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독대 뒤편 쌀이 담긴 조그만 단지 '철륭'을 모신다. 터신(土地神) 단지다. …단지 속의 쌀을 햅쌀로 바꾸어 넣는데 여기서 꺼낸 묵은 쌀은 밥이나 떡을 해 먹는 게 아니라 장독대 언저리 깨끗한 곳을 파고 정하게 묻었다.
"아깝게 왜 파묻어? 쌀을." 효원이 어머니 연일 정씨(延日鄭씨) 부인이 하는 일을 보고 옆에서 물었다. "큰일 날 소리, 이것은 그냥 쌀이 아니라 신체(神體)다." "신체?" "신의 몸이라 그런 말이지…" (최명희의 '혼불' 6권 245쪽)
최명희는 쌀을 신체라 했고 우리 고장의 시인 이병초는 "쌀은 내 목숨"이라고 했다. 쌀은 가뭄과 장마, 거센 폭풍우와 뙤약볕을 이겨낸 산물이다. 쌀 '미(米)'를 파자하면 '팔(八)+팔(八)'이 되고 이를 합치면 88이 된 데서 나이 88세 별칭을 미수(米壽)라 했다. 쌀 한톨이 생산되기까지에는 여든 여덟번의 손끝 정성이 가야 한다는 속설이 여기에서 나왔다.
신체와 목숨으로 여긴 쌀, 여든 여덟번의 정성을 들이고서야 수확할 수 있었던 쌀이 천덕꾸러기 신세가 돼버렸다. 우리나라 1인당 연간 쌀소비량은 74㎏이다. 10년 전에 비해 20kg이나 감소했다. 1인당 하루 쌀 소비량도 202g에 불과하다. 밥 한공기에 소비되는 쌀이 130g 안팎이니 우리 국민들은 하루 두 공기도 먹지 않는 셈이다.
올해 전국 쌀 생산량은 429만5천413톤. 지난해보다 12.6%가 줄었다. 생산량 감소에도 불구하고 가격마저 하락했다. 곡창 중의 곡창인 김제지역의 쌀 한가마(80kg) 값이 12만원 선에도 못 미치고 있다. 생산비도 못건진다면 농업으로서 가치는 이미 상실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지금 30년만의 최악의 흉작과 가격하락이라는 이중고에 농민들의 시름이 깊다. 농민단체들이 자치단체 청사 앞에 벼를 야적하고 성난 농심을 표출시키고 있다. 그런데 자치단체나 정부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있다. 북의 연평도 폭침 때문에 대북지원 쌀마저 막혀있으니 설상가상이다.
농자는 천하지대본 (天下之大本)이요, 농업은 사업지수(四業之首)라고 했다. 천하의 근본이라는 농사를 짓기 꺼려하고, 농(農)·학(學)·상(商)·공(工)의 네 가지 직업 중 으뜸이라는 농업을 포기해야 할 실정이니 뭔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됐다. 농사를 지어야 할 것인지 말아야 할 것인지 그것이 문제로다.
/ 이경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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