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작리 기념공원엔 전적비만 덩그러니 / 농민군 토벌 관료들 업적 새긴 비석까지
충남 예산은 동학농민혁명군 6만여 북접군의 활동 중심지였다. 당시 농민군을 지휘했던 덕의대접주 춘암 박인호(1855~1940) 선생은 내포지역에서 보국안민과 광제창생을 기치로 도탄에 빠진 민중들을 교화, 동학교단을 조직했다.
그는 충청 서부지역의 북접을 이끌면서 지방관·대지주의 수탈과 착취가 극심했던 1880년대 이 지역에서 교세를 확장했다. 특히 유림세력이 강성했던 지역 특성상 지방관과 지역 유력자가 결탁, 농민들을 억압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자 그를 비롯해 접주들은 갑오년 2월 덕산 봉기를 시작으로 농민군을 규합했다.
박인호 선생의 9월 기포령을 시작으로, 인근 각지에서 들불처럼 농민군이 들고 일어나 태안·서산·대흥 등 인근 관아를 점령했다. 혁명의 불꽃이 고창·정읍지역을 넘어 ‘양반의 고장’이라고 불리던 충청도로까지 확산된 것. 하지만 인근 아산만에서 벌어진 청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군이 관군과 함께 농민군 진압에 나서면서, 농민군의 수난은 시작됐다.
지금도 예산지역 곳곳에는 한순간이라도 반짝였던 농민군의 승리의 역사와 이를 이어가고자 했던 농민군 지도자들의 고뇌에 찬 숨결이 자리하고 있다.
△예포대도소
1880년대 예산에 처음으로 전파된 동학은 관의 감시와 탄압, 유림세력의 배척에도 불구하고 지도부의 꾸준한 포덕활동으로 많은 교인을 양성했다.
그러던 중 갑오년 전북지역에서 혁명의 불씨가 거세게 타올랐고, 사태를 관망하던 예산지역 동학지도부도 혁명에 동참하면서 혁명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갑오년 9월 30일 기포한 내포 농민군들은 10월 1일 태안과 서산관아를 공격, 수감돼 있던 농민군을 석방시켰다. 이후 당시 농민군을 이끈 박인호와 박덕칠은 현재 예산 삽교읍, 덕산에 전진기지 성격의 대도소를 설치했다. 특히 삽교읍에 설치된 예포대도소는 농민군지도부가 전투준비를 위한 군수물품을 비축하거나 인근 지역과의 연락을 맡았다.
하지만 이를 저지하기 위한 관군의 공세도 매서웠다. 갑오년 10월 11일 호연초토사 이승우는 내포동학농민군 본부인 예포대도소를 불시에 공격했고, 이에 농민군은 패퇴했다. 관군은 대도소를 불태우는 동시에 혁명군에 협조한 농민들의 세간살이를 약탈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지난 17일 찾은 삽교 예포대도소 옛터에는 현재 주거지가 들어서 있고, 인근에 세워진 안내판만이 이곳이 당시 농민군의 사령부였다는 것을 어렴풋이 상기시켰다. 바로 인근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삽교읍 하포리에는 박인호 선생의 유허비, 생가터가 있다. 생가터는 현재 축사로 쓰이고 있었다.
갑오년 일대를 호령했던 대접주의 위상과는 동떨어진 너무나 초라하고, 방치된 생가터를 보며 충청지역이 왜 동학의 불모지로 불리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대흥관아터
예산군 대흥면에 위치한 대흥관아는 갑오년 10월 7일 예포대접주 박덕칠이 이끈 농민군이 일시 점령한 곳이다. 당시 박덕칠은 목천 유진수, 홍주 박성순, 대흥 차경천 등을 앞세워 군량창고와 무기고를 부쉈다. 군수 이창세는 옷가지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부랴부랴 현장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1979년까지 대흥면사무소로 사용되던 관아터는, 면사무소를 신축하면서 현재 바로 옆 자리로 이전·복원됐다. 관아로 들어서는 길에는 이승우 영세불망비를 비롯해 농민군 토벌에 참여한 관료들의 업적을 기린 비석 등 수십기가 나란히 서 있었다. 걸어서 5분 가량 거리에는 고부군수 조병갑의 생가가 있던 마을이 있다. 지역 대토호였던 조병갑 일가의 99칸 기와집은 당시 농민군이 헐고 불태워 현재 남아있지 않았다.
혁명의 불씨를 제공했던 조병갑을 단죄하고자 했던 농민군의 불같은 기세를 엿볼 수 있었다.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예산읍 관작리에 위치한 기념공원은 2010년 관작리 전적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자리에 조성됐다. 관군·일본군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펼치던 농민군은 갑오년 10월 24일 승전곡에서 대승을 거둔다. 이후 같은 달 26일 농민군은 홍주목 중군 김병돈과 군관 이석범이 이끄는 관군의 습격을 받는다. 이에 농민군은 전열을 다시 정비, 다음날 3만여명의 병력을 모아 이날 관군과 일대 격전을 펼친다. 4000~5000여명에 달하는 토벌군은 농민군을 향해 포를 쏘며 접근했다.
농민군은 화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에 굴하지 않고 토벌군 진영의 야산을 포위, 육탄전을 벌여 끝내 토벌군을 패퇴시켰다. 이 전투는 농민군의 최대승전으로 평가되고 있다.
예산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은 2007년 기념사업회가 정부 지원을 받아 설립했다. 하지만 이후 정권이 바뀌면서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면서 현재는 제대로 된 관리가 되지 않고 있다.
공원에는 전적비만이 덩그러니 서 있어 황량하기 그지 없었고, 잡초마저 제때 제거하지 못해 길목 곳곳이 끊긴 채 방치돼 있었다.
동행한 박성묵 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회장은 “정치권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찾는 사람도 없어지면서 공원을 유지·보수하기도 힘든 처지이다”면서 “동학농민혁명 2주갑을 맞아 다양한 선양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사업회의 역량을 모으고 있다”고 말했다.
● 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박성묵 씨 주도 2006년 발족…농민군 유족 명예회복 앞장
기포 후 한 달간의 짧은 항전 때문에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던 예산지역 동학농민혁명은 지역의 한 시민활동가의 노력에 의해 빛을 보게 됐다.
박성묵 회장은 발로 뛰며 예산의 혁명사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박인호 선생의 발자취를 연구하던 그는 예산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계승·선양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나머지 2006년 기념사업회를 발족했다.
이 일은 농민군 유족을 만나면서부터 기획됐다.
“동학농민혁명의 불모지로만 알았던 예산에서 동학농민혁명군 유족을 찾았을 때 정말 희열을 느꼈습니다. 역적의 자손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숨죽이며 살아왔을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한을 풀어주고 싶었습니다.”
그는 동학의 정신은 1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효하다고 믿는다.
3.1운동을 비롯해 5.18민주화운동 정신의 뿌리인 동학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주체적 역량을 확립할 수 있다고 믿어서다.
그는“정체성 없는 역사의식을 가진 지도자와 국민이 있기 때문에 일본이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등 터무니없는 일을 벌이고 있다”며 “확실한 민족의 주체성을 갖기 위해서는 동학을 우리 민족의 중심사상으로 이끌어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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