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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벼가 도열병에게 보내는 편지

박진우 국립농업과학원 농업미생물과 농업연구관
박진우 국립농업과학원 농업미생물과 농업연구관

여보게, 친구! 들판의 황금물결에 문득 자네가 생각나 펜을 들었네. 가난하던 시절 쌀 풍년에 모두가 함박웃음이었는데, 이젠 풍년 소식이 관심을 받지 못한지 오래되었군. 자네가 쌀 수확량을 좌우하는 저승사자 같은 위세를 떨치던 때도 있었는데, 자네도 늙었나 보이. 세월무상이야.

보릿고개에 신음하던 시절, 농촌진흥청에서 나, ‘통일벼’를 개발했지. 육종학자들의 심혈이 깃든 획기적 수확량의 기적의 품종, 나는 배고픈 국민에게 희망의 메시지였어. 1970년대 초반 전국에 보급된 내 덕에 1975년 우리나라는 쌀 자급을 달성하고, 1977년 전국 쌀 평균수량이 1,000m2당 494kg으로 단군 이래 최고 수량을 기록했지.

내가 바로 ‘녹색혁명’의 주역이었어. 우리 민족이 배고픔에서 벗어나 경제발전에 매진하고, 오늘날 번영을 누리게 되는 중심에 내가 있었지. 2009년 교육과학기술부 선정 ‘국가연구개발 반세기 10대 성과사례’의 1번이 나였으니 얼마나 큰 영광인가?

그런데, 호사다마였을까? 그 영광이 채 가시지도 않은 1978년, ‘도열병’ 자네에게 치명적 일격을 맞았지. ‘통일벼’는 ‘도열병’에 강했지만 새로운 무기를 준비한 자네에게 속절없이 당했어. 맛이 좀 떨어지는 단점을 극복한 ‘대단한 수확량’이란 경쟁력은 자네를 당하지 못했지. 챔피언의 자리에서 바로 내려와야 했던 그 심정, 그간 많이 힘들었지만 이젠, 시간이 많이 흘렀네.

종종, 자네 소식을 듣네. 2012년 ‘Molecular Plant Pathology’라는 세계적 학술지에서, 전 세계 석학 495명의 투표로 자네가 과학, 경제적으로 중요한 식물 곰팡이 병 1위에 선정된 논문을 보고 뿌듯함을 느꼈다네. 2005년 우리나라 연구진 주도로 자네의 유전정보가 완전히 해독되기도 했지. 사람의 유전정보가 완전 해독된 게 2003년이니 자네의 중요성을 굳이 이야기 안 해도 될 것 같군.

이런 게 애증의 관계인가 싶네. 철천지원수였던 자네 소식이 반갑고 잘 되길 바라는 마음. 집안족보가 복잡해 ‘피리큘라리아 오라이제’라는 임시이름으로 살아가던 자네가 가족관계의 확인으로 ‘마그나포르테 그리세아’라는 제 이름을 찾은 것도 늦었지만 축하하네.

돌이켜 보면 자네 없이 ‘통일벼’라는 영광을 안고 살아가는 내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자네와 나의 애증관계가 우리나라 농업 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해 온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네. 우리 사이에 서로를 이기고자 벌어진 끝없는 투쟁. 이 노력들이 오늘날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 수준의 육종기술과 병해충 관리기술을 가지게 된 원동력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네.

지난 반세기 우리 농업은 눈부시게 발전했지. 식량생산, 원예, 축산에서 이젠 4차 산업 기반의 첨단농업까지, 농촌진흥청과 민간 연구자들의 피땀 어린 노력의 결과이겠지만, 그 저변에 자네와 나처럼 때론 경쟁하고 때론 힘을 합쳐 함께 앞날을 개척해 온 열린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농업이 어렵다고들 하지만 우리 후배들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 내리라 나는 믿네. 자네의 무지막지한 공격을 최고의 벼 품종이라는 결실로 승화시킨 나의 후배들처럼. 사랑하네. 친구! 언제 막걸리 잔이나 한잔 함께 기울이세.

/박진우 국립농업과학원 농업미생물과 농업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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