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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님, 더는 못 가겠습니다요. 조금 쉬었다 가시지요.지게를 진 장정이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말했다. 다 떨어진 짚신, 여기저기 때가 묻은 남루한 옷, 눈 밑의 짙은 그늘. 마치 전쟁이라도 치르고 온 것 같은 모양새였다.하지만 마님은 고개를 저었다. 한 시라도 빨리 고향 땅에 당도해 일을 마무리해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오히려 그는 호통을 쳤다.지금 때가 어느 땐데 엄살을 부리느냐? 지체할 시간이 없다. 빨리 가자.주저앉았던 장정은 아무 말 못하고 슬금슬금 다시 일어섰다. 주저앉아 쉬는 것도 다 때가 있는 법이고, 지금은 그 때가 아니었다. 장정이 짊어진 것은 사람의 주검이었다. 그들은 반역죄로 처형당한 주검을, 위험을 무릅쓰고 간신히 수습해서 고향 땅 태인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때는 1895년 을미년, 동학혁명군 영솔장 최경선은 그렇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5대 장군 중 유일하게 생묘 남겨여기가 축현마을이에요. 저기 왼쪽에 보이는 산이 조왕곡이라는 덴데, 최경선 장군 묘역이 저기 있어요.정읍 시내에서 제3산업단지를 끼고 동쪽으로 달리다 들어선 길에서, 최경선의 손자인 최명언 정읍유족회 회장이 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원래는 더 높은 곳에 있었는데, 묘역을 조성하면서 접근성을 높이려고 이장했어요. 동학 연구자나 학생들이 찾아오곤 하니까.묘역 가는 길은 콘크리트로 단단히 포장돼있었다. 이 묘역은 1996년에 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가 성금을 모아 조성했다.지자체의 외면 속에서도 유족회, 시민단체, 개인 등으로부터 약 5000만원을 모아 뗏장을 덮고 묘비를 세웠다. 민예총 소속 조각가 김운성에게 의뢰해, 죽창 든 농민군을 형상화한 조형물도 세웠다.조형물이 총 11개인데, 우리는 12개라고 말해요. 사실 묘역에 두는 조형물을 홀수로 세우는 경우는 없거든요. 그건 일부러 그런 거예요. 나머지 하나는 바로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 혁명정신이라는 거죠.이갑상 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이사장은 이렇게 말하며 웃었다.그런데 최경선 묘역만 이렇게 잘 정돈돼 있는 이유가 뭘까?이 이사장은 묘역을 처음 조성할 때에도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특히 동학혁명을 주도했던 다른 인물의 유족들이 항의를 많이 했다고 한다.이 이사장이 그들을 납득시킨 단 한 가지 근거는 바로 생묘라는 점이었다.당시에는 혁명에 가담한 사람들은 다 역적이었고, 그래서 다들 무서워서 시신을 제대로 수습을 못했죠. 그런데 최경선 장군의 시신만은 성균관 진사를 지낸 형님이 하인들을 대동해서 모시고 온 겁니다.최경선의 형 영대는 산길로만 며칠에 걸쳐 시신을 운반해온 뒤 몰래 묻었다. 그리고 그 위치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했다. 오로지 족보에만 한 줄 적어 넣었을 뿐이었다.최명언 회장조차 직접적으로 전해들은 바가 전혀 없었다. 그가 조상의 묘소를 찾은 것은 한참 세월이 지난 뒤, 족보에 적힌 위치를 직접 찾아본 뒤였다.△사발통문 작성부터 함께했던 핵심 인물1859년에 태인에서 홍문관 대제학을 지낸 최성룡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최경선은 밑바닥 계층으로서의 농민과는 거리가 멀었다.당시 태인의 전주 최씨 집안은 상당한 부호였다. 맏형 영대는 성균관 진사였고, 최경선은 벼슬길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상당한 학식을 갖춘 엘리트였다.그랬던 그가 혁명에 가담한 이유는 명확하게 드러나 있지는 않다. 다만 1889~1890년 사이에 전봉준과 만나 교류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혁명에 대한 생각을 품어왔다고 추정할 수는 있다.1895년에 이루어진 재판의 기록물인 전봉준 공초에는 너는 최경선과 친한 것이 몇 년이나 되는가?라는 질문에 전봉준이 동향이므로 서로 친한 것이 5~6년이 된다고 대답한 대목이 있다.또 최경선에 대한 판결을 적은 제30호 판결선언서에는 전봉준의 모주(謨主음모를 꾀한 주체), 고굉(股肱팔과 다리)이 되어 종시기사(終時其事)에 참여라는 표현이 나온다.이로 미루어볼 때, 최경선은 거사를 구상하는 단계에서부터 전봉준과 함께했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당시 다른 양반 지주층이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하거나 아예 반농민군 활동을 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사발통문에도 이름을 올린 그는 태인 지역에서 동학 교인들을 모아 전봉준과 함께 1894년 1월 10일(음력) 고부봉기를 일으켰다.3월 백산봉기 이후에는 영솔장(군사를 직접 거느리며 지휘하는 선봉장)으로서 농민군을 이끌었다. 황토현에서의 승전을 시작으로 전주성 점령에 이르기까지 농민군 진격의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2차 봉기 때, 전봉준의 주력부대가 공주 방면으로 북상하자 최경선은 휘하 부대를 이끌고 손화중과 함께 광주로 향했다. 나주에서 수성군과 공방전을 벌이던 그는, 전봉준 부대가 우금치, 태인에서 연패하고 해산한 뒤에도 동복, 남평 등지를 누비며 혁명의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그러나 결국 동복 벽성리에서 밀고로 붙잡혀, 전봉준, 손화중과 함께 서울로 끌려가 재판을 받고 처형됐다.최경선에게는 후사가 없었다. 아들이 있었지만 어려서 사망했고, 딸도 있었지만 그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그의 시신을 수습한 형 영대는 그의 여섯째 아들 종식(족보상 이름은 헌규)을 장군의 양자로 들여 후사를 잇게 했다. 최명언 유족회장은 바로 그의 아들이다.△남은 자의 섭섭함최경선은 이렇게 동학혁명의 전 과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동학사를 정리한 오지영이 5대 장군으로 평가했던 인물임에도 세간의 인지도는 높지 않다.교과서에도 전봉준이나 손화중, 김개남에 대한 언급은 있지만 최경선에 대한 언급은 없다. 최명언 회장은 물론 섭섭하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그는 국가가 대우하는 것부터가 미흡하다고 말했다. 2004년에 제정된 특별법에 의해 참여자라는 지위는 받았지만, 여전히 국가유공자로서는 인정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기념일 제정 논의가 지지부진한 것도 이들에게는 섭섭한 일이다.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을 제정하자는 논의가 시작된 지는 오래됐지만, 혁명정신을 제대로 기리자는 뜻이 지자체 간의 자존심 싸움으로 번지면서, 논의 자체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고 있다.이렇게는 안 되는데.다시 갑오년을 맞은 감회를 묻자 그는 동학혁명이 잘 알려져야 하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남은 자의 섭섭함이 진하게 배 나오는 목소리였다.
△지략과 포용력 갖춘 손화중손화중 장군(1861~1895)은 정읍시 과교동에서 비교적 부유했던 토반 집안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혁명에 투신하지 않았다면 한 세월 넉넉히 살았을 법하다.그의 동학과의 인연은 지리산 청학동에서 시작됐다. 그는 1880년대 경치가 아름답다는조선 십승지지(十勝之地)를 찾아 처남 유용수와 함께 지리산 청학동으로 들어가 수도생활을 했다.당시 영남지방에서는 동학이 한참 퍼지고 있었다. 동학사상에 심취한 그는 후천개벽의 동학 종교론에 깊은 감명을 받아 동학에 입교했다. 그는 비폭력 무저항이라는 교단의 방침에도 불구하고 전봉준의 혁명론에 공감, 마침내 갑오년 3월 고창 무장에서 포고문을 공포하고 전국적인 동학혁명 대장정에 나서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지략과 포용력을 갖춘 그는 동학군의 봉기를 막후에서 지휘하면서 동학군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앞서 그해 1월 고부봉기 때도 전봉준과 함께 앞으로의 투쟁 방법에 대해 상의하는 등 혁명의 처음부터 깊이 관여하면서 동학군의 진로를 결정했다.손화중 장군 후손에 따르면 혁명 이전부터 전봉준은 손 장군을 스승처럼 대하며 혁명의 시기와 방법 등에 대해 논의했다.무장기포 이후 그는 전봉준과 함께 농민군을 이끌고 전라도 일대를 석권했으며, 갑오년 3월 백산대회에서는 김개남과 함께 총관령으로 추대됐다.그는 전주성 점령 후 2차 봉기 때 광주에서 기포, 북상하는 전봉준을 대신해 광주와 나주 등 후방을 지켰다.일본군이 바다를 통해 전라도로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한 것.그는 이에 우선 관군을 진압할 필요를 느껴 1894년 10월, 11월 나주성의 수성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등 후방 작전을 주도했다.