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일반기사

명문을 찾아서-기전여고



전주기전여고에는 영어로 된 학교 홍보 리플렛이 있다. 글로벌시대 당연한 것 같지만 고등학교에서 영어로 학교를 소개하는 곳은 전국적으로도 그리 많지 않다. 기업들처럼 외자유치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외국인 학생이 있는 것도 아닌 학교에서 왜 영어로 된 리플렛이 필요한 것일까.

 

그것은 많은 미국인들이 관심을 갖고 많은 이들이 매년 이학교를 찾기 때문이다. 전주신흥고와 함께 미국의 한국 선교 역사와 맞닿아 있는 대표적인 학교가 바로 기전여고다. 기전(紀全)라는 이름도 초대 교장인 미국인 정킨(Junkin·全緯廉) 목사를 기념하는 학교라는 뜻(Junkin Memorial)에서 만들어졌다.

 

◇호남 최초의 여학교

 

전주기전여고는 1백년 역사의 호남 최초 여학교임을 자랑한다. 미국 남장로교 테이트 여선교사(한국명 최마태)가 6명의 소녀를 자신의 집에서 가르치기 시작한 1900년을 기전여고는 학교 역사로 삼고 있다. 기전이라는 이름은 한참 뒤인 1908년에 지어졌고 정규적인 학교의 면모를 갖추지는 못했지만 테이트 선교사에 의해 시작된 교육이 오늘의 기전여고의 뿌리가 됐다고 보기 때문이다.

 

전주시 화산동 테이트 선교사의 집이 학교로 사용되다 1904년 전킨 목사가 학교 운영권을 인수하면서 중앙동으로 이전했다. 테이트 선교사에 의해 학교가 시작됐지만 기전여고는 전킨 목사를 초대 교장으로 불러왔다. 전킨 교장 이전 학교로 불리울 만큼 제대로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미미했기 때문으로 해석하는 것 같다.

 

전주기전여학교는 보수적인 도시 전주에서 이렇게 근대 여성 교육의 싹을 틔웠다. 기전여학교가 설립되기전까지만 해도 당시 여자는 교육의 대상 조차 아니었다. 안방에서 부모로부터 한글·천자문을 배우는 정도가 고작이던 시절 기전여학교는 그야말로 개화의 상징이 됐다.

 

◇민족정신의 요람

 

기전여고의 자랑은 단지 오래된 학교 역사에만 있지 않다. 나라를 잃은 암울한 시대 민족정신의 요람으로서 자랑스런 역사가 있다. 3.1운동 당시 기전여학교 출신으로 교사 생활을 하던 임영신을 비롯, 이학교 학생들이 전주 3.1만세운동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3월13일 전주 남문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에 참여했던 기전여학생중 13명이 옥고를 치렀다.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지냈던 박은식선생은 그의 저서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전주의 여학생 임영신, 정복수, 김공순, 최애경, 김인섭, 최요한나, 강정순, 최금주, 김선희 등 14인이 독립운동을 하다 갇혔는 데 필사의 결심으로 음식을 단식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13명에 대해서는 보안법 위반으로 각 징역 6개월과 3년간의 집행유예 판결이 내려졌다.

 

기전여학생들은 광주학생운동 당시에도 불같이 일어났다. 이학교 기숙사생 70여명이 광주학생운동에 동조해 1930년 1월24일 ‘동감만세운동’을 벌이다 그중 50명이 투옥되는 사건도 있었다.

 

◇폐교와 복교의 어려웠던 시절

 

민족정신의 말살을 위해 일제가 강요한 신사참배에 기전여학교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학교 재단인 전주 지역 교회지도자들은 학교를 포기하면 포기했지 신사참배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견지했다. 1935년 인톤 선교사를 의장으로 임시위원회가 소집돼 폐교를 결정했다. 폐교 결정 이후 2년여만인 37년 10월5일 기전여학교는 문을 닫았다.인톤 교장은 일본인 전북지사와 학무국장에게 “당신네가 지금은 우리에게 학교를 그만하라고 하지만 반드시 다시해달라고 청할 날이 있을 것이다”고 미래를 기약했다 한다.

 

‘기전여고 80년사’에 수록된 이경철씨(폐교 당시 교사) 는 회고담에서 “전주에서 잊혀지지 않은 날 많았다 그중에서 가장 통쾌한 일은신사참배를 거부한 일이다. 무슨 이름붙은 날마다 시가행진을 시키고 신사에다 꼭 절을 하도록 강요했다. 기전여학교는 다른 학교학생들이 참배하느라 정렬해 서서 순서를 기다리는 바로 뒤를 옆눈도 안돌리고 곧장 학교로 왔다.”고 당시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폐교 후 1백70여명의 학생들은 전주공립여자 편입됐다.

