형태도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훼손돼 있었다.어릴 적에 자주 와서 놀았는데, 그 때에는 지금보다 봉분 모양이 제대로 돼 있었죠.형체가 희미해져가는 봉분에 숫자가 적힌 흰 표지를 놓아 위치를 표시한 사람은 최씨였다.기념사업회가 관리를 하고는 있지만 예산이 부족해 1년에 한 번 벌초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이곳이 더 훼손되기 전에 등록문화재로 지정돼야 한다고 최씨가 말했다. 한 차례 반려됐지만, 5월 중에 다시 신청서를 제출할 예정이라고.그런데 왜 더 격이 높은 사적지 같은 것이 아니라 등록문화재로 지정되길 원하는 것일까?사적지로 지정되면 문화재 관리를 위해 주변 주민들이 다 나가야 한대요. 그렇지만 주민들의 삶의 공간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죠. 지금 여기에 사는 사람인데. 그렇게 양쪽 모두 보존하는 게 맞다고 봐요.△원평을 사랑한 사학자 최순식 선생최고원 씨의 원평 지역과 지역 사람들에 대한 이런 애착은 故 최순식 선생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최순식 선생은 본래는 역사를 직접 연구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29세라는 조금 늦은 나이로 전북대에 들어가 정치학 등을 공부했고, 졸업 후에는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당시 원평 지역에서 최씨 집안은 대대로 인정받던 유지 집안이었다.그는 고리대금을 써야만 했던 마을 서민들을 위해 1970년에 원평 새마을금고를 창립하기도 했다. 한 번 부도가 난 것을 지역 주민들의 강력한 요청으로 다시 일으켜 세웠고, 이것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이렇게 지역에 대한 애정이 큰 데다가 동학 농민군을 도운 최세현의 손자이기도 한 그가 지역의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글을 통해 금산사 주변에서 조상대대로 누백년을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향토사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밝힌 그는, 80년대에 모악향토문화연구회를 조직하고 활동을 시작했다.그는 미륵신앙과 정여립증산동학 사이의 연관성을 조명했다. 원평 장과 금구금산 지역의 사금은 다양한 사람들을 끌어모았고, 가까이에 있는 모악산과 금산사는 미륵신앙과 개벽사상 등 종교적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 특히 금산사는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아들 신검에 의해 유폐됐던 곳으로, 후백제 유민의 정서를 만들어내는 역할도 했다.이러한 지역적 특성과 정서의 영향을 받아 정여립이나 김덕명, 전봉준, 강증산 같은 인물들이 혁명개벽의 뜻을 품게 됐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그는 또 1893년에 원평에서 집회가 열렸으며 이 집회가 동학농민혁명이 혁명 차원으로 발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밝혔고, 1919년에 원평에서 있었던 31 만세운동이 동학농민혁명의 연장선상에 있었다는 것도 밝혀냈다.특히 그는 지주도 농민군도 모두가 피해자라는 관점에서, 혁명 뒤에 감춰진 역사에도 관심을 기울였다.이러한 성과들은 이후 이뤄진 연구들의 밑거름이 됐다. 정읍이나 고창의 동학농민혁명사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원평 지역의 혁명사는 그의 노력에 의해 비로소 알려지게 된 셈이다.이외에도, 최 선생은 구미란 전투에서 이름 하나 남기지 못하고 스러져간 농민군을 위해 무명농민군 위령제를 1994년부터 지내기 시작했다.이처럼 원평 지역의 역사와 문화적 토대를 찾아내고 기리는 데 헌신한 최순식 선생을 위해 마을 사람들은 공적비를 세웠다.△중요한 건 현재의 역사2008년에 최순식 선생이 급작스럽게 병으로 세상을 뜨자, 최고원 씨가 그의 유지를 받들기로 했다.최씨는 우선 위령제의 명맥을 이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기념사업회 결성을 서둘렀다.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 지원조례 제정에도 힘을 쏟았다.조례는 2010년 3월에 김제시의회에서 통과됐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지역사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했다.무관심에 맞서야 했고, 빠듯한 예산으로 위령제나 묘역 관리 등 할 일들을 해야 했다. 최근에는 구미란 전투 농민군 무덤과 원평 집강소 등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다.이렇게 매일매일 바쁜 삶을 살고 있는 그녀는 최근 모악산 문화공동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주민들과 같이 지역사에 대해 고민하고 뭔가를 모색해보는 단체예요. 지역의 고유한 문화자원과 주민들이 상생하도록 하기 위한 거죠.최씨는 동학농민혁명을 기념한다며 치러지는 사업들이 오히려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일종의 박제처럼 만들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를 하고 있었다.천편일률적인 기념사업, 어느 곳에 가도 똑같이 있는 조형물기념공원 조성 같은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그녀가 찾은 길은 바로 현재의 역사였다.과거의 역사가 중요하단들 현재의 역사만큼 중요하겠어요? 지역 주민의 일상 속에서 동학농민혁명의 기념 정신이 이어지는 게 진정한 기념사업이라고 봐요.그녀의 기념사업 모토는 작게 만들고 적게 세우고 비워둔다란다. 비워둔 그 공간은 지역 주민들의 삶이 채울 것이다. 이런 장을 만들어내는 것이 향토사학자의 역할인 셈이다.

  • 기획
  • 권혁일
  • 2014.05.07 23:02

(17) 동학 연구·활동가들 - 故 아산 최현식 선생 "제폭구민·보국안민, 동학혁명 정신 잊으면 헛일"