하지만 끝내 관군의 반격을 견디지 못하고 광주로 후퇴했다.이후 고창 질마재에서 체포된 후 일본군에 넘겨져 다음해인 1895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동학 대접주 손화중 손화중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34세로 지도자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렸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교인 1만여명을 거느린 대접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의 고결한 인품과 학식 덕분이었다.전봉준이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를 무장에서 시작한 것은 이곳을 근거로 하는 손화중의 강력한 동학조직이 있었서이다.총 8000여명이 집결했다는 백산대회에 참여한 동학군 가운데 손화중이 이끈 농민군은 절반에 가까운 3500여명에 달했다.또한 동학농민군의 최대승전으로 기록되고 있는 황토재싸움도 사실상 손화중의 조직이 주도적인 역할을 해 거둔 승리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삼례 2차 봉기 이후 그는 북상에 참여하지 않고 나주 장성 지역에 머물면서 일본군의 후방교란에 대비했다. 이는 일본군이 나주 해안으로 상륙한다는 소문이 있었고 강력한 나주지역 반농민군세력의 준동을 막자는 의도에서 나온 결과였다. 또한 후방에서의 군량미 확보도 그의 책임이었다. 전쟁에 있어 든든한 후방지원군이 있다는 것은 큰 힘이 된다.그만큼 그는 믿을 수 있는 동학 지도자였다.하지만 공주 우금치 전투의 패배로 북상하던 동학군이 와해되면서 그의 목숨도 위험에 처하게 됐다.끝내는 관군에 붙잡혀 사형 선고를 받게 되면서 새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나섰던 그의 활약상도 역사 속으로 묻히게 됐다.△반목 보다 화합 통해 동학정신 계승해야2004년 동학혁명이 일어난 지 110년 만에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제정으로 동학농민혁명 후손들도 기를 펴고 살게 됐다.이 때부터 국가기념일 제정을 위한 논의가 모아졌지만 각 지방자치단체간의 이견으로 기념일 제정은 난관에 부딪혔다.이에 최근 동학혁명 유족회 측은 최근 특별법 공포일을 기념일로 지정해 줄 것을 정부에 건의했다. 지역갈등 때문에 기념일을 정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지역성이 없는 날을 기념일로 하자는 의견이다.이를 바라보는 동학 후손들의 마음은 쓸쓸하기 그지 없다.손화중 장군의 손자 손홍렬씨는 기념일이 뭐가 대수라고, 이렇게들 싸우는지 모르겠다면서 혁명의 정신을 유지, 계승하는 것이 현재로선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손씨는 이어 동학이 난에서 혁명으로 인정 받은 지도 10년이 됐는데도 혁명정신보다 보여지는 기념일에만 집착하는 세태가 씁쓸하다고 덧붙였다.손씨는 백성이 잘 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애쓴 선조들의 얼과 기개를 본받아 대립 보다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학농민혁명 2주갑을 맞은 2014년. 두 갑자가 지나는 동안 우리나라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봉건왕조 국가에서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를 거쳐 민주주의 국가로 거듭났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고픈 국민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120년 전 동학농민혁명은 미완성으로 막을 내렸다. 이뤄지지 않은 사랑이 아름답다고 했던가. 많은 사람들이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인용하고 있다. 특히 오는 64지방선거에 출마 예정인 많은 지역 정치인들이 출사표를 던지면서, 동학의 정신을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동학농민혁명을 왜곡하려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 때문에 동학농민혁명 지도자의 후손들은 두 번 울어야 했다. 지난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정이 이뤄지기 전까지 동학 난, 민란 등으로 폄하돼 후손으로서 자긍심을 갖지 못했다. 가난의 대물림에다가 제대로 배울 수 있는 형편도 못된 후손들은 눈물을 곱씹어야 했다. 가까스로 명예회복을 이뤄냈지만 최근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 등으로 후손들은 역사전쟁 2라운드를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던 김개남 장군의 후손들이 겪고 있는 역사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여다본다.△전라좌도 호령하던 김개남김개남 장군(1853~1894)은 전봉준손화중 장군과 더불어 동학농민운동을 이끌었던 3대 거두다. 전라좌도를 호령하던 그는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모델이 될 만큼 매력적인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김개남 장군은 농민군 지도자 중 가장 급진적인 강경파로 전봉준 장군과는 다르게 급진적 성향을 보여 후대에 많은 오해를 낳고 있다. 1894년 8월 평양전투에서의 대승을 전기로 청을 굴복시킨 일본은 조선의 내정에 노골적인 간섭을 시작한다. 이 때 남원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김개남 장군은 좌도의 농민군 7만명을 남원에 집결시켜 대회를 열었다. 전봉준손화중 장군은 후일을 도모코자 대회를 만류했지만 김개남 장군은 한번 흩어지면 다시 합하기 어렵다며 두 사람의 제의를 거절했다. 그는 봉건세력과의 타협을 철저히 거부했다. 실제 그는 집강소 시기에 자신이 관할하고 있는 전라좌도의 양반들을 가혹하게 정치했다. 화산 같은 김개남 장군의 폭발성과 추진력은 그의 가장 큰 매력이었으나, 동시에 한계이기도 했다. 세상을 바꿔보자는 분기에 기름을 부었지만 혁명의 대세가 기울자 그의 성격은 독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그는 두말 할 것 없이 동학농민운동을 이끈 일등 공신이다. 동학농민혁명이 미완에 그쳤기 때문에 그를 둘러싼 오해가 증폭되고 있다는 게 유족들의 주장이다. △항변 없는 죽음 역사 논쟁으로전주화약 이후 집강소 시기나 2차 농민혁명 때 보여준 김개남 장군의 다소 격한 행동들이 상대적으로 부각돼 포악함 또는 냉혹함이 그의 기질을 형용하는 어휘가 되고 말았다.이는 김개남 장군의 경우 전봉준 장군과는 다르게 유언과 판결문 한 장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점이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게 유족들의 설명이다. 1894년 12월 1일 측근의 고발로 체포된 김개남 장군은 농민군 지도자 중에서 가장 잔혹하고 전격적으로 처형됐다. 전라감사 이도재는 김개남 장군의 위력에 위축돼, 그를 서울로 압송 중 농민군에 의해 탈취 당할 위험이 있다는 핑계로 아무런 재판 과정 없이 체포 이틀 후에 서교장에서 참수했다. 1894년 12월 3일의 일이었다. 그의 시신은 남원 일대에서 핍박받은 양반 토호들에 의해 짓밟혔고 그의 간을 꺼내 씹기도 했다고 한다. 그의 머리는 서울로 이송돼 서소문 밖에서 3일간 효시됐다. 8척 장신에 호령을 하면 앞산이 쩌렁거렸다는 무골은 판결문 한 장 남기지 않은 채 갔다. 입과 입으로 전해온 김개남 장군의 진짜 모습은 어렴풋한 신화와 함께 과격한 모습이 양존하고 있다. 이 때문에 최근 역사왜곡 논란에 휩싸인 교학사 교과서에는 김개남 장군에 대해 (동학농민군의 지도자인) 김개남은 (중략) 반대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살육과 약탈을 허용하였다. 이는 결과적으로 전세를 불리하게 만들었다(184쪽)고 서술했다. 이는 동학농민군에 대한 왜곡된 서술이라는 게 민족문제연구소의 지적이다. 전세가 불리해진 것은 김개남 때문이 아니라 일본군의 개입이 결정적이었다는 것이다.김개남 장군의 증손인 김종기씨는 이 교과서를 보고 어안이 벙벙했다. 김개남 장군이 양반 계층에 대해 엄혹하게 대한 것은 어디까지나 봉건적 폐단을 바로잡는 차원에서였고, 오히려 민중 대부분은 그런 김개남 장군을 열렬히 지지했다.김씨는 동학혁명의 본거지인 전북 지역에서도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한 학교가 있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전주의 상산고는 지난해 12월 31일, 교학사 교과서를 지학사 교과서와 함께 역사 수업에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상산고 동문회를 비롯해 전북 지역 및 전국의 시민사회단체들이 강하게 반발했다.상산고는 일주일 뒤에 교학사 교과서 채택을 철회했고 교학사는 뒤늦게 교과서 내용을 수정했지만, 유족들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남았다. 김씨는 현재 교학사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동학정신, 역사왜곡 막아가난은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왜곡은 참을 수 없었다. 