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는 한국영화사의 잊혀진 역사를 복원하는 또 하나의 축이었다. 거슬러 올라가자면 1940년대 말, 본격적으로는 50년대와 60년대, 전주는 서울 충무로와 함께 지방에서는 유일하게 영화가 제작됐던 도시다. 한국 전쟁영화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피아골''아리랑'이 만들어졌으며 최초의 컬러영화 '선화공주'와 '애정산맥''성벽을 뚫고''애수의 남행열차''붉은 깃발을 들어라' 등 당대의 흥행작 여러 편이 제작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상을 만들어내기도 했던 작은 도시 전주가 영화제를 꿈꾸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말. 그러나 반응은 냉담했다. '왜 전주에서 영화제를 여느냐'는 것이 가장 큰 벽이었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한국영화사의 소중한 흔적을 안고 있는 전주영화사가 우리 앞에 놓이자 그 벽은 비로소 허물어졌다.
전주영화제의 출발은 '전주'스러웠다. 외형적 화려함에 마음 주는 대신 영화의 진정한 가치와 미래를 주목한 전주영화제는 영화를 '소비'하는데 그치지 않고 '생산'에 방점을 놓았다. 화려했던 영화사의 40년 단절을 잇는 전주국제영화제가 첫길에 '생산'이라는 과제를 선택한 것이다. 그 첫해 전주영화제가 채택한 '생산' 프로그램은 전주영화제의 지향성을 대표하는 '디지털영화'의 몫. 세 개의 독립된 프로그램이 전주영화제의 '생산' 대열에 섰다. 디지털 삼인삼색과 디지털 워크숍, 40년대부터의 전주영화사를 복원(?)하는 다큐멘터리 '지역영화사-전주'가 그것이다. 오늘에 이르러 '디지털 삼인삼색'은 전주영화제의 상징적 결실이 됐고, 변영주감독이 제작한 다큐멘터리는 한국영화사의 잃어버린 고리, 전주의 영화역사를 복원하는데 성공했다.
열 네 번째 맞는 올해 영화제가 4월 25일 개막한다. 돌아보니 그 세월위에 놓인 궤적의 굴곡이 만만치 않다. 지난해 전주영화제가 겪어야 했던 갈등의 후유증 또한 여전히 짐스럽다. 그런데도 올해 영화제의 면면을 톺아보니 전주문화의 소중한 역사성과 영화제의 정체성이 오히려 더 굵고 빛나 보인다. 숱한 갈등과 어려움을 딛고 준비해온 전주영화제 식구들의 의지와 열정이 가져온 결실일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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