향토역사학자 고(故) 최현식 선생은 동학농민혁명 연구의 1세대 격이다. 학계로부터 외면받던 혁명의 흔적을 찾는 데 평생을 바쳤다. 그의 발자취를 담은 연구서가 나올 정도로 동학농민혁명 연구에서 선구자였다. (사)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가 2006년 발간한 <최현식과 동학농민혁명사 연구>라는 책에는 최 선생이 자신의 역작인 <갑오동학농민혁명사>를 세상에 내놓기까지의 과정이 세세히 담겨 있다. 그가 갑오동학농민혁명사를 세상에 내놓은지 34년, 현재까지도 동학을 연구하는 후학들로부터 동학연구 지침서가 되고 있는 이 역작에는 그의 땀과 열정이 녹아있다.전국 각지를 발로 뛰며 자료를 모으고 분석했던 그의 열정이 동학혁명사에 주춧돌이 됐다는 게 학계의 평가다. 이런 그의 발자취를 더듬어보자.△아산 최현식의 생애와 활동 아산 최현식 선생은 1923년 고창군 아산면 중월리에서 태어났다.그는 서당공부를 하다 늦깎이로 아산 석곡국민학교를 졸업한 뒤 1941년 일본으로 유학했다.애초 문학에 뜻을 두고 있었던 그는 다수의 언론사에서 근무하면서 필력을 다듬었다.고창 출신인 그가 정읍에 정착한 것은 1952년. 이후 그는 1956년 우연히 장봉선 선생이 쓴 〈전봉준실기〉를 접한 뒤부터 동학연구에 매진했다.당시동학란으로 폄하되던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의와 지역나라에 미친 영향에 대해 깊이 있는 연구활동에 들어간 것.마땅한 사료가 없던 시절, 그는 마침 1959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전국에 흩어져 있던 동학 자료들을 집대성한 동학란기록이라는 자료집을 토대로 본격적인 연구활동에 돌입했다.하지만 한정된 사료로는 깊이 있는 연구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직접 동학유적지, 농민군 유족 등을 만나는 등 현장에서 답을 찾아나갔다.동학농민군의 발길이 닿은 모든 지역에는 그의 발자국이 겹쳐 있다. 그는 전북은 물론 강원도 홍천, 경상도 성주에 이르기까지 동행없는 길을 수없이 걸었다.동학농민군이 진을 쳤던 무장의 호산봉이나 황토재의 도교산이 현지에서 여시메봉으로 불린다든지 한자로 짜맞춘 지명이라든 하는 게 다 최 선생의 노고에서 비롯된 값진 수확이다.아주 단순한 사안일지라도 사건 전개에 정통한 지식과 해당지역에 관한 인문지리를 두루 파악함으로써만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렇게 녹두장군과 동학농민군의 원혼으로 떠도는 파랑새를 뒤쫓은 지 24년이 되는 1980년 1월, 마침내 대표적인 그의 역작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동학농민혁명의 올바른 복원과 자리매김을 위해 그가 바친 열정과 노력은 이 분야 연구자들의 필독서요 지침서인 〈갑오동학혁명사〉에 결집돼 있다.사건의 전모를 밝히고 후속연구에 필요한 상세한 주석은 물론 주도 인물들의 후손까지 추적, 인물지로 엮어놓은 노작 중의 노작이다.이에 1980년대 이후 본격적인 동학농민혁명 연구는 갑오동학혁명사의 발간이 커다란 기폭제가 됐다.갑오동학혁명사는 방대한 자료수집과 유적의 세심한 답사와 확인이 결합된 갑오동학혁명사는 권위에 안주하고 있던 당시 역사학계에 경종을 울렸다.주류 역사학계로부터 무시와 괄시를 받았던 그는 향토사학자라는 태생적 한계를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불굴의 의지로 극복해 냈다.이처럼 열정적으로 연구활동에 매진했던 그는 흐르는 세월을 이길 수 없었는지 지병을 앓던 끝에 2011년 끝내 세상을 떠났다.하지만 1980년대 불모지였던 우리나라 동학연구사에 한 획을 그은 갑오동학혁명사는 현재까지도 동학연구자들의 나침반이 되고 있다.최현식 선생의 저서로는 〈갑오동학혁명사〉, 〈동학농민혁명 인물사료 탐구〉, 〈최현식과 동학농민혁명사〉 등 다수가 있다. 그는 그동안의 연구업적을 높이 평가 받아, 2013년 제3회 동학농민혁명 대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최현식 선생의 또다른 진면목최현식 선생은 학문적 연구활동 외에도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계승시키고자 여러 기념사업을 주도했다.그는 1967년 몇몇 뜻있는 이들을 모아 갑오동학혁명 기념사업회를 정읍에서 결성했다.이어 이듬해 갑오동학혁명 기념문화제를 처음 시작했다.또한 지역의 역사, 문화, 예술 전반에 걸쳐서도 맹활약했다.실제 정읍 태인초등학교 터에 방치됐던 태인 동헌을 보수해 전라북도 유형문화재(76호)로 등록하는데 힘을 보탰고, 지역의 지명 유래를 밝히는 데도 주력했다. 정읍문화원장으로 재직할 때는 백제 가요 중 유일하게 지금까지 전승돼왔던 정읍사악곡인 수제천 연주단을 만들기도 했다.하지만 이 같은 여러 활동의 기반에는 역시 동학이 있었다.그는 생전에 우리가 동학농민혁명을 올바로 이어받아야 하는 핵심은 그 정신, 동학농민군이 높이들었던 제폭구민(포악한 것을 물리치고 어려움에 처한 백성을 구함)과 보국안민(나랏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의 기치를 계승해야 한다는 것이라며 이를 잊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했었다.△최현식을 기억하는 사람들 1980년 5월 11일 고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당시 야당의 대표로 정읍에서 제13회 갑오동학혁명 기념문화제에 참석해 연설 하신 것을 명분으로 신 군부에 의해 우리사업회가 강제 해산 당했었습니다.관변으로 전락된 사업회를 다시 민간주도로 환원시키기 위해, 100주년 행사인 고부봉기 역사맞이 굿을 성공리에 마치고 그 여세를 몰아 1995년 민간주도의 사업회를 재건 할 때 처음 뵈었습니다. 강직하면서도 합리적인 분이셨으며 후배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으며 좌우를 아우르며 재건의 당위성을 설명 하실 때는 어느 누구도 반박을 하지 못했습니다.이갑상 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이사장은 최현식 선생을 원칙을 우선시 한 학자로 기억한다.이갑상 이사장은 상식에 준하면서도 원칙을 우선으로 한다는 점이 가장 감명 깊게 다가왔다면서 또 후배들에게 쉽게 말을 놓지 않는 모습에서 참어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고 말했다.그는 병상에 누워 계시면서도 후학들이 사건의 연도를 묻는 질문에는 몇년, 몇월까지 모두 암기하시던 총기에는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고 말했다.최현식 선생은 또 자신의 의견만 강요하지 않는 유연한 사고를 가진 인물로도 평가되고 있다.조광환 전 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이사장은 최 선생은 자신의 연구에 오류가 있으면 바로 그 자리에서 인정하는 유연한 사고를 가졌다며 향토사학자로서의 한계를 뛰어넘지는 못했지만 이런 사고 덕분에 지금까지도 후배들로부터 존경받고 있다고 말했다.그는 또 역사학자로서의 최 선생을 높이 평가했다.최 선생이 남긴 〈갑오동학혁명사〉는 후배 연구자들의 입문서로 꼽히고 있습니다. 거시적이고 세부적인 관점에서 동학혁명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갑오동학혁명사는 동학연구자와 일반인들의 필독서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 기획
  • 최명국
  • 2014.04.30 23:02

(16) 동학 연구·활동가들 - 故 삼암 표영삼 선생 "진정한 동학정신은 끊임없이 삶의 틀 바꾸는 것"