가난은 대물림돼도 부끄럽지 않으나, 역사 왜곡이 대물림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김종기씨의 이 한마디는 우리나라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모두 담고 있었다. 김씨는 역사는 살아 움직이는 생명으로, 역사왜곡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시민들이라고 했다. 올해 초 대한민국 사회를 달군 교학사 교과서 역사 왜곡 논란에서, 결국 전국 수 백개 학교 가운데 한 곳만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한 것은 깨어있는 시민들의 양심적 행동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교학사 교과서 채택을 막기 위해 나선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비록 이들의 얼굴은 잘 알지 못하지만 역사왜곡을 함께 막아낸 동지다면서 같이 싸워준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말을 전하고, 이들에게서 동학의 정신을 엿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우리나라가 혼란의 시기를 겪고 있는 것은 지도자 계층의 그릇된 역사인식 때문이다면서 국민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알려주고, 올바른 역사관을 가진 국민이 많아지게 되면 이를 바로 잡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동학농민혁명군 후손들의 피폐한 삶은 지도자들의 후손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체포된 지도자들 대부분이 반역죄로 처형되면서 그 가족들은 오랫동안 역적 집안이라는 낙인을 달고 다녀야 했다. 가장을 잃은 가족들은 당장 연명조차 버거웠고, 관의 감시와 주변의 눈총 또한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2004년에야 특별법 제정으로 명예회복과 복권이 이루어졌지만 사건이 발생한 지 110년은 그 후손들에게 너무 긴 시간이었다. 가난의 대물림에다가 제대로 배울 수 있는 형편도 안된 이들에게 지도자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은 차라리 사치였다. 동학농민군을 이끌었던 전봉준김개남손화중최경선김덕명 장군의 후손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고, 선대를 어떻게 기억하는지 들여다본다.전봉준 장군(1855~1895)을 제쳐놓고 동학농민혁명을 이야기 할 수 없다. 고부봉기와 무장기포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그는 백산대회(1894년 음력 3월26일~3월29일)에서 총대장으로 추대된 후 내내 혁명의 중심에 섰던 최고 지도자였다. 그를 기리는 시설물들이 그의 행적을 따라 정읍과 고창을 중심으로 여러 곳에 설치돼 있다. 그가 태어난 고창 당촌(고창읍 죽림리)에 생가가 만들어졌고(2000년), 혁명 당시 살았던 정읍 이평면 장내리의 고택은 사적지로 지정돼(1981년) 관리되고 있다. 동상 혹은 부조 등으로 그를 형상화 한 조형물도 10여곳에 이르며, 그의 이름을 딴 전봉준공원(정읍 내장산 입구)까지 조성됐다. 선조묘와 부모묘도 천안전씨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당시 역사가 재조명되고 재평가 받으면서 전봉준 장군이 이렇게 기려지고 있지만, 정작 그의 직계 가족은 여전히 미궁 속이다.△베일에 쌓인 가계사실 전봉준 장군의 생애 자체가 베일에 가려진 부분이 많다. 1차적 자료라고 할 그가 남긴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고, 그의 가족들이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생애에 관한 내용들은 재판당시 진술과 구전 등으로 알려진 정도다. 그가 고창 당촌에서 출생했다는 사실은 오지영의 〈동학사〉(1940년)에 나온 내용으로, 고창의 향토사학자 이기화씨가 천안전씨 족보와 구전 등을 통해 확인했다. 가족 상황 역시 명확하지 않다. 직접적인 자료는 1차 재판에서 진술한 6명이라는 게 전부다. 부인과 자녀 4명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960년대부터 동학농민혁명 연구에 몰두해온 정읍의 향토사학자 최현식(1923~2011)씨는 생전에 전봉준 장군의 가계(家系)를 추적했다. 그는 2남 2녀중 장녀 전옥례 여사(1880~1970)를 만나 들은 증언을 〈갑오동학혁명사〉에 담았다. 증언자인 전 씨는 15세의 나이로 화를 피해 진안 마이산으로 들어가 김옥련으로 변성명하고 금당사 공양주로 지내다가 23세에 결혼, 두 아들을 두었다. 전봉준 고택은 자신이 어려서 살았던 집이라고 했으며. 그동안 숨어 지내다가 갑오동학혁명제가 열리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됐다는 것이다. 장남(용규)은 손을 두지 않고 사망했으며, 차남(용현)은 행방불명, 차녀(성녀)는 고택 부근에서 살며 결혼해서 딸을 둔 것으로 파악했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흐른 탓에 가족관계를 증명할 만한 기록이나 주변의 증언이 뒷받침 되지 않아 직계 후손에 대한 사실은 여전히 명확하지 않다. 특별법 제정에 따라 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에서 벌인 유족 심사에도 4~5명이 전봉준 장군의 후손이라는 유족신청을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관련 증빙 자료가 없을 뿐더러 전봉준 장군의 시신조차 수습되지 않았기 때문에 유전자 감식 등으로 판별할 방법도 없기 때문이다.△국회서 학술대회 계획직계 가족이 없는 상황에서 천안전씨 차원에서 전봉준 장군이 기려지고 있다. 고창과 정읍지역 천안전씨 문중은 갑오년 1주갑인 1954년 고택 부근에 단비를 만들어 매년 제사를 지낸다. 〈갑오민주창의통수천안전공봉준지단〉이라고 쓴 이 단비는 김제 출신의 역사학자 김상기 박사(서울대 교수 역임)가 명명했다. 종중에 의해 설립됐지만, 장군이민주투사로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한 첫 시설물인 셈이다. 종중은 이 단비의 역사성을 들어 사적지나 문화재로 등록되길 바라고 있다.묘지 관리와 제사는 계손(系孫)인 전만길 씨가 50년간 관리했으며, 현재 그의 아들인 전성준 씨(54, 서울서 사업)가 2004년 작고한 아버지의 뜻을 이어 봉사손이 되었다. 전 씨는 아버지는 글자도 모르는 분이었지만 끌림과 혈족이라는 확신 때문에 사명감을 갖고 50년간 제사를 지내셨다고 말했다.장군의 제사는 100주년 때부터 천안전씨 대종회 차원에서 기일인 매년 양력 4월24일 시향제로 치러지고 있으며, 시향제에는 200~300명이 참여하고 있단다.천안전씨 대종회는 지난해 전봉준장군유적보존회를 사단법인 전봉준장군기념사업회로 확대 개편, 장군을 기리는 사업들을 준비하고 있다. 법인 이사장을 맡은 전해철 씨(81)는 기존의 시향제를 올해부터 국민적 추모제로 치르고, 국회에서 학술대회를 열겠다고 밝혔다. 국회에서의 학술대회는 집강소를 통해 풀뿌리민주주의를 시도했던 그 정신을 살릴 수 있다는 취지에서다. 전 이사장은 충남도로부터 승인을 받아 천안전씨 중심으로 법인이 시작됐지만, 향후 전국적인 모임이 될 수 있게 지역별 지부를 만들어 문호를 활짝 열 계획이라고 했다.전봉준 장군을 기억하고 기리는 활동들이 이렇게나마 이루어져 위안이 되고 있다. 그러나 사람다운 삶을 꿈꿨던 장군의 정신은 시설물이나 제사만으로 기려질 수 없다. 또 사실에 바탕을 두지 않는 무작정의 미화도 장군을 욕되게 한다는 점을 경계해야 할 것 같다.● 선친 이어 전봉준 장군 제사 모시는 전성준 씨 "서울에 전봉준 장군 동상 서는 날 올 것"당시 함께 처형된 손화중김덕명최경선 장군의 시신은 수습되지 않았습니까. 전봉준 장군의 시신도 분명히 수습됐을 것이며 어딘가에 기록으로 남아있을 것입니다.선친에 이어 2004년부터 전봉준 장군의 단소(가묘)를 관리하며 제사를 모시고 있는 전성준 씨(전봉준장군기념사업회 사무총장)는 우리의 노력에 따라 전봉준 장군이 실제 묻힌 곳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나타냈다.아버지는 단소 관리를 위해 집에서 8킬로 정도 떨어진 단이 있는 곳까지 새벽에 소달구지를 끌고 다녔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제사 때 허름한 차림의 한 노인이 찾아온 적도 있었답니다. 거제도에 살고 있으며, 친손이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후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장군의 시신과 친손을 찾지 못한 안타까움과 함께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데 대해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사람이 중심인 세상을 만드는 게 장군의 뜻 아니었습니까. 우익이냐 좌익이냐 따지고, 정치적 심벌로 이용하려 하는 것은 그의 정신을 퇴색시키는 일입니다.그는 또 전봉준 장군의 유적지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과장되거나 미화되는 것을 피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자신이 관리하고 있는 단소가 처음에는 조촐했는데 지금은 군더더기(비석, 석등)가 붙어 화려한 쪽으로 치장된 것 같다고 했다. 처음으로 돌려 사적지나 문화재로 등록되길 희망했다.고창의 생가 역시 가난했던 장군의 집으로는 거리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낮아질수록 더 커진다는 것을 기리는 사람이나 단체에서 경구로 삼았으면 좋겠단다.독립지사나 애국지사처럼 서울 한복판에 전봉준 장군 동상이 건립되는 날이 분명 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전적지나 기념관이 아닌, 서울의 중심부에 동상이 서는 날이 동학농민혁명이 제대로 평가받는 날 아니겠습니까.
