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촌수필'로 유명한 소설가 이문구는 2003년 위암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의료진으로 부터 "말기여서 가망이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러자 "마무리할 게 있다"면서 허락을 얻어 이틀간 집에 다녀왔다. 3년 전 100만 원에 계약한 동시집 원고를 마무리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보름 후 62세로 세상을 떴다.
임종에 앞서 그는 가족들에게 이렇게 유언했다. "혼수상태가 되거든 이틀을 넘기지 마라. 소생하지 않으면 엄마, 동생 손 잡고 산소호흡기를 떼라. 문학상 같은 것은 만들지 마라. 기일에는 제사 대신 가족이 모여 식사나 해라. 여한 없이 살다 간다." 그는 고향인 충남 보령의 관촌 소나무 숲에 한 줌의 재로 돌아갔다.
평생 '무소유'를 실천한 법정 스님은 한 술 더 떴다. 지난 해 3월 입적하면서 장례식을 못하게 했다. 여기에 더해 유언장에서 "그 동안 풀어 놓은 말 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 가지 않으려 하니, 부디 내 이름으로 출판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영혼을 맑게하던 책 30여 권이 서점가에서 사라졌다. 이같은 죽음은 요즘 식으로 말하면 '스마트'하다. 깔끔하게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결정한 것이다.
깔끔하기는 혼불의 작가 최명희도 마찬가지다. 그는 1998년 임종 자리에서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참 잘 살다 갑니다"라는 필담을 남기고 떠났다. 17년간 오직 '혼불'에 매달려 10권의 문화유산을 남긴지 2년 뒤였다. 당시 51세였다.
불모상태의 한국고고학을 이끌었던 김원룡 서울대교수는 "수의를 입히지 마라. 평소에 입던 옷 가운데 한벌 입혀, 화장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1993년의 일로, 당시만 해도 그리 하기가 쉽지 않던 시절이었다.
얼마 전 신부전증으로 세상을 뜬 환자가 1주일 병원 입원비로 6000만 원이 들었다고 한다.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고통스럽게 목숨만 유지하다 간 것이다.
흔히 말기암 등으로 임종을 앞둔 환자는 본인보다 가족들의 만족감을 위해 끝까지 항암치료를 고집하는 경우가 많다. 남아있는 사람들이 할만큼 했다는 위안감 때문이다.
/ 조상진 논설위원
요즘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환자의 심폐소생술 및 연명치료를 거부하는 사전의료의향서 쓰기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고령화 시대를 맞아 잘 죽는 것(well dying)이 중요해지고 있다.
조상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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