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징대학살기념관엔 '피의 역사' 고스란히 서려 / 공산주의자 10만명 처형당해, 이념 전쟁 상처도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을 기점으로,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우위를 점했다.
‘그래도 아직은’ 일본이 열강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한, 그리고 을미사변(1895)으로 인해 일본에 대한 공포와 반감이 극에 달한 조선은 러시아를 끌어들이며 줄타기 외교를 시도했다(아관파천·1896).
하지만 조선의 이런 중립국화 전략도 1905년,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돌아가며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일본의 독주를 견제할 세력은 동아시아에 없었다.
청은 무술변법 등을 통해 재기하려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신해혁명으로 무너졌다.
쑨원(손문·孫文) 측과의 약속을 깨고 신생 중화민국의 독재자가 된 위안스카이(원세개·袁世凱)가 사망한 이후에는, 대륙은 ‘대군벌시대’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중국의 역사는 민국 수도 난징(남경·南京)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난징은 ‘무덤 도시’?
“난징에 올 때마다 공기가 무거운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동행한 통역 겸 가이드는 이렇게 말했다. 난징이라는 도시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이 죽었기 때문이란다. 가이드들 사이에서는 난징 관광을 가리켜 ‘무덤 관광’이라고까지 표현한다고.
일단 난징의 ‘무덤’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중산릉’이다. 중국의 ‘국부(國父)’로 일컬어지는 쑨원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1926년부터 1929년까지 3년에 걸쳐 건립됐다.
‘중산릉’이라는 이름은 그의 호 ‘중산’에서 따온 것이다. 황제의 무덤에만 붙이는 ‘릉’이라는 글자는 황제를 끌어내리고 공화국을 세우려 했던 이에겐 어울리지 않는 글자지만, 중국인들이 얼마나 그를 추앙해왔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중국 인구 3억9200만명을 나타내는 392개의 돌계단 위에 그의 사상인 ‘삼민주의(민족·민주·민권)’를 나타내는 현판이 걸린 묘당이 자리잡고 있다.
중산릉 옆에는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朱元璋)이 묻혀 있는 ‘명효릉’도 있다. 명은 강남에서 건국된 국가로서는 처음으로 대륙을 통일한 나라다.
지금은 특별한 도시로 대우를 받고 있지는 않지만, 난징 시내에는 자부심이 숨어 있다.
1912년 중화민국이 수립되면서 수도로 정해진 곳이 난징이었고, 따라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주요 활동 무대도 난징과 그 인근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승리를 거둔 1949년 이후에도, 대만으로 피신한 중화민국은 여전히 이곳을 헌법상 수도로 명시해두고 있다.
그래서 총통부 관저 옆에는 중화민국 수립 무렵을 재현한 ‘1912 거리’가 조성돼 있기도 하다.
하지만 ‘자유롭고 평등한 주권국가’를 향한 열망이나 어떤 ‘영광’만이 이 도시를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잊히지 않을 숫자 ‘30만’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대공황이 전 세계를 휩쓸었다.
물론 동아시아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나치 독일이나 파쇼 이탈리아가 그랬듯, 일본은 이런 상황의 타개책으로 군국주의적 팽창 카드를 꺼내들었다.
1931년,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이후 동북3성을 점령한 뒤 괴뢰정권인 만주국을 수립해 청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푸이·溥儀)를 수장으로 앉혔다.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은 이 때부터 시작된 중-일 간의 군사적 충돌의 연장선에 있다. 일각에서는 중일전쟁의 시발점을 만주사변으로 보기도 한다.
1937년 7월, 우연히 발생한 병사 실종사건을 구실 삼아 대대적인 대륙 침공에 나선 일본은, 속전속결로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중국의 거센 저항에 직면했다.
하지만 그 해 10월에는 상하이(상해·上海)가 함락됐고, 장제스(장개석·蔣介石)의 국민당 정부는 11월에 충칭(중경·重慶)으로 수도를 옮겼다.
그리고 12월, 난징이 함락됐다.
구타와 가혹행위가 만연한 비인간적 병영 문화와 전쟁 스트레스는 집단 광기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것은 난징과 주변지역에 살던 민간인 30만명이 학살되는 참극으로 나타났다.
무카이 도시아키(向井敏明)와 노다 쓰요시(野田毅)라는 두 군인은 ‘누가 먼저 100명의 목을 베는지’를 놓고 시합을 벌였고, 일본의 언론들은 이를 대서특필했다.
전쟁은 중국을 비롯한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고, 중국인은 물론 이 참극을 잊지 않았다.
2007년에 확장 개관한 난징 대학살 기념관은, 건물 자체에 그런 한이 사무쳐있는 듯했다.
기념관 앞 광장에 설치된 십자가 모양의 대형 구조물 앞에서 한 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는 공간을 지배하는 무거운 분위기에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모든 전시물에는 중국어와 영어, 그리고 일본어로 된 설명이 붙어있다. 희생자의 유가족 등을 추적해 모은 희생자 각각에 대한 정보를 일종의 아카이브로 전시해놓은 것도 눈에 띄었다.
△국민당과 공산당, 그리고 희생자
난징에는 희생자를 기리는 공간이 또 있다.
우리 역시 겪은 일이지만, 중국에서도 공산당과 국민당 간의 이념 대립이 당연히 존재했다. 오죽하면 두 차례나 내전을 치렀을까.
1927년 장제스의 공산당원 숙청으로 시작된 제1차 국공내전은 1936년 ‘서안 사건’으로 국민당과 공산당이 일단 힘을 합쳐 일본에 대항하기로 하면서 일단 종결된다. 하지만 1945년 일본이 항복한 뒤 제2차 국공내전이 벌어졌다. 이 내전의 결과로 대륙을 지배하게 된 것은 공산당이었다.
위화타이(우화대·雨花臺)는 그런 이념 대립의 역사를 안고 있는 곳이다. 난징 국민당 정권은 당시 활동했던 공산주의자들을 잡아 이곳에서 처형했다. 중국 공산당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처형당한 공산주의자가 10만여명에 달한다고 한다.
그 처형장 자리를 내전 끝에 다시 밟게 된 중국 공산당은, 1950년 그 자리에 ‘혁명열사릉원’을 건립했다.
기념관 안, 추모 자리에는 수천 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한 명도 잊지 않겠다는 선언처럼 보였다.
그런 중국 공산당이 나중에 문화대혁명이나 천안문 학살을 자행한 것을 떠올리면, 역시 역사는 한 쪽만의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그리고 ‘정말로’ 이 같은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감정 속에서, 스스로에게, 그리고 대한민국에게, “우리는 어떤가”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자작고개나 우금치, 구미란 등에서 희생된 이들을 기억할 의지가, 뒤이은 일제의 강압 식민통치 과정에서, 이어진 전쟁과 각종 사고와 여러 폭력 속에서 희생된 이들을 잊지 않을 자신이 우리에게 있는가?
‘우리가 당한 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저지른 일에 대해서도 잊지 않으며, 다시는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끔 하려는 노력은 있는가?
난징이 준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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