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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지역별 유적지와 기념사업 - 전주] 동학농민혁명 불꽃 가장 찬란하게 피운 곳인데…

'후백제 도읍지'·'조선왕조 발상지' 이미지에 가려 농민군 전주성 점령 등 역사 의미 기리는 정책 소홀 / 관련 유적지 산재해 있지만 어엿한 상징시설 없어

   
▲ 전주 완산공원내에 세워진 ‘동학농민군 전주 입성비’.
 

‘1894년 사건’에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데는 전주가 있었다. 민중들이 감영을 점령한 것이 조선역사상 처음이었고, ‘집강소’를 통해 민중에 의한 통치가 이루어진 것도 한국 역사상 최초였다. 여전히 논란이 있고 동학농민운동이나 갑오농민전쟁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학자도 있지만, 특별법으로까지‘동학농민혁명’으로 정리된 데에 바로 전주의 역할이 컸다. 전라도 수부, 전라감영이 자리한 전주성의 점령과 이를 바탕으로 한 집강소 설치가 당시 봉건주의적 이념과 제도에 결정적 타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1차 봉기의 화룡점정이었으며, 2차 봉기로 가는 중요한 열쇠를 쥐었던, 동학농민혁명사에서 가장 빛났던 그 전주가 오늘에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 시민들 가까이에 있는 전주 덕진공원이 그 답을 대신할 것 같다.

 

덕진공원에는 전북의 ‘법조3성’의 동상을 비롯, 간재 선생 유허비, 신석정·백양촌 신근·김해강·이철균 시비 등 전북인 낳은 많은 인물들의 동상과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동학농민혁명을 이끌었던 3대 지도자를 기리는 시설도 여기에 들어서 있다.

 

시민들 가까이에, 여러 위인들 속에 3대 지도자를 기억할 수 있는 장소라는 점에서 덕진공원 시설물이 나름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유적지도 아닌 곳에 제각각으로 설치된 지도자 3인의 시설은 별 울림을 주지 못하고 있다. 실제 안내판 하나 설치되지 않은 공원 구석에 설치된 시설물들을 알고 있는 시민들이 얼마나 될 지 궁금하다.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를 푸는 데 전주가 중요한 키워드이지만, 전주에서 동학농민혁명을 찾기란 이렇게 힘들다. 집강소 설치와 폐정개혁을 단행해 근대 민주정치를 열었던 상징적 공간에서 조차 그 역사를 떠올릴 수 없는 것이 현주소다. 정읍과 고창 등지에서 동학농민혁명의 과잉이라면, 전주에서 왜 상대적으로 외면을 받고 있을까.

 

덕진공원에서 보듯이 전주의 역사적 자원이 풍부한 점이 한 이유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후백제의 도읍지·조선왕조의 발상지로서 이미지를 살리는 데 정책의 힘을 실으면서 ‘동학’이 끼어들 틈이 적었다. 특히 그동안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저평가 속에 조선왕조와 대척점에 있었던 ‘동학’을 힘있게 부각시키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여기에 전주를 지역권으로 하는 기념사업회가 없었던 점도 전주에서 ‘동학’의 위상을 세우지 못한 배경이 될 듯하다. 전주 소재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일찍이 발족돼 많은 사업들을 벌였지만, 전국적 사업쪽에 관심을 두면서 상대적으로 전주를 소홀히 했다고 사업회 관계자들도 자성하고 있다.

 

△전주입성비 조차 점령 의미 못살려

 

현재 전주에서 동학농민혁명을 기억할 수 있는 기념시설은 덕진공원을 포함해 손으로 꼽을 정도다. 기념시설 또한 역사적 사실과 다르게 기술되거나 고증작업 없이 설치돼 보완이 요구되고 있다. 1981년 전주청년회의소와 풍남청년회의소에서 설치한 덕진공원내 ‘전봉준선생상’의 경우 ‘선생’이라는 이름부터가 낯설다. 전봉준 장군이 한 손에 사발통문 뭉치를 움켜잡고 패랭이를 쓰고 있는 형상의 동상 얼굴 또한 본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는 게 학계 의견이다.

 

가장 대표적인 전주지역 기념시설인 ‘동학농민군 전주입성비’도 전주성 점령의 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전주 완산공원내에 설치된 이 비는 1991년 전북도 문화재위원회에서 건립한 전주성 점령과 관련된 유일한 기념물이다. 완산은 동학농민군과 관군이 전주화약을 맺은 후 농민군 스스로 전주성에서 철수하기까지 농민군과 관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이이화 선생은 ‘전주성 입성’은 잘못이며, ‘전주성 점령’이 적확하다고 주장한다. 아무리 무혈입성이라도 농민군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보기 때문이다. 비문에 새겨진 동학농민군이‘부안 백산’기포 또한 사실과 달라 교정이 필요하다.