△이사경 접주와 용반마을동학농민혁명은 가장 남쪽에 위치한 전라남도 장흥에서도 매우 처절하게 진행되었다. 장흥의 동학농민군은 이방언 대접주의 지휘 아래 이인환, 이사경 등의 접주가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중 이사경 접주는 자신이 살고 있는 장흥 부산면 용반마을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사경은 1894년 6월경 용반마을 근처에 있는 자라번지라는 곳에 집강소를 설치하였다. 이 집강소는 장흥지역에서 가장 먼저 설치된 것으로 <일사>(장흥 유생 박기현 저) 에 따르면 장흥군 부산면 자라번지에서 장흥 동학도들이 대회를 열고 농민군이 죄있는 사람을 들을 잡아들여 징치하고 있으며, 26일에는 강진 병영의 우후(虞侯)를 잡아다가 곤장을 치고 400냥을 징발하기도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사경의 부친 이호인은 이 지역에서 일찍부터 동학에 입도하여 동생 호의, 호신까지 입도시켜 활동하였으며, 몸이 아파 죽게 되자 아들 이사경에게 접주를 넘겨주었다고 한다. 이호인은 실질적으로 이 지역 동학교도들을 관리한 선두주자로서 생을 다하게 되자 주변의 교도들과 상의하여 아들인 이사경에게 접주의 지위를 대물림한 것이다. 이후 이사경은 용반리 농민군을 이끌고 12월 4일 벽사전투, 12월 5일 장녕성 전투, 12월 7일 강진전투, 12월 10일 강진병영전투 등에 참여하였으며 12월 15일 장흥 석대 전투, 12월 17일 옥산전투 등에 참여하였다가 이후 용반리로 피신하여 생가 근처의 기역산에 은신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몰래 돌아가며 이사경에게 음식을 주면서 보호하였으나 기역산 너머 유치대리에 사는 모씨의 밀고로 체포되어 1895년 1월 벽사역에서 처형되고 말았다. 이사경 접주의 증손자 이정태씨는 증조부 이사경 접주는 기골이 장대하고 용맹하였으며 인품 또한 넉넉하여 따르는 사람들이 그를 접주로 추대하였다고 어릴 적 동네 어른들로부터 들었다고 말했다. △농민군은 처형되고 마을은 전소용반리는 장흥지역 동학농민군 활동의 거점으로서 인천이씨들이 집성을 이루고 있어 마을사람 대부분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 이렇게 마을 전체가 참여하자 이에 대한 토벌도 매우 철저하게 이루어졌다. 체포된 용반리 동학농민군들은 장흥 원도리 벽사역에서 뒤로 손을 묶인 뒤 쌓아올린 짚단 위에 올려놓고 불을 질러 화형으로 처형되었다. 처형된 시신은 겨울 날씨의 혹독한 추위에 꽁꽁 얼어 방치 되어 그 참상이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가장을 잃은 가족들이 시신을 찾았으나 얼음덩이처럼 굳어 있어, 그 아내와 이웃 아낙들이 한 사람은 머리 부분을 한 사람은 발 부분을 머리에 이고 걸어서 마을로 돌아왔다고 한다. 용반마을 출신 동학농민군 이세근의 손자 이연기씨는 젊은 시절 떡 방앗간을 하면서 조부와 같은 제삿날에 동네 부인네들이 갑오 동학 때 돌아가신 어른들의 제사를 지내야 한다며 떡을 맞춰간 일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조모 안봉문이 조부 이세근이 전투에 나가기 전에 왼쪽 속 섶 가슴 쪽을 가위로 잘라 두었었는데, 그 자국을 보고 화형을 당한 시신들 속에서 조모가 조부의 시신을 찾아 왔다고 한다.고 하여 그 내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동학농민혁명이 끝날 무렵 농민군 토벌대는 이 마을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당시 300여 가구가 있었는데, 이중 3가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불타지 않은 3가구는 빈소가 설치되어 있던 어떤 집의 아래채, 집을 막 지어 지붕만 덮어 놓은 집으로 지붕만 타고 집채는 타지 않은 집, 마을 뒤편으로 멀리 떨어진 배밭 골에 있어 너무 허술하여 그냥 둔 집 뿐이라고 한다.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용반마을과 용반마을 사람들이 치뤄야 할 댓가는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다. 이후 용반마을 사람들은 선조들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것을 알리지 않기 위해 족보에 사망한 날과 다르게 기록해 놓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것이 후손들에게 얼마나 많은 고초와 핍박을 당하게 하였는지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면면히 이어지는 역사 용반마을 앞 들판은 참 넓고 넓다. 어떻게 이렇게 넓은 들이 있을까 싶다. 이 마을 사람들은 이 넓은 들판에서 열심히 일하고 여기서 수확한 곡식들로 충분히 살아가고도 남았다. 마을은 결속이 잘되었다. 화합도 잘 되었다. 300가구가 넘는 마을은 평화로웠다. 그런데 관리들은 그 넓은 들판에서 수확한 곡식을 약탈해갔다. 결국 이 마을 전체가 이사경 접주를 중심으로 일어서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생존의 문제였다. 누군가 그들의 것을 빼앗아 가지 않았다면 그들은 농민군이 되지 않았을 것이며 그들의 마을은 불태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이 끝나고 120년이 지난 오늘 장흥 용반마을은 여전히 풍요롭고 한가롭다. 120년 전의 불태워진 흔적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그날의 역사는 후손들의 몸과 마음으로 이어져 면면히 흘러오고 있다. △유족회 주관 매년 합동제례2014년 1월 24일 오후 2시, 전라남도 장흥군 부산면 용반리에서 합동제례가 있었다. 합동제례를 지내는 이유는 이 마을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던 동학농민군들이 모두 1895년 1월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이 제례는 장흥동학농민혁명유족회에서 주관하여 진행되었다. 제례의 준비는 이사경접주의 증손자 이정태씨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이세근의 손자 이연기씨가 맡았다. 이들은 아직까지 이 마을에 남아있는 농민군의 후손들이다. 이 제례에 위패가 모셔진 동학농민군은 장흥 용반 접주 이사경을 비롯하여 이호인, 백인명, 최진문, 최승문, 이원찬, 최창업, 이원종, 이호의, 이세근, 이회근, 이호신, 이순근, 이수공, 이몽근 등 15명에 달한다. 이러한 모습은 요즘 흔히 볼 수 없는 장면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120년이 지난 지금에 까지 후손들이 억울하고 처참하게 죽어간 동학농민군을 잊지 않고 그 넋을 기리고 있다는 것이다. 매년 제례를 지내고 그것을 이어간다는 것은 후손들이 동학농민군의 정신을 잊지 않고 있으며 그것을 우리 후손들에게 계속 물려주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120년이 지난 시점에 우리는 동학농민군의 정신을 잊지 않기 위해 무엇인가 몸으로 실천해야 한다. 그것은 멀리 있지 않다. 장흥군 용반리의 동학농민군의 후손들처럼 동학농민군의 처절한 죽음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싶다.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부장
1800년대 중반 조선왕조의 병란과 농민항쟁은 군현이나 도의 경계를 넘지 못한 채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1984년 11월 동학농민군의 2차 봉기는 전국으로 확대됐다. 함경도를 제외하고 거의 전국에 걸쳐 전개됐다.그 발자취를 더듬어보면 이해 10월, 전봉준 장군은 재봉기를 결정했다.이에 충청도와 전라도 인접지역의 농민군은 완주 삼례에 집결했다. 동학 교주 최시형도 기포령을 내려 동학조직을 재무장토록 했다. 이로부터 한 달 뒤인 그해 11월, 충청도 북부와 경기도, 강원도에서 모인 북접농민군은 손병희 통령의 지휘 아래 충남 논산으로 행군해서 남접농민군과 합류했다. 동학사 기록과 관군보고서에는 갑오년 논산에서 공주까지 산과 들에 사람이 꽉 들어찼다거나 벌떼처럼 밀물이 넘치는 것처럼 밀려왔다고 적었다.논산에 집결한 동학농민군은 전봉준 장군의 남접과 손병희 통령의 북접이 합세한 세력이었다. 남접은 노성과 효포 쪽으로 공격했고, 북접은 이인에서 봉황산과 하고개를 공격했다. 그러나 화력의 열세로 일방적으로 패배를 당했다. 전봉준 장군은 공초에서 2차 접전 후 1만여 군병을 점고한즉 불과 3000여명이요, 또 두 차례 더 싸운 뒤 점고한즉 500여명이었다고 했다.얼마나 많은 농민군이 총탄에 스러져갔는지 알 수 있는 단서다.당시 공주 우금치 전투에 참가한 익산 왕궁 출신 최원국(崔元局)은 이 전투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은 채, 구사일생으로 전장을 떠나 귀향해 후일을 기약했다.