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일반기사

화가 임일순

며칠 전, 귀한 선물을 받았다. 〈우리누나 임일순〉이라 이름 붙여진 그림 모음책이다. 비뚤게 쓴 글씨에 어린아이가 그린 듯 한 별과 달, 나무 사이에 조그마한 할머니가 앉아 있다. 표지부터 가슴이 뭉클했다. 책을 펼쳐보니 그림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그림을 그린 임일순은 칠십 육세 할머니, 지난 1월 세상을 떠난 고인이다. 할머니는 선천적 정신지체장애자였다. 그림 모음책은 동생 임철완 전북대 의대 명예 교수가 세상을 떠난 누나를 추모하며 엮어낸 것이다. 임교수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누나를 모셔와 살았다. 임교수의 어머니 생전에 그의 이모들은 정박아인 누나가'어머니보다 먼저 죽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었단다. 그러나 부모님이 먼저 돌아가시고도 누나는 8년을 더 살았다.

 

그림 모음책에 글을 쓴 임교수는 자신의 집에 모신 후에서야 보호자가 없이는 어느 것 한 가지도 의지대로 할 수 없는 누나의 행복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권한 것이 그림그리기다. 할머니는 동생이 사다준 도화지에 크레용으로 색연필로 때로는 스티커로 날마다 그림을 그리고 붙이기 시작했다. 임교수의 집 벽면은 이 그림들로 가득 찼다. 관객은 임교수 부부와 도우미 아주머니 단 세 명. 새로 그린 그림을 보면 칭찬을 아끼지 않는 훌륭한 관객들이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관객은 할머니 자신이었다. 그림을 그리면서,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면서, 할머니는 즐거워했다. 가족들은 작은 보살핌과 칭찬이 할머니의 일상에 얼마나 큰 희망이 되는지를 알게 됐다. 낙서 같았던 그림은 시간이 지나면서 날로 새로워졌다. 사람과 동물, 과일, 나무, 어린 시절에 본 허수아비와 막대총까지 그의 기억은 모두 도화지위에 옮겨졌다. 한 평생 외롭게 집안에서만 살아야 했던 정박아 할머니는 그렇게 화가가 되었다.

 

지난 1월 4일, 할머니는 새로운 그림을 그렸다. 임교수의 말처럼 반고흐가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그렸다는 '까마귀가 나는 밀밭'을 연상시키는 이 그림은 새와 나무, 풀밭과 강물이 흐르는 풍경화다. 검은 하늘에 점토를 붙여 두 개의 달까지 그려 넣은 그림을 임교수는 누나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식탁 옆 벽에 붙여 놓았다. 그림 모음책에서 '우리누나가 그린 경치'란 제목으로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그림이다. 할머니는 이 그림을 그린 이틀 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영혼의 풍요로움이 가득찬 그림들은 세상에 남았다. 정신지체장애로 온 생애를 외롭게 살았던 할머니가 우리에게 준 선물이다.

김은정
다른기사보기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0/ 100
최신뉴스

국회·정당조국 “변화가 있으려면 경쟁해야, 혁신당 지지해 달라”

사건·사고순창 공장서 불⋯3명 부상

경제일반[주간 증시전망] 미국 FOMC 정례회의 의사록 공개 예정

전시·공연실패와 무력감의 시간서 태어난 연극 ‘구덩이'

오피니언[사설] 해군 제2정비창 군산조선소가 ‘최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