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조운 시인 '고부 두승산'서 처음 다뤄 / 신석정 시인 1963년 전북일보 통해 시 발표도 / 창작 1980년대 가장 활발 1990년대이후 주춤
태평양시대 개막 전야였던 19세기 중엽 한반도는 거대한 태풍의 눈이었다. 서구 제국주의 열강이 몰고온 거대한 태풍이 중국과 아시아 대륙을 통째로 날려버릴 기세로 휘몰아쳤다. 태평양에서 솟구치고 대륙에서 내리꽂히던 태풍이 1894년 갑오년 한반도에서 폭발하였다. 이런 대폭발 앞에서 민족의 안전과 안전의 기본토대인 국가의 자주권을 지키고자 동학농민군들은 의연히 봉기했다. 그것이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다. 그때로부터 120주년이 지난 지금 태평양의 움직임과 중국 대륙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1894년 갑오선열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절실한 때인 것 같다.
동학농민혁명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차지하는 중대한 위상으로 인해 일제식민지시기, 해방 이후 세계사적 차원에서 전개된 동서냉전체제구축시기에 빚어진 좌우대립과 민족분단 그리고 한국전쟁이라는 정치적 혼란 속에서 그 정신이 제대로 이어지지 못하고 도리어 극심하게 왜곡되고 축소되었다. 나아가 동서냉전체제 하부구조로 볼 수 있는 군사정권시기를 거치면서 극심하게 굴절되기까지 했다.
한국 근현대사의 극심한 굴절과 부침으로 인하여 동학농민혁명에 대하여 ‘반란’과 ‘혁명’이라는 극단적인 인식이 공존해왔다. 역사는 두 차원의 시간성을 지닌다. 실제로 사건이나 행위가 일어난 시점과 그 사건을 기록하고 해석하는 시점에서의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지난 120년 동안 한국문단의 시인, 소설가들은 동학농민혁명을 어떻게 인식했을까?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이후 지금까지 한국문단에 발표된 문학작품은 장편소설 22편, 장편시 9편, 단편시 265편으로 총 296편에 달한다. 이들 작품들은 편의상 1980년 전과 후로 구분해서 살펴볼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을 주제로 창작된 최초의 작품은 1947년 〈연간조선시집〉을 통해 발표된 조운의 시(詩) ‘고부 두승산(古阜 斗升山)’이다. 이 작품은 3·1운동 이후 사회주의사상이 국내에 보급되면서 동학농민혁명을 마르크주의 유물사관에 입각하여 해석한 역사학계 연구와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일제식민지시기 일본인 역사가들은 동학농민혁명의 반외세 민족운동으로서의 인식을 철저히 통제하고 차단하는 한편 조선왕조의 부패상만을 부각시켜 식민통치를 미화하는데 이용했다. 나아가 ‘동학 사교집단의 반란’ 혹은 고부군수 폭정에 따른 전라도 고부지역의 민란, 전봉준 사건으로 축소했다. 마치 세월호 침몰사고의 원인을 세모해운 유병언의 개인문제로 호도하는 것과 비슷한 양상이다.