△우금치 전투 참전군 대패최원국은 1863년 생으로 왕궁면 온수리에서 터를 잡고 살아왔다.농업에 종사했던 그가 동학에 입도한 계기는 확실치 않다. 왕궁 지역에서는 동학혁명과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특별한 사건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다만 왕궁 지역은 1894년 9월 재봉기의 집결지인 삼례와 가까워, 그도 이에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특히 후손들은 그가 혁명 초기부터 활동해왔다는 증언을 하고 있어, 1차 봉기 이전부터 혁명에 깊숙히 관여해온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최원국의 장손 최병관씨(79)는 모친으로부터 할아버지가 당시 백산이며, 정읍이며 인근지역으로 날듯이 돌아다니셨다고 들었다고 말했다.하지만 최원국의 주요 행적은 우금치 전투 때부터 두드러진다.갑오년 11월 동학군을 토벌하기 위해 참전한 일본군은 1개 중대씩 3대로 나뉘어 동로군은 충주에서 강원도로 들어가 순회했고, 중로군은 청주로 직행해서 옥천 보은 금산 일대로 남하했다. 서로군은 천안 홍주 공주로 내려갔다. 동학농민군은 수많은 희생자를 냈지만 완강히 저항했다. 전봉준 장군은 북상의 요지인 공주 점거를 당면 목표로 정했다. 이때 우금치전투가 벌어졌다. 우금치는 최대 규모의 공격이 감행된 주전장이었다. 공주 이인과 효포에서도 전투가 벌어졌고, 그와 함께 11월 22일부터 12월 5일까지 홍주와 문의 등지에서 6차례의 전투가 벌어졌다. 이 모든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대패했다. 이로 인해 동학농민군의 상경은 좌절됐다.당시 전투에서 최원국은 농민군의 일원으로 참전, 진격하다가 다리에 총탄을 맞고 정신을 잃었다.새벽녘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 밑에 깔려있었던 그는 심한 갈증을 느낀 나머니 눈을 떴다. 주위를 둘러봤을때 전날까지만 해도 동고동락했던 전우들의 시체가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그는 인근 농가로 피신, 간단한 응급처치를 끝낸 뒤 고향으로 쓸쓸히 내려왔다. 그의 가슴 속에는 다시 한번 들고 일어나 일본군을 응징하겠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화력 열세 절감, 신무기 개발 전념최원국은 아픈 몸을 이끌고 고향인 익산 왕궁으로 귀향했다.이때부터 그는 일본군의 막강한 화력을 극복할 수 있는 신무기 개발 및 화약 제조에 투신했다.그는 우선 뜻을 같이 하는 지인들과 함께 자신의 초가집 처마의 여러 해 동안 묵은 썩은 새(초가집의 지붕을 엮은 이엉) 물과 소변으로 화약을 만들었다.또, 남몰래 화승총을 쏘는 연습도 하며 후일을 기약했다.당시 그는 총구에 화약을 재고 콩밭 일곱 두렁을 달려가면서 총을 쏠 수 있어야 1등 사수라는 말을 종종 했다고 한다.하지만 일본군의 농민군 색출 작전에 신변의 위협을 느끼는 등 아슬아슬한 줄타기 같은 삶을 살았다.이에 그는 장남 한수와 차남 두수를 일가 친척들에게 양자로 보내고, 막내 덕수와 부인만 데리고 처가로 떠났다. 이때부터 그의 논이며 밭이 친일파 지주들에게로 넘어가면서,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고, 꾸준히 독립투사 및 동학 도인들과 접촉하면서 그들에게 활동자금을 지원했다. 짚신을 삼아가며 어렵게 번 돈의 대부분이 여기에 쓰였다.손자 최병관씨가 기억하고 있는 최원국은 이렇다.3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어렴풋이 할아버지께서 골방에 앉아 짚신을 삼고 계신 모습이 떠올라. 어린나이에도 깊게 패인 할아버지의 주름과 불편한 다리가 인상 깊었어.그는 이후에도 계속 독립투사 및 동학 도인들과 꾸준히 접촉해오다, 광복을 맞이하기 전인 1936년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하지만 그의 부당한 외세의 침략에 대한 항쟁과 반봉건 정신은 후대까지 면면히 내려오고 있다.△동학의 정신 계승유지하는 자랑스러운 후손 되고파최병관씨는 한 번도 할아버지를 원망한 적이 없다. 가족들과 후손들이 고초를 겪긴 했지만, 그 모두가 다 국가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그러면서도 뒤늦게서야 혁명에 투신했던 농민군들이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게 된 것은 아쉽다면서 이제라도 동학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가기 위한 국가사회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그는 할아버지대의 비극적인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선 우리나라가 좀 더 강한 힘을 길러야 한다고 역설했다.외세의 무자비한 총칼 앞에 스러져간 수많은 농민군의 전철을 밟아선 안 되기 때문.지금의 잘사는 대한민국은 우리 선조들의 땀과 눈물로 만들어 졌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돼. 모두가 힘을 모아 더 강대하고, 잘사는 한국을 만드는데 힘을 모아야 해.
지난해 끝자락을 뜨겁게 달궜던 화두는 단연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였다.시작은 철도노조의 파업에 대한 것이었지만, 이 인사말에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언어로 응답하면서 들불처럼 번졌다. 가슴 속에 담아두고 있던 안녕치 못한 이유를 끄집어낼 창구가 열린 셈이다.120년 전에도 그랬다.시절이 하 수상했다. 무너져가던 조선 정부는 탐관오리들의 부패를 막을 도리가 없었다.민중은 안녕치 못했지만, 그 울분을 모아낼 공간이 없었다.첫 번째 대자보의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사람을 하늘같이 대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은 신흥 종교 동학이었다.1892년부터 보은, 삼례 등지에서 교도들이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집회는 처음에는 혹세무민 혐의로 처형된 교조 최제우의 죄를 벗겨달라는 교조신원(敎祖伸寃)에 초점을 두고 시작됐다.하지만 봉건적인 구습에 짓눌려 있던 농민들과 일부 깨어있던 지식인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곧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 보국안민(輔國安民) 등의 구호가 나타났다.종교집단에서 민중 그 자체로 탈바꿈한 동학은 커다란 물결이 되어갔다.그리고 대규모 집회가 있던 삼례에서 불과 3km 떨어진 왕궁에서, 김준식(金俊植)이라는 이름을 가진 훈장이,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분연히 일어나 그 물결에 합류했다.△왕궁서 글 가르치던 훈장 김준식김준식은 1856년 생으로, 왕궁 이탄마을(현 익산시 왕궁면 구덕리 이탄마을)에서 훈장으로서 지역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쳤다.손자 김경철씨(81)에 따르면, 그는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 천주를 모셔 조화가 정해지는 것을 영원히 잊지 않으면 온갖 일을 알게 된다) 13글자를 외우던 동학 도인이기도 했다.그가 동학에 입도한 계기는 확실치 않다. 왕궁 지역에서는 동학혁명과 관련 있는 특별한 사건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다만 왕궁 지역은 1892년 11월과 1893년 2월에 대규모 집회가 있었던 삼례와 가까워, 그도 이에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1894년 갑오년 음력 2월, 38세의 그는 두 살 어린 동생 양식(養植)과 함께 집을 나섰다. 농민군이 봉기해 백산에 거점을 형성하던 무렵이었다.농민군에 합류해 함께 싸우던 그는 그 해 5월에 전사했다. 농민군이 점령한 전주성을 수복하려던 관군과 이를 저지하던 농민군이 치열하게 맞붙던 때였다.1941년에 간행된 전주부사에는 (1894년 5월 1일)상오 10시부터 하오 4시까지 벌였던 이날 싸움으로 동학농민군의 시체는 계곡을 가득 메웠다고 기록돼 있다. 김준식은 이날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은 훈장 출신 등 지식인 계층은 격문과 같은 문서 작성정리를 맡는 경우가 많았다며 다만 모든 지식인이 그런 일을 맡은 것은 아니며, 직접 전투에 나선 이들도 있었다고 말했다. 김준식은 후자에 속하는 실천적 지식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김준식이 전사하고 얼마 후, 동생 김양식도 세상을 떠났다.사망 경위가 확실치는 않지만, 전주성 점령 후 농민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던 중에 일본군의 총에 맞아 숨진 것으로 전해진다.이 때 워낙 많은 농민들이 말 그대로 몰살당해서 시신조차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자기 목숨 돌보지 않고 뛰어든 것은 이들의 조부도 마찬가지였다.김준식의 조부 김기풍(金基豊)은 조선 후기에 민초들의 삶을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혁신적인 지식인이었다. 그는 이 때문에 역적으로 몰려 처형됐고, 고산 마명리(현 완주군 고산면 방죽안)에 모여 살던 일족은 뿔뿔이 흩어졌다.