필자는 2005년부터 2009년까지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에서 심사담당관으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와 유족등록 업무를 담당했다. 그런데 100년이 훨씬 지난 일이어서 그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와 유족임을 증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현장조사를 매우 심도 있게 진행했다. 그러나 심의위원회 직원만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많았다. 다시 말해 전문가의 시선과 관점이 필요했다. 바로 이 과정에서 삼암 표영삼 선생을 처음 뵙게 됐다. 신청서에 나와 있는 몇 줄 만을 가지고 판단하기는 매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이럴 경우 표영삼 선생을 모시고 현지 사실조사를 실시했다. 유족들은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 증언했다. 그러나 울분이 앞서 설명이 조리 있게 이뤄지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리고 증언내용은 조각조각으로 구성됐다. 바로 이때 표 선생의 진가가 발휘된다. 그는 몇 개의 조각을 가지고 퍼즐을 맞추듯이 증언을 기초삼아 증언의 앞뒤 관계를 명확하게 짚어준다. 당시 동학교단의 상황을 통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게 되는 과정을 심도 있게 분석해준다. 표영삼 선생의 분석으로 묻혀있던 역사가 비로소 우리 앞에 생생하게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된 후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가 설치돼 국가적 차원에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와 유족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그런데 이렇게 된 데에는 바로 표영삼선생의 공이 크다. 조사는 전국적으로 이뤄졌다. 경기도 용인, 강원도 인제와 홍천, 경상도 청송과 영양, 경상도 상주와 예천, 충청도 태안과 서산 그리고 예산, 충청도 보은과 영동, 전라도 전주와 임실 그리고 남원, 전라도 정읍과 고창 그리고 부안과 김제, 전라도 곡성과 화순 그리고 보성, 전라도 장흥과 강진 그리고 무안, 이 모든 곳에 있는 동학농민혁명 유족에 대한 조사에서 표 선생은 늘 함께 하셨던 것이다. 필자는 표 선생과 조사를 함께 다니면서 이분의 인간적 면모에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도교 교인으로서 그리고 동학연구가로서 생각과 행동, 말과 행동이 일치하시는 분이셨다. 동학과 천도교가 추구한 인간에 대한 사랑을 몸소 실천하고 계셨다. 선생은 평소 부인과 아들에게 존대를 했다고 한다. 아침밥도 평생 선생이 담당했다고 한다. 물론 조사과정에서 거의 손자뻘에 해당하는 필자에게도 항상 존대해 주셨다. 그리고 가끔 진정한 동학정신은 끊임없이 삶의 틀을 바꾸는 것이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필자는 표 선생과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조사를 같이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2008년에 돌아가셨다. 그런데 필자는 장례식장에 참석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장기를 기증하고 공식적인 장례를 치르지 않았다. 선생은 돌아가시면서까지 인간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셨던 것이다.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부장● [고 표영삼 선생 생애와 활동] 천도교 신자이자 연구가'다시 개벽' 강조표영삼선생은 1925년 12월 17일 평안북도 구성군 오봉면 봉덕동에서 부친 표원묵과 모친 김안화 사이에서 출생했다. 원래 이름은 表應麟이었으나 나중에 표응삼으로 바꿨다. 그리고 다시 표영삼으로 개명했다. 천도교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조부 표춘학 덕분이었다. 조부가 천도교에 입교한 것은 1900년이었다. 선생의 집안은 3대를 잇는 계대교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외가도 독실한 천도교인 집안이었다. 자연스럽게 천도교인으로 성장했다. 1950년 6월 25일 남과 북이 전쟁으로 소용돌이 칠 때 선생은 혈혈단신으로 월남했다. 전쟁이 한창 중인 1951년 선생은 부안군 줄포면사무소에서 임시로 근무했다. 이곳에서 그는 배급을 담당했는데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가족 수를 확인하는 등 합리적인 방법으로 일을 처리했다. 뿐만 아니라 주인 없는 시신을 직접 묘를 만들어 주는 등 주민들을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휴전에 앞서 1952년 12월경 부안에서 서울로 올라온 선생은 천도교청년회를 부활하는 데도 적극 노력했다. 1952년 12월 24일에 부활된 천도교청년회에서 문화부장 겸 중앙상임위원으로 선임된 것을 비롯해 휴전 이후 1953년 8월 개최된 제1차 확대위원회에서도 총무부장 겸 중앙위원으로 선임돼 청년회 활성화에 기여했다. 1961년 이후 10여년 동안 노동현장에 투신해 체신노조, YH노조 설립 등을 지도했다. 노동현장에서 물러난 뒤 1977년 다시 천도교로 돌아와 신인간사 주간, 교화관장, 상주선도사, 교서(교사)편찬위원 및 위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남은 일생을 천도교 연구에 매진했다. 저술활동으로는 주간으로 활동했던 천도교 기관지인 〈신인간〉에 많은 기고를 통해 이뤄졌다. 설교를 비롯해 사적지 답사기, 논문 등 130여 편이 실렸으며, 저서는 〈동학 1〉 〈동학 2〉가 있다. 〈동학 3〉은 유작이 됐다. 그가 천도교와 관련해 남긴 연구성과는 크게 교리연구, 교사연구, 동학유적지 조사 등 세 분야로 구분할 수 있다. 그 중에서 동학유적지의 조사와 정리는 표영삼선생이 독자적으로 구축한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이상 성주현, 〈표영삼 선생의 생애와 동학유적지조사〉, 2009 참조) 이같은 공로로 표 선생은 정읍시가 제정한 올 동학농민혁명 대상수상자로 선정됐다.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신영우 충북대 사학과 교수는 표영삼 선생은 동학조직과 사상등에 대한 연구자들과 동학의 연결고리가 됐으며 유적지와 후손들의 발굴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했다.△표영삼 선생이 남긴 교훈표영삼 선생은 그의 저서 〈동학 1〉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동학의 특징은 한마디로 이중적인 세계관을 부정한다. 살아가는 이 세상만이 진실이라고 믿는다. 감성계와 초감성계로 나누어보는 이원적 관점 자체를 거부한다. 때문에 내일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모든 시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한울님처럼 대접받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 동학의 꿈이 돼 버렸다. 동학의 발자취는 이제 겨우 100년이 좀 넘었다. 그러나 이 짧은 기간에 너무도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신분제의 타파와 외세의 침략에 대한 항거, 잘못된 나라는 바로잡는데 30만이라는 귀중한 목숨을 바쳤던 것이다. 삶의 틀을 바꾸자는 다시 개벽을 위한 희생이었다. 좁은 땅에서 짧은 기간에 이처럼 많은 희생자를 냈다면, 보통의 신념집단이라면 자취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끈질긴 생명력을 갖게 된 것은 동학의 꿈이 모든 사람들의 지향하려는 꿈과 통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엄성에 반하는 현실의 모순이 자각되는 한, 동학은 누군가에 의해 계속 살아있을 것이다.표영삼 선생은 삶의 틀을 바꾸는 다시 개벽을 강조했다.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가장 기본적인 가치로 삼았다. 선생이 제시한 이러한 가치가 바로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이며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추구해야할 방향이다.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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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4.23 23:02

[(15) 동학 연구·활동가들] 배항섭 교수 "'근대' 에만 매달리는 연구 한계…미래지향적 접근 중요"