 

10년간 문을 닫았던 학교가 조국의 광복과 더불어 1946년 문을 열었으나 모든 것이 부족하고 어설플 수 밖에 없었다. 폐교로 모든 학교 기물들은 없어졌고, 학생모집이나 교사 확보·재정난 등에 허덕여야 했다. 복교에 앞장선 이는 모교 1회 출신의 강옥전 교장이었다. 이후 오늘의 학제인 3년제 고등학교로 55년 기전여고가 설립됐으나 어려운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웅비하는 기전여고

 

어려운 과정에서도 선교부가 마련한 지금의 부지에 학교 신축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대지가 전부 바위로 돼 공사는 난항을 겪었다. 미군 비행장에서 폐기처분한 시멘트를 얻어 굳은 덩어리를 디딜방아로 빻아 찧고, 학생들은 방과후 하루 두번씩 전주천서 자갈을 주워 보자기에 싸 날라 오늘의 기전여고를 세웠다고 2회 졸업생 신규순씨는 ‘기전80년사’에서 회고했다.

 

새로운 보금자리를 얻은 뒤 학교 운영난은 더욱 심해졌고 설상가상으로 내분까지 겹쳐 한 때 신흥고와 합병까지 거론됐다. 그러나 전주지역 목사들을 중심으로 ‘학교를 새로 만들지는 못할 망정 있는 학교를 없앨 수는 없다’는 여론이 들끓어 합병 문제를 1년간 유예키로 했다.

 

이때 영입된 사람이 같은 재단의 광주수피아 여고에 재직하던 조세환 교무과장이었다. 현 기전대학 학장인 조씨는 어려웠던 기전여고를 착실하게 개혁하며 반석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이후 80년대초까지 20여년간 기전여고 교장을 역임했다.

 

◇기전여고의 오늘

 

지난해 11월 마련된 1백주년 기념행사는 오늘의 기전여고를 보여주는 자리였다. 결코 화려하지 않지만 내실있게 치른 1백주년 행사는 곧 기전의 학풍이라 할 만하다. 의례적일 수 있는 ‘1백년사’도 기전여고는 만들지 않았다. 대신 복교후 어려운 시절 교장을 역임했던 한미성9대교장(미국명 허니컷)을 초대했고, 2대 나은희교장(미국명 랭킨)의 서간문을 모아 ‘사랑을 심는 나무들’이라는 이름으로 책을 펴냈다.

 

합창부와 동문 음악인들이 함께 하는 음악회를 마련, CD음반으로 발행한 것도 기전여고만의 특징있는 1백주년 기념행사였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인간을 육성한다’ 는 교육목표가 말해주듯 기전여고는 특출한 인물 몇명 보다 많은 학생들의 인성교육을 더욱 중시한다. 1만3천여 이학교 출신들중 문학이나 무용, 체육 등 예체능 분야 인재가 많은 것도 이같은 교육 풍토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김문자 총동창회장(5회)은 “동문회 모임이 다른 학교처럼 활성화되지 못한 점이 아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동문들이 편협되지 않게 교회 중심으로 여러 좋은 활동을 활발히 하는 것 또한 기전만의 매력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졸업생들 어디서 무엇하나

 

◇학계

 

김강미자(7회·예수간호대) 노희경(9·조선대) 이길주(11·원광대) 황인복(12·한일장신대)·윤정임(13·수원대) 송남순(14·한일장신대) 마인숙(17·전북대)·최은순(18·기전대) 김연옥(20·숭실대) 류명혜(27·서울대) 한점숙(27·기전대)

 

◇법조계

 

김양희(29·광주지법판사)·최유정(31·전주지법판사)·김수정(32·변호사)

 

◇언론인

 

허미숙(16·기독교 경남방송 편성국장)·장혜윤(32·KBS기자)·박민희(33·한겨례신문기자)·조수진(33·국민일보기자)

 

◇의사

 

정영은(24·치과) 곽정임(25·치과) 김경식(25·연세치과원장)·하정미(25·산부인과)·강정숙26·치과)·전윤애(26·소아과) 성수옥(27·방사선과) 오영륜(27·서울대 해부병리학) 조영신(27·치과) 최현미(27·치과) 조희정(28·서부치과원장) 원경숙(28·전문의) 윤혜정(30·산부인과) 천근아(31)

