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잔치는 두 군데서 열렸다. 한 군데는 전라감영(全羅監營) 통인청이요, 다른 한 군데는 본부(本府) 통인청이다. 오늘로 말하면 전라감영은 전북도청이요, 본부는 전주시청 격이다. 여기서 통인(通引)은 도지사나 시장의 잔심부름을 맡아 하는 말단 공무원이다. 이들 말단 공무원들이 상관의 결재없이 판소리 광대를 불러 들여 잔치판을 연 것이다.
양 통인청은 서로 자기편에 가량이 뛰어난 광대를 모시기 위해 경쟁했다. 한 달 전부터 수 백리 밖에까지 수소문했다. 초청된 광대는 솜씨 좋은 음식점을 선택해 모셨다. 오늘날 민박과 같은 음식점들은 대부분 숙박비를 받지 않았다. 대신 광대들은 한 달 동안 목을 풀고 발성연습을 하는 등 수련에 힘썼다.
승패는 광대의 기량에 의해 판가름났다. 뛰어난 광대가 소리하는 곳에 관중이 몰리고 그 자리에서 최고의 아이돌이 탄생한 것이다. 그들에겐 명창이라는 호칭이 따랐다. 덕분에 판소리 발전의 기폭제가 되었다. 때론 잔치가 과열돼 양 팀간에 투석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또 이 잔치는 심사위원도, 특별한 상도 없었다. 귀명창들의 박수소리가 심사였고, 곧 바로 입소문으로 번졌다. 이렇게 해서 인정을 받은 명창들은 여기 저기 초청되었다. 궁중에 들어가 임금 앞에서 소리를 하고 벼슬과 양식을 후히 받기도 했다. 이 큰 잔치가 바로 전주대사습(大私習)이다.
당시 본부광대로 알려진 이는 장자백 정창업 김세종 송만갑 염덕준 등이고, 영문광대는 이날치 박만순 주덕기 장수철 등이다. 또 소속이 불분명한 광대는 모흥갑 유공열 배희근 김창환 김정근 공창식 유성준 전도성 송업봉 박태섭 등이다. 모두 한 시대를 풍미한 쟁쟁한 가객들이다.
이같은 대사습이 일제 때 중단되었다가 1975년에 부활했다. 부활 이후 내노라 하는 명창들의 등용문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심사와 조직 운영의 공정성, 지나친 TV 프로그램화 등의 비판도 없지 않았다.
마침 대사습이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을 신청할 계획이라고 한다. 당초 지역의 관과 민이 힘을 합쳐 자발적으로 만든 축제인 점에 비추어 보면 탐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국악의 보전과 계승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닐까 싶다. /조상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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