농민전쟁은배항섭 교수(성균관대)는 1894년에 일어난 대규모 민중항쟁을 가리켜 시종 농민전쟁이라고 불렀다.2004년에 동학농민혁명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일단 국가적으로 공인된 명칭은 동학농민혁명이다.어떤 이들은 이 사건의 본질은 민중봉기고 동학이라는 종교의 역할은 미미했으니 동학이라는 단어를 빼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동학이라는 조직이 갖는 의미를 폄하해서는 안 된다며 반박하기도 한다.배 교수는 농민전쟁이라는 용어를 주장했다. 농민이 주도한 대규모의 변혁 시도였다는 점에서 전쟁이라고 부를 만하다는 것이다.논쟁이다. 용어 하나를 놓고서도 논쟁이 벌어진다. 단 하나의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각계각층이 제 나름대로의 논리를 펴며 연구를 진전시키고 있다.조선후기 민중운동과 동학농민전쟁의 발발, 임술민란과 19세기 동아시아 민중운동 등의 책을 펴냈고 지금도 꾸준히 관련 논문을 발표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동학농민혁명 연구의 권위자 배항섭 교수를 만나 지금까지 진행된 학계의 연구와 논쟁의 흐름을 들어봤다.△동학혁명 연구, 군사정권기 거쳐 80년대에 절정시작은 역시 일본인들이었다. 시대적 배경이 그랬다. 조선 말기와 일제 강점기, 항쟁을 했던 농민들은 여지없이 반역을 일으킨 무리였다.일본인 사학자들은 이를 식민사학에 연결시켜, 조선사회는 이만큼 부패했다. 일본이 조선을 합병한 것은 조선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는 논리를 펴나갔다.동학농민혁명에 관한 한국인의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시작한 것은 1931년, 김제 출신의 김상기(서울대 교수 역임)가 동아일보에 동학과 동학난이라는 글을 연재하면서부터다.해방 이후에는 한우근이 반외세적 성격을 상대적으로 강조하며 해방 이후 세대의 연구를 이끌었다.월북 학자인 전석담은 1949년 마르크스주의 사관을 통해 동학혁명을 들여다보는 시도를 했다. 그는 동학혁명을 민중항쟁으로 높이 평가하면서도 봉건적 질서를 완전히 타도하지 못하고 근대적 자유를 누리는데에는 실패했다며 이를 한계로 꼽았다.또 50년대에는 김용섭이 민중의 의식 성장이 낳은 변혁운동이라는 관점으로 연구를 진행했다. 김용섭의 이런 연구는 4.19 혁명의 경험과 맞물려 이후의 연구들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반봉건반외세라는 공식은 이 때 굳어지기 시작한 것.516 쿠데타로 집권한 정권이 혁명의 정당성을 만들기 위해 동학혁명을 건드렸다. 새벽종이 울리고 새 아침이 밝아오는 근대를 향한 열망이 함께했다. 그 반대편에서는 민중에 의한 사회 변혁이라는 이상이 투영된 연구가 이뤄졌다.동학농민혁명 연구는 80년대에 폭발하듯 쏟아졌다. 이이화, 정창렬, 신용하 등의 걸출한 학자들이 저마다의 연구성과를 발표했다.소장학자들이 모여 만든 단체인 한국역사연구회는 연인원 50명이 투입된 1894년 농민전쟁연구라는 5권짜리 책을 내놨는데, 이들이 해온 연구의 총결산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1994년은 동학혁명 100주년이었다. 전국적으로 연구 붐이 일었고, 본보도 기획취재팀을 꾸려 자료를 발굴했다.△100주년 이후 퇴조잃어버린 20년그리고 100주년이 지난 다음에는 연구들이 확 줄어버렸어요.의외였다. 100주년을 계기로 더 활성화된 것이 아니라 퇴조해버렸다니, 그 이유가 뭐였을까?절차적 민주주의에서 진전이 시작됐고, 1992년에는 문민정부가 들어섰죠. 그런 과정 속에서 사회 변혁에 대한 관심이 떨어진 것이죠.여기에, 1990년대 말에는 외환위기가 찾아왔다. 신자유주의와 함께 먹고사니즘이 우리 사회의 지배이념으로 떠올랐다. 사회 변혁이 세간의 관심 범위에서 벗어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냉전이 종식되고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새로운 사조들이 나타나면서 이념의 지형이 크게 바뀌었다.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이뤄지던 일국사 중심주의적 연구 경향도 비판을 받았다. 우리 학계는 여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동학혁명에 대한 연구는 올 스톱에 가까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박사학위 논문조차도 가뭄에 콩 나듯 한 상황이었다.새로운 과제에 입각한 새로운 연구가 이뤄져야 하는데, 많은 연구자들이 100주년을 기점으로 농민전쟁 연구에서 손을 놓았고, 신진 연구자들의 유입은 이뤄지지 않고, 이렇게 침체된 것이 최근 20년이었죠.△동학농민혁명은 과연 근대를 지향했는가연구가 전반적으로 침체된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학계에서 요즘 가장 핫한 이슈는 무엇인지 물었다. 배항섭 교수는 근대에 관한 논쟁을 꼽았다.재일사학자 조경달은, 농민군들이 서구적 근대를 지향했다는 주류적 견해와는 달리, 농민군들이 반자본주의와 반식민주의를 포함한 다른 의미의 근대를 지향했다고 주장했다.그는 자본주의적 소유관계를 근대성의 요소로 본다면, 농민군이 주장한 토지의 평균분작과 같은 것은 이에 배치된다고 봤다. 따라서 서구적 개념의 근대성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특히 전세계적으로도 민중혁명은 근대적 체제를 세우려 했던 부르주아 혁명과는 달리 어떤 새로운 요소가 자신들의 삶을 위협할 때 이에 반대하는 움직임으로서 일어났다는 점이 근거로 제시됐다.배 교수의 생각은 어떨까?그는 농민전쟁이 분명 근대를 지향하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반근대라고까지 보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근대와 반근대라는 구분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매우 독자적인 영역을 세우고 있었다는 것이다.△근대성 틀 벗고 다양한 의미 살려야반봉건반외세라는 것도 서구적인 기준에 농민전쟁을 맞추는 것이죠. 서구적 근대화를 우리가 달성했어야 하는 것들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보고, 그걸 찾아내려고 하고.교과서에서는 동학농민혁명이 국제 질서의 변동과 근대 국가 수립운동이라는 단원 아래 근대적 개혁 추진 과정이라는 부분에서 소개되고 있다.식민사관의 반작용이었다. 우리도 독자적으로 근대화를 이뤘다고 말해야 했고, 역설적으로, 그럼으로써 우리는 언제나 서구의 경험에 이만큼 미달한 상태에 놓였다.사실 환경문제 같은 것만 보더라도, 인간의 이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근대라는 것 자체가 회의와 비판의 대상이지 않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근대에만 매달리는 연구는 문제가 있죠.현재에 맞는 연구, 동학혁명이 내포하고 있는 다양하고 풍부한 의미를 살리는 연구. 배항섭 교수는 그런 새로운 연구 경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이 사건이 서구와는 얼마나 달랐는지, 얼마나 우리의 독자성이 있었는지를 보는, 그런 미래지향적인 연구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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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혁일
  • 2014.04.16 23:02

(14) 동학 연구·활동가들 - 정남기 유족회 고문 "동학혁명은 민족의 유산, 주민참여형 사업 개발 필요"

