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그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자료가 발표됐다. 신재효 탄생 200주년을 기념한 판소리학회의 정기학술회의에서다. 신재효에 대한 연구성과가 적지 않지만 이번 발표된 내용은 그 성과들에 대한 재편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신재효의 생애와 판소리 연행에 대한 몇 가지 단상'이란 다소 긴 주제의 논문은 동아대 이훈상교수가 내놓은 것이다.
새롭게 밝혀진 가계도나 천석꾼으로 알려져 있었던 그가 훨씬 더 탄탄한 경제적 기반을 갖고 있었다는 점, 그가 지냈던 '동리정사'의 이름이 '부용헌'이란 이름을 갖고 있었다는 점, 한시를 짓는 모임에서도 중심이었다는 점,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던 제자 진채선에 대한 새로운 사실 등 눈길을 끄는 내용이 적지 않다.
그동안 신재효에 관한 연구작업이 지속적이고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왔던 점에 비추어보면 이런 새로운 사실들이 이제야 공개된다는 것이 외레 새삼스럽다. 관심이 가는 부분도 바로 이 대목이다. 이 교수는 신재효 가문의 전승 고문서와 관련 금석문 등 그동안 신재효 연구에 활용되지 않았던 자료들을 집중적으로 수집하고 연구했다고 한다. 그동안 소홀했던 신재효의 생애사가 재조명될 수 있었던 배경이다. 덕분에 새롭게 발표된 내용에는 신재효를 새롭게 보게 하는 내용이 적지 않다. 그중에서도 진채선과 관련된 부분은 일반 독자들에게도 매우 흥미로운 내용이다.
신재효의 총애를 받았던 진채선은 조선 후기, 최초의 여자 명창이다. 채선은 1867년 한양에서 열린 경복궁의 경회루 낙성연에 참여한 뒤 행적이 불분명했다. 신재효가 채선이 대원군의 각별한 보살핌을 받아 다시 돌아오지 않자 그를 향한 절절한 애정을 담아 썼다는 '도리화가' 역시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이 교수의 논문에는 채선의 행적이 분명하다. 채선은 한양에서 내려와 영광이나 부안 등지에서 활동했으며 그 지역 현감들은 채선을 기생으로 만들려고 애를 썼다. 이런 사실은 그 지역 이서가 신재효와 주고받은 편지로 생생하게 드러난다.
신재효 생애사가 갖는 의미는 크다. 당대 사회문화사의 면면이 더 새롭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연구의 진전을 기대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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