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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후손- 김덕명 장군]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유일하게 남은 집강소 보존을"

농민군에 물적·인적자원 지원한 '동학농민군 총 참모' / 유적 관리 소홀, 망치질 한번에 쓰러질 판 / 증손자 김석태 씨 "문화재 등록 서둘러야"

▲ 김덕명 장군 가상 초상화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했다. 동학농민혁명에서 2인자라고 불린 한 사내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함께 재판 받고 운명을 같이한 전봉준 장군의 선명한 사진은, 얼굴조차 기억되지 않은 그와 대비될 뿐이다. 동학농민혁명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이 사나이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전과 구전을 통해 떠도는 이야기가 그를 기억할 수 있는 전부다.

 

하지만 그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실천한 혁명가이자, 김제 금구 일대에서 대접주로 활동하며 조선왕실과 일본군의 블랙리스트 최상위에 이름을 올렸다. 동학농민혁명을 연구한 전문가들 사이에서 그가 없었다면 전봉준·김개남·손화중 장군의 활약도 없었을 것이라고 평가가 나오기도 한다. 동학농민혁명 전 과정에서 지도부 참모로써 인적·물적 자원을 공급하는 막중한 역할을 한 김덕명 장군의 이야기다.

 

김덕명 장군의 발자취를 더듬기 위해 그의 증손자인 김석태 씨와 함께 지난 17일 김제시 금구면 원평을 찾았다. 김 씨는 현재 전국동학농민혁명유족회장을 맡고 있다.

 

△원평과 김덕명

 

“원평은 동학농민혁명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곳이고, 김덕명 장군은 그 중심에 있던 인물입니다. 하지만 기록이 거의 없는 것은 물론 남아 있는 유적조차 소홀하게 관리되고 있는 현실이죠.”

▲ 김덕명 장군의 증손자인 김석태 전국동학농민혁명유족회장이 문화재로 등록되지 못한 채 쓰러져 가고 있는 ‘원평집강소’를 바라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다.

원평에서 만난 (사)김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의 최고원 상임이사의 첫 마디다. 최 이사는 평생 원평에 머물려 향토 사학을 연구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을 전해주는 기본 사료를 보면 원평과 관련한 기록은 거의 찾을 수 없고, 동학혁명의 역사에서 김제 원평이 갖는 위치를 생각한다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라는 게 최 이사의 설명이다. 1893년 교조신원운동 단계에서 원평집회가 갖는 의미는 매우 중요하게 강조되고 있지만, 1894년 혁명 전개 과정 서술에서 원평은 옆으로 비켜져 있는 실정이다.

 

그 이면에는 일본군의 문서 수집에 대한 집착이 자리하고 있다. 일본군 지휘부는 동학농민군과 접전을 할 때 무엇보다 먼저 동학농민군이 보유한 문서를 수집토록 지시했다. 이를 토대로 동학농민군 조직과 활동 사항 등을 파악한 일본군은 도처에서 농민군을 철저히 진압할 수 있었다. 반면 동학 조직에서 작성한 자료는 거의 없기 때문에 지역별 인물별 연구가 전혀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럼에도 여러 구전과 극소수 문서 등을 종합해 보면 원평은 집강소의 대도소가 있었고 동학혁명 때는 태인지방과 함께 농민군 주력부대가 일본군과 마지막 전투를 벌인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원평은 농민전쟁의 중심지였고 이곳에 터전을 잡고 있던 지도자가 바로 김덕명 장군이다. 김덕명은 언양 김씨로 본 이름은 준상, 자가 덕명인데 자를 이름처럼 써온 것은 다른 농민군 지도자와 같다.

