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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우금치 전투서 부상 최원국과 후손들] 총상 딛고 무기 만들며 새로운 투쟁 꿈꾼 동학 투사

일본군 압도적 화력 앞에 대패후 화약 제조 투신 / 짚신 삼아가며 어렵게 번 돈 독립자금으로 제공 / 후손 최병관씨 "반외세 반봉건 정신 계승할 터"

▲ 갑오년 동학농민혁명 제2차 봉기의 최대전장인 우금치 전투에 참가했던 최원국의 손자 최병관씨가 지난 24일 자신의 자택에서 할아버지의 당시 행적을 기록한 관련 기록들을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군산본부=오균진

1800년대 중반 조선왕조의 병란과 농민항쟁은 군현이나 도의 경계를 넘지 못한 채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1984년 11월 동학농민군의 2차 봉기는 전국으로 확대됐다. 함경도를 제외하고 거의 전국에 걸쳐 전개됐다.

 

그 발자취를 더듬어보면 이해 10월, 전봉준 장군은 재봉기를 결정했다.

 

이에 충청도와 전라도 인접지역의 농민군은 완주 삼례에 집결했다. 동학 교주 최시형도 기포령을 내려 동학조직을 재무장토록 했다. 이로부터 한 달 뒤인 그해 11월, 충청도 북부와 경기도, 강원도에서 모인 북접농민군은 손병희 통령의 지휘 아래 충남 논산으로 행군해서 남접농민군과 합류했다.

 

동학사 기록과 관군보고서에는 갑오년 ‘논산에서 공주까지 산과 들에 사람이 꽉 들어찼다’거나 ‘벌떼처럼’ ‘밀물이 넘치는 것처럼’ 밀려왔다고 적었다.

 

논산에 집결한 동학농민군은 전봉준 장군의 남접과 손병희 통령의 북접이 합세한 세력이었다. 남접은 노성과 효포 쪽으로 공격했고, 북접은 이인에서 봉황산과 하고개를 공격했다. 그러나 화력의 열세로 일방적으로 패배를 당했다. 전봉준 장군은 공초에서 “2차 접전 후 1만여 군병을 점고한즉 불과 3000여명이요, 또 두 차례 더 싸운 뒤 점고한즉 500여명”이었다고 했다.

 

얼마나 많은 농민군이 총탄에 스러져갔는지 알 수 있는 단서다.

 

당시 공주 우금치 전투에 참가한 익산 왕궁 출신 최원국(崔元局)은 이 전투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은 채, 구사일생으로 전장을 떠나 귀향해 후일을 기약했다.

 

△우금치 전투 참전…군 대패

 

최원국은 1863년 생으로 왕궁면 온수리에서 터를 잡고 살아왔다.

 

농업에 종사했던 그가 동학에 입도한 계기는 확실치 않다. 왕궁 지역에서는 동학혁명과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특별한 사건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왕궁 지역은 1894년 9월 재봉기의 집결지인 삼례와 가까워, 그도 이에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후손들은 그가 혁명 초기부터 활동해왔다는 증언을 하고 있어, 1차 봉기 이전부터 혁명에 깊숙히 관여해온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최원국의 장손 최병관씨(79)는 “모친으로부터 ‘할아버지가 당시 백산이며, 정읍이며 인근지역으로 날듯이 돌아다니셨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원국의 주요 행적은 우금치 전투 때부터 두드러진다.

 

갑오년 11월 동학군을 토벌하기 위해 참전한 일본군은 1개 중대씩 3대로 나뉘어 동로군은 충주에서 강원도로 들어가 순회했고, 중로군은 청주로 직행해서 옥천 보은 금산 일대로 남하했다. 서로군은 천안 홍주 공주로 내려갔다. 동학농민군은 수많은 희생자를 냈지만 완강히 저항했다.

 

전봉준 장군은 북상의 요지인 공주 점거를 당면 목표로 정했다. 이때 우금치전투가 벌어졌다.

