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시대 지방에서 운영되던 권번은 앞서 고려시대부터 전해져 오던 여악제도(女樂制度)에 따라 관 주도로 이어지던 각 지방 교방청의 악(樂), 가(歌), 무(舞)를 익힌 여기(女妓)들이 1905년부터 1908년까지 모든 여악과 관기제도(官妓制度)의 폐지와 함께 궁과 전(殿)으로부터 쫓겨나 생계를 위해 결성됐던 기녀조합을 말한다.
일제는 조선왕실을 이왕가(李王家)로 격하시키고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를 설치했다.
이왕직아악부는 기존 1000여 명의 장악원 소속 악공들을 불과 수십여 명으로 축소시켜 이끌던 국가 공립기관으로, 그 산하 기관 내에서도 소수의 기생들을 선발해 기예를 연마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생들은 관기제도(官妓制度)의 폐지와 함께 신설된 민간 조양구락부(朝陽俱樂部) 소속의 권번조직에 합류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통용되던 자반(茶番), 권번(券番) 등의 용어는, 일본식 용어인 시중을 드는 직업을 지칭하는 것으로, 기존의 여악제도를 대신하여 기녀조합이 그 기능을 이끌어간다는 의미에서 관의 교방(敎坊)의 역할을 대신하는 당번(當番) 대신, 권번(券番)이라는 일본식 해석을 붙인 것이 그 유래가 되었다는 게 학계의 판단이다.
본격적인 권번시대는 서울에서 1913년 다동조합이 설립되며 전국화가 시작됐다. 하지만 1920년 이후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수탈이 시작되며 군산항으로 이어지던 수탈 경로를 따라 먹거리가 풍부했던 현재의 정읍, 김제, 군산, 그리고 인근의 남원 등지의 전북 권번 활동이 왕성했다.
각 지역에서는 보다 뛰어나 기녀들을 배출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했고, 기본적인 향악정재(鄕樂呈才)에 필요한 악(거문고, 가야금, 향비파, 장고, 아쟁, 해금, 피리, 대금, 소금 등의 악기), 가(歌), 무(舞)를 비롯해 시(詩), 서(書), 화(畵)에 대한 교육을 3년 동안 진행하고 심사해 일패(一牌)부터 삼패(三牌)로 분리, 운영했다.
이 당시 소수의 이왕직아악부와 조양구락부 소속의 전국 권번 조직들이 일제 강점기 시기를 풍미하게 되었는데, 이 이왕직아악부의 초대 아악사장이 기존까지 소수의 궁중악 수장에게 붙이던 ‘국악사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당시까지의 ‘아악’이 현재의 ‘국악’이란 용어로 통용, 정착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1940년대 초반을 넘어서며 모든 예기조합의 활동을 금지시켰고, 그로인해 현재의 민간 국악원과 현재의 공립, 국립국악원으로 자리매김 되는 시대사를 거쳤다.
따라서 옛 권번을 재현해 보고자 하는 사업은, 일제강점기 초기 여악제도의 폐지 이후 민간에서 자생적으로 조직돼 약 30여 년 동안 명맥을 유지했던 예기조합들의 기능적 측면들이 상징적인 측면에서의 건축물들과 함께 복원, 재현될 때 국가예산 지원의 의미에 부합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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