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가끔 만년필을 보다 보면, 이 녀석들이 사람과 비슷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브랜드나 라인에 따라서 모습이 현저히 다르며, 뚜껑을 여는 방식과 마감 처리도 각기 다르다.
펜촉도 각각 재질이 다르고, 같은 라인이라고 해도 색이 다르다. 똑같은 제조사의 똑같은 만년필이라고 해도 미묘하게 그립감이나 잉크의 농도가 다르다.
그러나 이렇게 서로 '다른' 만년필이라도 같은 점이 있다. 쓰면서 길들여야 한다는 점이다. 처음 만년필이 종이에 닿을 때는 특유의 사각거리는 소리가 심하다. 가끔씩은 펜촉이 종이를 긁어 파내는 것 같은 소리가 나기도 한다.
어린아이 같이 글씨가 원하는 대로 써지지 않을 때도 있다. 가끔씩은 잉크를 방울방울 흘리기까지 한다.
새 만년필이 마치 고장 난 것처럼, 혹은 헌 만년필 보다 안 좋게 느껴지는 것은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년필로 글씨를 많이 쓸수록 점점 긁히는 소리가 줄어들고, 글씨가 예쁘게 각이 잡힌다.
내가 가지고 있는 라미 만년필들도 하나는 시집 한 권을 필사하니까 겨우 길이 들었고, 하나는 시집을 반 권 필사하기도 전에 익숙해졌다. 확실한 건 필사를 하면, 글씨를 쓰면 쓸수록 긁히는 것 같은 소리는 줄어들었고, 글씨가 튀지도 않았다. 만년필이 길이 든 것이다.
어떤 일에 익숙해지는 것도 만년필을 길들이는 것과 같다. 처음 할 때는 어색하고 힘들더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시간을 들일수록 익숙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과를 처음 깎는다고 생각해 보자. 처음 사과를 잡았을 때는 분명 과육을 조각해놓았을 것이다. 너무 사과를 두껍게 깎은 나머지, 껍질에 붙은 과육을 그냥 먹어도 되겠다는 소리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과일을 깎으면 깎을수록 점점 껍질을 얇게 깎을 수 있었을 것이다. 손때도 덜 묻고, 나름대로의 노하우도 생길 것이다. 이렇듯 중요한 것은, 자신이 잘 하고 싶은 그 일에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다.
생택쥐페리의 '어린왕자'에서도 길들이는데 시간이 필요함을 말하고 있다. 여우는 '네가 장미꽃을 위해 소비한 시간 때문에 너에게 장미꽃이 소중한 거야' 라고 어린왕자에게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다.
길들이는 데에는 일정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물론, 어린왕자와 장미처럼, 그 일과 직접적인 대화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일에 마음을 주어야지 자신에게도 익숙해질 수 있는 것이다. 익숙해지려는 노력도 해보지 않고서 편법만을 찾으려고 하면 절대로 그 일을 잘 하지 못하게 된다.
만년필에서 나는 종이 긁는 소리가 싫다고 해서 부드러운 종이만을 찾으려고 해선 안 된다. 종이 위에서 잉크가 번지는 결과만을 낳을 뿐이다. 잘해보겠다는 가장 처음의 열망조차도 편법 위에서는 사라질 뿐이다.
일 년의 반이 벌써 지나간다. 2013년을 시작하면서 잘 하고 싶었던 일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만약 아직 그 일을 잘 하지 못하고 있다면, 더 그 일에 시간을 쏟자.
남은 반 년 동안 그 일이 당신에게 온전히 길들여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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