 

우금치는 최대 규모의 공격이 감행된 주전장이었다. 공주 이인과 효포에서도 전투가 벌어졌고, 그와 함께 11월 22일부터 12월 5일까지 홍주와 문의 등지에서 6차례의 전투가 벌어졌다. 이 모든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대패했다. 이로 인해 동학농민군의 상경은 좌절됐다.

 

당시 전투에서 최원국은 농민군의 일원으로 참전, 진격하다가 다리에 총탄을 맞고 정신을 잃었다.

 

새벽녘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 밑에 깔려있었던 그는 심한 갈증을 느낀 나머니 눈을 떴다. 주위를 둘러봤을때 전날까지만 해도 동고동락했던 전우들의 시체가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그는 인근 농가로 피신, 간단한 응급처치를 끝낸 뒤 고향으로 쓸쓸히 내려왔다. 그의 가슴 속에는 다시 한번 들고 일어나 일본군을 응징하겠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화력 열세 절감, 신무기 개발 전념

 

최원국은 아픈 몸을 이끌고 고향인 익산 왕궁으로 귀향했다.

 

이때부터 그는 일본군의 막강한 화력을 극복할 수 있는 신무기 개발 및 화약 제조에 투신했다.

 

그는 우선 뜻을 같이 하는 지인들과 함께 자신의 초가집 처마의 여러 해 동안 묵은 썩은 새(초가집의 지붕을 엮은 이엉) 물과 소변으로 화약을 만들었다.

 

또, 남몰래 화승총을 쏘는 연습도 하며 후일을 기약했다.

 

당시 그는 “총구에 화약을 재고 콩밭 일곱 두렁을 달려가면서 총을 쏠 수 있어야 1등 사수”라는 말을 종종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군의 농민군 색출 작전에 신변의 위협을 느끼는 등 아슬아슬한 줄타기 같은 삶을 살았다.

 

이에 그는 장남 한수와 차남 두수를 일가 친척들에게 양자로 보내고, 막내 덕수와 부인만 데리고 처가로 떠났다. 이때부터 그의 논이며 밭이 친일파 지주들에게로 넘어가면서,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고, 꾸준히 독립투사 및 동학 도인들과 접촉하면서 그들에게 활동자금을 지원했다. 짚신을 삼아가며 어렵게 번 돈의 대부분이 여기에 쓰였다.

 

손자 최병관씨가 기억하고 있는 최원국은 이렇다.

 

“3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어렴풋이 할아버지께서 골방에 앉아 짚신을 삼고 계신 모습이 떠올라. 어린나이에도 깊게 패인 할아버지의 주름과 불편한 다리가 인상 깊었어.”

 

그는 이후에도 계속 독립투사 및 동학 도인들과 꾸준히 접촉해오다, 광복을 맞이하기 전인 1936년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의 부당한 외세의 침략에 대한 항쟁과 반봉건 정신은 후대까지 면면히 내려오고 있다.

 

△“동학의 정신 계승·유지하는 자랑스러운 후손 되고파”

최병관씨는 “한 번도 할아버지를 원망한 적이 없다. 가족들과 후손들이 고초를 겪긴 했지만, 그 모두가 다 국가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뒤늦게서야 혁명에 투신했던 농민군들이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게 된 것은 아쉽다”면서 “이제라도 동학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가기 위한 국가·사회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할아버지대의 비극적인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선 우리나라가 좀 더 강한 힘을 길러야 한다고 역설했다.

 

외세의 무자비한 총칼 앞에 스러져간 수많은 농민군의 전철을 밟아선 안 되기 때문.

 

“지금의 잘사는 대한민국은 우리 선조들의 땀과 눈물로 만들어 졌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돼. 모두가 힘을 모아 더 강대하고, 잘사는 한국을 만드는데 힘을 모아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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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국 psy2351@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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