 

배항섭 성균관대 교수는 “전주입성비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해나 시민적 공감이 없이 세워져 전주성 점령의 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며, “이곳의 역사적 의미를 되살릴 수 있는 새로운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주성 점령에 앞서 금구에서 진격했던 용머리고개, 전주성을 점령하기 직전 농민군이 숙영했던 전주 삼천, 완산칠봉 전투지 등을 안내하는 기념시설이 전무하다. 다만 김개남 장군이 처형됐던 초록바위 안내판에는 처형지임을 안내하고 있고, 천도교에서 100주년을 기념해 전주 한옥마을에 건립한 ‘동학혁명기념관’이 그나마 상징적인 기념시설이 되고 있다.

 

△전북의 대표정신, 전주에서 살려야

 

전북일보가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앞두고 1992년 6월 창간호에서 전북도민의식 조사를 실시한 결과 ‘동학농민혁명이 전북의 정신이 되어야 한다’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전북도가 1999년 조사한 도민의식 조사에서도 동학농민혁명의 저항정신이 전북의 대표정신으로 생각하는 데 80% 이상이 동의했다.

 

혁명의 불을 지핀 곳이 정읍이라면 혁명의 불꽃을 찬란하게 피운 곳이 전주라는 점에서 전주가 동학농민혁명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 지 고민이 필요한 대목이다.

 

현재 추진되고 있는 전라감영 복원과 관련해 전라도 전체를 통괄했던 역사에만 머무르게 할 지, 근대민주주의의 역사를 쓴 집강소의 역사에도 힘을 실어야 할지 논의가 필요할 것 같다.

 

문병학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처장은 “전라감사의 집무실을 핵심으로 삼더라도 뜰 앞에 전라감사 김학진과 동학농민군 최고지도자 전봉준의 화약을 기리는 조형물이라도 설치해 전주화약의 의의를 새겨야 한다”고 말했다.

 

문 처장은 또 “동학농민군의 전주성 점령은 프랑스 혁명군이 바스티유감옥을 점령한 것과 비견된다”며, “프랑스대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에펠탑을 세운 것처럼 전주에 상징적인 조형물이나 기념시설이 꼭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 21세기 전주 역사문화정책 핵심 기제

 

- '근대민주주의 태동시킨 고장' 역사적 위상에 대한 재인식을

 

19세기말, 전라감영이 있던 전주는 동양적 근대와 서구적 근대가 극적으로 교차한 역동적인 공간이었다.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것이 1894년 5월 31일이었고, 전라도 전역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근대적인 폐정개혁을 단행한 것이 그해 여름이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896년 지금의 서문교회 자리에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가 들어왔고, 곧이어 예수병원과 신흥학교 터전이 마련되었다. 이처럼 전주성 주변은 근대 초기에 형성된 중요한 역사문화유적들이 즐비하다.

 

이는 전주가 조선 건국자의 본향일 뿐만이 아니라 전제왕조체제를 극복하고자 적극적으로 근대를 수용, 우리나라 근대민주주의를 태동시킨 매우 중대한 역사적 위상을 지닌 고장임을 말해주고 있다. 인류역사 전체 틀에서 보면 전주가 지닌 조선왕조의 본향이라는 위상은 역사발전의 역방향이고, 근대적 폐정개혁 단행으로 전제왕조를 극복하고자 했던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는 역사발전의 순방향이다.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 척양척왜 보국안민의 기치를 든 동학농민군은 전라도 수부이자 조선건국자 본향인 전주성을 함락시켰다. 이후 동학농민군 총대장 전봉준은 전라감사 김학진에게 전라도 전역에 집강소 설치를 요구, 감사 집무실이었던 선화당에 집강소 총본부격인 대도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을 단행했다. 이는 친일내각의 갑오개혁을 강제한 실질적인 힘이었다. 이처럼 전주는 조선건국자의 본향이자 전제왕조체제를 극복하고 근대민주주의를 실현시킨 역사적인 고장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전라북도(전주시)의 역사문화정책은 풍패지향(豊沛地響)에 붙들려 근대민주주의 효시라는 전주가 지닌 역사적 위상을 지역발전의 핵심기제로 활용하지 못했다. 이는 행정기관의 역사인식 부재 탓도 있지만 지난 한 세기 동안 극심하게 굴절되어온 근현대사의 부침에 더 큰 원인이 있다. 동학농민군이 쓰러진 후 조선은 일제식민지로 전락했고, 해방 후에는 세계사적 차원의 동서냉전체제 구축과정에서 빚어진 극심한 좌우대립 민족분단 한국전쟁 등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다. 그 연장선상에서 1960~1990년대 군사정권시기가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근대민주주의 효시라는 전주의 역사적 위상은 역사의 뒤안길에 암매장된 채 철저히 망각되었고, 조선건국자의 본향이라는 박제화 된 절름발이 역사인식이 자리했다.

 

21세기 문화관광시대, 우리는 서둘러 지난 한 세기 동안 박제화 된 전주의 역사적 전통과 문화에 대한 재인식에 나서야한다. ‘풍패지향’이라는 외날개짓의 한계를 서둘러 깨닫고, 더 늦기 전에 퇴화 일보직전인 역사발전의 순방향, 근대사 관문으로서의 역사적 위상이라는 날개를 활짝 펴야한다. 근대 민주주의 효시라는 날개의 핵심깃대가 동학농민혁명사와 그 역사유적들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문병학 시인·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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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용 kimwy@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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