△피난퇴거시련의 연속고산 마명리에서 나와 왕궁 이탄마을에 겨우 자리를 잡은 이 집안에, 김준식양식 형제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다.엎친 데 덮친 격으로 김준식의 부인 박씨가 1895년에 보쌈을 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갑작스럽게 부모를 잃은 아들 덕문(德文)은 17세의 몸으로 여동생과 함께 피신 생활을 시작해야 했다.현재 김경철씨가 살고 있는 거목마을은 거목(巨木)이라는 이름 그대로 원래 큰 나무가 짙게 우거져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었는데, 친척집을 전전하던 김덕문은 이곳에 피난처를 만들고 살기 시작했다.존재 자체를 숨겨야 하던 시기였으니, 살림 형편은 말할 것도 없었다.일제 강점기가 지나가고, 거목마을에 흩어졌던 일족이 모여들었다. 피난처였던 이곳은 어느덧 22가구가 사는 마을이 됐다.하지만 1970년에 이 마을을 관통하는 호남고속도로가 건설되면서, 김씨 일가는 현대화의 거대한 물결 속에 다시 생이별을 맞았다.김경철씨의 집은 간신히 수용을 면했지만, 직선거리로 불과 40m 떨어진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 소음에 지금도 신경이 여간 쓰이는 것이 아니다.그는 박정희 대통령이 군대식으로 밀어붙이던 땐데 저항을 할 수 있었겠어요라며 쓴 웃음을 보였다.이렇게 뿔뿔이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하다보니, 호적에도 이가 빠진 부분이 많았다.그가 고조부로부터 내려오는 역적의 역사를 알게 된 것도, 호적의 빠진 부분을 채워 넣으러 일족을 찾아 돌아다니면서였다.△다시 갑오년, 자랑스러운 역사 후손에 알릴 것그는 동학혁명 당시와 지금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광주를 봐요. 전부 폭도로 몰렸잖아요. 비슷하다고 봐야죠.자식이 넷, 손주가 여덟인 그는 가능한 한 조상의 일을 자손들에게 알리고 싶다고 말한다.1831년에 작성된 것부터 1890년대의 것까지 호구단자 21장을 고이 모셔두고 있는 것도, 족보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방방곡곡을 돌아다닌 것도 이 때문이다.1894년으로부터 120년, 두 갑자가 되는 해를 맞아 그에게 특별한 감회가 없는지 물었다.김경철씨는 후손으로서 새삼 자랑스럽죠. 나라와 백성을 구하기 위해서 일어난 거잖아요라며 담담한 소회를 밝혔다.그는 피난과 시련으로 점철된, 하지만 당당히 나서 저항했던 조상들의 미완의 혁명을 이렇게 품에 끌어안고 있었다.
모난 돌이 정 맞았다. 대한민국의 근현대사가 그랬다. 120년 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농민들은 조선 왕실의 눈에 모난 돌이었다. 당시 농민들은 열강 사이에 끼어 통치력을 상실한 조선 왕실을 대신해 척왜척양(斥倭斥洋)을 기치로 봉기했다. 1894년 무장에서 기병한 농민군은 그해 4월 27일 전주성을 점령하면서 잠시나마 그들이 바라던 세상을 만들었다. 조선 왕실도 모난 돌의 반란에 잠시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지만, 끝내 일본군을 동원해 모난 돌을 진압했다. 모난 돌의 수난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일제시대에는 독립운동을 펼친 사람들이 모난 돌이었다. 일본은 조선인들에게 침묵과 복종을 강요했다. 참다못한 이들의 독립운동이 들불처럼 퍼졌다. 다시 모난 돌들의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동학농민군을 진압한 것처럼 독립투사들을 잔인하게 걷어냈다. 이런 가운데서도 모난 돌이 되지 않기 위해 일본에 충성을 맹세한 사람들이 많았다. 해방이 되면서는 정부의 의견에 반기를 든 사람들이 모난 돌이었다.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유신에 반대하면 정을 맞았다. 하지만 모난 돌의 생명력은 강했다. 정을 맞고 다시 숨죽이며 살기를 반복했지만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중요한 순간에는 어김없이 모난 돌들이 등장했다. 특히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이들의 후손들은 그들의 조상만큼이나 뜨거운 피를 가지고 억압에 맞서왔다. 1894년 남원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을 이끌었던 김홍기(金洪基) 대접주와 그의 후손(김종환-김학연-김동규)들 이야기는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김홍기 대접주의 증손인 김동규씨(70)가 구전과 사료 등을 통해 기억하는 동학과, 전문가들의 고증을 거친 자료를 토대로 김홍기 일가의 삶을 재구성해봤다.△전라 좌도 동학혁명 이끈 김홍기김홍기(金洪基) 대접주의 자는 경홍(慶洪), 본관은 순천으로, 1856년 10월 9일 남원군 둔덕면 탑동(현 임실군 오수면 탑동)에서 태어났다.그는 1889년 10월 27일 장인인 최봉성으로부터 도를 받아 천도교에 입교, 전라 좌도(임실진안장수무주용담순창남원구례곡성옥과) 일대를 돌아다니며 포교활동을 전개했다. 그의 포교로 입교한 호수는 5000에 이르렀다고 한다(50~100호 1개 접다수 접을 관리하는 직책이 대접주) 당시 김홍기는 김영원(31운동 주동자로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 한영태(천도교 임실교구장, 31운동 주동자로 수감 중 옥중에서 혀를 깨물고 자결), 최승우(천도교 임실교구장, 남원 방아치 전투에 참여), 최유하, 최동필 등 6명과 의형제를 맺고 남원 지역에서 동학 포교에 전력을 다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하자,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으로부터 임실의 최승우에게 척왜척양(斥倭斥洋)하고 포덕천하(布德天下), 광제창생(廣濟蒼生) 보국안민(輔國安民)하에 동원령이 전달되었는데, 최승우는 즉시 남원에 거주하고 있던 매부 김홍기에게 연락해 임실과 남원이 합동해 기포했다. 또 그해 3월 백산봉기에 참여하기도 했다. 김홍기는 최승우와 함께 임실에 무혈입성하여 민정을 다스렸고, 남원 토박이 동학교도인 유태홍, 황내문, 이기동 등과 함께 남원에서 기포한 후, 곡성순창옥과구례장수진안용담 등을 석권했다. 김개남 장군의 남원 입성 이후, 그는 집강소를 통해 남원지역을 통치하고, 남원대회 때 여러 역할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김개남이 북상한 후인 1894년 11월, 김홍기는 남원 토박이 동학교도인 황내문, 이규순, 이사명 등과 방아치에서 박봉양이 이끄는 운봉 민보군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으나 대패하고 말았다. 이때 민보군 이성흠에게 체포된 김홍기는 1895년 2월 14일 남원 장터에서 생을 마감했다. △끝나지 않은 동학혁명김홍기의 죽음은 가족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당시 16세였던 그의 큰 아들 김종문은 아버지의 옥살이를 지근거리에서 살폈다. 김종문은 엄동설한에도 아버지가 처형되기 전까지 노숙을 하며 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역적으로 지목된 이의 아들에게 아무도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먹을 것을 주고 숙박을 제공하고 싶어도 서슬파란 탄압 앞에 그리 할 용기를 낼 사람은 없었다고 보는 게 맞을 듯하다. 결국 아버지의 죽음을 눈앞에서 지켜본 김종문은 3개월 후에 세상을 떠났다.김홍기의 집안은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봄이면 광문을 열어 어려운 사람들과 먹을 것을 나눴다고 한다. 당시 조정은 그의 죽음과 함께 재산을 모두 몰수했다. 남은 가족들은 동학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보다 당장 생존의 문제에 직면해야 했다. 그러나 희망은 있었다. 김홍기의 작은 아들 김종환(1891~1959)은 당시 3살이었다. 그는 어머니 등 유족들을 통해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다. 동학에 동자만 꺼내도 잡혀가던 시절 그는 숨죽이며 미래를 준비했다. 그러다 기회가 왔다. 그는 1919년 31만세운동이 벌어지자 임실, 오수 지역에서 독립선언서를 받아 장성, 구례, 순천까지 전달했다. 들불처럼 퍼진 31운동의 도화선 역할을 맡았던 셈이다. 그는 28살 되던 해 집을 나서 6년이 훌쩍 지나서야 집이 아닌 남원 닭뫼마을에 정착할 수 있었다. 그동안 전주, 정읍, 김제 등을 전전하며 장돌뱅이로 위장하며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독립유공자 명단에 오르지 못했다. 옥살이를 하거나 수감 기록이 없다는 이유였다. 그렇지만 그의 독립운동 활약상은 남원 지역 향토사학자들과 여러 사료들이 증명하고 있다. 동학의 정신은 김종환의 아들 김학연(1915~1974)이 그대로 이어 받았다. 그는 일본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행정서기 자리를 거부했다. 또 감시를 피해 남원에서 야학을 운영하며 조선인들에게 항일 정신을 심어줬다. △동학의 정신 현대사회로 계승돼야삶이 말이 아니었다. 김동규씨는 지나온 인생을 이렇게 회고했다. 동학혁명과 항일운동에 참여했던 그의 일가는 피폐한 삶을 살았다. 숨죽여 살며 제대로 된 학업을 잇지 못한 채 현대사에서 점점 배제돼갔다. 그에게는 당장 먹고 살 길이 없었다. 선조들의 동학정신을 계승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중학교까지 졸업한 그는 당시 많이 배운 축에 속했다. 하지만 군대를 제대하고 그에게 닥친 현실은 가난이었다. 그의 아버지(김학연)의 몸이 약했기 때문에 동생 7명을 먹여 살려야 하는 게 그의 의무였다. 그렇게 동학혁명의 정신은 삶의 무게 앞에 무릎을 꿇는 듯 했다. 하지만 김동규씨에게는 희망이 있다. 멸족 위기에 몰렸던 증조부 김홍기의 후손은 현재 66명까지 늘어났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이들에게 집안의 역사를 들려줬다. 그는 선조들에 비해 한 게 없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꿋꿋이 살아남아 동학의 정신을 전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김동규씨는 내가 한 것은 후손을 늘린 것뿐이다. 66명 동학의 후예들이 선조의 정신을 이어받아 올곧고 바르게 살면 내 역할은 다한 것이다고 말했다.
