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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 서체

전북 출신인 원교 이광사(1705~1777년), 창암 이삼만(1770~1847)과 함께 조선 후기 최고 서예가로 꼽히는 추사 김정희(1786~1856년)는 중국 청나라까지 명성을 떨친 실력가로 평가받는다. 우리나라 서예의 역사가 깊지만 특정 서예가가 고유의 예술적 특징인 ‘서체’를 구축한 경우는 소수다. 김정희의 서체를 추사체, 한호의 서체를 석봉체, 이광사의 서체를 원교체, 이삼만의 서체를 유수체라고 부른다. 토종 서체인 것이다.

 

아쉽게도 서단에서 서체는 왕희지체, 안진경체, 구양순체라고 하는 중국 서체가 주류다. 이들 서체가 한국 서단 표준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서예를 가르치는 선생이 왕희지체를 익혔으면 제자들도 왕희지체를 이어받아 쓴다. 서예는 익히기 힘들고, 전형적인 도제식 수업으로 전수된다.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 등 다양한 자체에서 특정 서체를 완전정복하려면 수십년간 익혀야 가능하다. 왕희지체, 추사체 등 다양한 서체를 골고루 익히기 힘든 구조다. 각종 서예대회에서 왕희지, 구양순 등의 서체 출품작이 주류이다 보니 자연히 추사체 등 토종서체를 익히는 분위기가 약한 생태계가 됐다고 한다. 오래 전부터 왕희지, 안진경, 구양순 등의 서체에 익숙해진 서단이 그들의 서체를 최고 권위에 올려 놓고 예술성, 완성도 등을 평가하는 분위기가 토종 서체를 짓누르고 있는 셈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추사 김정희가 귀양가기 전 전북에서 활동한 당대 최고의 서예가 창암 이삼만 선생을 찾았다. 추사가 창암보다 젊었지만 그 서예 실력이 청나라까지 알려진 터였던지라 창암이 자신의 작품을 추사에게 보여주며 평을 요청했다. 자신보다 훨씬 연배인 창암의 글씨를 훑어 본 추사의 평은 냉혹했다. “지방에서는 글씨로 밥은 먹겠습니다”란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9년 후 추사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상경하던 중 창암을 찾았을 때 창암은 이미 세상을 떠난 상황이었다. 과거 창암에게 혹평했던 것이 마음에 걸렸던 추사는 묘문을 남겼다. “여기 한평생 글씨를 위해 살다 간 어질고 위대한 서가가 누워 있으니 후생들은 감히 무덤을 훼손하지 말라.”

 

우리 서단이 추사체나 석봉체, 그리고 창암 이삼만의 유수체 등 우리 토종 서예가들의 서체를 외면하는 분위기에는 추사가 창암의 유수체를 ‘촌뜨기 서예가’의 어설픈 지렁이 글씨쯤으로 얕보았던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김재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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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호 jhkim@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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