조운 시인의 ‘고부 두승산’(古阜 斗升山)은 일제의 위와 같은 역사왜곡과 축소를 강하게 질타하는 역사인식을 보여준다. 이 시는 ‘농민대중’을 농민혁명의 주체로 확고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한국문단에서 동학농민혁명을 주제로 한 두 번째 시는 전북일보 1963년 9월 29일자를 통해 발표된다. 신석정 시인의 ‘갑오동학혁명의 노래’가 그것인데, 이 시는 1963년 당시 5·16정권이 동학농민혁명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느라 전북지역 원로와 서울의 갑오동학혁명기념사업협회 건의를 수용하여 1963년 8월 25일 기념탑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 9월 6일 착공식을 가진 후 “혁명정부가 서둘러서” 공사를 추진하여 27일 만인 1963년 10월 3일 정읍 황토현의 ‘갑오동학혁명기념탑’ 제막식을 가졌다. 이 기념탑 제막식 나흘 전에 전북일보 지면을 통해 신석정의 시가 발표되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징을 울려라 죽창도 들었다
이젠 앞으로 앞으로 나가자
눌려 살던 농민들이 외치던 소리
우리들의 가슴에 어련히 탄다
갑오동학혁명의 뜨거운 불길
받들고 나아가자 겨레의 횃불
오늘도 내일도 더운 피 되어
태양과 더불어 길이 빛내자 - 신석정, ‘갑오동학혁명의 노래’전문(全文)
한편, 4·19혁명을 계기로 민주주의 의식이 높아지면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관심도 함께 상승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1967년 신동엽의 장편서사시 ‘금강’과 ‘껍데기는 가라’외 3편의 단편시가 발표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이 사건에 대한 문단의 관심은 1970년대 김관식·황동규·문병란 등 10편의 시 발표로 이어졌고, 소설은 1960년대 서기원 〈혁명〉(1965), 최인욱 〈전봉준〉(1967)이 발표되었고, 1970년대 이용선 〈동학〉(1970), 유현종 〈들불〉(1976), 박연희 〈여명기〉(1978) 등이 발표되었다.
이후 1980년부터 2014년까지 문학작품 창작은 크게 늘었다. 시 분야에서 장편 8편, 단편 247편, 소설분야에서 중장편 16편으로 총 271편 발표되기에 이른다. 이는 1895년부터 1979년까지 25편의 문학작품이 발표된 것에 비하면 가히 폭발적인 증가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1980년대로 넘어오면서 민족민주운동 세력이 급성장하여 동학농민혁명의 민중성과 변혁지향성의 현재화를 구현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80년대 이후 발표된 시는 임홍재 ‘청보리의 노래’(1980), 안도현 ‘서울로 가는 전봉준’(1985), 양성우 ‘만석보’(1985), 고운기 ‘봉준이 성님’(1987), 고은 ‘첫닭 울면’(1988), 김남주 ‘황토현에 부치는 노래’(1988) 등이 있고, 소설은 안도섭 〈녹두〉(1988), 박태원 〈갑오농민전쟁〉(1988), 문순태 〈타오르는 강〉(1989), 한승원〈동학제〉(1994), 송기숙 〈녹두장군〉 등이 있다.
한국문단의 작가들이 발표한 문학작품에 나타난 동학농민전쟁 인식은 크게 다섯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농민해방투쟁적 인식이다. 이는 1920년대 국내에 유입되기 시작한 마르크스주의 영향을 받은 사회주의 반일민족해방운동가들의 역사인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조운의 ‘고부 두승산’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둘째, 서구적 근대문명 부정에 따른 무정부주의적 경향으로 이는 4·19혁명을 계기로 창작·발표된 신동엽의 장편서사시 ‘금강’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셋째, 반외세운동적 인식으로 1960년대 신동엽, 1970년대 김관식, 황동규, 문병란. 1980-90년대 김남주, 곽재구, 김용락 등의 시들에서 볼 수 있다. 넷째, 반독재운동적 인식으로 장효문, 송수권 등의 장편서사시에 잘 나타난다. 다섯째, 민중해방운동적 인식으로 1980-90년대 창작·발표된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인식이다.
주목할 것은 1980년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했던 문학작품 발표가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 작품 발표가 급격하게 둔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현상의 배경으로 ‘근대 이후’를 자처했으며 또 그렇게 인식되었던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함께 형성되기 시작한 ‘탈근대주의’(Post-modernism) 담론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아울러 최근 뉴라이트 계열의 ‘식민지근대화론’ 등의 시대적 상황변화 등도 배경으로 들 수 있을 것 같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으로 이어지는 세계사적 판도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여 우리는 망국(亡國)과 일제식민지라는 치욕을 맞았다. 오늘 한반도 주변상황은 짙은 안개속이다. 일본의 아베정권은 군국주의 추구하고 있고, 한반도에는 정체불명의 6자회담이 실재한다. 갑오선열들의 넋을 불러 오늘 우리의 좌표를 묻고, 내일을 향해 나가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는 말이 그 어느 때보다도 의미심장할 대가 지금이 아닌가 싶다.
문병학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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