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7월 삼성그룹서 완전 분리 '한솔' 탄생…6·7호기 증설 초경량 신문용지 등 생산 세계 3위 규모로
1965년 새한제지로 출범, 삼성에 인수된 뒤 굴지의 제지기업으로 성장한 전주제지는 1990년대 이후 큰 변화의 파도에 휩싸인다. 전주제지는 초창기 10만평에 달하는 논과 밭, 황무지를 갈고 닦아 초지기 1호기∼5호기까지 가동하며 국내 신문용지의 50% 가량을 공급할 만큼 괄목성장했다. 그러나 대기업의 경제력 집중 완화, 소유 분산, 업종 전문화 등 정책을 추진하는 정부가 1989년 들어 대기업이 영위하는 사업 가운데 중소기업형 분야 정리에 강력한 의지를 보이면서 전주제지는 결국 삼성으로부터 분리 독립됐다.
삼성그룹은 1991년 11월 6일 전주제지와 신세계백화점의 분리독립 방침을 전격 발표했고, 1993년 7월28일 은행감독원의 확정을 통해 삼성-전주제지는 완전히 분리독립 됐다. 이 때 전주제지 대주주 이인희 고문은 임직원들의 신분을 보장하고, 처우도 삼성과 동등 또는 그 이상으로 보장하는 등 사기 진작에 힘썼던 것으로 전해진다.
▲ 제2창업
전주제지 김인호 사장은 삼성과의 분리독립이 발표된 지 6일 만인 1991년 11월12일 발표한 '최우량 기업의 실현을 위한 선언'을 통해 독립경영체제 구축을 위한 행보를 서둘렀다.
김 사장은 선언에서 인재 제일의 경영, 새로운 그룹으로의 성장, 독립경영 체질의 확립, 새로운 기업 문화의 창조 등 네가지를 강조했다.
삼성의 그늘을 털고 독립된 기업으로서의 위상을 정립하기 위한 방안으로 사명 변경도 추진됐다. 사명 개명작업은 91년 1월부터 착수됐다. 사내에서 공모한 결과, 2만여개의 후보안이 제시됐고 한자 및 외국어 조어형은 배제하기로 했다. 그리고 1992년 5월1일 순한글 명 '한솔'이 새로운 사명으로 결정됐다.
한솔은 발음이 쉽고 외국어 표현도 용이했다. 또 의미적으로도 크다, 유일하다는 뜻의 '한'과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소나무와 우두머리를 상징하는 '솔'을 결합한 한솔은 세계 정상에 우뚝 서겠다는 임직원들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1992년 9월23일 임시주총에서 사명 변경을 결정하고, 창립 27주년인 1992년 10월1일 제2 창업을 선언하면서 새로운 사명 '한솔제지주식회사'가 공식 사용됐다.
▲ 독립의 몸부림
한솔제지는 완벽한 독립을 위해 사명 변경에 이어 새로운 시각물(한솔 마크)을 제작하고, 1994년 1월에는 사가 '한솔의 노래'도 발표했다.
종합제지회사로서의 위상을 확실히 하기 위한 중장기 전략을 담은 '한솔플랜2000'도 1992년 9월 발표했다. 이 계획은 △2000년 매출목표 3조 원, △세계적 규모의 종합제지회사로 성장, △제지 경쟁력 강화를 위한 안정적 사업 다각화 추진으로 요약된다. 즉 제지를 중심으로 원료 조달, 생산, 판매체계를 구축하고 물류, 환경, 엔지니어링 등 제지와 관련된 신규사업에의 진출을 통해 완벽한 수직계열화를 구축한다는 원대한 계획이었다.
이는 당시 경영 환경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한솔제지는 1991년 12월 종이 생산량 400만톤을 달성, 업계 최초로 세계 100위권에 진입한 상태였다. 1986년 1000억 원을 돌파했던 매출액도 1991년 11월29일 3000억 원을 기록했다. 또 전주공장은 신문용지와 중질지, 재생지를 생산하는 대단위 전문공장으로 육성하고, 장항공장은 고급인쇄용지 전문 생산공장으로, 또 대전공장은 산업용지 전문생산공장으로 특화한다는 전략을 갖고 있었다. 한솔은 또 폐수처리제 등 고분자화학과 정밀화학을 겨냥한 화학회사, 제지수송과 관련된 물류회사, 금융기업 등으로 사업 범위를 확대,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 한다는 계획이었다.
이같은 계획을 추진하는 한편 새로운 기업 이미지를 확고히 구축하기 위한 장기적 홍보 전략도 실행해 나갔다. 1991년 말, 기획실 산하 홍보팀을 홍보실로 승격하고 1993년 8월에는 '손과 종이'라는 주제로 첫 TV광고를 내보냈다. 1994∼1995년에는 '우리나라에서 나무를 제일 많이 심어 온 기업'이라는 이미지 광고를 해 환경기업의 이미지를 심고자 했다.