올해가 갑오년이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12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60년이 두 번, 30년이 네 번 지났다. 한 세대를 30년으로 치면 네 세대가 지나간 셈이다. 그저 먼 역사속의 일이라고 여길 만큼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면 그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당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이름 없이 쓰러져간 동학농민군들의 모습이 되살아온다.△무명의 사상자 30만명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사람이 혹자는 300만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죽거나 다친 사람이 30만이라고 한다. 당시 인구를 대략 1000만으로 추산해 보면 이 숫자는 실로 어마어마한 규모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동학농민혁명 하면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을 떠올린다. 물론 이들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의 역할이 컸고, 이들이 있었기에 조직적인 활동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동학농민군 지도자가 아닌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농민군들이 있었다. 이들은 과연 어떤 이들이었을까? 2004년 3월 5일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그리고 이법에 따라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여기서 유족들로부터 신청을 받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와 유족을 등록하여 국가차원의 명예회복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이름 없는 동학농민군들의 삶과 죽음의 내용이 상당히 많이 밝혀졌다. △최후 순간까지 대를 이으려 했던 부정(父情)필자가 심사담당관으로 참여하면서 가장 안타깝고 가슴 아팠던 것이 최후의 순간에 가족을 생각했던 동학농민군들의 선택이었다. 사실 동학농민군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삶에 대한 또 다른 선택이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남겨진 가족,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위해 나의 삶을 포기하는 일이었다. 남겨진 가족을 위해 마지막 순간에 직접 생을 포기하는 눈물겨운 사례가 많았다. 전라도 강진의 강 아무개는 동학농민군으로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사형에 처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동생이 나섰다. 형 대신 자기가 처형당하겠다고 하였다. 장손인 형이 살아남아야 하며 자신은 결혼도 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결국 그는 형 대신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강씨 집안 족보에 죽은 동생 이름 밑에는 더 이상 후손이 기록되지 못하였다. 지금은 충청도지만 당시 전라도에 속했던 금산에 사는 이 아무개는 동학농민군으로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처형당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가 나섰다. 아버지는 아들이 3대 독자이므로 자신을 대신 잡아가라고 하였다. 결국 아버지가 대신 죽고 아들은 살아남았다. 만약 그때 그의 아버지가 대신 죽지 않았다면 그 후손들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겨진 후손들은 그 아버지의 마음을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충청도 태안의 가 아무개는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가족들에게 이제 가면 돌아올 수 없을 것 같다고 하면서 자신의 손가락 하나 잘라 주고 갔다. 돌아오지 못하면 그것으로 무덤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라는 뜻이었다. 결국 그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런데 그의 아내는 집 밖에서 나는 바람소리에도 문밖을 서성였다. 남편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애틋한 마음에서였다. △목불인견의 처형 순간동학농민군들의 죽음의 순간은 너무나 처참했다. 전라도 장흥의 이 아무개는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른바 분살(焚殺)이라는 형태로 처형되었다. 논가에 말뚝을 세우고 농민군에게 유지기(얼굴을 가리는 것으로 삿갓과 비슷함)를 씌운 다음, 말뚝에 묶고 말뚝 아래에는 볏단을 놓고 불을 질러 처형하는 것이다. 이러한 처형방식은 전라도 남부지역에서 횡횡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충청도 태안에서는 동학농민군을 처형하는데 작두가 이용되었다. 토성산에서 수많은 농민군들이 작두로 처형되어 그 피가 강물을 이루었다고 한다.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1894년 조선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또한 경상도 예천에서는 동학농민군들이 체포되어 생매장당하여 죽음을 맞이하기도 하였다. △살아 남은 자들의 몸부림살아남은 사람들은 시신만이라도 어떻게든 찾아야했다. 그것이 그들의 임무이자 책무였다. 그들의 삶과 죽음에 관여할 수는 없어도 그 시신을 통해 후손들에게 지나간 시간을 일깨워주는 것이 살아남은 자의 몫이었다. 충청도 옥천의 강 아무개는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귀신당 계곡에서 처형되었다. 그러자 그 소식을 들은 그의 아내는 귀신당 계곡으로 가서 남편의 시신을 수습하여 둘러메고 와서 묘를 썼다고 한다. 강씨의 아내는 체구가 크고 힘이 장사였다고 한다. 전라도 함평의 전 아무개는 나주지역 전투에 참여하여 전사하였다. 그의 아내는 수백구의 시신 중에 귀에 이상이 있는 남편의 시신을 찾아 수습하여 머리에 이고 왔다고 한다. 또 전라도 장흥의 이 아무개는 장흥지역 마지막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후손들은 시신을 찾지 못하자 밥그릇을 넣고 가묘를 만들고 집을 나간 날에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전라도 무안의 박 아무개는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하다가 무안 현경에 피신해 있었는데 같은 마을 사람이 신고하여 일본군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그가 처형된 후 시신을 찾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한 구덩이에서 불에 타 죽었기 때문에 시신을 찾을 수 없었으나 평소에 팔에 끼고 다니던 토시를 보고 찾아 매장하였다고 한다.△피신, 그 후의 삶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겨우 살아남은 동학농민군들의 삶 역시 순탄치 않았다. 그들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다. 많은 농민군들이 산속으로 들어갔다. 충청도 농민군들은 천안 광덕산으로 피신하여 생활하기도 했다. 전라도 임실남원지역의 농민군들은 순창 회문산으로 피신하여 생활하였다. 그밖에 집으로 돌아온 농민군들은 이사를 가거나 갖은 고초를 당하며 살았다. 동학농민군이었다는 게 죄인이었으며 멍에였다. 시간이 흐른 뒤에도 동학농민군을 보는 사회의 시각은 크게 바뀌지 않았으며 일제강점기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동학농민군들은 계속 감시의 대상이었다. 