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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동학 연구·활동가들 - 故 아산 최현식 선생 "제폭구민·보국안민, 동학혁명 정신 잊으면 헛일"

발품 팔아 〈갑오동학혁명사〉집필…후배 연구자들의 '큰 귀감' / 1967년 정읍서 기념사업회 결성, 문화·예술 분야서도 맹활약

   
▲ 고 최현식 선생의 생전 모습.
 

향토역사학자 고(故) 최현식 선생은 동학농민혁명 연구의 1세대 격이다. 학계로부터 외면받던 혁명의 흔적을 찾는 데 평생을 바쳤다. 그의 발자취를 담은 연구서가 나올 정도로 동학농민혁명 연구에서 선구자였다. (사)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가 2006년 발간한 <최현식과 동학농민혁명사 연구> 라는 책에는 최 선생이 자신의 역작인 <갑오동학농민혁명사> 를 세상에 내놓기까지의 과정이 세세히 담겨 있다. 그가 갑오동학농민혁명사를 세상에 내놓은지 34년, 현재까지도 동학을 연구하는 후학들로부터 동학연구 지침서가 되고 있는 이 역작에는 그의 땀과 열정이 녹아있다.

 

전국 각지를 발로 뛰며 자료를 모으고 분석했던 그의 열정이 동학혁명사에 주춧돌이 됐다는 게 학계의 평가다. 이런 그의 발자취를 더듬어보자.

 

△아산 최현식의 생애와 활동

 

아산 최현식 선생은 1923년 고창군 아산면 중월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서당공부를 하다 늦깎이로 아산 석곡국민학교를 졸업한 뒤 1941년 일본으로 유학했다.

 

애초 문학에 뜻을 두고 있었던 그는 다수의 언론사에서 근무하면서 필력을 다듬었다.

 

고창 출신인 그가 정읍에 정착한 것은 1952년.

 

이후 그는 1956년 우연히 장봉선 선생이 쓴 〈전봉준실기〉를 접한 뒤부터 동학연구에 매진했다.

 

당시‘동학란’으로 폄하되던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의와 지역·나라에 미친 영향에 대해 깊이 있는 연구활동에 들어간 것.

 

마땅한 사료가 없던 시절, 그는 마침 1959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전국에 흩어져 있던 동학 자료들을 집대성한 ‘동학란기록’이라는 자료집을 토대로 본격적인 연구활동에 돌입했다.

 

하지만 한정된 사료로는 깊이 있는 연구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직접 동학유적지, 농민군 유족 등을 만나는 등 현장에서 답을 찾아나갔다.

 

동학농민군의 발길이 닿은 모든 지역에는 그의 발자국이 겹쳐 있다. 그는 전북은 물론 강원도 홍천, 경상도 성주에 이르기까지 동행없는 길을 수없이 걸었다.

 

동학농민군이 진을 쳤던 무장의 호산봉이나 황토재의 도교산이 현지에서 여시메봉으로 불린다든지 한자로 짜맞춘 지명이라든 하는 게 다 최 선생의 노고에서 비롯된 값진 수확이다.

 

아주 단순한 사안일지라도 사건 전개에 정통한 지식과 해당지역에 관한 인문지리를 두루 파악함으로써만 가능한 일이었던 것.

 

이렇게 녹두장군과 동학농민군의 원혼으로 떠도는 파랑새를 뒤쫓은 지 24년이 되는 1980년 1월, 마침내 대표적인 그의 역작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동학농민혁명의 올바른 복원과 자리매김을 위해 그가 바친 열정과 노력은 이 분야 연구자들의 필독서요 지침서인 〈갑오동학혁명사〉에 결집돼 있다.

 

사건의 전모를 밝히고 후속연구에 필요한 상세한 주석은 물론 주도 인물들의 후손까지 추적, 인물지로 엮어놓은 노작 중의 노작이다.

 

이에 1980년대 이후 본격적인 동학농민혁명 연구는 갑오동학혁명사의 발간이 커다란 기폭제가 됐다.

 

갑오동학혁명사는 방대한 자료수집과 유적의 세심한 답사와 확인이 결합된 갑오동학혁명사는 권위에 안주하고 있던 당시 역사학계에 경종을 울렸다.