 

그는 그리 가난하지 않은 중농 집안에 태어나 어릴 때부터 글을 익혔지만, 고리타분한 경서보다 병법 책을 읽어 뜻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와 가까운 한 일족이 대지주로 군림하면서 벼슬을 사서 세도를 부리는 일을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이들 김씨들의 재실이 있는 장흥리 안정 절골에서 종중회의를 할 때 이런 행태에 분노해 재떨이와 목침을 던지며 의기를 보였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이처럼 그는 젊은 시절부터 불의와 비리를 참지 못하고 의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가 체포됐을 때 관변 기록인 ‘순무선봉진등록’에는 “이놈은 크게 도소를 원평점에 설치하고 사사로이 국가의 곡식과 돈을 거두어들이면서 평민을 침학한 자이다”고 기록됐다. 또 그의 판결문에는 또 “김덕명이가 금구지방에서 무리를 모아 당을 이루고서 관고의 군대에 쓰는 물건을 마구 빼앗고 민간의 돈과 곡식을 약탈하면서 혹은 관가와 혹은 마을에서 멋대로 날뛰며 소요를 일으켜서 분수를 잊고 의리를 저버린 것이 그 끝간 데가 없다”고 적혀있다. 이 기록은 그가 집강소의 중심지도자로서 많은 군수품을 거두고 지주를 응징하며 농민들의 지지를 받았다는 것을 역설한다.

 

하지만 우금치에서 패한 뒤 원평으로 왔으나 기다리고 있는 건 고향의 품 대신 배신이었다. 그는 안정 절골에 있는 산지기 집으로 몸을 피했다. 산지기는 폐사가 된 안정사에 부처를 모셔 놓고 무당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김씨 문중의 토호들에게 구명을 호소했으나 구명은 커녕 이들은 오히려 관가에 고발했다고 전해진다.

 

△전봉준과의 인연

▲ 김제 원평 김덕명 장군의 유골이 봉안된 납골당.

그가 언제부터 전봉준이나 김개남과 만남을 이어갔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여러 가지 증언과 정황 등을 통해 동학농민혁명이 있기 전부터 인연을 맺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먼저 전봉준은 아버지 전창혁과 함께 고부 조소리로 이사하기 전에 원평에서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사실은 전봉준의 외가가 언양 김씨라는 점에서도 뒷받침된다. 원평은 언양 김씨의 집성촌이기 때문이다. 김덕명은 지식인으로 지역에서 재력을 가진 세력가였다.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그가 직접 참여한 기록은 없으나 전봉준보다 나이가 8년이나 많고 이 지역의 동학 대접주로서 상당한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김덕명은 연장자로서 전봉준과 뜻을 같이 한 동지이자 물질적 후원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김석태 회장은 “할아버지(김홍구)의 이야기로는 전봉준 장군이 어릴적 원평에서 증조할아버지(김덕명)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물적·인적 자원을 동원해 전봉준 장군을 도왔다”고 말했다.

 

△사라져가는 역사 현장

 

“역사의 현장이 사라진 뒤 이것을 재현하면 ‘역사와 단절’을 수반할 수밖에 없어요. 현장을 보존하는 것은 과거와 현재의 연결이고 더 나아가 미래에 동학의 정신을 이어줄 연결고리가 되는 셈이지요. 문화재 등록을 서둘러야 할텐데요….”

 

김석태 회장은 방치된 ‘원평집강소’를 보며 개탄스런 표정을 지었다. 현재 집강소 자리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원평집강소는 망치질 한번에도 건물이 주저앉을 정도로 훼손됐다. 뜯겨진 천정 사이로 보이는 상량문에 ‘光緖捌年壬午三月二十(광서팔년임오삼월이십·1882년 건립)’ 문구만이 건물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었다.

 

원평집강소의 상징적 의미는 크다. 당시 도축을 하며 재산을 모은 백정 동록개가 건립한 뒤, 동학농민혁명이 본격화되자 ‘신분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며 김덕명 장군에게 헌납한 것으로 전해진다.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생각해보면 상징성이 매우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사라져가는 역사 현장은 이뿐만이 아니다. 김덕명 장군의 생가터, 우금치에서 대패한 동학농민군이 최후를 맞은 구미란 등은 각종 자료 등의 부족으로 인정을 받지 못해 방치되고 있다.

 

“당시 동학은 보편적 정서였어요. 동학농민군이나 김덕명 장군이나 불의를 참지 못해 일어났고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한 것이었죠. 동학의 정신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는 현재도 살아 있어야 하고, 앞으로 미래를 살아갈 세대도 분명히 알아야 할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역사입니다.”

 

김석태 회장의 마지막 말은 살아 있는 역사마저 천대하는 전북지역 자치단체에 경종을 울리는 듯 했다.

김정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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