동학농민혁명 유가족들의 위상은 혁명에 대한 평가와 궤를 같이 했다. ‘난’으로 치부되던 일제강점기까지 이름을 숨기고, 고향을 등진 채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진 경우도 많았다. 선대가 혁명에 참여했던 사실을 당당히 밝힐 수 있었던 때는 혁명이 본격적으로 재조명되기 시작한 100주년 즈음이었다. “이전까지 유족 스스로도 인식이 안됐고, ‘내가 후손이다’고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습니다.”동학농민혁명유족회 발족 당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족회의 산파역을 맡았던 정남기 전 회장(71, 현 유족회 상임고문)을 만나 혁명이 어떻게 기려져야 할지 들어보았다. 정 전 회장은 유족회 결성 당시 총무를 맡았고(초대 회장은 김인배 후손 김영중씨), 2000년부터 10년 가까이 유족회 회장으로 활동했다.-100년이 지난 뒤에야 유족회가 결성됐습니다. 어떻게 유족회가 출범했는지.“지도자들의 후손을 제외하고 일반 참여자들의 후손은 그동안 밖으로 드러내는 것 자체을 꺼리는 분위기 아니었습니까. 유족회 발족도 유족이 아닌, 역사문제연구소를 이끌던 이이화 선생을 중심으로 각계 인사들이 나서 주셨습니다. 100주년이 되던 1994년 3월3일 역사문제연구소 사무실에서 조촐하게 발족했습니다.”-유족회의 그동안 성과를 꼽는다면.“유족회의 가장 큰 목표는 혁명에 참여했던 선대의 명예회복이었습니다. 서훈범국민추진위원회가 꾸려졌고, 언론인 출신의 김중배씨가 위원장을, 제가 집행위원장을 맡았습니다. 가난하고 못 배운 후손들이지만, 모금운동을 벌이는 등 유족들이 참 열심히 참여했습니다. 2004년 특별법이 제정으로 명예회복의 성과를 거뒀고, 법에 따라 1만여명이 유족으로 등록하게 됐습니다.”-혁명을 기리는 데 유족회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보는 데요.“‘공적서 하나 받으면 뭐하냐”고 불만을 갖는 유족들도 있어요. 그러나 진정한 후손은 정신적인 것이라고 봅니다. 혈통은 후손이면서 반혁명적으로 간다면 진정한 후손이라고 할 수 없죠. 참여정부 때 대통령비서실 홍보수석비서관을 지낸 조기숙 교수(이화여대)가 고부봉기의 빌미를 제공했던 조병갑의 증손이지만, 유족회에 와서 진정어린 사과를 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후손 같다’는 말도 나왔습니다. 선조가 관군이고 진압군이라는 게 문제가 아니며, 편견을 가져서도 안 됩니다. 혁명은 모두의 것입니다. 상생과 화해로 가는 것이 후손된 도리입니다. ”-유족들 사이에 보상을 바라는 분위기도 감지되는 데요.“독립운동 유족과의 형평성을 들어 보상을 염두에 둔 유족들도 없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또 특별법상 유공자로서의 훈격도 구체적으로 정해지지 않고 추상적·선언적으로 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여자의 후손 중 손자들도 많지 않고, 아직 정치·사회적으로 혁명에 대한 인식이 낮아 현실성이 떨어집니다. 다만, 국가의 추모행사 주관을 의무화 하는 등 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4월11일 관련 학술대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혁명에 대한 사회적 인식 부족을 말씀하셨는데, 유족들이 더 절감하겠지요.“유족들이 못 나고, 못 배워서 역사를 바로세우지 못한 책임도 있지만, 국가적 책임이 크다고 봅니다. 민족분단의 상황에서 동학농민혁명을 높이 평가하는 북한을 의식한 점도 있지만, 전국민이 자랑스러운 혁명으로 여길 수 있는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혁명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유족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입니다. -국가뿐 아니라 자치단체의 역할도 중요하다고 보는 데요. 특히 전북이 혁명의 중심에 있었다는 점에서 전북지역 자치단체들이나 전북정치권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역대 전북도지사 중에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있었는지 의구심을 갖습니다. 말로는 전봉준을 외치면서 동학과 전봉준을 위해 투자한 게 있습니까. 제주 4.3사태만 보십시오. 제주도와 도민들이 똘똘 뭉쳐 국가적 관심을 끌어내지 않았습니까. 동학농민혁명이 몇 백배 큰 사건인데 국가 행사로만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전봉준 장군을 꼽았지만, 2006년 한 조사 결과 전봉준을 꼽은 국회의원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전북지역 국회의원들 중에서도 없었다는 이야기죠.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역사인식을 제대로 하는 도지사와 국회의원이 나와야 합니다.-전국 각 지역에 기념사업회가 꾸려지고, 여러 기념사업들이 추진되고 있는데.“10년전, 20년전 방식 그대로 답습해서는 달라질 게 없습니다. 기념행사장에 노인들을 불러서 숫자만 채우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학술대회도 많이 해봤고, 죽창 들고 거리행진도 많이 하지만 주민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주민참여형 사업개발이 중요합니다. -기념사업을 둘러싸고 지역간·단체간 갈등이 여전한 데요.“100주년 때 기념우표 발행을 놓고 천도교와 혁명 관련 사업회간 명칭을 놓고 싸워 결국 우표발행을 못했습니다. 기념일을 놓고 언론에서 정읍과 고창간 싸움으로 몰고 가는 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표발행 때도 무장기포일로 기념일을 삼는데는 이론이 없었고, 몇 차례 학술대회에서도 전문가들 사이에 무장기포일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고창에서 기념일과 관련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정읍에서 문제를 삼고 있는 게 문제입니다. 앞으로 이성적인 대화와 토론을 거치면 공감대를 형성할 것으로 봅니다.”● 정남기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상임 고문은 기자 출신…언론재단 이사장 지내 "반골기질, 동학 할아버지 닮았다"정남기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상임 고문은 고창 아산 출신으로, 언론계에서 잔뼈가 굵었다. 1970년대 초 현대경제일보(현 한국경제신문 전신) 기자로 언론계에 발을 디딘 그는 기자협회 합동통신(연합통신 전신) 분회장으로 활동하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강제 해직됐으며, 1988년 연합통신(현 연합뉴스)에 복직해 조사부장, 편집부장, 논설위원실장, 민족뉴스취재본부장, 동북아정보문화센터상임이사 등을 역임했다. 퇴직 후에는 연합뉴스 동북아시아정보문화센터 상임이사 겸 소장과 한국편집미디어협회 부회장 등으로 활동했다. 2005년부터 만 3년간 한국언론재단 이사장을 지냈다. 동학농민혁명유족회와의 인연은 정 고문의 할아버지(정백현 1869~ 1920, 본명은 근영)가 혁명 당시 농민군 지도부인‘비서’로 활동했기 때문. 백산결진 당시 송희옥과 함께 비서로 임명된 사실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당시 총대장으로 추대된 전봉준의‘비서’라는 풀이도 있지만, 심부름 역할을 하는 비서가 아닌, 비밀스런 글을 작성하는 임무를 말하는 것으로 이이화 선생은 풀이했다.정 고문은 고교시절(고창고) 조부의 혁명 참여 사실을 알았으나 부친은 철저히 숨겼으며 100주년 때 쯤에서야 말씀하셨단다. 26세에 혁명에 참여했던 조부는 서울로 피신해있다가 3년뒤 고향으로 내려왔으나, 대신 증조부가 고창 흥덕관아에 잡혀가 고문 끝에 사망했다. 조부는 동학입도 당시 상황을 적은 일기 〈진암견문록〉을 남겼으며, 정 고문이 전주역사박물관에 기탁했다.그는 자신의 반골성향이 “동학 할아버지에게서 그 힘이 나온다”고 자신있게 말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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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원용
  • 2014.04.09 23:02

(13) 동학 연구·활동가들 - 김양식 박사 "동학 배경지식 뒷받침돼야 생생한 문화콘텐츠 가능"

