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영두 (소충사선문화제전 위원장)
1980년 5월 광주의 봄은 따스했다.
긴 독재의 터널에서 빠져나온 참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국민들은 80년 민주의 봄을, 민주의 새싹이 솟아나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은 민주주의를 향하는 깃발만 나부낀채 다시 군부독재의 등장으로 막을 내리고 민주의 불은 꺼지고 말았다.
2010년 4월 19일은 1960년 부정선거로 말미암은 4.19 학생혁명 의거에 의한 자유당 이승만 독재정권이 하야하고 독재를 종식시킨지 50주년 되는 해이다.
80년 민주의 봄은 국민으로부터 나와야 할 권력이 군화로부터 나오는 권력의 폭거가 시작된 것이었다.
타는 목마름으로 기다리던 대한민국 민초들은 광주민주항쟁으로 독재의 바위돌에 짓눌려 지기 시작했다.
3김(김대중,김영산,김종필)으로 불려지는 지도자들은 긴급체포, 구속, 가택연금되었고 국회기능정지(해산)와 모든 정치활동과 언론은 보도통제되었다.
80년 5월 나는(필자) 신민당정책위원으로서 광주의 현실을 조사하기 위해 권노갑, 유훈근, 최성근씨등과 함께 광주현지로 가기로 되었으나 긴급체포령으로 나 혼자 외교관 신분을 가진 D씨와 함께 출입이 통제된 광주에 잠입했다.
광주시민은 민주화를 외쳤고, 군부독재 퇴진을 요구했다. 외부와의 차단으로 식,생필품등을 구하기가 어려웠으나 좀도둑없이 자체적으로 시민질서를 유지시켰다. 그러나 계엄이 발동되고 계엄군이 투입되면서 시민군(市民軍)이 결성되고 자체방어를 위해 무기고가 열리면서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에 의한 살상은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여학생이 처참한 주검으로 발견되고 수많은 시민이 행방불명되는 등 빛고을광주는 전쟁터 그 자체였다.
전남대 송기숙교수, 홍남순변호사의 자제, 시민군대표 김종배, 광주시민 정운본씨등 많은 분들을 현장에서 만나 광주의 진실을 파악했다.
선량한 시민과 학생이 폭도로, 광주시민이 좌익 빨갱이 집단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총과 칼과 장갑차로 유혈사태는 진압된 듯 했으나 무등산과 역사의 진실은 그것을 사실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이 조사는 서울에서 外信에 알려져 光州의 진상은 낱낱이 소개되기 시작했다. 국제사회는 들끓었고 국민의 눈과 귀를 틀어막아도 광주의거 진실은 사발통문이 돌기 시작했다.
계엄사는 즉시 양영두를 전국에 지명수배 하였고, 가족들은 집안에 체포구금 영장없이 감금당하고 수색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계엄당국은 나의 체포에 혈안이 되었고 전주와 임실에 있는 일가친지들, 전국의 동창, 지인들이 조사받고 감시대상이 되었다.
몇 달 후 나는 계엄당국에 체포구금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남산의 중앙정보부 지하4층, 악명높은 그곳에서(DJ선생조사받은 방) 20여일을 잠 못자고 온갖 고문을 받으며 태어나서 80년 당시까지의 행적과 국회(손주항의원관계), 광주사태 진상조사 관계, 김대중선생 일가와의 관계등을 정신착란이 일기 직전까지 거듭 반복해 취조받고 고문당했다.
이제야 말할 수 있다. 인간은 참으로 독한 동물이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었다. 만신창이가 되었던 나는 그래도 산자다(살아있는 자). 5.18 광주 민주 묘역에 계신 수많은 민주 영령들게 삼가 머리숙여 명복을 빈다.
30년의 세월을 뒤돌아 보며....
/양영두 (소충사선문화제전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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