 

◇약사

 

전정자(10회) 김보민 김연화 김옥경 김하영 양황조 이미경 최영은(이상 27회) 이미영(34회)

 

◇한의사

 

서일안(35·경기도 분당)

 

◇종교인

 

박화자(4회·미국)·하경(27·목사)

 

◇정치인

 

김완자(19·도의원)

 

◇문학인

 

최명희(9·작고 소설가) 문금옥(17·시인)·김금옥(25·소설가)

 

◇성악가

 

김혜정(25회) 전소은(27회) 김미란(성악가)

 

◇연예인

 

최선자(4·탤런트) 국성순(28·연극인)


 

학교 연혁


 

△1900.4.24 미국 남장로교 테이트선교사 학교시작
△1904.9.1 전킨 선교사 초대교장 취임
△1907 랭킨 선교사 2대교장 취임
△1907.7.29 교명 정함
△1909 화산동에 2층 벽돌집 신축
△1912 고등 보통과 4년제 과정 설치
△1937 5대 인톤교장 취임
△1937. 10.5 일본 신사참배에 항거해 자진 폐교
△1946.11.26 인문계 4년제로 복교
△1949 제7대 린튼(인사례) 교장 취임
△1954 4.15 신학제에 따라 여고 1학년 1학급 설치
△1956.5.26 현 위치로 교사 신축 이전
△1962 호남기독학원으로 법인 개편
△1962 제10대 조세환교장 취임
△1985 실내체육관 준공
△1986 27학급으로 증설
△1987 제11대 황선현교장 취임
△1994 제12대 김연태교장 취임




학교를 빛낸 동문

 

기전여고는 ‘기전을 빛낸 졸업생’으로 초대 상공부장관을 지낸 임영신(1899∼1977)과 ‘혼불’의 작가 최명희(1947∼1988)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기전여학교 고등과를 졸업한(고등과 3회) 임영신의 학교 시절에 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기전학교 시절 ‘공주회’(비밀결사대)의 핵심 멤버로 활약하는 등 학교시절부터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 그는 학교 졸업후 충남에서 교편 생활을 하던중 기전학생들과 함께 전주남문에서 3.1만세운동을 벌이다 투옥되기도 했다.

 

유명 인사가 된 후에도 기전에 대한 그의 애정은 각별했다고 한다. 조세환 전 교장의 이야기. “중앙대 총장으로 있던 때 임장관은 졸업식 등 대학 기념 때면 꼭 기전학교 교장을 초대했어요. 한번은 대학 졸업식때 초대를 받아갔는데 당시 정부 핵심 인사였던 김종필·정일권씨 등도 초대됐더군요. 임장관은 응접실로 가면서 모교 교장 선생님을 앞세워야 한다고 앞서려는 JP를 제지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최명희씨 역시 기전이 있었기에 작가로서 정상에 설 수 있었다. 최씨의 문학적 재능을 알아 본 학교측이 이를 지도할 수 있는 교사를 특별 공개채용하는 배려가 있었고, 이에따라 고교시절 최씨는 탄탄한 문학적 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당시 최씨를 지도한 교사가 현 이향아(본명 이영희)교수다.

 

최씨는 고교시절 여러 문예대회를 휩쓸었고, 그때마다 교장 선생님과 함께 교단에 올라 그의 작품을 전교생들이 듣곤 했다고 동창생들은 기억했다.

 

최씨는 교사로 돌아와 한때 후배들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고, 유명 작가로 우뚝 선 후 후배 대상으로 특강을 갖기도 했다.

 

‘착실 온순’(1학년) ‘예절 바르고 명랑’(2학년) ‘명랑하고 예의 바르고 폭넓은 사고력으로 지도하는 능력이 있다’(3학년)고 고교 생활기록부는 최씨를 말하고 있다.

 

김원용
다른기사보기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0/ 100
최신뉴스

전시·공연청년작가 김하윤의 ‘모험담’

정치일반명암 갈린 ‘전주병 라이벌’…정동영 의혹 휘말리고 김성주 이사장 재내정

정치일반이춘석 활동 재개로 더 뜨거워진 익산갑…차기총선 다자구도 되나

문화일반[안성덕 시인의 ‘풍경’] 막 장 아니 첫 장

사람들전북기자협회 ‘2025 올해의 전북기자상’ 시상식 성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