올해로 2주갑을 맞은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연구는 현재진행형이다. 1주갑이었던 1954년 당시까지는 농민들의 단순한 무력투쟁 정도로 치부됐다면 그 이후 100주년이되면서 우리 근대사의 중요한 한 대목으로 평가됐다.이때부터 활기를 띠기 시작한 학계 연구의 발판을 마련한 것은 80년대 반정부 민주화운동에 나섰던 역사학도들이다.당시 혈기 왕성했던 이들이 차차 역사학계의 전면에 나서면서 혁명 관련 연구활동도 그 성과를 드러내게 됐다.이 중 두드러진 연구성과로 학계의 기린아로 꼽히고 있는 김양식 박사(54·충북발전연구원 선임연구위원)를 만나 그동안의 연구활동과 앞으로의 연구과제 등에 대해 들어봤다.-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은.“한양대 공대에 재학 중이던 시절인 80년대 초 민주화운동이 점차 확산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도 거리로 나가 친구들과 함께 군사정권의 타도를 외쳤습니다. 그러면서 점차 이런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던 중에 대학 동아리를 통해 여러 사회과학 서적을 접하게 됐습니다. 이때부터 민중을 계몽하는 학자의 길로 들어서고자 하는 마음이 싹 텄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민중이 주도가 된 동학혁명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고, 깊이 파고들면서 어느새 제 전문분야로 자리잡게 됐죠.” - 연구활동 중 가장 주안점을 둔 분야는.“근대 농민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보면 토지 문제가 가장 큽니다. 처음엔 이런 국유지 관련 토지분쟁을 깊이 있게 연구했습니다. 그러다가 혁명 과정에서 집강소(혁명 당시 농민자치기구)를 다룬 기존 연구에 문제점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기존 연구자들은 집강소의 역할을 너무 일률적으로 확대 해석하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또 집강소는 전주화약 당시에 설치하기로 약속한 것이 아니라 전봉준과 당시 전라감사 김학진 사이 열린 회담에서 합의된 것입니다. 이와 함께 당초 집강소의 설치 목적은 민정기능을 위한 것이 아니라 혁명 이후 흐트러진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다만 농민군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그 기능이 민정기능으로까지 확대된 것일 뿐입니다. 이것도 점차 반농민군이 힘의 우위를 점하면서 다시 치안유지만을 맡는 것으로 기능이 축소됐습니다. 이처럼 혁명을 다룬 기존 연구의 오류를 바로잡는데 중점을 뒀습니다.” - 그간의 다른 역사학자들의 연구활동을 평가한다면.“혁명 과정에서 민중의 존재를 너무 강조하다 보니 혁명이 일어나게 된 배경에 소홀한 측면이 있습니다. 민중의 투쟁에만 천착하다보니 동학의 조직과 실체에 대한 연구는 미진했던 것 같습니다. 1주갑 이후의 연구가 투쟁사 중심이었다면 2주갑 이후는 연구의 폭을 넓혀, 동학이 농민들로부터 지지를 받게 된 배경과 동학사상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이뤄져야 할 것입니다.” - 동학 2주갑의 역사적 의의는.“21세기 한국의 운명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변화의 물줄기 속에서 큰 격변에 처할 것으로 보입니다. 근대의 혁명이 자본의 혁명이었다면 최근의 혁명은 정보를 가치로 삼습니다. 일반 대중들이 정보화사회에서 정보에 소외되고 조종당하는 상황이 심화하면서 정보 빈부격차가 커지고 있습니다. 또한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각축도 눈 여겨봐야 합니다. 동학혁명을 거울 삼아 당시 민중들의 고민, 시대적 상황, 지식인들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 했던 노력들을 현재 시대에 비춰봐야 할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아야 합니다.” - 2주갑을 맞이했지만 아직 일반 대중들의 관심이 미흡한 데요.“대중들이 혁명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자료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화콘텐츠 계발이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콘텐츠를 창출하기 위한 대중문화예술가들의 혁명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의미 있는 콘텐츠 발굴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혁명에 대한 이미지가 수탈과 외세 침략에 대한 저항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만 빠져 있어, 동학을 해석하는 관점의 폭이 좁은 것도 문제입니다. 이에 앞으로는 혁명이 발발하게 된 이면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종교로서의 동학이 농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으며, 이후 근대화과정에서 동학이 우리나라 국가 형성에 미친 파장에 대한 이해가 필수입니다.이런 배경지식이 뒷받침돼야 보다 생생한 문화콘텐츠가 만들어져 대중들의 관심을 끌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학자 김양식 씨는 공대 출신…10년 넘게 동학연구충북 청주 토박이인 김양식 박사는 지역의 역사·문화에 대해 관심이 깊다. 그는 다양한 연구활동을 통해 충북 역사바로세우기를 실현해나가고 있다. 그 중심에는 충북발전연구원 부설 충북학연구소가 있다. 그는 이곳에서 충북의 역사와 문화, 민속, 사상 등을 조사·연구하고 있다.특히 그는 동학농민혁명을 주전공으로 삼아 충북지역의 동학 교단의 역할, 혁명에 투신한 충북인 등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한 동학 연구활동에 매진하고 있다.그는 원래 이공계 출신이다. 하지만 80년대 반정부 투쟁에 나서면서 고질적인 사회문제를 개선할 필요성을 느껴 역사교육학과로 전공을 바꿨다. 그리고 단국대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이후 한국 근대사를 주로 연구하다가 동학의 형성과 농민혁명 전개과정에 매력을 느낀 나머지 십여년 전부터 동학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주요저서로는 〈지리산에 가련다〉 〈근현대 충북의 역사와 기억〉 〈충북의 하늘위에 피어난 녹두꽃〉 〈새야 새야 파랑새야〉 등이 있다.그는 연구활동을 위해 전북을 자주 찾는다. 혁명 유적지가 다수 분포된 고창과 정읍, 전주 등 역사의 현장을 직접 답사한다. 이 때문인지 그는 지인들로부터 ‘반 전북사람’이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고 한다.그는 “충북과 전북은 역사적 배경이나 사람들의 성향 등 닮은 구석이 많다”면서 “연구활동을 위해 자주 찾다보니 어느새 제2의 고향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그는 존경하는 동학연구자를 묻는 질문에 “이이화 선생님과 문병학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처장이다”며 “이 분들의 연구 발자취를 더듬어가다보니 지금에 이르렀다”고 말했다.동학 2주갑을 맞아 이제는 동학의 근간에 대해 좀 더 파고들고 싶다는 김양식 박사. 그는 지금도 좁은 자신의 연구실 한켠에 무더기로 쌓아놓은 각종 서적들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을 것이다.

  • 기획
  • 최명국
  • 2014.04.02 23:02

[(12) 동학 연구·활동가들 - 이이화] "동학, 드라마·영화화…다양한 예술장르로 대중화해야"