또 1995년 한솔문화재단을 설립, 미술관과 종이박물관 건립 계획을 추진하는 한편 전통한지 제작 기술 보존을 위한 학술 활동비 지원 등 각종 문화 및 지원사업을 추진해 나갔다.
▲ 세계 3위의 신문용지 생산공장
1980년대 후반부터 신문용지 시장이 호황이었다. 1990년 신문용지 내수는 전년대비 21.7% 증가한 51만 7000톤을 기록했고, 생산량은 17.5% 증가한 52만 1938톤에 달했다. 수출도 53.4%나 증가했다. 1973년 중단됐던 신문용지 수입이 1989년부터 재개되고, 또 89년 2만3807톤이었던 수입량이 90년에 4만312톤에 달할 만큼 신문용지 수요가 급증했다. 이에 따라 국내 제지업계도 설비를 확충했고, 94년들어 생산량이 전년대비 21.4%나 증가했다. 그렇지만 신문사들의 잇따른 증가와 중앙지의 지방분공장 설립, 증면 경쟁이 이어지면서 신문용지 수요는 계속 늘어났다.
신문사들의 증면과 다면인쇄, 컬러인쇄가 가속화 하면서 신문용지의 평량 경량화 등 품질 고급화 작업도 자연스럽게 진행됐다.
전주제지는 54g/㎡였던 신문용지 평량을 경량화하는데 성공, 1989년 7월부터 국내 최초로 48g/㎡의 컬러 신문용지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어 1993년 11월29일에는 새로 증설한 6호기에서 46g/㎡의 초경량 신문용지를 생산해 냈다. 초경량 신문용지 생산은 신문 1부당 중량을 줄여 우편료 절감, 배달 용이 등 효과를 낳았다.
또 85년과 86년에 이어 93년에도 두 차례에 걸쳐 개조 공사를 실시하는 등 품질 관리에 꾸준히 노력했다.
1989년 5호기 건설로 전주제지는 하루 1390톤의 종이를 생산할 수 있는 국내 최대 제지공장이었지만, 단일공장 규모로는 세계 25위에 불과했다. 이에 국제경쟁력을 갖춘 종합제지회사로서 위상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생산량을 더욱 확대해야 한다는 경영진의 판단이 내려졌다.
1991년 11월6일 핀란드 발멧사와 초지기 도입계약을 체결하고 6호기 증설에 들어갔다. 1500억원이 투입된 이 공사는 1992년 4월 기공식, 12월 기계 설치공사, 1993년 8월16일 시험운전을 거쳐 16개월만에 완공됐다. 6호기는 연간 26만톤 생산능력(최대속도 1500m/분)을 갖춘 초지기와 29만톤을 생산할 수 있는 탈묵펄프 처리시설을 갖춘 국제규모였다. 이를 통해 한솔제지는 세계 4위의 신문용지 생산 공장으로 발돋움했다.
이어 2000억원에 달하는 거액을 투자, 연산 24만톤, 설계속도 1700m/분, 신문용지 코팅설비 기능까지 갖춘 7호기 발주 계약을 1995년 1월 필란드 발멧사와 체결했다. 7호기 가동으로 전주공장은 연간 100만톤 생산능력을 갖춘 세계 3위 규모의 신문용지 생산공장으로 그 위상을 높였다.
▲ 종합제지회사로 도약
전주공장을 신문용지 전문공장으로 육성한다는 장기 전략에 따라 인쇄용지 생산공장은 충남 장항 금강하구언변에 세워졌다. 1990년 4월 장항공장 PM21(장항에 있는 제2공장에 건설되는 초지기 1호라는 의미) 건설본부가 발족된 뒤 1600억여원의 사업비가 투입돼 시설된 PM21은 1992년 2월부터 본격적으로 백상지 등 인쇄용지 생산에 들어갔다. 장항공장은 1992년 5월21일 준공과 함께 본격 가동에 들어갔고, 이어 94년 5월 준공된 중성지 생산 초지기 PM22호기는 그해 27만5000톤을 생산, 장항공장의 독립 기반을 이뤘다.
한솔제지는 이와 아울러 특수지 사업과 산업용지 사업에도 진출하며 제3공장 건설프로젝트를 진행했고, 1995년 대전공단 내 7만여평의 부지에 백판지 공장을 설립, 가동에 들어갔다.또 백판지 생산업체인 동창제지를 1994년 인수, 연간 40만톤의 백판지 생산능력을 갖췄다.
이에따라 한솔제지는 1990년대 중반 무렵 신문용지는 물론 중질지, 백상지, 정보용지, 백판지 등 각종 용도의 종이를 모두 생산할 수 있는 종합제지회사의 위상을 갖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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