 

주류 역사학계로부터 무시와 괄시를 받았던 그는 향토사학자라는 태생적 한계를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불굴의 의지로 극복해 냈다.

 

이처럼 열정적으로 연구활동에 매진했던 그는 흐르는 세월을 이길 수 없었는지 지병을 앓던 끝에 2011년 끝내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1980년대 불모지였던 우리나라 동학연구사에 한 획을 그은 갑오동학혁명사는 현재까지도 동학연구자들의 나침반이 되고 있다.

 

최현식 선생의 저서로는 〈갑오동학혁명사〉, 〈동학농민혁명 인물사료 탐구〉, 〈최현식과 동학농민혁명사〉 등 다수가 있다.

 

그는 그동안의 연구업적을 높이 평가 받아, 2013년 제3회 동학농민혁명 대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최현식 선생의 또다른 진면목

   
▲ 고 최현식 선생이 생전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연구성과를 소개하고 있는 모습.

최현식 선생은 학문적 연구활동 외에도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계승시키고자 여러 기념사업을 주도했다.

 

그는 1967년 몇몇 뜻있는 이들을 모아 갑오동학혁명 기념사업회를 정읍에서 결성했다.

 

이어 이듬해 갑오동학혁명 기념문화제를 처음 시작했다.

 

또한 지역의 역사, 문화, 예술 전반에 걸쳐서도 맹활약했다.

 

실제 정읍 태인초등학교 터에 방치됐던 ‘태인 동헌’을 보수해 전라북도 유형문화재(76호)로 등록하는데 힘을 보탰고, 지역의 지명 유래를 밝히는 데도 주력했다. 정읍문화원장으로 재직할 때는 백제 가요 중 유일하게 지금까지 전승돼왔던 ‘정읍사’악곡인 ‘수제천’ 연주단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 같은 여러 활동의 기반에는 역시 동학이 있었다.

 

그는 생전에 “우리가 동학농민혁명을 올바로 이어받아야 하는 핵심은 그 정신, 동학농민군이 높이들었던 제폭구민(포악한 것을 물리치고 어려움에 처한 백성을 구함)과 보국안민(나랏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의 기치를 계승해야 한다는 것”이라며 “이를 잊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했었다.

 

△최현식을 기억하는 사람들

 

“1980년 5월 11일 고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당시 야당의 대표로 정읍에서 ‘제13회 갑오동학혁명 기념문화제’에 참석해 연설 하신 것을 명분으로 신 군부에 의해 우리사업회가 강제 해산 당했었습니다.

 

관변으로 전락된 사업회를 다시 민간주도로 환원시키기 위해, 100주년 행사인 ‘고부봉기 역사맞이 굿’을 성공리에 마치고 그 여세를 몰아 1995년 민간주도의 사업회를 재건 할 때 처음 뵈었습니다.

 

강직하면서도 합리적인 분이셨으며 후배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으며 좌우를 아우르며 재건의 당위성을 설명 하실 때는 어느 누구도 반박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갑상 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이사장은 최현식 선생을 ‘원칙을 우선시 한 학자’로 기억한다.

 

이갑상 이사장은 “상식에 준하면서도 원칙을 우선으로 한다는 점이 가장 감명 깊게 다가왔다”면서 “또 후배들에게 쉽게 말을 놓지 않는 모습에서 참어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병상에 누워 계시면서도 후학들이 사건의 연도를 묻는 질문에는 몇년, 몇월까지 모두 암기하시던 총기에는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고 말했다.

 

최현식 선생은 또 자신의 의견만 강요하지 않는 유연한 사고를 가진 인물로도 평가되고 있다.

 

조광환 전 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이사장은 “최 선생은 자신의 연구에 오류가 있으면 바로 그 자리에서 인정하는 유연한 사고를 가졌다”며 “향토사학자로서의 한계를 뛰어넘지는 못했지만 이런 사고 덕분에 지금까지도 후배들로부터 존경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역사학자로서의 최 선생을 높이 평가했다.

 

“최 선생이 남긴 〈갑오동학혁명사〉는 후배 연구자들의 입문서로 꼽히고 있습니다. 거시적이고 세부적인 관점에서 동학혁명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갑오동학혁명사는 동학연구자와 일반인들의 필독서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최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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