동학농민혁명 2주갑은 그 자체가 역동적인 역사였다. 일제강점기는 물론, 혁명 1주갑이었던 1954년 당시까지도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는 별 울림을 주지 못했다. 우리 역사상 최대 민중항쟁이었던 그 역사가 전면에 부상한 것은 고작 100주년에 즈음해서였다. 물론, 그 이전에도 몇몇 연구자들에 의해 역사의 베일을 벗기려는 노력이 있었고, 80년대 민주화운동의 흐름을 타고 학계의 재조명 작업이 내부적으로 진행됐지만, 대중적 관심을 끌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아직도 많은 과제를 앞에 두고 있지만, 오늘의 모습으로 동학농민혁명이 우리 앞에 서기까지 연구자들과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의 ‘역사찾기’를 기억해야 할 것 같다. 본 기획에서 혁명의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묻혀있던 자료를 찾아내고, 현장을 누빈 연구자와 활동가를 만난다. 이들에게 동학농민혁명이 갖는 의미는 무엇이며, 그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역사학자 이이화(77)는 ‘녹두장군’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전봉준 장군처럼 키가 작고, 목소리가 크고, 고분고분하지 않은 기질과 비슷해서다.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찾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많은 활동을 한 것이 바탕이 됐음은 물론이다. 그는 30대 때부터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관심과 연구활동을 바탕으로 1989년 역사문제연구소 부설로‘동학농민혁명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만들고,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초대 이사장을 맡는 등 책과 현장을 넘나들었다. 재단 이사장에서 물러난 후 관련 공식 직함은 없지만, 2주갑은 그를 현장으로 다시 불러냈다. 지난 20일 기념재단에서 제작하는 홍보영상물 촬영을 위해 정읍을 찾았고, 전북일보 리더스아카데미 강좌에 연사로 초대돼 관련 특강을 했다. 이달 중 경북 영덕과 전남 무안에서 특강도 잡혀 있다.그는 현재 동학농민혁명의 대중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며, 이런 일련의 활동 역시 그 자신이 할 수 있는 대중화 작업으로 여긴다.-동학농민혁명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나 배경이 있었다면.“늦은 나이로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광주고)을 마쳤습니다.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에서 문학도의 꿈을 키우던 중 참기름 장사를 하던 어머니가 위암으로 쓰러지면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고, 틈만 나면 국립도서관에서 책을 읽었습니다. 이 때 역사학도가 될 것을 결심했어요. 그런데 80년대 암흑의 시대, 역사학자로서 무슨 역할을 할까. 그리 자문하면서 동학 관련 연구서와 자료들을 찾아보고 답사를 다니며 ‘왜 이들이 목숨을 걸고 봉기했을까’를 화두로 삼게 된 것이죠.”-당시 관련 자료가 많지 않아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 어떻게 접근했나요.“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있을 때 규장각에서 수집했던 자료를 검토하고 유적지를 찾았습니다. 특히 젊은 연구자들과 답사팀을 꾸려 전라도·경상도·충청도·경기도·강원도까지 유적지를 탐방했고, 유족이나 관련자를 찾아 증언을 들었습니다.”-동학농민혁명의 오늘의 역사로 서기까지 선생님의 공적인 많은 데, 그 역할을 자평하신다면.“공로자라고 해서 원광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도 받고 녹두대상도 받았지만, 운동은 혼자 하는 게 아닌, 같이 하는 것입니다. 특별법 하나만 봐도 연구자와 단체, 국회의원들이 힘을 합해 뜻을 모아 이룬 것 아니겠습니까. 2주갑을 맞아 돌아보면 몇 가지 큰 진전과 성과에 자부심을 갖기도 합니다. 역사문제연구소에서 30권의 사료총서를 내 연구자들이 연구할 수 있는 학문적 토대를 제공했고, 특별법을 만들어 법적으로 참여자들의 명예를 회복시켰습니다. 특별법에 바탕을 둔 재단 발족으로 혁명의 지속적인 조명과 선양사업을 가능하게 만들었으며, 유족회 발족도 성과였습니다.”-그간의 연구를 평가한다면. “제 개인적으로는 국사편찬위원회에 보관된 매천 황현의 〈오하기문〉을 정창렬 교수와 함께 찾아낸 것입니다. 그러나 매천의 며느리가 기증한 원본 중 의병 부문은 전주대 호남학연구소에 잘 보관돼 있으나, 동학 관련 부분의 원본이 사라져 애석합니다. 100주년을 전후해 국내 자료가 많이 발굴됐으며, 전북일보의 발굴 사료인 전봉준의 제자가 기록한 〈석남역사〉(박문규) 역시 귀중한 사료로 평가합니다. 다만, 일본 자료가 아직도 많이 발굴되지 않아 관심이 필요합니다.” -기념재단 이사장 혹은 연구자로서 그간의 활동에 아쉬운 점도 있을 텐데요.“김대중 대통령이 퇴임 후 동학을 소재로 한 드라마 제작이 안 된 것을 안타까워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100주년때 거의 모든 신문들이 연재물로 다루었고, 지상파 방송에서도 4부작 혹은 5부작 다큐로 제작했지만, 대중화를 위한 노력은 부족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조수미의 ‘파랑새’노래를 들으면 눈물이 납니다. 조수미 씨에게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문학, 음악, 연극, 드라마, 영화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예술적으로 대중화 하는 작업이 따라야 합니다.” -대중화를 위한 개인적인 계획이나 욕심이 있다면.“서울 남산에 안중근·김구 동상이 있습니다. 여기에 동상 하나를 더 세우고 싶은 데, 그게 전봉준 입니다. 박원순 서울시장과 친하지만, 친분으로 되는 것이 아니죠. 국민적 공감대가 필요한 데, 그게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마지막 보람 있는 일로 꼭 이루고 싶습니다. 그것은 서울 남산에 또 하나의 동상 하나가 아니라, 동학농민혁명이 국민적 정신으로 우뚝 서는 것을 의미합니다.”-2주갑을 맞아 기념사업들이 활발히 준비되고 있습니다. 바람직한 방향은.“과거 추모제로 치러졌던 기념사업이 축제적으로 접근하는 분위기 입니다. 잔이나 올려놓고 제의적로 치렀던 형식적인 의례에서 벗어나 다양하게 기리고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합니다. 다만, 지역이기주의를 버려야 합니다. 기념사업이 결코 밥그릇 싸움이 돼서는 안 됩니다. 특히 동학기념일 제정은 혁명의 대중화와 국민적 인식 제고, 사업의 집중화를 위해 아주 중요한 데, 지역이기주의로 흘러 안타깝습니다.”(동학농민혁명 기념일과 관련, 그는 구체적인 언급을 피했다. 대신 대다수 학자들이 무장기포일에 손을 든 상황에서 우금치전투 패배일이 어떻냐고 조크를 했다고 했다.)-2주갑이 갖는 의미를 되새겨주시죠.“동학농민혁명은 대내적으로 평등, 대외적으로 자주를 부르짖었고, 북으로 황해도 해주에서 남으로 여수 진주까지 떨쳤습니다. 토지제, 신분제, 남녀차별 등 전근대적인 사회구조를 바꾼 일대 혁명이었고, 그 정신은 미래로 가는 빛입니다. 그 역사에 대한 이해와 의미를 아는 것이 혁명에 동참하는 길입니다.”● 역사운동가 이이화 씨는 발로 뛰는 '민중사학계 거목'이이화 씨는 발로 뛰는 역사운동가다. 그의 관심 영역은 민중이다. 역사학자로서 처음 이름을 올린 것도 신분차별의 타파를 내세운 허균에 관한 연구였고(1973년 창작과비평에 발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과 친일인명사전편찬 등에 깊이 관여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그의 관심을 피해가지 못했다. 동학에 대한 관심 역시 같은 맥락에서다.발로 뛰는 사학자는 8순을 눈 앞에 뒀지만, 지금도 현장을 무서워 하지 않는다. 술과 담배도 그의 오랜 친구다. 그와의 인터뷰도 늦은 저녁에 전주의 한 가게맥주 집에서 진행했다. 필름통 잿털이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것도 인상적이었다.대구 출신의 그는 전북과 특별한 인연은 특별히 없지만, 동학을 고리로 오랜 세월 많은 인연을 쌓았다. 동학농민혁명 1백주년이 지난 뒤 관련 일을 떠나 장수에서 집필활동에 전념하기도 했다.그는 지금까지 공저를 포함해 100여권의 책을 냈다. 그의 대표작인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전 22권)는 9년간의 집필로 이루어진 대작이다. 〈녹두장군, 전봉준〉 〈평등과 자주를 외친 동학농민운동〉 〈인물로 읽는 한국사〉(전 10권〉를 비롯,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만화 한국사〉(전 9권) 〈평등과 자주를 외친 동학농민운동〉 등이 그의 저서다. 많은 역사서를 내고도 그의 책 발간에 관한 허기는 채워지지 않은 것 같다. 그는 동학농민혁명사를 정식으로 쓰고 싶다고 했다. 너무 헤프게 쓴 것 같다는 반성을 달고서다. 경기도 파주로 거처를 옮긴 것도 그 때문이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손을 대지는 못했단다. 그의 혁명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 기획
  • 김원용
  • 2014.03.26 23:02