동학농민군들은 그들의 삶의 틀을 바꾸기 위해서 분연히 일어섰다. 적어도 후손들에게 바꾸어진 삶의 틀을 남기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후손들은 일제강점기 반역자의 후손이라는 굴레로 고통 받았다. 삶은 피폐해졌고 삶의 기반은 이미 무너져버렸다. 해방 이후 현재까지도 그러한 양상은 변하지 않았다. 한번 무너진 기반을 회복하기 어려웠다. 이름 없이 쓰러져간 동학농민군들, 그리고 부모와 형제를 잃고 고난의 시대를 힘겹게 살아온 후손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이 갖는 의무이기도 하다.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전북에서 일어나 전국에 떨친, 한국 역사상 가장 큰 농민항쟁이었던 동학농민혁명. 조선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혁파하려던 농민들의 거사가 올해로 2주갑(120년)을 맞았다. 한 때 동학란으로까지 폄하됐던 당시 거사는 100주년을 전후해 역사학계시민사회단체천도교 등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재조명됐고, 이를 바탕으로 혁명 발생 110년만인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또 당시 사건을 기념하는 시설물들이 전국 곳곳에 설치됐으며, 전북을 넘어 지역별 기념사업들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가 당시 혁명을 바르게 기억하는지 여전히 의문이다. 기념사업과 기념단체의 활동이 활발해졌지만, 정작 동학농민군들이 열망했던 사회와 진정성 있게 맥이 닿고 있는지 회의적이기 때문이다. 기념일 제정을 두고 지역간 첨예하게 맞서 혁명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있고, 혁명의 역사적 흔적들이 대부분 지워졌으며, 유적지 또한 체계적으로 관리되지 못하는 게 오늘의 모습이다.20년 전동학농민혁명 100년 - 혁명의 들불, 그 황톳길의 역사 찾기에 나섰던 전북일보가 올 2주갑을 맞아 그 의미를 되새기는 기획을 마련했다. 이번 기획은 동학농민혁명이 갖는 역사적 위상에 걸맞은 위상 찾기를 중심에 둘 계획이다. 큰 틀에서 동학농민혁명이 올바르게 기려질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세계사로 외연을 확대하는 길을 전문가들과 함께 찾는 작업이 될 것이다.△연구성과동학농민혁명의 120년은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수난사였다. 정치적 상황과 입장에 따라 해석을 달리하면서다. 일본인 식민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청나라의 사주에 의해 농민군들이 일어났다거나, 대원군이 동학의 힘을 이용하여 정권을 탈취하려 했다고 권력투쟁 측면으로 왜곡하기도 했다. 동학란동학농민전쟁갑오농민전쟁갑오농민혁명동학혁명동학농민운동 등의 다양한 명칭이 당시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고 정리했는지 보여준다. 100주년을 계기로 동학농민혁명이라는 보편적 이름을 얻었고, 특별법과 공문서 등에도 공식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연구자들은 지금도 각기 다른 명칭을 쓰고 있다. 1894년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연구자의 몫이기에 탓할 문제가 아니지만, 통일된 명칭을 갖지 못하는 사실 자체가 연구적 측면에서도 여전히 미완의 역사임을 반증한다.그럼에도 100주년을 전후한 시점부터 동학농민혁명 관련 연구는 괄목할 만한 연구성과를 냈다. 학술대회학위 논문연구지 발표단행본 등으로 많은 연구 성과물이 쌓였다. 특별법이 제정된 후 174권의 단행본이 발행됐고, 관련 논문이 700여편에 이른다. 중국과 일본, 북한, 영어권에서의 연구 동향, 중국 태평천국농민전쟁독일 농민전쟁미국영국의 농민운동과 비교하는 연구들도 나왔다. 100주년 전까지 전봉준김개남손화중손병희 등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역할에 연구의 중심이 두어졌다면, 태안장흥 홍주상주예천 등 전국 각지에서 농민군 활동의 구체적 사례들이 밝혀진 것도 성과였다. 불모지 상태의 동학농민혁명 연구에 일찍이 뛰어들어 이 시대 마지막 동학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정읍의 향토사학자 고 최현식 선생의 일대기가 쓰여연구자의 연구까지 이루어졌다.그러나 2000년대 이후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연구들은 과거 연구의 정리 쪽에 머물렀다. 실제 동학농민혁명을 본격적으로 다룬 박사학위 논문도 최근 10년간 없었으며, 새로운 문제제기로 주목을 받은 연구물도 눈에 띄지 않았다. 100주년을 전후해 당겨졌던 연구자들의 관심이 줄어든 탓이다. 연구자들의 관심을 되돌리는 게 2주갑의 과제이기도 하다.△기념사업, 기념시설100주년 이후 동학농민혁명의 위상이 크게 달라졌다. 대표적인 것이 국가 차원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진 점이다. 동학농민혁명참여자등의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 제정되면서다. 또 관련 재단이 설립돼 기념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안정적 기반도 구축했다.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 변화도 중요한 성과로 꼽힌다.이를 바탕으로 동학농민혁명을 기리는 사업들이 전국으로 확산됐다. 전북을 중심으로 몇몇 지역에 한정됐던 관련 민간단체들이 크게 늘어 현재 27개에 이른다.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를 비롯 정읍고창김제남원완주 등 전북에 9개의 민간단체가 활동 중이며, 장흥함평무안보은충북금산우금타예산태안서석상주예천고성 등지에 민간단체가 있다. 전국 조직으로 전국동학농민유족회가 결성됐으며,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동학혁명백주년기념관천안 전씨 종중들이 중심이 된 전봉준장군기념사업회도 있다.관련 시설도 크게 늘었다. 동학농민혁명 관련 전국에 조성된 기념시설물은 70여곳. 조선정부와 유림 등 혁명의 반대쪽에서 건립한 시설물들을 포함해서다. 100주년 이후 기념시설물은 장성 황룡촌 기념탑대둔산 최후항전기념비고창 전봉준장군 생가완주 동학농민혁명 역사광장고창 무장기포 역사공원보은 역사공원무장창의 포고비정읍 무명 동학농민군 위령탑보은취회 기념비남원 교룡산성 은적암비손화중장군 추모비삼례봉기기념비상주동학농민군상 등 20여개다.기념공원 등 좀 더 규모 있는 사업들은 최근 몇 년 사이에 활발해졌다. 홍천과 옥천보은장성 등에 기념공원이 세워졌으며, 전주남원장흥 석대들전적지광주 충남 예산태안무안 등지에서도 기념공원 혹은 기념관 건립을 추진 중이다.그러나 이같은 기념사업과 기념시설 확충은 여전히 미흡하다. 기념사업 대부분이 행사성 위주로 흘러 혁명이 갖는 의미를 주민과 함께 하는 데 한계를 보이고 있다. 국민적 인식 확산을 위해 다양한 콘텐츠 개발을 통한 사회문화운동으로 확산시키는 게 과제다. 또 시설물을 늘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유적지 보전 등이 상대적으로 소홀하다. 유적지 발굴과 방치된 유적지 보전이 필요하며, 중요 유적지에 대한 문화재 등록 등에 관심이 요구되고 있다.△과제연구자들은 동학농민혁명이 120년전에 갇힌 역사가 아닌, 21세기 현재에도 유효하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읽는다. 동학농민군들이 추구하고 실천했던 자유와 평등, 나눔과 배려 정신은 한국을 넘어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갖고 있다. 반외세를 부르짖던 농민군들의 함성은 세계자유무역 질서라는 이름 아래 정당화 되는 한국농업의 암울한 현실과도 닿아 있다. 농민군들의 꿈꾸었던 세상은 오늘을 사는 우리가 꿈꾸는 미래상인 셈이다.문병학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처장은 한국 현대사의 여러 모순 중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모순으로는 민족분단에 따른 분단의 모순인 데, 그동안 전국에서 추진된 기념사업의 전체적인 측면에서 보면 민족통일과 관련된 기념사업이 매우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또 전라도 지방사로 왜곡축소되어온 동학농민혁명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갈 기념사업 모색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부장은 동학농민혁명을 한국의 보편적 가치 뿐아니라 세계사적으로 정신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며, 이를 위해서는 중국의 태령천국농민전쟁이나 남미의 농민운동에 대한 비교 연구 등의 연구작업과 국민들의 혁명에 대한 인식을 확대시키는 작업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특별취재팀 - 김정엽최명국권혁일 , 문병학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 사무처장,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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