[(11)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후손- 김덕명 장군]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유일하게 남은 집강소 보존을"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했다. 동학농민혁명에서 2인자라고 불린 한 사내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함께 재판 받고 운명을 같이한 전봉준 장군의 선명한 사진은, 얼굴조차 기억되지 않은 그와 대비될 뿐이다. 동학농민혁명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이 사나이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전과 구전을 통해 떠도는 이야기가 그를 기억할 수 있는 전부다. 하지만 그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실천한 혁명가이자, 김제 금구 일대에서 대접주로 활동하며 조선왕실과 일본군의 블랙리스트 최상위에 이름을 올렸다. 동학농민혁명을 연구한 전문가들 사이에서 그가 없었다면 전봉준김개남손화중 장군의 활약도 없었을 것이라고 평가가 나오기도 한다. 동학농민혁명 전 과정에서 지도부 참모로써 인적물적 자원을 공급하는 막중한 역할을 한 김덕명 장군의 이야기다. 김덕명 장군의 발자취를 더듬기 위해 그의 증손자인 김석태 씨와 함께 지난 17일 김제시 금구면 원평을 찾았다. 김 씨는 현재 전국동학농민혁명유족회장을 맡고 있다.△원평과 김덕명원평은 동학농민혁명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곳이고, 김덕명 장군은 그 중심에 있던 인물입니다. 하지만 기록이 거의 없는 것은 물론 남아 있는 유적조차 소홀하게 관리되고 있는 현실이죠.원평에서 만난 (사)김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의 최고원 상임이사의 첫 마디다. 최 이사는 평생 원평에 머물려 향토 사학을 연구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을 전해주는 기본 사료를 보면 원평과 관련한 기록은 거의 찾을 수 없고, 동학혁명의 역사에서 김제 원평이 갖는 위치를 생각한다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라는 게 최 이사의 설명이다. 1893년 교조신원운동 단계에서 원평집회가 갖는 의미는 매우 중요하게 강조되고 있지만, 1894년 혁명 전개 과정 서술에서 원평은 옆으로 비켜져 있는 실정이다. 그 이면에는 일본군의 문서 수집에 대한 집착이 자리하고 있다. 일본군 지휘부는 동학농민군과 접전을 할 때 무엇보다 먼저 동학농민군이 보유한 문서를 수집토록 지시했다. 이를 토대로 동학농민군 조직과 활동 사항 등을 파악한 일본군은 도처에서 농민군을 철저히 진압할 수 있었다. 반면 동학 조직에서 작성한 자료는 거의 없기 때문에 지역별 인물별 연구가 전혀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럼에도 여러 구전과 극소수 문서 등을 종합해 보면 원평은 집강소의 대도소가 있었고 동학혁명 때는 태인지방과 함께 농민군 주력부대가 일본군과 마지막 전투를 벌인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원평은 농민전쟁의 중심지였고 이곳에 터전을 잡고 있던 지도자가 바로 김덕명 장군이다. 김덕명은 언양 김씨로 본 이름은 준상, 자가 덕명인데 자를 이름처럼 써온 것은 다른 농민군 지도자와 같다. 그는 그리 가난하지 않은 중농 집안에 태어나 어릴 때부터 글을 익혔지만, 고리타분한 경서보다 병법 책을 읽어 뜻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와 가까운 한 일족이 대지주로 군림하면서 벼슬을 사서 세도를 부리는 일을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이들 김씨들의 재실이 있는 장흥리 안정 절골에서 종중회의를 할 때 이런 행태에 분노해 재떨이와 목침을 던지며 의기를 보였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이처럼 그는 젊은 시절부터 불의와 비리를 참지 못하고 의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가 체포됐을 때 관변 기록인 순무선봉진등록에는 이놈은 크게 도소를 원평점에 설치하고 사사로이 국가의 곡식과 돈을 거두어들이면서 평민을 침학한 자이다고 기록됐다. 또 그의 판결문에는 또 김덕명이가 금구지방에서 무리를 모아 당을 이루고서 관고의 군대에 쓰는 물건을 마구 빼앗고 민간의 돈과 곡식을 약탈하면서 혹은 관가와 혹은 마을에서 멋대로 날뛰며 소요를 일으켜서 분수를 잊고 의리를 저버린 것이 그 끝간 데가 없다고 적혀있다. 이 기록은 그가 집강소의 중심지도자로서 많은 군수품을 거두고 지주를 응징하며 농민들의 지지를 받았다는 것을 역설한다. 하지만 우금치에서 패한 뒤 원평으로 왔으나 기다리고 있는 건 고향의 품 대신 배신이었다. 그는 안정 절골에 있는 산지기 집으로 몸을 피했다. 산지기는 폐사가 된 안정사에 부처를 모셔 놓고 무당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김씨 문중의 토호들에게 구명을 호소했으나 구명은 커녕 이들은 오히려 관가에 고발했다고 전해진다. △전봉준과의 인연그가 언제부터 전봉준이나 김개남과 만남을 이어갔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여러 가지 증언과 정황 등을 통해 동학농민혁명이 있기 전부터 인연을 맺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먼저 전봉준은 아버지 전창혁과 함께 고부 조소리로 이사하기 전에 원평에서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사실은 전봉준의 외가가 언양 김씨라는 점에서도 뒷받침된다. 원평은 언양 김씨의 집성촌이기 때문이다. 김덕명은 지식인으로 지역에서 재력을 가진 세력가였다.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그가 직접 참여한 기록은 없으나 전봉준보다 나이가 8년이나 많고 이 지역의 동학 대접주로서 상당한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김덕명은 연장자로서 전봉준과 뜻을 같이 한 동지이자 물질적 후원자였던 것으로 보인다.김석태 회장은 할아버지(김홍구)의 이야기로는 전봉준 장군이 어릴적 원평에서 증조할아버지(김덕명)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물적인적 자원을 동원해 전봉준 장군을 도왔다고 말했다. △사라져가는 역사 현장역사의 현장이 사라진 뒤 이것을 재현하면 역사와 단절을 수반할 수밖에 없어요. 현장을 보존하는 것은 과거와 현재의 연결이고 더 나아가 미래에 동학의 정신을 이어줄 연결고리가 되는 셈이지요. 문화재 등록을 서둘러야 할텐데요.김석태 회장은 방치된 원평집강소를 보며 개탄스런 표정을 지었다. 현재 집강소 자리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원평집강소는 망치질 한번에도 건물이 주저앉을 정도로 훼손됐다. 뜯겨진 천정 사이로 보이는 상량문에 光緖捌年壬午三月二十(광서팔년임오삼월이십1882년 건립) 문구만이 건물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었다. 원평집강소의 상징적 의미는 크다. 당시 도축을 하며 재산을 모은 백정 동록개가 건립한 뒤, 동학농민혁명이 본격화되자 신분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며 김덕명 장군에게 헌납한 것으로 전해진다.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생각해보면 상징성이 매우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사라져가는 역사 현장은 이뿐만이 아니다. 김덕명 장군의 생가터, 우금치에서 대패한 동학농민군이 최후를 맞은 구미란 등은 각종 자료 등의 부족으로 인정을 받지 못해 방치되고 있다. 당시 동학은 보편적 정서였어요. 동학농민군이나 김덕명 장군이나 불의를 참지 못해 일어났고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한 것이었죠. 동학의 정신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는 현재도 살아 있어야 하고, 앞으로 미래를 살아갈 세대도 분명히 알아야 할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역사입니다.김석태 회장의 마지막 말은 살아 있는 역사마저 천대하는 전북지역 자치단체에 경종을 울리는 듯 했다.

  • 기획
  • 김정엽
  • 2014.03.19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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